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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단편]-Vengeance-

2004.12.25 14:35

히이로 조회 수:281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더 이상 아무런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내 후각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였다. 새빨간 물감들 마냥 붉은 액체가 추상적인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이 이리저리 흩어져 곳곳을 물들인다. 작은 불씨가 꺼지지 않고 타오르듯이 선명히 눈동자 속에 들어오는 붉은 빛깔들의 향연. 그러나 보통의 불꽃이 내뿜는 따뜻한 온기는 이것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뜨겁긴 하지만, 칙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불꽃…….

철컥! 철컥! 철컥!

'아직도……이번에는 4명이군. 베고 베어도 끝이 없는 걸…….'

녹이 슨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좋아하려고 해도 도저히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은 차가운 소리를 내는 주인공들이 서서히 내 주위로 엄습해 오기 시작한다. 시간상으로는 대낮이어야 마땅하겠지만 우거진 수목들이 빛을 차단해서인지 주변은 동이 트기 전의 고요한 새벽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덕분에 주위에 흐트러진 시체들의 피가 더욱도 선명하게 빛을 뿜고있다는 느낌을 받고있었지만…….

스윽∼!

오른쪽 중지 손가락에 약간의 통증을 느끼면서 나는 들고있던 검을 조용히 고쳐 잡았다. 손잡이에 힘을 주면 줄수록 손가락의 통증은 극심해져갔다. 아까 전의 전투도중 무언가에 강타 당해 뼈에 이상이 생긴 듯 했다. 생과 사를 구분 지을지도 모르는, 인생의 마지막 전투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의 부상이라니…갈수록 마음만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큰일이다…이 중요한 순간에…….'

시선을 돌려 다가오고 있는 적 4명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온 몸을 회색의 강철로 감싼 중무장, 4명 전부 잘 손질된 듯한 장검을 들고있었고 갑옷과 무기의 재질, 그리고 가슴 부위에 새겨져있는 검은 새가 비상하는 듯한 문양을 보았을 때 막연했던 불안감은 나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적의 주력기사단……하지만 어째서 '젤리크나이츠'가 여기 있는 거지…….'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소문으로는 많이 들어본 익숙한 단어. 바르디아가 보유한 신무기 중 하나인 젤리크라는 이름의 폭약, 단 한 개의 젤리크 만으로도 잘 만들어진 요새의 성벽 절반이상을 파괴할 수 있다는 최악의 무기. 그리고 이런 폭약의 이름을 이어받은 젤리크나이츠 역시 명실공히 대륙 최강이라는 칭호의 기사단으로써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사단 속에는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그 녀석'이 몸 담고 있을 것이다. 그 녀석이…….

철컹∼! 철컹∼!

한 명의 적을 상대로 다수가 덤비지는 않겠다는 의사표현인지 단 한 명만이 검의 간격 내로 들어온다. 순간적인 시선의 교차, 투구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살기가 충만한 눈을 가진 자였다.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느낌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이곳이 내 무덤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나라는 인간이 묻히기에는 전혀 손색이 없는 '전장'이라는 이름의 무덤이지만.

챙그렁!!!

가볍게 서로의 검을 맞부딪치고 재빨리 적과의 거리를 넓혔다. 왠지 모르게 들기 시작하는 이질적인 느낌. 이건…전쟁이 아니라 결투다. 세상에 존재하는 도덕, 이성, 법 따위는 마치 엿 먹으라며 비웃듯이 이성적인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 전쟁터에서 되 먹지도 않은 격식이라니. 갑자기 머리  속으로 불쾌한 기분이 끊임없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죽여버리겠어.'

있는 힘껏 고함을 내지르며 선공을 펼친 건 나 자신이었다. 체력적, 무장 면에서도 월등히 떨어지는게 현재 나 자신이 직면한 상황. 단 한번의 공격으로 정확히 적의 비무장 부분의 급소를 찌르지 않는 한 승산은 보이지 않는다.

챙강!!

"윽!!"

끼기기기기긱…….

"흐읍∼!!"

적은 예상대로 종베기 자세로 내 몸을 베어버릴 작정인 듯 했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그 순간, 손가락 통증으로 신음이 입안에서 저절로 흘러나온다. 상대와 나의 힘은 호각, 아니…내가 밀린다. 이대로 가면, 이대로 가면 정말로 적이 원하는 대로 되어버린다.

"크아아아앗!!"

온 몸이 쑤셔왔다. 통증은 갈수록 극심해졌다. 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견딜 만 하지 않을까, 난 살기 위해 지금까지 수없이 나와 같은 본질을 가진 생명을 죽여오며 이곳까지 다다른 것이지 이따위 이름 없는 숲 속에서 나자빠져 시체로 뒹굴라고 살아온 건 아니다. 물론 나도 언젠가는 여기 널부러져 있는 시체들처럼 생을 마감하겠지…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아직 그때가 아니다. 아니, 아니라고 생각한다. 난 살아남을 것이다!

끼기기긱!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순간을 벗어나기 위해 난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몸부림을 치고있었다. 이 몸부림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순간적으로 낸 힘에 적의 팔이 튕겨져 올라갔다. 내 앞으로 빈틈이 만들어진 것이다. 검의 날을 수평으로 세워 적의 투구 한 가운데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있는 힘껏 찔러 넣은 것이 효과를 보았다. 정적의 숲 속을 처절하게 울리는 비명과 검과 얼굴에 튀기는 뜨거운 붉은 물감. 이 물감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난 비로소 잠깐이었지만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빠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동료의 죽음을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한 명의 기사가 나를 향해 돌진해왔기 때문이다.

부웅∼!!

"!!!!!!!!!!"

채앵!!

"이런 망할!"

가까스로 첫 공격은 간신히 피할 수 있었지만 두 번째 공격을 막으면서 검의 부러져버렸다. 요래 지속되는 전투도중에 제대로 관리한번 하지 않았으니……나 스스로 자초한 일인 것인가. 이러는 와중에도 적은 검을 움켜잡고 내 머리통을 깨끗이 몸에서 분리시켜주겠다는 듯, 거친 기세로 공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피하는 것도 벅찬 상황, 그리고 끝내 나무뿌리에 걸려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게되었다.

"네놈이……네놈이 감히 텔로스를!"

"………."

휘익∼!!

스산한 바람을 가르며 검 끝이 내 심장을 향한다. 놈은 자신의 더 맛보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분노로 인해 날 죽이는 것조차 약간 주저하고 있는 것인지 곧바로 날 찌르진 않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이 이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넌 지금 '나'라는 인간을 죽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라는 것을!

"크아아앗!!"

울분과 기합이 뒤섞인 고함을 지르며 적은 무저항 상태인, 정확히 말하자면 무저항 상태로 죽음을 눈앞에 둔 나약한 한 인간을 죽이기 위해 검을 최대한 높이 치켜들어 수직으로 내리꽂으려는 찰나, 나는 그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넘어져있는 상태에서 있는 힘을 다해 적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쿠웅∼!

'지, 지금이다!'

순간적인 기습에 적은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둔탁한 쇠음을 울리며 뒤로 나뒹군다. 육중한 철갑덕분일까? 놈은 좀처럼 일어서지를 못하고있었다. 마치 뒤집혀서 어쩔 줄을 모르고 바둥바둥대는 거북이새끼 마냥. 그리고 난 이미 좀 전에 죽인 녀석의 검을 꺼내 집어들고선 무표정하게 일어나려고 있는 힘을 다하는 녀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상황은 역전되어버렸다. 망설임 같은 건 없다. 또다시 한 번 뜨거운 감촉이 몸에 전해진다. 어느 순간 미소를 짓고있는 나 자신, 이미 이 동물적인 본능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물들어 버린 것인가…….

"악, 악마같은 놈!"

"……………흥."

아직도 남아있는 적 2명 중 한 명이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내가 하고있는 짓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있는 이 녀석은 아마 악마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모습을. 놈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띄운 채, 이미 숨통이 끊어져버린 놈의 투구를 벗기고는 기계적으로 죽은 자의 얼굴을 반복해서 찌르고, 베어나가고 있었다. 남의 검 끝이 놈의 얼굴로 들어갈 때마다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가라 앉았다를 반복했다. 이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게 뭉개진 얼굴에, 그다지 원한도 없는 '적'의 얼굴에 계속해서 칼질을 해대고 있는 나 자신을 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본능이…몸이 원하는 대로 모든 움직임을 맡길 뿐이었다.

철컥! 철컥!

스릉!!

"…………………………………."

동료 두 명의 죽음이 위기감을 가져오게 했던 것일까? 어느 순간 두 녀석이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검을 뽑고 서서히 접근해 들어오고 있었다. 놈들과 달리 내 몸은 이미 만신창이나 다름없다. 검을 잡은 손은 찢겨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더불어 쓰라린 고통까지 함께 내 몸을 자극하고 있었다. 양팔의 근육은 무리하게 검을 휘두른 여파로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고 전신이 이미 나른해져 움직이기조차 귀찮은 상태였다. 이런 상태로 지금까지 죽지 않고 버틴 건 분명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집착 때문일 것이다.

"그래, 빨리 와라, 어서 조져놓고 좀 쉬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후 나는 갑자기 날뛰기 시작한 송아지 새끼 마냥 총알같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2:1 상황에서 선제공격으로 한 녀석을 제압하지 않는 이상 승산은 없었기 때문. 이런 예기치 못한 나의 움직임에 적들은 당황했는지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멈칫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가장 가까이 있던 놈을 걷어찬 뒤 나머지 한 녀석에게도 달려들었다. 한 녀석이 넘어진 사이, 다른 한 녀석을 처리해야만 한다. 짧은 시간 안에 해낼 수 있을까?

"채앵! 챙! 슈캉∼!!"

"크윽!!"

용감하다 못해 무모할 정도로 덤벼드는 기세에 처음에는 주춤했는지 나에게 우세한 방향으로 이어져 가는 것 같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내가 밀리기 시작했다. 동료의 죽음을 보고 놈은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 같았고, 그렇게 되자 체력적으로 불리한 내 쪽이 밀리게 되는 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 둘을 죽였다는 승리감에 젖어 오히려 내가 녀석들을 만만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라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순간, 갑자기 등뒤에서 진득한 살기를 느꼈다.

"큭! 이런!"

휘익∼!!

"제, 제기랄!"

왼쪽 옆구리에 순간적으로 불에 데인 듯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상당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있는 힘껏 몸을 틀어 간신히 찔리는 것만은 피했지만 베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살결을 타고 흐르는 액체가 말없이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다.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맞대고 있던 녀석을 밀쳐버리고 뒤로 돌아 방금 전의 공격으로 자세가 흐트러진 녀석의 오른 팔을 나는 있는 힘껏 내리쳤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동물과 같은 공격이었다.

"크아아악!!"

"헉, 헉…닥치고 이제 그만 뒈져버렷!!"

푸슉∼!

검을 잡고 있는 양 손, 양팔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짐과 동시에 놈의 살을 베는 경쾌한 느낌이 온 몸으로 전해진다. 눈앞에서 녀석의 비명과 몸통에서 팔이 분리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내 자신조차 놀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놈의 목을 찔러 들어가는 나의 검을 볼 수 있었다. 한순간에 적 1명을 더 처리한 셈이었다. 이제 남은 녀석은 1명뿐…….

휘익∼! 챙∼! 채앵!! 까앙∼!!

가까스로 머리를 베고 지나가려는 적의 검 날을 피하고 있는 힘을 다해 놈의 공격을 받아쳐 냈다. 지금까지 싸운 3명의 기사들보다 더 강한 녀석이라는 직감이 본능적으로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안정된 자세, 정확한 검 놀림, 상당한 속도와 민첩함, 모든 것이 골고루 갖추어진 강자인 것 같았다. 검과 검을 맞부딪치는 횟수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커져갔고 몸의 피로함도 극심해져 갔다. 그렇게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는 밀리고 밀려 어느 순간 큰 고목의 기둥에 등을 맞대고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도망치려 한다 해도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빠져나갈 자신도 없었지만…………. 막다른 골목에 선 상황이었다. 녀석의 선제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낸다 해도 이어지는 두 번째 공격을 막을 자신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

위이이이잉∼!

스윽…………철컥!

스산한 바람을 느끼며 조용히 검을 들어올려 찌르기 자세를 취하는 적의 모습이 눈에 비추어진다. 양손으로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잡은 채 어깨 부분에서 서있는 몸과 수직이 되도록 검을 끌어올려 내 몸 정 중앙을 노리고 있었다. 내가 검으로 발버둥을 쳐도 전부 받아 쳐낸 후 궁극적으로는 내 몸의 급소를 관통시키겠다는 듯이…………. 옆구리의 통증이 심해서 일까? 어느 순간부터 난 한기를 느끼며 온 몸을 떨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녀석을 쓰러트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막연한 소원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대로 꼼짝없이 생을 마감하는 것인가, 그러기엔 내 자신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머리는 다가올 죽음을 거의 확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고 있었지만 내 몸 어딘가에 존재하는 감성은 절대로 죽을 수 없다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두 가지의 강한 대립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것이다.

철컹∼! 철컹∼! 철컹∼!

'……오는 건가…………드디어…….'

어느 순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대치하던 적과 나 사이의 거리가 차가운 금속음과 더불어 급격히 좁혀져 들어간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고 나발이고 이 상황에서 어떻게든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이 나무 밑, 이 숲 속이 내 무덤이 되는 것이다. 정확히 따지자면 무덤이라 할 것도 없는 곳이지만………….

"이런 썅! 누가 이 딴 곳에서! 네 놈같이 이름도 모르는 일개 기사 따위에게 뒈질 것 같냐! 죽어버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별 짓을 다한다는 말이 생각나 버리고 말았다. 지금의 나 자신이 그렇지 않은가? 거의 비명에 가까울 정도의 소리로 욕을 갈기고는 마지막 발악인 냥 들고있던 장검을 있는 힘을 다해 달려드는 녀석에게 던져버린 것이다.

까앙∼!!!!!!!!!!!

예상외의 행동에 충격이 컸는지 순간적으로 달려오던 적의 자세가 그를 향해 날아오는 검을 막기 위해서 주춤한다. 비록 적의 갑옷에 부딪쳐 어떠한 상처도 주지 못하고 검은 튕겨 나갔지만 결과적으로는 급소로 향하던 적의 검 끝을 다른 쪽으로 틀게 했던 것이다. 대가로 왼쪽 어깨를 내주고 말았지만…………………….

푸욱………….

"아악!!"

검이 내 몸을 뚫고 들어가는 그 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길게 느껴졌다. 날카로운 금속이 살을 파 들어가는 순간, 근육을 뚫리는 순간, 쇄골 뼈를 살짝 베며 지나 마지막으로 나무에 박혀 버리는 그 순간 순간이 너무나 선명하고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놈과 나 사이의 거리가 가장 가까워진 그런 순간이었다. 투구 속에 감추어져 있던 녀석의 눈과 마주쳤을 때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온 몸을 떨고 있었다. 검에 찔린 상처가, 그 상처에서 생겨나는 통증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날카로운 눈매에……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움, 자신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속으로 비웃고 있다는 듯한 느낌.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다. 이런 느낌을 주는 녀석은……'그 놈' 밖에 없어!

"히익!! 네 녀석은!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거냐! 으으…………죽여버리겠어! 네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려 내 입으로 씹어먹고 말겠다!!!"

이 순간만큼은 미쳤다고 보는 게 옳을 듯 했다. 나는 과거의 기억이 선명히 드러나기 시작하자 어느 순간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던, 기억 속에 강제로 억눌려있던 기억이 끄집어져버리자…….

퍼억!! 퍼억!! 콰당!!

순식간에 싸움 양상은 육탄전으로 돌변했다. 어깨에 박힌 검을 뽑아 내던져 버리고 적의 투구를 벗겨 버린 후 쉴새없이 주먹을 놈의 얼굴에 내리꽂았다. 물론 적도 가만히 있지는 않고 필사적으로 나에게 덤벼들었다. 입술은 터져 봇물처럼 피를 쏟아냈고 이마는 깨져 한 줄기 붉은 액체를 쉴 새 없이 얼굴 위로 흘러내리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가 뒤엉켜 뒹군지 10여분이 지난 순간,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던 내 손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잡혔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

전투는 끝난 것 같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큰 고목에 등을 기대고 앉아 방금 죽인 기사의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체의 목에서는 여전히 새빨간 물감이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순간의 착각이었을까? 저 기사의 얼굴에서 그 녀석의 얼굴이 겹쳐 보이다니…………그만큼 절박했다는 상황이라는 것인가……. 긴장이 풀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검에 찔리고 베인 통증들이 엄습해온다. 그래도 나는……희미하게나마 웃고 있었다. 이유는 너무 단순해서 바보 같기도 했다. 단지……………….

-죽지 않았으니까, 살아남았으니까…………살아있으니 언젠가는 그 녀석에게, 아니, 그 녀석의 얼굴에 내 검을 찔러 넣을 기회가 남아있는 거니까………….-

힘겹게 손을 움직여 상처를 대충 지혈하고는 쓰러지듯이 주저앉아 눈을 감는다. 쉬고 싶었다.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한숨 푹 자고 일어나는 것이다. 이 장소에 널 부러져 있는 시체들과 달리 영원한 잠은 자지 못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았으니까……어쩌면 더 힘들고 비참한 일일지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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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단편입니다.

이게 이어져 나가면 장편이되는 것이겠고

여기서 끝나면 단편이겠지요

일단 장편으로 나가도 시점은 3인칭으로 바뀔테니 단편으로써의

특성은 잃지 않을 듯 하군요.


대략 그냥 별 생각없이 보셔도 되고

예전에 제가 끄적이던 -안타레스-의 두 주인공 놈들과

연관시켜보셔도 상관없을 듯 합니다.

추신:일러스트는 스캔하면 올리도록 하지요.


그럼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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