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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하





소년시종은 걷고 있었다. 길고 길게 이어진 회랑성의 복도을, 뚜벅. 뚜벅. 뚜벅. 촛대에 꽂은 촛불 하나만을 들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걸었다. 저 너머 하늘에서는 별들이 쏟아졌지만, 소년이 걷고 있는 회랑은 캄캄할 뿐이었다. 들어가고 또 들어가, 꺾고 또 돌아, 걷고 걸어 회랑 끝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살며시 발을 멈추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뒤집어 써 머리를 가리던 천을 내리고서야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었다. 달의 여신이 사랑하던 아이마저 잊어버린 채 넋을 잃고 볼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밤바람에 나뭇잎을, 덤불을 뒤흔드는 바스락 소리가 마치 요정의 키득거림처럼 들리는 밤. 별을 녹인 소년의 머리카락만이 지상에 내린 달처럼 눈부신 백금으로 빛났고, 선명히 붉은 눈동자는 타들어가는 촛불에 태양 같은 오렌지빛이었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유일하게, 찬란하다, 는 말이 어울릴 법한 소년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벽에 손을 디디었다. 정확히 말해서는, 문에.


삐그덕.


아주 희미한 떨림과 함께, 천천히 문이 열렸다. 달빛이 깃든 방 안,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커다란 침대였다. 하얀 이불이 폭신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소년은 표정의 변화 없이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규중의 밀회 따위로는 결코 보이지 않았다. 애당초 소년은 아직 겨우 십 대 초반이었다. 소년의 나이에 걸맞는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평지풍파를 전부 겪은 눈을 하고 있었을지라도. 무엇보다도, 소년이 가까이 다가간 침대 속에 파묻히듯 곤히 잠든 것은, 숲 속의 공주가 아닌 여서일곱 살이나 겨우 되었을까 싶은 작고 작은 아이.


소년의 머리칼이 달빛의 백금이었다면, 여자 아이의 머리카락은 햇빛의 그것이었다. 그것도, 아침의 옅은 투명함, 낮의 찬란함, 타오르는 해질녘의 강렬함까지 모든 색이 갖추어진 금빛이었다. 포동포동한 두 뺨에는 아이 특유의 복숭앗빛 홍조가 사랑스러웠고, 우윳빛의 피부는 보드라워 보였다. 마치 신의 아이 같은 모습이었으나, 소년은 여전히 - 평지풍파를 전부 겪은 눈을 - 살짝 게슴츠레하게 뜬 채, 미간을 한 번 좁혔을 뿐이었다.


"너, 자고 있는 게 아니지요."


"......"


대답은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누가 보기에도 소녀는 곤히 잠든 것처럼 보였으니까. 어떤 낙원의 꿈을 꾸는 것일지 궁금해 질 정도로 달콤한 잠을.


"...착각이었나."


여전히 아이는 세상 모르고 잠든 채였다. 소년은 잠시 생각하고는, 빙그르르 뒤를 돌았다. 촛대의 불꽃이 사라지고,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10. 9. 8. 7. 6. 5. 4. 3. 2. 1. 불과 10 초 전까지만 해도 곯아 떨어져 있던 여자 아이가 반짝 눈을 떴다. 여름날 새벽, 가을 낮의 하늘과 같은 녹빛 푸른 눈동자. 사람이 홀릴 듯 빠져들 눈동자엔 이미 단 한 점의 졸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두리번 두리번. 양 옆으로 고개를 저어 주변을 둘러본 여자아이는, 장난 꾸러기 요정마냥 씨익 미소지었다. 오늘도 계획대로, 무사 통과 만사 태평!


그 자그마한 체구에 비하면 커다란 침대에 폭 파묻힌 채, 소녀는 한 번 몸을 빙글 돌렸다. 굴렸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엎드린 자세로, 여자 아이는 그 작은 머리를 뉘이기엔 너무나 큰 베개 밑으로 손을 쏙 집어넣었다. 뒤적거리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고, 여자 아이가 꺼낸 것은 한 권의 서책이었다. 그것을 서책이라고 해야 할지, 그냥 '문헌'이나 '기록물'이라고 표현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가장 정확한 표현은 '둔기'가 맞겠지만──어쨌든.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리고 아이는 침대 끝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아슬아슬, 떨어지기 직전 몸을 멈춘 아이는 자신의 몸만한 크기의 서책을 활짝 폈다. 자그마한 손이 더듬더듬 글자를 손으로 짚었고, 어렴풋한 달빛에 시야가 밝아졌다. 촛불을 켜면 간단한, 더 보기 쉬울 일이었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작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달빛 아래 엎드린 여자아이는 눈 앞에 펼쳐진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불과 삼 분 가량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쩐지, 주변이 조금 환해진 느낌이 들었다. 조금이 아니었다. 이런, 벌써 해가 뜰 시간인가? 시간은 그렇게 빨리 흐른 걸까? 순간, 조금 빛이 흔들린 느낌이 들었다. 깜짝 놀란 아이는 휙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빛 한 점은 커녕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과 흩뿌려진 별들. 영리한 아이는 상황을 이해하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이는 고개를 돌렸다.


"에에에에에엘샤웨일스 지방에서 고대에 존재했다는 여성용 이름!"


"... 그렇게 부르지 말아 주었으면 합니다만, 계집애 이름 같습니다."


"그그그그그게 지금 나는 그저 조금 더워서..."


"지금이 말입니까?"


엘샤, 라 불린 백금발 소년은 여전히 무심한 듯한 붉은 눈을 향한 채 변함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직 변성기가 오기 전, 소년의 높은 미성이었지만 그 어조는 놀랍도록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여자아이는 지금이 가을이란 것을 깨달았다. 낮은 조금 따뜻할지언정, 밤은 결코 '덥다'라고 할 수는 없는 날씨였다. 남쪽 바다색 눈동자의 아이는 그야말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그, 그. 자다 보니까.. 이불이 온 몸에 둘둘 말려서... 우우..."


"...그렇습니까? ...지금 저 쪽을 보면 결코 그랬었다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여자 아이가 누워 있었던 침대. 유독 크고 넓던 그 침대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아이일종의 대리인.매우 귀한 아이이므로 전쟁 중인데다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로부터의 위험의 가능성도 있는 상황에서 만약을 위해 함께하게 둔 그나마 비슷한 용모의 아이로, 말동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까 여자아이의 새근거림과는 달리, 좀 더 쌕쌕거리는 숨소리였다. 머리 길이는 비슷했고, 색은 찬연한 아이의 금발보다 좀 더 탁하고 어두운 애쉬 블론드...로 보였지만 저 쪽은 촛불의 빛이 거의 닿지 않은 채 어두웠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 쪽도 자고 있었기에 눈동자 색은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아이야말로 온 몸에 이불을 둘둘 휘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윽."


"너는 거짓말이 정말로 서투릅니다.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을 정도로. 뭐, 어떤 것도 악의가 없는 것이란 사실은 그나마 낫습니다만. 그 정도면

어린 아이의 귀여운 둘러대기 정도로 대부분 생각할 테니까요."


"우우, 엘샤도 나보다 겨우 다섯 살 많으면서...!"


"..... 쉬잇. 너, 그녀를 깨우고 싶은 겁니까?"


"?!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추욱, 여자 아이의 양 어깨가 비 맞은 새끼 고양이처럼 쳐졌다. 조금 시무룩한 표정이다. 그것을 보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엘샤라는 소년은 침대 옆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 치 흐트러짐도 없는 우아한 몸놀림이었지만, 의외로 그럴 때는 시원시원한 동작이었다. 


"...엘샤...?"


"발."


"..발..?"


"두 번 말하게 할 겁니까. 빨리 내밀어 보세요."


"아, 알겠.. 그런데 어째서..?"


"아까 긁히지 않았습니까. 정말이지 곤란한 일만 벌여놓는군요. 거기서지루한 가정교사에게서 몰래 도망칠 줄이야."


"하지만, 시킨 일들과제들과 레이디로서의 연습은 전부 다 끝내 놨었고.. 그건 지루하고... 전부 다 다시 한 번 확인까지 했고..."


"전부 다 끝냈더라도 해야 하는 건 몇 번이고 다시 봐야 하는 겁니다. 너, 별스럽게 꼭 그런 것에서만 호불호가 너무 극심해요. 다른 건 다 아무런  불평도 없이 머리가 조금 이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긍정적 낙천적으로 보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만. 뭐,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면 네가 네 나이로 보이는 건 외모 정도 밖에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편 들어 주는 것도 이번 뿐입니다."


"...감사를 말한...윽,"


"아주 새빨갛게 다 까졌군요. 정말이지, 내가 네 엄마로 보입니까?"


"그렇지만 보기보다 아프지는 않... 엄마?"


이런. 엘샤는 작게 혀를 찼다. 천하의 소년조차도 종종 잊어버릴 뻔한 사실이었지만, 소녀는 묘하게 애어른스럽게 침착한, 아이답지 못한 면이 있었다.남들의 위에 서면서 책임질 것도 누릴 것만큼이나 많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간간히 보여주는 뾰로통한 모습 같은 것을 제외한다면. 그렇기에 엘샤 또한 그녀의 여러 조금 '특별한' 점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무심코 넘겨버릴 뻔한 적이 많았다. 엘샤 정도로 매사에 능숙하고 착 가라앉았다 할 정도로 침착한 사람마저 그럴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 지는 뻔한 이야기였다. 말투야말로 어린 아이의 것이었을지언정, 사고 방식이나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실언이었습니다. 부디 잊어주십시오.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만."


소년의 달빛 머리칼이 가만히 눈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제서야 달빛으로 좀 더 밝고 눈부시게 보였던 눈동자의 색이 또렷이 보였다. 적색이 아닌 자색. 자수정 같은 보랏빛의 눈이었다. 그 눈으로 소년은 빤히 아이를 쳐다보았다. 묵묵히, 말 없이.


"그런데 엘샤.. 그런 느낌인가?원전의 에드워드는 어릴 적 우드스톡 궁에서 부모와 떨어져 자랐으며, 같이 지냈다 해도 필리파 왕비는 계속 임신중이었으므로 있어 주기는 어려웠다 / 마르그리트의 경우 저기에 왕비가 병으로 일찍 죽었다는 설정 추가"


그것 말이야, 그거. 아이는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으나, 엘샤는 그 의미를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눈을 내리깔고는 중얼거렸다.


"...나도 어렴풋이 밖에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 그런가."


"그러니까 너도 조금은 신경 쓰는 편이 좋습니다. 네가 우수한 건 알고 있지만 참아야 할 건 참아야 하는 법입니다."


소녀는 대답이 없었다. 사실은 아이도 알고 있었다. 몇몇 행동에 대해서라면 동년배의, 같은 상황에 처한 다른 아이들에 비해 그녀는 훨씬 더 자유롭다는 것을.살 수 있는 것들은 전부 다 살 수 있었고, 딸을 매우 예뻐한 부왕 덕에 타국의 공주들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바다란 것은 한없이 넓게, 광활하게 퍼져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바이킹한 때 영국에 있었던 노르만의 기록에서 간접적으로. 또한 바다를 본 적 없는 이 때의 마르그리트에겐 도버 해협조차 그리 보였을 것."


"──세상의 끝에는 얼음의 땅이 있다고 하더군.이미 러시아나 북유럽과도 나름대로 적지만 교류가 있었던 시대이므로"


"──저 먼 곳 어딘가에는 화려한 오색의 새가 날개짓하며,콘스탄티노플이나 그 쪽과 이탈리아를 견문했던 사람들의 말"


"──동쪽으로 계속 간다면 태양신의 궁이 나오고,그리스 신화의 파에톤 이야기"


"──해가 가라앉는 서녘으로 향한다면 별이 뜨는 곳에 닿을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하늘 끝에. 세상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나는 보고 싶어. 어떤 것이 있을지 나는 알고 싶어.왕족이며 그것도 여자아이이므로, 시집 가기 전에는 궁 밖으로 나가는 것도 여의치 않는다아이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곧게 소년을 마주보았다. 비취색 투명한 눈동자가 한없이 깊었다. 소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의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에, 자안의 소년은 다시 한 번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쓴웃음 같은 미소가, 순간 입가에 스쳤다. 


"자, 다 되었습니다."


"아, 응!"


"...하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소년은 몸을 움직여 침상에 기대었다. 한 쪽 다리는 뻗고 한 쪽 다리는 위로 굽힌 채 그 무릎에 살짝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여자 아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햇빛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조금 멋대로 춤추어 이마가 흐트러졌다. 고개를 살며시 갸웃하며 아이는 물었다.


"...엘샤?"


"...네가 잠들 때까지 여기서 감시할 겁니다."


"!!! ──역시 엘샤도 정말 좋아한다!"


"그러니까,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뭐, 됐습니다. 내가 포기하는 게 낫겠군요. 그렇지만 목소리는 좀 낮추십시오."


"에헤헤."


여자아이는 빙글빙글 도는 표정으로 웃었다. 소년이 잠을 잘 것을 종용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쯤은 아이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에둘러 말하는 허락이었다. 거기에, 어두운 곳에서 달 아래에서 보지 말고, 제대로 촛불이 환하게 켜진 곳에서 하라고. 여전히 턱을 괸 채, 소년은 흘끗 아이를 보고는 휙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 여전히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아이는 다시금 한참간 읽던 것에 몰두했다.


"...샤? 엘샤, 지금이 언제쯤인가?"


"...어디 보자... ..이제 곧 날이 바뀌겠군요."


한동안 조용히 있던 아이는 문득 소년에게 물었고,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를 것에 잠겨 있던 소년은 하늘을 가만히 보곤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이는 그에 환한 얼굴로 팍 몸을 돌렸다. 보송보송한 이불이 펄럭, 하는 소리를 냈고 아이의 긴 머리칼 끝자락이 엘샤의 귓가를 스쳤다. 


"그럼 이제 곧 엘샤가 이 곳에 온지 이 년이 되는 날이로구나!"


".... .... 너는 또 그런 걸 계산하고 있었던 겁니까. 정말이지 할 일도 지지리 없군요."


"하지만 하지만 기쁜 날이 아니더냐! 앗, 잠시..."


소년이 깜짝 놀라 받을 새도 없이, 아이는 깡총 침상에서 뛰어내리곤 그 밑으로 반쯤 기어들어갔다. 더듬더듬, 무엇인가를 찾는 듯 싶었다. 곧, 아이가 꺼낸 것은 작은 상자. 해바라기처럼 웃으며 아이는 상자를 내밀었다.


"──선물이다, 에-르-샤!"


"... 뭡니까, 이건? ....,"


소년은 아주 약간 당황한 듯한 얼굴로 엉겁결에 상자를 받았다. 안에 든 것은 서툰 솜씨로 만든 과자. 모로 봐도 전문가의 작품은 아니었다. 소년은 곧바로 이것이 무엇인지, 누가 만든 것인지, 언제 만든 것인지를 알아차렸다.


"──이것 때문에 아까 도망쳤던 겁니까."


"어어어어어떻게.... 으, 으윽. 아,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보지 말아라!"


"...하아, 입 밖에 낸 사실은 지킨다고 믿습니다. 그보다, 시간 낭비에 기력 낭비를 했군요. 괜한 짓이었습니다. 너는 도대체가... ...그보다, 혼자 숨어들어서라도 한 겁니까?"


"음? 그, 그건 아니..."


"우우우우, 둘 다 치사해!!!!!"


무심코 너무 크게 외쳐버렸을까. 기절한 듯 잠들었던 벌꿀빛 머리의 소녀마저 잔뜩 삐친 목소리로 분한 듯 소리치며 깨어났고, 엘샤라 불린 소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혀를 찼으며, 햇빛 머리칼 여자아이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바락 바락 날뛰던 여자아이의 입에 상자에서 꺼낸 과자 한 조각을 냉큼 물려주었고, 곤란해하던 아이의 입에도 쏙 넣어주었다. 오물거리는 소리, 오독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에 찼다. 다소 벙찐 표정으로 멀뚱멀뚱 눈을 마주치던 두 아이는 이윽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질린다는 듯 미간을 좁히면서도 결코 싫어하는 모습만은 전혀 보이지 않던 소년이 잔소리를 내뱉으며, 그렇게 시작 되는 작은 방의 비밀 연회.


그리고 이른 새벽. 깜빡 잠이 들었던 소년이 눈을 뜬 후 제멋대로 나뒹군 채 잠들어 있는 작은 아이들을 보고 한숨을 쉬며 이불을 덮어준 것은 또 다른 이야기. 그렇게, 언제나와 같은, 상냥한 해가 고개를 들며 서서히 감싸안는 아침이 찾아온다.






흠칫.


마르그리트는 깨어났다. 무심코 깜빡 졸았던가. ...아무리          라고 해도, 이 정도로 속 편하게 행동한다니 희미하게 자조하는 표정을 머금었다. 그럼에도 그 표정이 따스했던 것은 완전히 잊고 살았던 꿈을 보았기 때문일까. 비취빛 눈동자가 조금 묽게 촉촉했다. 그러고보니, 벌써 이 시간인가.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감독관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다, 기다리는 새 조금 벽에 기대어 앉아 쉬었을 뿐이건만. ...하늘의 별은 이미 도시의 불빛의 그림자에 가려져 빛을 잃었지만, 그녀가 생전에 보던 것과는 조금 다른 위치였지만, 그럼에도 같은 하늘에서 같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장 어두운 때는 해가 뜨기 바로 전.

아무리 깊은 어둠도 언제인가 끝나는 법.


마르그리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곧, 몇 시간 후면 이 도시에도 새벽이 내리겠지. 이 시간에 방문은 무리이며, 또 반드시 당장 들어야 할 종류의 것은 아니었으니. 재방문은 추후로 미루어도 될 것이었다. 부드러운 금발이 벚꽃잎인 양 바닥에 흩날려 내려앉았다. 읏차, 하며 가볍게 몸을 사뿐 일으킨 마르그리트는, 먼저 근처에 있을 칼을 찾아 돌아가기로 했다. 그럴 예정이었다.


"───,"


도망쳐봐야 소용 없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강한 살의와 함께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곧, 기척이 멈추었고. 육중한 교회의 문이 삐그덕, 하는 기괴한 소리를 냈다. 경첩이 끼이익, 듣기 싫은 비명을 질렀다. 비릿한 냄새가 났다. 뒤를 돌아 보지 않아도, 마르그리트 또한 곧바로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누구인지도. 


"안녕, 마리. 좋은 밤이네. 약속대로 널 내 것으로 만들러 왔어."


마르그리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먼저 보인 것은 그녀에게 곧게 향해진, 붉은 액체를 방울 방울 떨어뜨리는 사브르였다. 그 뒤로, 성모자상을 담은 화려한 색채의 로즈 윈도우 아래, 온 몸이 핏빛으로 물든 금발 소녀가 그림과 같이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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