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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하

   또한,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서, 교황과의 관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행적일 것이다. 메로빙거의 왕들이 그러했고, 또 선왕 피핀이 교황령을 기증한 이래, 그 역시 프랑크 왕국의 군주로서 - 반쯤은 관습화된 의무로 - 교황을 비호하였으나,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교회에 복종하기는 커녕 자신이 교회보다 우위에 있다 생각하였다. 그러한 그의 생각은 하드리아누스 1세의 선종 후, 후임으로 교황이 된 레오 3세에게 보낸 편지에 드러나 있는데, 그 서신 중 그는 자신에 대해 "모든 기독교인의 지배자요 아버지요 왕이며 또 사제이며, 그와 동시에 수장이자 지도자" 라 표현하며, 교황이 준수해야 할 노선을 지정하였다. 이는 교황권을 억누르고, 자신이 그 위에 서겠다는 분명한 의지가 담긴 표현이었다. 


   그러한 그의, 교회 견제적 행보는 780년 부활절 연휴의 바티칸 방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당시, 그는 일전에 스스로가 약속했던 교황령의 확대 (당시의 바티칸에서, 약 120km 떨어진 페루자의 스폴레토까지 - 이는 르네상스기의 소규모 도시국가 하나에 준하는 영토의 넓이다.) 를 파기하였다. 그는 코로나 페레아를 소유한 롬바르드의 왕으로서, 스스로 독일 - 프랑스에 걸친 기존의 프랑크 왕국 영토를 넘어, 이탈리아마저 완전히 발 아래 두는 통치자가 되고자 했고, 그 권리를 교황에게 양도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아니, 그에게 설령 그렇게, 이탈리아의 유일한 군주가 될 작정이 없었더라도, 왕권을 중시하는 왕이라면 당연한 처사였으리라. 교황에게 그만한 영토를 수여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곳에 뿌리를 두고 세도를 부리며 산 옛 로마의 귀족들이나 교회 세력의 확장을 의미했고, 그들의 확장은 그의 통치에 대한 간섭으로 이어질 테니까.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무리 신실하다 한들, 왕이라는 자리에 대한 생각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이해할 것을, 지독히도 - 무신론에 차라리 가까울만큼 교회를 불신하는 - 그가 모를 리 없었다. 4세기 경, 기독교가 공인된 이래 교회를 이끄는 무리들은 절대 다수가 '신실함'과는 거리가 먼, 수도사의 탈을 쓴 세속주의자들이었으니. 그들이 영토를 갖게 된다면 그 욕심은 한없이 커지리란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기존의 로마 기득권층을 억누르고, 교회 위에 서려고 했던 그의 처사에 로마와 교회는 어떻게든 그의 영향력을 끌어내리려 애썼고, 그 중 하나는 레오 3세에게의 비난이었다. 하드리아누스 1세 - 예루살렘에 아프로디테와 제우스의 신전을 세운 황제의 이름이 교황의 이름이라니 참으로 어울리면서도 웃기는 일이다 - 의 선종 후, 그가 레오 3세를 즉위시킨 것에 대해, 분명히 '세속과의 연을 버렸을 터인' 하드리아누스의 '조카'와, 로마 교회의 관료들 그리고 귀족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들고 일어난다. 레오 3세가 귀족 출신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간통을 저질렀다, 위증을 저지른 죄인이다, 그들은 외치며 비난하며, 799년 4월. 마침내 교황을 습격하여 폭행까지 하고 만다. 레오 3세는 이 습격 이후 피신하여,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왕을 만나 구원을 요청했고, 그는 직접 군을 이끌고 로마로 내려와 주동자들을 전원 처형시키고 레오 3세를 복위시킨다. 


   하지만 이렇게,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습격이나 받던 허수아비 같은 레오 3세조차도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한 후 정확히 이틀 뒤── 그에게 다른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한 일을 저지른다. 서로마 황제의 관. 성탄절, 그가 미사를 올리던 도중 그 자리의 모든 로마 귀족들이 그를 향해 '아우구스투스' 라 환호했으며, 미사는 곧 황제 대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는 루루찡이 예상하지 못했던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로, 그가 여태까지 추구해 온 것을 자칫하면 완전히 상태를 뒤엎어버릴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는 여직, 교권 이상의 왕권을 추구하고 실행했으나, 이 '대관식' 에서, 교황이 그의 머리 위에 관을 씌운다면, 그것은 교황에게 황제를 임명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 즉, 황위 계승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었다. 또한, 역대 교황들조차 피핀이나 클로비스 등에게도, 그런 황제 추대 같은 것은 약하디 약한 명분 - 정통성 - 으로 하지 못했는데, 출자가 미약한데다 그럴 만한 법적 권리도, 역사적 명분도 없던 레오 3세가 그것을 감히 실행하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던 것이었으리라. 그의 전기문 '카롤루스 대제의 생애(Vita Caroli Magni)' 에서는, 교황이 만약 이런 - 이 따위 - 계획을 세운 줄 알았더라면 그는 결코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 단언하고 있다. 물론, 현대의 몇몇 학자들은 이러한 묘사와 견해에, 만약 그가 정녕 황제위를 원하지 않았더라면, 후일 그것의 인정을 위해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또 그의 동의 없이 과연 교황이 혼자 그러한,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권력을 가진 그에게 멋대로 그리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표하지만── 그저 탐욕스러운 '진짜 샤를마뉴'도, '샤를 엘리오르' 도, 이미 자신에게 바쳐진 칭호를 거절하는 꼴불견스러운 일은 원치 않았을 것이다. 전자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 후자는 더 강한 왕권을 위해. 이미 바쳐진 이상, 돌이키거나 남에게 뺏기는 웃기지도 않는 꼴을 보인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손에 들어왔다면, 되돌릴 생각이 아닌, 이용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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