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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학교를 가지 못했다. 특별히 가기 싫었던 것도, 비가 내려서도 아니었다.

다만 내 눈앞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소녀가 마음에 걸려서 이었다.

방황 할 때는 몇 일간 연속을 학교를 빠진 적도 있지만(물론 지금도 마음을 정리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요즘은 그렇게 자주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 ‘부득이하게 빠져야만 하는’상황과 맞닿은 것이다. 그 때문에 오늘 학교 가는 것은 포기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다. 경찰서에 연락해도 될 텐데 나는 왜 이 소녀를 아직까지 내 방에 데려다 놓고 있는 걸까?

깨어날 때를 기다리고 있은 것일까? 아 그래, 어쩌면 단순히 업고 가기가 불편해서 그런 것일 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녀를 내 버려 둔 채, 내가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일이 있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해야 할 일은 역시...

...잠 이었다.

시험을 앞둔 녀석은 틈틈이 공부를 하고, 운동선수는 틈틈이 연습하며, 나는 틈틈이 잠을 잔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다른 이들은 무언가를 이루어 내는 것이 목표이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그 무언가라는 녀석을 피해 있는 것이 목표라는 점.

빗속에서 조금 젖어있었더니 조금 피곤했다. 물에 축축이 젖은 옷을 세탁기에 대충 넣어놓고, 다시 내 방으로 들어와 나는 그 자리에 털썩 누워버렸다. 항상 그렇지만 나는 생각을 못한다. 하지만 잠드는 과정은 보통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이렇게 내 방에 누워있으면 서서히 눈꺼풀이 무거워 지면서 눈동자가 피부의 보호를 받는다.

그리고는 어둠이 지배하는 시각 안에서 점차 잠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게 평이한 코스 안에서 잠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더 길고 긴 잠이 되기 위해서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내 모습이 안 봐도 훤했다.

잠이 온다. 그리고 잠시 동안의 도피처의 조그만 입구가 내 검은 시야에 들어온다. 거창한 간판은 없지만 ‘환영!’이라고 쓴 명찰만한 표가 눈에 강하게 띈다. 환영한 다라……. 내가 단골손님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리고 나는 편안하고도 짧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비 오던 하늘도 빗줄기를 줄이고, 땅과 물의 마찰음이 잠깐 사그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천장과 공허한 벽. 하얀색 정신병원의 환자실 같은 공허한 색. 벽, 벽, 벽!

어두워져 가는 두꺼운 이불, 조용한 빗소리, 역시 조용한 아침…….

얼마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 뒤늦게 자리에서 눈을 떴다.
천장과 공허한 벽. 하얀색 벽, 두꺼운 이불, 조용한 빗소리, 그리고 소녀.

소녀라고?

무심결에 본 걸 의미 없이 나열하던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그 연둣빛의 꼬마소녀가 나를 커다란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흠칫 거리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연둣빛의 꼬마 소녀는 턱에 손을 괴인 채, 하얀 피부와 대조적인 붉디붉은 조그마한 입술을 옹알거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는 것처럼…….

“물”

순간 내게 들린 소녀의 목소리는 귀가 아닌 뇌를 통해 울리고 있었다.
아니, 그건 확실히 전음 바로 그것이었다.

“물”

다시 한 번, 소녀는 입을 옹알거렸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단순한 움직임에 불과했다.

그랬다.

내게 들리는 말은 모두 전음일 뿐, 음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까지 나는 아까운 몇 분을 소비해야만 했다.

내가 소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아서였을까? 소녀는 가느다란 손으로 내 손목을 나름대로는 세게 쥐었다 놨다 하는 행동을 여러 번 반복했다.

손을 떼어낸 채로 나는 일어섰다. 무미건조한 나의 목에서도 소녀와 같은 시원한 액체를 갈구 하고 있었다.

하얀색 작은 창고에서 큰 창고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이런 기분을 맛본 적이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투명해서 깨질 것만 같은 컵에 또 다른 투명하고 시원한 그것이 채워졌다.

그뿐이었다.

소녀에게 건네주고 더 이상 옹알거림도, 전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주저앉듯이 누워있던 작은 침대위에 몸을 구겨 넣듯 밀어버렸다. 아니 무너져 버린 것이라 하는 것이 어쩌면 더 정확할 지도 몰랐다.

풀잎향이 나기 시작했다. 발끝부터 머리 윗부분 까지, 모세혈관 하나하나 숨 쉬는 구석까지 느껴져왔다. 아니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풀빛으로…….

오늘도 학교를 가긴 틀렸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내 어깨를 타고 다리의 끝부분 까지 전달해 주는 것이었다.

순간 내 팔위에 또 다른 체온이 겹쳐졌다.

나에 체온보다는 약간 낮은 듯 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그것이 겹쳐졌다.
눈이 조금씩 위로 말아 올라가듯이, 세상을 비추었다. 신기한 듯이 내 팔 위에 손을 올리고 커다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연둣빛 긴 머리에, 눈동자 역시 조금은 녹색으로 보였다. 어쩌면 그렇게 보인다고 의식해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이름이 뭐예요?”

또 다른 전음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선명하게, 그리고 소녀의 옹알이는 조금 더 확실해 졌다.

“이름? 이름으로 지금껏 별로 불려본 적이 없는 것 같군. 너는 누구지?”

조금은 딱딱하고, 어떻게 보면 차갑게만 보이는 기계인간과 같은 목소리의 대답을 한 나는 소녀의 눈과 내 눈을 자연스럽게 나란히 내버려두었다.

소녀는 내 질문이 조금은 당황스러웠는지, 내 팔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거두어 드린 채, 남은 손으로는 머리를 넘겼다.

어쩌면 그것이 소녀의 버릇일지도 몰랐다.

“나는 들꽃이에요. 봄이 되면 피어나는 보라색의 들꽃.”

분명하게 소녀는 말하고 있었다. 내게 자신의 존재를 전달하고 있었다.

“이름이 들꽃이라는 건가? 설마 자신이 길거리에 피어나는 식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조금은 황당하고, 신빙성이 무척이나 떨어지는 허나 빗속에서 그렇게 쓰러져버린 소녀의 이유를 증명이라도 해주는 듯 한, 그 대답은 내게 또 다른 감정을 남겼다.

감정이란 단어가 존재함을 알려주는 첫 신호탄에 불을 당긴 셈이었다.

소녀는 나의 질문에 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웃는 소녀의 얼굴에는 보랏빛 홍조가 감돌았다. 붉은 빛 가운데 보라색의 신비함이었다.

“전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혹시.”

소녀는 다시 한 번 빙긋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를 내려는 것인지 옹알거리는 입술의 움직임도 조금 빠르게 변했다.

“전음인 것을 느끼시네요. 맞아요. 전음.”

수줍은 듯 한 표정으로 새치름하게 아니 조금은 순진하게, 순수한빛으로 소녀는 말하고 있었다. 손을 대면, 소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게 될 것만 같은 순수한 빛이었다.

“들꽃.. 이라고 했나? 왜 그 빗속에 쓰러져 있었던 건지 물어봐도 되는건가?”

소녀는 내 질문에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더 이상 어떠한 전음도 옹알거림도 내게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침묵을 곱 씹은지 몇 분 후에야 소녀의 전음은 진공상태의 무엇인가를 타고 내 뇌를 자극했다.

“며칠 동안 여기 있어도 되요?”

소녀의 큰 눈은 미세한 흔들림도 없어 보였다.
갈 곳이 없어서, 단지 그뿐인가. 아님…….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대할 이유도 없었지만, 찬성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고 느꼈다. 하지만 입안에서 맴도는 이 소리는 건조하게 말라버린 입술사이에 갇혀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었다.

“말씀이 없으시면, 허락하신 거죠?”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내게 소녀는 다시 한 번 전음을 보내왔고, 기쁜 듯이 환하게 웃었다. 어딘가 모르게 편안함이 밀려오는 웃음 그 자체였다.

소녀는 아이같이 침대에서 폴짝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막 상경한 시골처녀처럼..

“방에 아무것도 없네요.”

전음에서 느껴지는 실망감이 뇌를 타고 중추신경을 자극했는지, 가슴이 아려왔다.
소녀의 단 한마디의 말로 인해서, 아니 그것도 단지 전음을 통해서 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의식하고 있었다.

“식물을 키워요. 그렇게 해요.”

소녀는 다시 한 번 내게 전음을 보내왔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침대에 몸을 내맡겼고, 환영 이라는 작은 문패를 두어 번 두들기는 것으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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