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2008. 03. 28 초회본
==========================================================================================


한밤중의 공동묘지.
달도 떠있지 않은 밤이지만, 무수한 별빛들이 비추고있어서 그런지 무섭다거나 하는 느낌은 들지않는 곳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이곳엔 무언가 피부를 곤두서게 하는것이 있다.
약한 바람은 피부를 찢고,
향기로운 흙의 냄새는 코를 마비시키고,
바람에 흔들리는 풀의 소리는 고막을 터트리고,
어둡지만 밝은 풍경은 안구를 타들어가게 할것같다.
감각세포 하나 하나가 참지 못하고 터져버릴것 같은 느낌.

살기.

공동묘지지만 유령이나 그 외 '무서움'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보이는 그 곳. 하지만 잿빛의 존재가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 만으로, 그곳엔 '죽음'이 가득 찼다.
"삭(朔)의 밤에, 굳이 이계의 장소를 만들것도 없지만. 뭐 오늘 목적은 싸우는게 아니니까."
그는 붉은 눈을 가늘게 뜨며, 살며시 웃었다. 보는 이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게 하는 차가운 웃음이다.
"누구냐, 넌..."
리겔이 잿빛의 존재를 경계하며 말했다.
"약간의 장난을 쳐 봤는데. 나름 꽤나 즐거웠소, 리겔공."
"언, 니..."
미즈루가 움츠려들며 카미루에게 다가간다. 카미루의 얼굴에도 눈물자국이 남아있다.
"그럼, 이제 돌려드리죠, 여러분의 기억."
잿빛의 존재가 손을 들어올리며 눈을 크게 뜨고, 리겔과 카미루, 미즈루 모두 눈 앞에 섬광이 번쩍였다고 느꼈다. 그와 동시에 덮쳐오는 현기증.
"뭐 정확히는 기억을 뺏어간게 아니라, 기억 위를 마력으로 덮어씌워 보이지않게 해 놓은 거였지만. 정말이지 리겔공-당신의 그 엄청난 [세계]를 뛰어넘은 기억은, 다 덮는데도 굉장한 마력이 필요어."
"데, 스..."
리겔은 머리속에 들어오는 정보의 홍수를, 필사적으로 정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기억을 잃었을땐 머리속이 탁한 무언가로 덮여있다는 느낌이었다. 기억을 잃어서 남은 자린가-싶었던 것이, 카미루, 미즈루의 피를 빨면서 지워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남아있던 탁한 부분도 데스에 의해 모두 사라졌다.
"뭐야, 이거..."
카미루가 중얼거렸다. 리겔에 비하면 지워진 부분이 적기에, 빨리 정리가 된 듯 싶다.
"거짓말이지...? 네, 리겔씨?"
"거짓말이 아닙니다."
잿빛의 존재-데스가 말했다.
"그것이 진실. 당신들은 모두 잊어주길 바랐기에, 기억을 덮었던건데, 이렇게 다시 하게 되는군요. 정말이지...운명의 여신의 장난이란. 아니, 운명의 여신같은건 이 [세계]에 없지만."
쿡쿡, 하고 데스는 웃었다.
"데스. 네놈의 장난에 더이상 놀아날 생각은 없다. 네 말대로 저 둘은 상관없어. 그러니, 이제 끝내자."
"말 했잖아. 오늘의 목적은 싸우는게 아니라고. 그저 이야기를 전하기위해 왔을뿐."
데스는 눈을 번뜩였다.
"코야마가의 두 아가씨들. 리겔공은 뭐랄까-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뭐, 가...?"
미즈루가 대답했다.
"분명 제가 리겔공의 기억을 덮어버린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밀어내기위해 대량의 마력이 필요하다는것도. 하지만 그걸-굳이 아가씨들의 피를 빨아서 회복하다니. 그것도 본능적으로. ...정말이지, 무어라 말을 하기 힘들도록 야만스럽군, 당신은."
리겔은 이를 갈았다. 그리고,
"염혈!!"
허공에서 한자루 검이 나타났다.
아무런 장식도 없고, 아무런 특징도 없는 검. 상아색의 검집 안엔 매우 낡고 녹슬고 이가 나간 검이 꽂혀있었다. 리겔은 염혈을 뽑고 허공으로 도약했다.
"이, 런~"
하지만 데스도 몸을 간단히 빼 그 검을 피한다. 리겔은 허공에서 몸을 더 움직여 데스에게 검을 휘두른다. 말도안되는 채공시간...이라기보다, 저 정도이면 비행이다.
팅, 무언가 부딛치는 소리가 들리고,
"거기다 이렇게 호전적이기까지..."
데스의 손에는 거대한 낫이 들려있었다. 위 아래 모두 날이 달려있는, 백골처럼 새하얀 낫. 심지어 정말로 인간의 두개골과 늑골 모양으로 장식이 되어있었다. 진짜는 아니지만, 진짜처럼 섬뜩한 모양이다.
데스는 염혈과 부딛친 낫을 크게 휘두른다. 리겔도 그 흐름을 흘리며 지상에 착지한다.
"정말이지, 당신은!"
그리고 왼손을 들어 리겔을 향해 무언가를 발사한다. 검정색의 화살, 혹은 침과 같은 무언가. 총알과 같은 속도로 정말 눈 깜짝 할 사이에 날아갔다. 그렇지만 리겔은 그것도 튕겨낸다.
"꺄악!"
"미즈루?!"
비명소리. 미즈루가 쓰러졌다. 리겔이 튕겨낸 데스의 공격에 맞은것이다.
"무슨?!"
데스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리겔공, 당신이란 자는..."
데스가 표정을 분노로 일그린다.
"코야마가의 언니분껜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공격, 육체적 타격은 없는, 공포를 거는 공격이었습니다. 아마...좀 걸리겠지만, 이상 없이 깨어날겁니다."
데스는 카미루에게 정중히 사과하며 말했다.
"용건은 끝난데다 예기치않은 일까지 일어났으니, 난 이만 떠나도록 하지요..."
그리고, 이지러진 세상은 나타나듯이 다시 사라졌다.


"......"
건물 옥상 위. 아래의 도심은 원래의 빛을 되찾고 돌아가고 있었다. 리겔은 데스가 처음 나타난 하늘을 공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카미루는 쓰러진 미즈루를 껴안고 앉아있었다.
"리겔씨."
카미루가 부른다. 하지만 리겔에겐 대답이 없다.
"리겔씨!"
다시한번 부른다. 그제서야 리겔은 돌아본다.
"어떻게 된 일이죠? 기억속에... 쓰러져있는 사람들은? 그리고...제 친구는?!"
카미루가 울먹이듯 묻는다. 하지만 리겔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이곳은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있던 곳이다. 결국 그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 그 공책은요?!"
"미안, 합니다..."
리겔은 그 말만을 남기고, 건물 밖으로 몸을 던졌다.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어느새 어둠속에 잠겨 사라져 있었다.
"......"


다음날, 당연하다랄까. 리겔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카미루는 말도없이 조퇴한 이유로 미즈루가 갑자기 쓰러져서 그랬다고 말했다. 미즈루가 걱정되지만 적당한 구실이 생겼다는점은 다행이었다.
결국 그날 수업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한게 없었다. 그저 공허하게 칠판만 쳐다보고, 선생님의 말소리도 귀에서 그냥 빠져나가고, 손은 움직이지만 머리속에 들어오는건 없었다.
"하아..."
그리고 그것과는 다르게, 무언가 숨쉬기가 힘들다. 마치 가슴까지 물 속에 잠겨있는것 같은 느낌. 수압으로 가슴이 눌려 숨을 쉬기 힘든 느낌. 하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무언가 더 강한것으로 압박당하는 느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그런 기분과 몸을 이끌고 겨우 수업을 끝나쳤다.
방과후. 카미루는 교내를 서성이고 있었다. 이미 대부분의 학생들과 선생님들도 귀가하고 퇴근한 뒤. 노을이 붉게 물들고있는 시간이었다. 카미루는 눈치채지 못하고 었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지난날 리겔과 함께 걸었던 곳을 따라 가고있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알 수 없는 문자들로 차있는 검정색 공책.
사인을 알 수 없이 죽은 친구.
저녁노을이 지는 교실에서 리겔과 처음 만난 날.
한밤중의 건물 옥상-쓰러져있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리겔과의 싸움.
없던 기억이 한번에 몰려왔지만, 무언가 실감이 났다. 역시 자신의 기억이라서 그런것일가.
그런 생각을 하던중, 카미루는 학교 정원-이라기보단 숲-의 안쪽까지 왔다.
"아."
학교 벽 앞이다. 풀과 나무가 우거진 정원 앞에 이단적인 것이 있었다.
기하학적인 도형들.
도형이라기보단 그림.
그림이라기보단...마법진.
지난번 리겔과 왔을땐 그저 '기분나쁘다' 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 다르다. 그림의 모양이나 그 외의 것들이 바뀐것은 아니다. 그저 '다르다'. 마치 살아있는것같은 기운을 내뿜고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역시...기분나빠."
그렇기에 카미루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미즈루는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있다. '공포'를 거는 공격이라고 했는데, 정신적 타격이 컸던것 같다.
'무사히 일어나야 할텐데...'
걱정되긴 했지만 무언가 할 수는 없다. 치료나 회복쪽은 카미루 전문이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 토우야가 잘 하는데, 지금은 어머니와 또 여행나갔다. 연락도 되지않았다.

'리겔씨...'
카미루는, 리겔을 떠올렸다.
기억을 잃고 코야마가에 살게된 리겔. 그땐 자신이 타쿠미라는 이름을 붙여줬었다. 어딘가 다가가기 힘든 느낌도 있지만, 상냥한 웃음. 미즈루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매우 마음에 들어했었다. 그러니 약혼이니 뭐니 결정해버린거겠지만.
그리고 자신도...리겔이 좋았다.
그리고 생각한다.
처음 만난 리겔을. 노을이 지는 교실 안에서.
차가운 눈빛. 다가가기 힘들다기보단, 다가갈 수 없는, 날카로운 분위기. 얼어붙은것 처럼 표정없는 얼굴.
'그쪽이 진짜 리겔씨일까...'
왠지 눈물이 나는것 같다. 눈 안쪽이 뜨거워진다.
'그런 차가운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쉽게 죽일 수 있는것일까...'
쓰러진 사람들. 증거는 없지만, 분명 리겔이 그 사람들을 그렇게 한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카미루는 눈물을 흘리며, 미즈루 옆의 침대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

리겔은 학교 옥상에 서 있었다. 그가 서 있는 바닥엔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이라기보단 마법진과 같은 느낌. 그 마법진들은-마치 살아있는듯한 기척을 내뿜고 있었다. 중심의 어떤 그림으로부터 뻗어나온 가느다란 선들은, 온 학교에 퍼져있었다.
리겔이 허공으로 손을 내밀자, 검 한자루가 쥐어졌다. 상아색의 검집에 꽂혀있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밋밋한 검. 염혈이다. 리겔은 녹슨 검을 뽑아-자신의 목에 그 끝을 대었다.
푸욱.
기분나쁜 소리. 녹슨 날은 리겔의 목을 뚫고 뒤쪽까지 나와있었다. 하지만 리겔은 아무렇지도 않다는듯이 검을 목에서 뽑았다. 푸슉-하고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십여초동안 피가 솟구치고, 이내 멈췄다. 리겔의 목은 어느새인가 모두 나아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피는-살아있는것처럼 꾸물꾸물 움직여 마법진의 위를 채웠다. 마치 선 위를 붉은 색으로 덧칠하듯이.
학교 곳곳으로 퍼져진 가는 선 하나하나까지 피는 퍼져나가 다른 곳에 그려진 마법진들도 리겔의 피로 물들였다. 그리고...

쿠웅.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그런 느낌일 것이다. 그때문에 카미루도 놀라 잠에서 깼다. 미즈루는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쿠웅.
이번엔 분명 소리까지 났다. 크진 않지만 분명히 들리는, 낮고 무거운 소리. 그리고 그와 함께 전해지는 거대한 중압감. 무언가 거대한것이...있다!
카미루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공기가 달라졌다. 거대한 기척에의해 낮게 가라앉았다. 대기마저 긴장하고있다는 느낌이다. 카미루는 사실 확인을 위해 얼른 몸을 일으켰다.

'공간'안의 카미루는 온 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중압감은 아직도 남아있기에, 위치를 찾는것은 금방이었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였다. 하지만-무언가 이상했다. 학교가 있어야할 자리에 학교가 없다. 마치 크레이터처럼, 학교 주변까지 푹 파여있었다. 그리고 그 위엔-거대한 서양의 성이 마치 마법처럼 떠 있었다.

공간이 둥글게 잘리듯 열리고 그 안에서 카미루가 나왔을땐, 이미 성은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크레이터처럼 파인 학교부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학교의 흔적같은것은 없다. 학교 뿐만 아니라 주변까지도 파여있다. 거대한 국자로 파낸것처럼. 그리고 카미루는 느꼈다.
농후한 피냄새.
기척.
피의 냄새와 섞여진 '녀석'의 기척.
"리겔 아미츠...!!!!!"
카미루는 소리질렀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는 코야마 카미루. 코야마가의 차기 당주.'
코야마가는 혈마로서 피를 이어왔다. 그 피의 능력을 높이고 순도를 지키기위해 살육과 근친상간등도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카미루는 다르다. 혈마이지만, 그런건 상관이 없다. 혈해의 능력이나 가문의 순수함따위, 이젠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토우야와 유리네도 그렇게 가르쳤다.
네가 가고싶은 길을 가라-라고.
'나는 나의 힘을 사람들을 위해 쓰기로 했어.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힘이라도, 현대의 세상엔 필요가 없을지라도.'
다시 둥글게 잘린듯한 공간이 나타나고, 카미루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코야마가의 지하로 이어져 있었다. 카미루는 더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렇기에 난, 사람들을 위해. 리겔을 막을거야.'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발걸음을 옮긴 곳. 코야마가 지하의 가장 깊은 곳.
그곳엔-거대한 둥근 돌문과, 그것을 막듯이 엄중히 봉인되어있는 검-혈해(血海)가 있었다.



==========================================================================================

>후기
안녕하세요, 코드입니다.
n번째 세계-코야마가 11번째 이야기 입니다.
이번엔 조금 빨리 썼습니다. 덕분에 양도 적습니다.
뭐랄까-쓰는데 마음이 급해서랄까. 내용도 빈약한것 같습니다만...
그 점은 다음번(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대수정을 하면서 다시 추가도 하고 해야겠죠...

내용상으로-드디어 분위기를 제대로 전환시켰습니다.
사실 여기서 이미 리겔과 카미루의 전투씬이 한번 있을 예정이었습니다만, 쓰다보니 삭제되었습니다.
그리고...그 외의 언급은 않겠습니다.

내일과 모레에도 한편씩 더 쓸 수 있길 빌며.
4월달 중간고사 시작 전에 '코야마가' 스토리를 끝낼수 있길 빌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