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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르륵

샌더스 2014.02.14 12:39 조회 수 : 22




00/



     시에라는 고민하지 않는다. 신중의 신중을 기해, 수백 수천 수만 번의 생각을 반복한 뒤 결론을 내렸으나, 한 번 무엇인가를 결정한 이상 그것을 추후의 진행에 따라 조절하는 일은 있을지언정 번복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지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몸이 애달프게도 희미하게 떨리고, 잔뜩 긴장한 손끝은 희고도 희어 눈과 같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가 외출한 것은 이미 확인한 후였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언정, 받아들일 각오는 되어 있다. 

어떠한 대답이 나올지언정,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다.


아마도, 지만. 그래도,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그녀 스스로가 못 버틸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었고, 방문을 열었다. 새빨갛게, 잘 익은 토마토마냥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그녀는 왼손에 꼬옥 펜을 쥐었다. 그리고는, 그리고는. 깊게 다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마치 철문처럼 무겁고도 단단해 보이는 맞은 편 방문의 손잡이를, 가볍게 돌렸다.





01/



     언제나처럼, 나긋한 말씨의 인사와 함께 귀가한 남자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꽤 빽빽하게 찬 서가 - 이 저택의 주인 소녀는 서적 취향이 정말로 좋았다 - 옆, 따스한 햇빛 아래의 책상에 놓여져 있던 책을 들고는, 살짝 몸을 돌려 몇 걸음을 걸어, 희미하게 숲내음이 감도는 듯한 마호가니 의자에 우아하게 앉았다. 사람의 앉는 자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일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에 그 외의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꽤 나름대로 편안한 각도로 기대어 다리를 꼬고 앉아, 남자는 책을 펼쳤다. 적당히 책갈피로 표시해 둔 장이었다.



   『... ... 나는 아가씨에게 우리 안에 들어가 쉬게 해 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볏짚 위에 새로운 깨끗한 양가죽을 깔고, 아가씨에게 '편히 주무세요' 라고 말한 다음 나는 밖으로 나와 문 앞에 앉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증인이 되어 주십니다. 마음에 불길이 타오를 듯 했지만, 불순한 생각은 티끌만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한 구석에, 나의 보호 아래에 편히 주무시고 계신다 생각하니 커다란 자랑스러움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 ... 』



   도데의 글 속 소년의 마음은 남자로서는 매우 즐거울 정도로 깨끗하고 순수한 것이었다. 형태 좋게 타이핑 된, 이 나라의 것이 아닌 문자를 읽으며 남자는 곧 다시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유려한 문장은 마치 시와 같아서, 꽤나 아름답다, 남자는 생각했다.



   『... ... 만약 당신이 노천에서 밤을 지새었던 일이 있다면, 사람이 잠들고 있는 시간에 어떠한 신비스러운 세계가 고독과 고요 속에서 눈을 뜬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그 때, 생물은 한층 더 맑게 갠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눈에서는 작은 불꽃이 여러 개 빛을 냅니다. 산에 사는 모든 정령들이 자유로이 오가고, 대기 속에는 희미한 음향과 가볍게 스치는 정도의 희미한 울림이 들립니다. 그것은 마치 나뭇가지가 자라고 풀이 돋아나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낮은 생물의 세계지만 밤은 무생물의 세계랍니다. ... ...』



   신비스러운 세계. 정령들이 춤추는 밤. 나뭇가지가 자라고 풀이 돋아나는 소리. 밤의 노래. 남자는 문득 소녀가 지나가듯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요정이 노래하는 세상. 나뭇가지가 자라고 풀이 사각거리며 돋아나는 소리. 소녀는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어떠한 음악인지, 어떠한 순간인지를. 그에게 지나가듯 말한 것 뿐이었으나 그는 문득, 그녀가 이 구절을 듣는다면 무슨 기억을 떠올릴지, 무슨 말을 할 지 조금 알고 싶어졌다.



     『... ... 그리고 내가 별의 결혼이 어떠한 것인가 설명해주려 하였을 때, 나는 무엇인가 상쾌하고 부드러운 것이 내 어깨에 기대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리본과 레이스와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곱게 누르며 내게 기대온 아가씨의 잠든 머리였습니다. 아가씨는 하늘의 별들이 햇빛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나는 가슴을 약간 두근거리면서, 나에게 여러가지 아름다운 추억을 안겨 준 이 청명한 밤의 신성한 보호를 받으며 아가씨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 ...』



     그는 문득 이러한 구절을 소녀에게 들려준다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그려보았다. 분명히 재미있는 반응을 돌려줄 것이었다. 기대대로, 혹은 기대 이상으로. 한 번 말해 볼까. 그는 선선한 입매를 살짝 끌어올렸다. 그렇다면, 부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 물론 기회라는 건 핑계일 뿐,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었지만 - 말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일까. 그리 생각하며 눈꼬리를 휘던 남자는, 문득 그의 손에 가려져 마지막 구절을 읽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끔 나는 별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하나의 별이 길을 잃고 나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남자는 한 번 눈을 깜빡였다. 유려한 필체로 씌여진 그것은, 누가 한 행동인지 모를 리 없는 것이었다. 이 집 안의 '그 외'의 누구도, 할 리가 없으며 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 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한 번 글자 위를 쓸어본 손가락 끝에 희미한 잉크 자국이 남았다. 깃펜으로 쓴 듯 남은 글을 읽고, 남자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어떠한 목적으로 씌여진 것인지까지는 아직 알 수 없었으나, 그는 그것을 그냥 넘길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는 책을 내려놓았고, 서가로 걸었다. 


     그가 남겨 둔 책장 마지막 귀퉁이에 적힌 건, 짤막한 구절 - 바뀐 구절이었다. 





운명과 감정은 한 명의 사람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Schicksal und Gemüt sind Namen einer Person   





02/



     남자는 서가의 조금 오른 쪽 끝, 약 세 번째 줄에서 책장을 훑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이 맞다면, 그 책은 분명 여기 즈음에 있을 것이었다. 아, 책장을 가리키며 훑던 남자의 손가락이 멈추었고, 그는 곧 팔을 뻗어 다소 낡고 작은 책을 꺼내었다. 조금 오래 된 듯 빛바랜 누런 종이의 책은, 옛 책 특유의 기분 좋은 종이 내음을 흘렸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그는 파라락, 책장을 넘겨 제일 끝을 보았다. 음? 예상 외의 일이었다. 끝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물론 그저 그녀가 도데의 책에만 유독 남겨둔 것일 가능성 또한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그녀의 성격상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그는 이미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는 상태였다. 



     "...당신은 나와 술래잡기라도 하고 싶은 걸까나, 귀여운 시에라."



     그렇게 중얼거리며, 남자는 의자에 앉는 대신 그대로 서가에 기대어 곧바로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꿀과 같은 금빛 눈이 빠르게 문장을 훑었다. 에밀 싱클레어. 데미안. 아브락사스. 사랑 속에서 밝게 자랐으나 자신의 길에 대해 고민하는 소년. 소년 옆에 나타난 악마 (Damon) 의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소년은 그 이름대로 '에밀 싱클레어'가 생각하는 밝은 세상'에 어울리는 자는 아니나, 항상 그를 돕고 또 이끈다. 그리고 아브락사스. 세계라는 알을 깨고 나오는 새.



     『... ... 처음엔 이토록 갑작스러운 개심에 나 자신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고 존경할 무엇을 가졌고 이상을 되찾았으며, 생은 다시 새벽에의 예감으로 감싸인 신비스러운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의 비웃음에 무감각할 수 있었고, 다시 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



     책장을 넘기며, 파르륵 넘기며, 주인 없는 방, 왼손에 펜을 쥔 채 팔락 넘기며 시에라는 또렷 생각했다. 이토록 갑작스럽게 변화한 스스로가 우스울 정도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 자신이 그른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그르든 옳든, 스스로가 생각해 내린 답이고 결론이라면 한 점 의심조차 갖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 또한 이유가 있을지어니, 그녀는 믿고 따를 뿐이었다. 어떠한 결과를 불러오든, 스스로가 판단한 것이라면 그 후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 망설이지 않는다. 



     소녀가 넘기던 책장을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따라 넘기며, 남자는 휙휙 문장을 읽어내렸다. 



     『... ... 불을, 구름을 들여다봐. 그래서 예감이 떠오르고 영혼의 목소리가 말을 시작하면 그것에 몸을 맡겨 버려. 그것이 선생님이나 아버지 또는 어떤 신의 마음에 들까 어떨까를 물어선 안 돼. 그런 물음은 널 망쳐 놓을 거야.  ... ... 』



     그녀는 충동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결단코. 허나 그녀는 스스로가 결정한 것에 흐림 없는 존재였다. 그것이 설령 신이라 하여도, 그녀는 스스로 믿는 길에 대해 안타까워 하면서도, 송구해 하면서도 그것을 포기한 법 없었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 안의 작은 목소리가, 조금 간질간질하고도 푹신한 그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지금 네가 내린 답, 그것이 옳다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푹신푹신한 기분. 그리고 그것을 아늑히 뛰어넘는 - 마치 장님이 처음으로 눈을 떠 보게 된 태양빛처럼 찬란한 그 기분을, 그 순간을. 그 감각에 온 행동과 믿음을 맏기면서도, 그녀는 그녀인 채 있을 수 있었다. 그녀는 파라락 책장을 조금 더 빨리 넘겼다. 분명, 이 즈음 어딘가.



     남자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구절에 익히 동의하는 바였다. 그런 물음은 사람을 망친다. 물론 그 또한 인간의 모습일지니 즐겁지 아니할 것 없고 당연하지 아니할 것 없었으메, 적어도 그 자신이 가진 의견은 구절과 같았다. 스스로가 말한다면 그것에 따라 멋대로 하면 그걸로 좋다. 그 뿐인 일이다. 



     『... ... 그 무엇도 두려워해선 안 돼. 영혼이 원하는 것은 그 어떤 일도 금지해서는 안 돼! ... ... 』



     시간은 촉박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시에라는 문득, 너무 많이 그녀가 넘겨버린 것을 깨닫고는 다시 책장을 앞으로 넘기려 했다. 그러나 문득 꽂히듯 눈에 든 그 구절에, 무심코 순간 손을 멈추었다. ... 살짝, 살짝 꽃잎 같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여직 경험해 본 적 없는 '감정'. 알 수 없는 '미지'. 전혀, 전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오히려 그녀이기에 그러한 사소한 것이 두려웠다. 여직 안 적 없었던 그것이 못내 몸에 떨렸다. 하지만 분명히 스스로는 알고 있다. 그녀 자신이 '의식'하지 않아도 그 속 어딘가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까. 바라고 있노라고. 그렇다면, 그렇다면. '마음'이, '혼'이 오롯 원하는 것을 그녀 '의식'이 막아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막아서는 아니 되며 또 막을 수도 없는 일. 그녀는 다시 한 번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펜을 잡은 손가락 끝에 살짝 힘을 주었다.



     문득, 남자는 빠르게 책장을 넘기던 중, 그가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하나를 건너뛰어버렸다는 - 동시에 두 장을 넘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책장을 앞으로 넘기기 전, 문득 눈에 든 구절을 그는 가벼이 훑었다. 그 무엇도 두려워해서는 아니 된다. 영혼이 원하는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 금지해서는 안 되는 것. 과연, 그와 술래잡기를 하는 소녀는 이 구절을 알고 있을까. 아니,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리고, 그는 단번에 확, 앞을 펼쳤다.



     『... ...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 』



     그녀는 페이지를 날듯 넘기던 손을 멈추었다. 지금, 비록 자그마한 그녀의 것일지라도, 그녀는 여직 살아 온 세상을 깨뜨리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세계를. 믿고 알고 바라고 살아온 세계를. 과연 그녀의 행동은 어디에 도달할까. 이 깨진 세계 밖으로, 그녀는 어디에 닿을 수 있을까. '지금'의 그녀로서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펜을 든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매끄러운 잉크가 종이에 닿아 적셨다.



     남자는 구절을 읽었다. 문장 속의 작은 새가 마치 새하얀 소녀와 같다는 감상을 하며, 그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직감적으로, 만약 또 한 번 무언가 적혀 있다면 그것은 이 곳일 거라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순간에 그래왔듯, 그는 이번에도 옳았다.





아저씨. 전 행복의 참된 비법을 찾았어요. I've discovered the true secret of happiness, Daddy,

그 비법이란 바로 '현재'를 사는 거에요. and that is to live in the now.





03/



     키다리 아저씨. 이건 또 귀여운 선택이었다. 남자는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맺히는 것을 느끼며 나긋 발걸음을 재촉했다. 고아원에서 자란, 재능 있고 밝은 여자아이가 후원자 - 미래의 남편이었지만 - 에게 보내는 편지 묶음글. 그는 우아한 놀림으로 손을 움직여 얇은 책을 꺼내었다. 후응, 매력적인 시에라, 당신은 이 책에서 무슨 말에 무엇을 남겼을까나. 그는 이번에는 다소 여유로운 자세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 ...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여자아이들을 많이 알아요.  그 애들은 행복에 익숙해진 나머지 행복을 느끼는 감각이 무뎌져 버렸지만, 전 매 순간 제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느낀답니다.  그리고 아무리 속상한 일이 생겨도 그 사실을 잊지 않을 거예요.  그 일을 재미있는 경험이라 여기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내가 어떤 하늘을 이고 있든, 나에게는 모든 운명과 맞설 용기가 있다.' 는 말처럼. ... ... 』



     소녀는 스스로가 행복한 존재라 자각하고 있었다. 아니, 한없이 자비롭고 긍정적인 그녀의 성정에 맞춘 관점이 아니더라도,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그녀는 행복한 인생을 산 부류에 속하고도 남았다. 하여 그녀는 매 순간 모든 것에 감사하고 또 모든 것이 은혜롭다 믿고 있었다. 허나 주디 애버트의 말은 그름이 없었다.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감각이 무뎌진 사람들은, '이 시대에는' 너무도 많았다. 그럼에도 또, 분명 그것을 깨닫고 그 순간순간의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 또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녀는 읊조렸다. 설령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 설령 그것이 슬프고도 속이 상하고 애타는 일이라 하여도 그녀가 행복한 사람이란 것은 잊지 않겠노라고. .... 무엇보다도, ... .... 그녀는 무심코 귓불이 화끈 달아오는 것을 깨달았다. ...허나, ... 그래. 무엇보다도, 지금 이 세상에서는, 그 사람이 존재하기에, 그것만으로도 그 무엇보다 행복한 일이노라고.



     솔직하게 말한다면, 아주 조금은 의외였다는 것을 남자는 부정하지 않았다. 책장을 넘기다 눈에 든 구절을 보고는. 보통 행복 속에서, 무른 세상에서 자란 사람들이 스스로의 세상에 대해 감사하는 것을 잊고 자신의 행복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절대 다수란 것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그 정점이라 해도 좋을 소녀가 그리 모든 순간 감사를 잊지 않는 것에 대해 예상 외라 생각했었다. 허나, 그것은 결코 기분 상하는 의외로움이 아니었다. 그는 계속 책장을 넘겼다.



     『... ... 어떤 일이든 간절히 바라고 그것을 이루려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결국 이루어지게 되는 법이에요. ... ...』



     시에라는 그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다. 또, 만약 거기에 자신이 무언가 보탤 수 있다면, 누군가 그 길에 손을 잡아주길 바란다면 무엇 하나 아끼는 일 없이 오롯 마음 다해 손을 내밀었다. 분명 당장은 괴롭고 입에 쓸지라도, 분명히 분명히 언젠가 그 끝에는 바라는 것에 닿으리라고.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믿는 그것은 지금의 그녀를 조금 자신 없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왔다. 노력. 노력. 노력. 자신이 지금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대해 그녀가 무엇을 노력하였고 또 얼마나 그것을 바라는지 감히 판단할 자신이 없었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는 그녀는 결코 아니었으나, 말했듯 이것은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다. 처음 겪는 일. 처음 가지는 감정. 처음 닥친 상황. 아는 것 없이 낯선 것 투성이 속에서, 아무리 그녀라 하여도 평소와 같이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수 있는 가능성은 지극히도 낮았다. 무으, 그녀는 작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만약, 만약, 자신의 바람이, 마음이 부족하고 또 노력이 적어 닿지 않는다면...



     눈에 띈 문장에 잠시 책장을 멈춘 레이시안은 잠시 알 듯 모를 듯한, 허나 무엇인가 만족스런 듯 보이는 미소를 슬쩍 삼킨 채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 ... 인생에서 정말로 의지력이 요구되는 시기는 엄청난 역경을 겪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위기를 딛고 일어서야 한다거나, 처절한 비극을 겪을 떄에는 누구나 용기를 갖지만, 일상의 사소한 좌절들을 겪으면서 웃을 수 있는 여유에는 정말로 대단한 의지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 ... 』



     맞는 말이었다. 그것은 또한 시에라가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갖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들은 살아간다. 비록 조금의, 아주 조금의 안타까운 선택을 . 슬픈 길로 몸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을지언정, 그들은 살아왔고 버텨왔고 또 앞으로 나아왔다. 그것이 역사란 것. 그들이 살아 온 이야기. 시에라가 못내 너무나도 좋아하고 애잔하고 또 사랑스러워하며 존경하는 '살아가는 이야기'. 허나 지금은 단지 그 마음만으로 찬탄을 마지않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아주 조오오오금이지만, 두려웠으니까. 과연 그녀는 이 선택 후, 어떠한 결말이 나오든 똑같이 행동하고 똑같이 반응하고 똑같이 대하고 똑같이 생각할 수 있을까. 행동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걱정 또한 없다면 그는 거짓이었다. 되새기듯 그 구절을 세 번 반복해서 읽은 시에라는 곧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 괜찮아. 왜냐하면────



     레이시안은 글을 쓰려다 만 듯 동그랗게 얼룩으로 채운 페이지의 구석을 보고는 살짝 손가락 끝을 대었다. 자세히 보니, 쓰려다 만 것이 아니라, 잉크 자국마냥 흘린 - 혹은 우연히 묻은 것에 가까워 보였다. 그녀가 이 페이지에서 우연 멈추어 읽은 구절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의 성품이라면, 당연히 이 부분이리라. 레이시안은 마저 페이지를 넘겼다. 이런, 거의 끝나가는데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설마, 이 책이 끝인 걸까? 그건 아닐 터였다.



     『... ... 우리는 이제 거짓으로 꾸민 것이 아니라, 정말 진짜 서로의 것입니다. 제가 드디어 누구의 것이 된다는 것이 야릇하지 않아요? 제가 누구의 것이 된다는 것은 아주, 아주 달콤한 듯합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을 잠시도 섭섭하게 하지 않을 거에요. ... ... 』



     시에라는 재빨리 손을 움직였다.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면, 아니, 적어도 그녀가 평소와 같이 침착했더라면 그 옆의 구절들을 읽어 볼 여유 정도는 있을 터였지만, 지금의 그녀는 못내 떨려 스스로를 간신히 추스리기에도 바빴다. 페이지의 내용을 읽을 새도 없이...



     결국 닿은 것은 마지막 페이지. 딱히 마음에 드는 구절을 찾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조금 두서 없이 바삐 움직이던 탓이었을까. 예상대로, 흐르는 글씨체로 적힌 무언가를 읽기 전 레이시안은 문득 그 바로 옆의 본문에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는 두 번, 눈을 깜빡이고 빙그레, 입가를 끌어올렸다. 시선을 다시 돌리고는───





이것이 그런 얄팍한 기분이라면, 소네트 한 편을 지으며 모조리 메말라 버리겠지요 

But if it be only a slight, thin sort of inclination, I am convinced that one good sonnet will starve it entirely away





04/



     레이시안은 잠깐 그 책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야 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서도. 그것은 여직 다른 두 권의 책 - 헤세의 데미안과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 - 에 대한 힌트로 소녀가 남겨두었던 것에 비하면 지극히도 사소한 부분의 발췌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떠올리지 못할 리가 없었고, 레이시안은 방금 온 쪽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또 움직여 근사한 하드 커버의 책을 꺼냈다. 오만과 편견, 인가. 꽤 철학적인 제목과는 연관이 있는 듯 없는 듯,  그는 나붓 책을 펼쳤다.



     『... ...우리는 자기가 무얼 봤는지 제대로 설명도 못하는 여행자는 되지 말아요. 우리가 갔던 곳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훤히 꿰고 있어야 해요. 호수와 산과 강이 머릿속에서 마구 뒤엉켜서는 안 돼요. 어느 곳의 경치를 묘사할 때도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면서 말씨름을 해서는 안 되죠. ... ...』



     시에라는 문득 귓불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기가 무얼 보았는지, 그녀는 단 하나의 틀림 없이 그대로 묘사할 수 있었다. 생전부터 지금 이 현세까지. 그대로 그릴 수도 있었고, 마치 직접 보는 것처럼 묘사할 재간 또한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녀 생전의 세상을, 지금 이 세상을, 그리고 그녀가 지금 떠올리는─── 그녀는 재빨리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귀에서 증기 기관차 같은 연기가 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법한 기분이었다.



     『... ... ──그래서 두 사람의 일에 편견과 무지에 사로잡혀 있었어. 이 순간까지도, 나는 나 자신을 너무나 몰랐어. ... ... 』



     그랬다. 그녀는 자신을 몰랐다. 아니, 솔직 말하자면 아직도 전부 다,는 알 수 없었으며. 생전에 이르러서는 거의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다른 것들을 아무리 쉬이 안다 하여도 그녀 자신만큼은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살짝 입을 앙다물었다. 사슴 같은 흰 목으로 살짝 꿀꺽. 조금씩이지만, 더 알게 되었어. 지금은, 조금씩이지만 더 알아가고 있어. 나를. 가족을. 사람을. 그리고, 너를. 

     다시금 잠시 전 하던 걱정이 머릿속에 슬그머니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천천히 소리를 내어 읊조렸다. "괜찮아, 괜찮아. ...왜냐하면," 

왜냐하면, 어째서, 그렇냐면───



     『... ... 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랍니다. 이전에 그렇게 말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저만큼 행복하지는 않을 거에요. ... ... 』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이 기분이. 

그것만으로도 꿈만 같이 행복하니까.





그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05/



     레이시안은 잠시 생각했다. 흔하다면 흔하다고 볼 수도 있는 구절이었으므로. 허나 그는 가만 생각했다. '그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 그리고 그 말을 쓴 소녀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인지. 약하디 약하지만, 꺾이지 않는 당신이라면, 무엇을 몰랐고─── 그리고 그는, 제목 없는 책을 꺼내었다.



연꽃 피던 날,    

마음은 헤매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내 바구니는 비어 있는데   

나는 그 꽃을 찾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여행을 떠난 어린 소녀의 이야기가 적힌 책. 잃어버린 것을 찾으러 가는 작고 소박한 모험이었다. 얼음성에 붙잡힌 친구도, 백 년 잠든 공주님도 아닌, 여자 아이 자신도 모르는 - 하지만 무언가 중요한 것이라고만 알고 있는 그러한 것을 찾아. 아름다운 하늘이, 향긋한 꽃밭이 폭신폭신 펼쳐진 길이었음에도 보지 못하고. 누구보다 행복한 세상이메도, 행복한 사람들이 소녀 주변에서 웃으며 손을 내밀어주고 또 소녀가 그 손 함께 잡고 웃어주는 걸 바라는 것을 모르고.




때때로 슬픔이 나를 찾아왔고   

나는 꿈에서 깨어나   

남녘 바람에서 불어오는 한 줄기   

감미로운 향기를 맡았습니다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 그런 것을 찾으러 다니면서도, 소녀는 문득문득 그것이 슬퍼져 울었다. 우는 이유는 그녀조차 알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이 찾는 것을 자신이 아직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이는 생각했다. 여행길 내내 아이는 자그마한 꿈들을 꾸었고 문득문득 또 진주알 같은 눈물을 한 방울 도르륵 흘렸다. 어째서일까, 어째서일까. 아이는 문득, 마치 누군가 밀어주는 것처럼 따스하고 상냥한 바람이 감싸는 것을 알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보내 주신 바람일까. 착한 아이는 지쳐 힘이 빠진 무릎을 비틀거리면서도, 곧바로 일어섰다. 그렇게, 아버지가 보내 주시는 바람에 싸여 따라가는 길에서 아이는 이번에는 마치 꽃바람 같은 달콤한 향내음을 맡았다. 



그 아련한 감미로움은   

내 가슴을 그리움에 고통스럽게 했고   

그것은 내게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여름의 뜨거운 숨결로 느껴졌습니다   



     여태까지 안 적 없었던 달싹한 향취지만 어쩐지 아팠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다 까진 무릎을 감싸쥐고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점점 더 힘들어진다는 건, 분명히 좋은 신호일 테니까. 남쪽 바람이 밀어준 것은, 분명히 내가 바른 길로 가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아이는 한여름 태양의 뜨거운 시선 아래에서도 천천히 천천히 걸었다. 너무너무, 몇 번이고 못내 쓰러져 버리고, 몇 번이고 못내 돌아가 버릴까, 란 생각이 들 정도로 아픈 길이었다. 처음에는 전혀 이렇지 않았는데, 점점 더, 발도 아프고, 무릎도 다리도 쓰렸고, 무엇보다 숨 쉬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 길이었다. 혼자서 혼자서 계속 걷던 아이는 결국 주저앉았다.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하지만 아이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이는 꿈에서 본 것들을, 꿈에서 본 풍경을, 꿈에서 본 사람들을 언젠가 보길 바라며 다시 일어섰다. 강을 지나고, 계곡을 건너, 야트막한 산의 오르막을 올라가던 아이는 심호흡을 하고 뒤를 돌았다. 많이 올라왔겠지. 얼마나 왔을까. 그리고 아, 하고. 아이는 짧게 숨을 멈추었다.



그것이 그렇게 가까이 있었음을   

그것이 내 것이었음을   

이 완벽한 감미로움이 내 자신의 가슴 속에서   

꽃피었던 것임을   

그 때는 정녕 알지 못했습니다   




     뒤에 펼쳐진 것은, 아이가 살아온 마을과 그 주변일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작은 마을이, 아이가 살던 세계는.

아이가 꿈에서 보고 좇던, 그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이야기는 끝났다. 아이는 웃었다. 그리고, 그 밑. 그 밑, 페이지 구석. 자그맣게 씌어진 몇 글자. 아마도 소녀가, 무진 애를 써서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그, ... 정말로, 정말정말. ...' 지우고 또 지운 끝에,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간신히 적어낸 서툴지만 오롯한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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