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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하


광휘光輝 

환하고 아름답게 눈이 부심. 혹은 그 빛. 혹은 눈부시게 훌륭함.



*           *           *




    공간이 뒤틀리고, 세상에 금이 간다. 허공에 일어난 균열은 가뭄의 땅바닥처럼 으스러지는 소리를 내는 양 갈라지고, 마치 넘쳐 흐르기 직전만큼 물을 담아놓은 것처럼 흔들흔들, ──'일렁거렸다'. 어둠이 마치 진흙처럼 진득이 녹아내리고, 밤바다의 파도처럼 몰아치고, 거센 여름의 태풍처럼 격렬히 휘저이더니.

──일순간, 멈추었다. 그리고,


    서서히, 서서히, 서서히. 살며시, 흰 비단에 물드는 쪽빛 염처럼. 검고 검고 밑바닥 없는 어둠 속 그 깊고 먼 끝에서, 무엇인가가 천천히 물들고 있었다. 퍼지고 있었다. 다가오고 있었고. 천천히.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은 태어나기 직전의 알처럼 강하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마치 별이 태어나는 것처럼. 화려한 빛이 되어 시야를 채웠다. 눈이 멀 것만 같은 그런 빛이었다. 그럼에도 무엇인가, 무엇인가가 굉장히 따스하고도. 맑은. 어둠 속을 기어다니던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빛에 안기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가 내려섰다.



    '초대'한 자를 기다리던 남자는 눈을 감싸쥐었다. 빛을 보지 못한 것이 벌써 몇 년 째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통째로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먼저 느낀 것은 분노. 이러한 빛에 버틸 리 없다. 허니 이제 곧 자신이 스러져 사라질 것이라는 것에 대한 분노. 증오. 누구인지 보이지도 않으메, 그 자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은 흡사 인간보다는 짐승. 어쩌면 맞는 말이었던가. 그러한 것을 남자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니, 누구'였'던 것인지. 그는 그저 생존 욕구와 자신의 감정, 그것들에만 의해 움직이는 그러한 존재였으니. 적어도 이제는.


    그는 굶주린 야수인 양 손톱을 세웠다. 입가와 양 미간이 분노로 흉측하게 일그러졌으나, 이미 그것을 보고 겁에 질려 울부짖을 어린애 따윈 주변에 없었다. 그는 서서히, 서서히, 일순 폭발한 듯한 눈부신 빛이 사그라드는 것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저것이 누구이지 보게 된다면. 갈가리 찢을 마음을 먹고서.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인 양, 사납게 끓어오르는 바람으로. 


     그리고, 폭발하는 듯한 빛이 스러지고, 투명한 잔향. 봄날의 햇빛 같은 상쾌하고도 상냥한 빛만이 부드럽게 감쌌다. 그제사 남자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빛을 휘감은 소녀. 한 손으로, 목을 잡고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자그마한 여자아이. 해악의 파편조차 보이지 않는 그런 소녀.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남자는 아직도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는 듯, 멍하니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가다듬는 듯한 소녀를 향해. 내달리려 했다. 그 희고 가는, 사슴 같은 목을 갈가리 찢으려 했다. 헌데.


     소녀는 눈을 떴다. 새벽녘의 그것과 같은 맑은 금빛 눈동자가 곧게 남자를 마주보았다. 위기감의 위, 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한 표정의 소녀는 물끄러미, 그만 몸에 힘이 빠져버린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요한 숲의 산새가 지저귀는 양, 소녀는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가여운 자로다."



     단지, 소녀는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소녀는 그저, 이젠 멍하니, 발이 땅에 매인 양 주저앉아 그녀를 올려다보던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고. 마치, 마치. 수십 수백여 년 전 보았던 햇빛의 찬란함을 마주한 그 감각으로, 남자는 마주 손을 내밀었고. 미소를 지었다.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안도. 어쩌면 그것은 후회. 어쩌면 그것은 체념. ..어쩌면 그것은 구원. 


   그리고, 손이 닿기 전. 이 세상에선 본 적 없었던 마알간 따스함에 포근히 감싸안기듯, 남자는 스르륵 무너져내렸다. 눈물자락 한 줄기가 맺힌 눈자리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담은 채. 서서히, 서서히. 아주 천천히. 보통의 그의 '동족'들보다도 훨씬 느리게 사그라드는 그를 보며, 소녀는 잠시,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놀라는 것은 없었다. 그녀가 그러한 일로 놀랄 성품은 아니었으니. 그저, 말했던 것 그대로였다. 눈 앞에 덤빈 남자의 동족 자체를 가여이 여긴다던가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때 그의 감각이. 몸부림이. 감정이 전해져 그것을 안타깝다, 가엾다 느꼈고, 그것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사라지기 싫어하는 자를 억지로 사라지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순간 그가 그 자신도 모르는 마음 깊은 곳에서 그리 바랐을 것이었고, 소녀의 생각은 옳았다.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스러지기 시작한 남자를 보며, 소녀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취미가 나쁜 장소로구나. 그것은 그 장소의 어두움과 음침함 때문인지, 혹여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소녀는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의 할 일을 생각할 뿐. 그런 소녀의 귓가에 바람이 소곤거렸다. 동굴 바람이 재빠르게 달려와 전령의 역을 고했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는 몸을 곧게 폈다. 여전히, 투명한 빛에 감싸인 채. 그 발 밑에만 새싹이 싱그럽게 고개 내민 채. 그 손이 닿는 곳에만 낡아 부서진 벽이 그 옛날 영광된 모습을 찾은 채.


   고아한 몸가짐으로 나붓이 선 채, 소녀는 달빛 한 점 깃들지 않은 허공을 올려보았다.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여기 서 있어.

  

   ──나는, 여기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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