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긔엽긔는 거꾸로 해도 긔엽긔

로하 2013.06.19 10:24 조회 수 : 0





Prologue/





──세계가 통곡한다. 아비가 자식을 베고, 자식은 아비를 베려 들고. 결국 그 심장에 시퍼런 창날을 꽂아넣은 왕은, 그저 하릴없이

멍하니. 비척이며 쓰러지는 아들 : 언제나 충실했고, 남모르는 곳에서도 성실함을 잃지 않았던,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단 한 명의 아이는

원망하는 빛 한조각 남기지 않은 채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무엇보다 소중한 그의 기사들을 잃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그의 왕국이 휘청였다.

이제는. 결국은.


아비의 손으로 자식을 거두게 하는구나.


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왕이었고, 눈 앞의 청년 - 오히려 소년에 가까울 정도로 곱상하고 아름다운 - 은 왕국의 반역자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늠름한 모습으로,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심한 상처에도 굴하지 않고 곧게 눈 앞의 역신을

내려보았다. 애간장이 녹아내렸고 숨이 가빠오고 귓가에는 비명만이 울린다. 그러한 그의 심정을 이해한 것일까, 보지 못한 것일까.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는 자식은 없다. 그것을 알고는 있으면서도, 왕은 우뚝 선 채 땅 위에 바스라지는 검은 머리칼을 바라볼 뿐이었다.

제 어미를 닮아 흐르듯 반짝이는, 마치 갓 번데기를 찢은 나비인 양 파들거리는 붉디 붉은 눈동자를 볼 뿐이었다.


그리고──


왕은 분명히 보았다. 아이의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를, 안도한 듯 살짝, 아주 살짝 휘어진 홍옥의 눈매를. 그리고 그는 이해했다.

어째서 그는 창을 들어 아이를 거두었는가. 어째서 아이는 이러한 비극을 일으킨 것인가.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야말로

손끝을 떨기 시작한 그는 재빨리 힘을 주었다. 떨림을 지우고, 흐느낌을 잠그고 다시금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이상의 왕, 그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주 살짝이었지만. 몰래 눈물이 맺힌 소년의 입가에 미소를 들려주기에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렇게. 마지막이 울렸고. 


비로소 왕의 발밑이 젖기 시작했다. 흔들림 없이 서 있었건만, 쉴 새 없이. 비는 내리지 않았음에도, 촉촉하도록. 



『후회하는가, 왕이여?』


그렇다. 그렇지 않을 리가 없다.


『바꾸고 싶은가, 왕이여?』


바꿀 수 있다면, 묻는 것은 우문.


『설령 그대가 이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해야만 한다고 해도?』


바꿀 수만 있다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성배의 왕은 바랬다. 그대의 행복을.』

『승천의 기사는 바랬다. 그대의 영광을.』


『그대의 소망은 이루어지리니.』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것이 끝이었다.







00/





'그녀'는 '그'였다.

'그'가 스물 넷의 나이로 적의 왕을 사로잡을 때, '그녀'는 열 일곱의 첫 출진으로 왕을 사로잡았다.

'그'는 자랑의 기사라 칭송 받았으며, '그녀'는 궁정의 하나뿐인 꽃이라 찬미받았다.

'그'는 왕의 믿음직한 큰아들이었으며, '그녀'는 왕의 네 아이 중 하나뿐인 딸이었다.

'그'는 훗날 병사했고, '그녀'는 열 일곱의 나이에 병으로 요절했다.


그것 뿐인 이야기였다.





*          *          *





'에드워드 플랜테저넷'은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잉글랜드의 왕자였다. 불과 십대 후반의 나이에 칠 년째 계속되는 전쟁에서 적의

왕을 생포했으며, 그마저도 탄식하고 매혹당한 완벽한 기사. 그 무예는 기사로서, 전략은 지휘관으로서 흠 잡을 데 없었으며, 자신의 영지는

백성이 괴로운 일 없이 훌륭하게 통치했다. 왕을 존경하고 기사를 공경하고 레이디를 존중하고 백성을 소중히 여기는. 이를테면 이 전란

속에서 그는 이상적이라 해도 좋을 통치자였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능력만큼이나 눈에 띄었던 것은 그 외모. 


아름다운 금빛의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뜨려, 이미 사교계의 레이디들마저 부러워할 모양새였으며, 최근 몇 년간은 최측근 기사, 

심복과 왕을 비롯한 극소수의 사람들 밖에 '제대로' 본 적 없는 미모는 바꿔치기 당한 아이인 양 섬세한, 마치 요정의 그것 같았다. 손은 

무기를 잡는 남자의 강건한 것이라기보다는, 섬섬옥수라는 비유가 어울릴 법하게 하얗고 고왔으며, 어깨도 허리도 한 팔에 감기고도 남을 

만큼 가녀렸다. 이를테면, 그는 남자답게 잘 생긴 것과는 극의 반대로, 마치 소녀와 같이 아름다운 쪽이라는 것이다. 


그를 갑주 차림으로, 그것도 먼발치에서밖에 본 적 없는 일반 민중이나 평기사들, 군사들이 그것을 잘 눈치 챌 일은 없었고, 

그나마 조금 그를 본 적 있었던 이들 또한 그가 얼마 전, 푸와티에에서의 전투 전 매우 크게 앓았다는 것 - 그리고 그 병으로 그들은

궁성의 꽃 또한 잃었다고 - 을 알고 있었기에, 그 후유증으로 다소 마르고 가늘어진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애당초 지금처럼 아름다운

소녀 같지는 않았지만, 그 전의 왕자 또한 곱상한 미인이란 표현에 적격인 생김이었으니까. 물론 손 크기 같은 것은 달랐지만, 그런 것을

알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 아무도 없었다.


현재의 '에드워드 플랜테저넷'이 '프레데린 마르그리트 빅토리아' 란 이름의 소녀였다는 사실은.







01/





소년은 헤매고 있었다. 그는 분명 오랜만에 돌아온 윈저의 궁성에서 아침의 조례 보고를 마치고, 자신의 집무실에서 공무를

하던 중, 다소 피곤함을 느껴 궁 내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을 터였다. 프랑스 남부의 영지라면 훨씬 더 온화한 기후였겠지만, 

험한 섬의 왕도에서는 이 정도 날씨만 되어도 좋은 날이었다. 그렇게 그는 모처럼의 사치를 부리는 기분으로, 약간은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던 중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이 곳은 어디란 말인가. 


연못과 수못이 다소 제멋대로 자란 듯 놓인 듯 싶으면서도 제대로 관리가 되어 있던 시월 말의 정원에서, 그는 천천히 산책

하고 있었고. 순간 강한 바람이 몰아쳤고, 그는 그저 가을 특유의 조금 거센 바람이라 생각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발을 옮겼었다.

주변의 풍경이 어쩐지 묘하게 달라진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옮겼다. 기분 탓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 


이 곳은 윈저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나 캔터베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프랑스의 영지 어느 곳에도 이러한 곳은 없었으며, 잉글랜드 - 웨일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여기는 어디인가. 자신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던 것인가. 짐작가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그저 가을 탓이리라

여겼던 그 바람. 그는 마술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소양 정도 밖에 없었지만, 상황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공간을

어떻게 엮고 섞어 버려 마치 미로 같은 것을 만든다는 마술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러한 간섭 없이 그저 생긴 일은

아닐 터였다.


아무리 보아도 정원 에서 마치 길을 잃었다는 듯 헤매이는 소년은 당장 다른 누군가가 보았다면 수상한 자라 경계 받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한동안 그는 아무와도 스치지 않았다. 적어도 가까이서는. 멀찍이,였다면 소년이 입고 있던

고급품의 의복과 분위기, 걷는 모양새 따위에 궁을 처음 방문한 고위 기사나 귀족의 영식이라 생각될 법도 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운도 여기까지인지, 소년은 멀찍이서 또각거리는 구둣굽 소리를 듣고는 시선을 돌렸다.


꿀을 탄 듯 진한 금빛의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구불거리며 물결쳤고, 드레스는 화려하지만 사치스럽다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키는 소년보다 한 뼘이 조금 덜 되게 작았으나, 외모나 분위기는 그보다는 분명히 성숙한 여성의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금빛 머리칼을

장식한 티아라. 어지간한 귀족이나 기사의 레이디는 얹을 수 없는 상등품이다. 자아, 어쩌면 좋을까. 소년은 순간 망설였지만 곧 가볍게

손끝에 힘을 주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그저 계속 걸으면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으며, 시간이 흐르면 돌아간다는

것도 확신할 수 없다. 결심한 소년은 가볍게 숨을 들이쉰 채 여성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 쪽의 레이디,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어머?"



소년은 정중히 한 쪽 손을 허리 뒤로, 한 쪽 손을 앞으로 하여 허리를 굽혔다. 예법에 어긋나기는 커녕, 그저 따라하는 것을 넘어서 

마치 타고난 듯, 숨을 쉬듯 하는 모양새였다. 낮게 묶은 금빛 머리카락이 살짝 사락,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흘러내렸다. 온화한 미소를

띈 채 인사를 마친 소년은, 곧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흠 잡을 데 없이 예의바르고 깍듯한 태도였지만.



"...귀부인께서 어디의 누구신지 감히 모르는 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허나, 이상한 말이라는 것은 저 또한 알고 있습니다만. 이곳이 

어디인지 부디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처음보는 분이시군요. 혹시 새로 서임받으신 기사.... 네?"



소년의 말에 여성은 동그랗게 눈을 떴다. 빛 진한 군청색의 푸른 눈이 거울처럼 맑았다. 소년은 여전히 정중하게 눈을 내리깐

채였다. 여성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톤 높은 목소리가 퍽 고와, 마치 금계작을 연상

시켰다.



"...설마 정말로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시는 건가요?"



소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제사 내리깔았던 눈을 곧게 떠 여성을 마주보았다. 산호색, 이라고 해야 할지, 남쪽

바다의 색이라 해야 할지, 혹은 여름 하늘색이라 해야 할지 모를 녹빛 띈 푸른 눈동자는 맑고 아름다웠고, 분명히 곤란함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싶은 느낌이었다.



"....."


"...아무래도 알 수 없는 마술, 에 휘말린 듯 싶습니다만. 도저히 이 곳은 저의 기억으로는 떠올릴 수 없는 곳이기에."


"혹시 출신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을 갖고 계신가요?"


"..아."



그는 잠시 망설였다. 가장 쉽고 확실한 것은 단도를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레이디에게 날붙이를 잡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는 잠시 실례, 라 중얼거리고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화려한 금사의 자수와 가문의 문양 - 세 마리의

사자 - 가 새겨진 왕가의 것이었다. 



"...과연. 명가의 자제분이신것 같군요.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당치도 않은 말씀을. 오히려 제대로 된 예도 갖추지 않고 다짜고짜 물은 제 쪽이야말로 송구스럽습니다."



여성은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했고, 그에 소년은 몸 둘 바를 몰라하듯 더욱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런 소년을 보고 살짝 미소를

띈 여성은 선선히 입을 열었다.



"마술에 휘말렸다, 고 하셨죠."


"네. 부끄럽지만..."


"이곳은 카멜롯. 위대한 아서 왕과 기사들이 수호하는 영광의 도시입니다."



소년은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카멜롯? 카멜롯?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그것을 모르는 그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릴 적부터 그들의 전설을 자신의 아이들에게 들려주었으며, 결국 또 다른 기사단 - 천 년 가까이 계속 이어지며 고국을 지키거나,

이름을 드높인 이들이 작위를 받는 - 을 만들었고, 그 주인은 소년이 되었으니까. 각설하고,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전설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물론 흔적으로 추정되는 것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뿐, 그 이야기가 완전한 현실이라고 가정하기에는 너무나 증거가 적었고,

불분명했으며, 오히려 신화시대의 내용에 가까운 이야기였으니까. 소년은 눈을 깜빡거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 카멜,롯. ..이라면, 아서 왕, 과 원탁의, 기사들..의 카멜롯,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어머, 알고 계시는군요."



소년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확답을 들어버렸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소년 본인은 어쩐지 타인들로부터 기사의 귀감이라는

둥 그러한 찬사를 받지만, 스스로가 거짓말쟁이란 것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갑자기 이런, 진짜 기사들의 곳에 와버린 것이 영 편치만은

않았다. 그것과는 별개로, 어린 시절부터 듣고 동경하고 자란 이들이 지금 그가 딛고 서 있는 곳, 그 땅의 어딘가에 함께 있다는 것은

마치 어린 시절의 꿈이 이루어진 것과 같은 기분이었기에. 특히나, 열 일곱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성 밖으로는 나가본 적 없는 새장 속

새와 같았던 아이에게는 그야말로 꿈과 같은 것이었기에.



"──에에. ...그렇다면 고귀한 레이디께서는 이 성의 왕비님이십니까."


"고귀한... 그렇게까지 높이시지 않아도 된답니다."



겸손한 대답이었으나, 그 찬사가 싫지는 않은 듯 여성은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상당히 마음에 든 것일까, 조금 기쁜 듯한

얼굴로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네. 제가 기네비어예요. 아, 마술에 휘말려서 갑자기 이런 곳에 오셨다니 당황스러우시겠죠. 멀린 님을 불러드릴까요?"



멀린이라니! 이쯤 되면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무엇인지 헷갈리기 시작했음에도, 소년은 자세를 흐트러뜨리는 일 없이 다시금

꾸벅 절했다. 



"....부디, 그렇게 해 주신다면 더없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를 따라오세요. 갑자기 외적으로 오해받아 공격당하시기라도 하면 곤란하겠죠?"


"──은혜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례를 무릅쓰고, 부탁드립니다."



깊게 절한 소년을 보며 다시금 가볍게 미소지은 기네비어는 몇 발자국 앞서 걷기 시작했다. 레이디 - 거기에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 의 바로 옆에서 걷는 무례를 범하는 일 없이, 소년은 세 발자국 가량 뒤에서, 곧은 자세로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은 꽤나 복잡했다. 분명히 이곳은 소년이 어린 시절 전설처럼 듣고 자란 곳이지만, 그렇기에 그는 여기의 미래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적어도 무엇인가가 달라지지 않는 이상은. 눈 앞의 이 사랑스러운 여성은 가장 뛰어난 기사와 부정을 저지르고,

그에게 있어 꿈과 같은 이 성은 분열로 무너져내려, 그 끝은 왕의 사생아가 일으킨 반역. 복잡한 심정이었다. 그런 소년의 생각을

자른 것은 왕비의 고운 목소리였다.



"...아, 그러고보니."


"예?"


"어쩐지 제가 누군지 한번에 알아보신듯한데, 어떻게 알아보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꽤나 장난스러운 웃음이었다. 소년은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툭,툭,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로서는 그다지 이상할 것 없는

내용이었지만, 과연 다른 사람이랄까, 듣는 입장에서 납득할 수 있을까.



"...입고 계신 드레스의 모양도 재질도 보통의 평기사나 하급 귀족위 가문의 레이디가 입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머리카락 

위의 티아라 또한 마찬가지. 거기에 이러한 성에서 안내인, 혹은 다른 감독역 없이 다닐 수 있는 여성이라면 한정되어 있겠지요.

거기에 ... 분위기 탓, 까지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호호, 그런가요?"



아무래도 상대는 납득한 것 같았다. 드레스나 티아라의 건에 대해서는 다섯 살 때부터 배워 온 작법의 일환, 성 운운한 부분은

성을 자신 아래에 두는 그의 신분 탓에 전혀 어떠한 과정도 없이 바로 떠오른 생각. 분위기는── 역시 사람을 파악하는 데 빠르고

능숙해야 하는 그의 직위 상, 이라고 해 두자. 그보다는 본디 타고난 것이라고 하는 게 더 옳았겠지만. 아무튼, 기네비어의 말에

소년은 가볍게 미소지은 채 목례했다.



"사실 폐하의 사촌누이분들도 가끔 이곳을 찾아오시거든요. 분위기탓이라고 하니, 어쩐지 굉장히 기쁘네요."



사촌 누이라면, 모건 르 페이 - 혹은 모르가나라 불리는 여성과 그녀의 자매들인가. 원탁을 무너뜨린 것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해도 무방한 여성들의 언급을 듣고, 소년은 매우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으나 그 뿐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조금 더 알아보기로 했으니까.

함부로 행동하고 판단할 것은 되지 못한다.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부왕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만 해도, 그와 다른

수십 수백 가지의 이야기가 존재했다. 소위 말하는 같은 소재의 다른 판본. 사소한 것이라도 달랐던 이야기들은 얼마든지 있었으며,

개중에는 제법 굵직한 사실조차 달랐던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감정 같은 것은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 아니, 애당초 최대한 가지지

않는 것이 좋다. 스스로 보고 판단하고 확인하기 전에는 섣불리 어떠한 것도 드러내고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꽤 침착하고

신중한 지휘관에 걸맞는 사고 방식이었고, 그것은 소년에게 어떠한 문제도 없이 적용되는 것이었다. 물론 결정을 내렸을 때의 당돌함이나

추진력은 별개의 일이었지만. 푸와티에의 역전을 이끈 도박은 보통의 지휘관이라면 힘든 결정이었던 것이다.



"사실 외부인께 함부로 궁의 구조를 알려드려선 안되지만... 다른 기사들께는 비밀로 해드릴게요."



장난스럽게 한 쪽 눈을 찡긋한 왕비는 퍽 귀여운 모습이었다. 물론 소년이 별다른 감정을 가질 일은 없었지만.



"...라고 했는데, 어머나."



기네비어는 발을 멈췄고, 그 뒤를 따라 소년 또한 즉시 걸음을 멈췄다.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린 소년의 눈에 들어온 것은 금발

벽안을 가진 장신의 남성이었다. 반듯하게 잘 생긴 외모는 아마 동화 속에 나오는 이상의 왕자님일까. 왕자님?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소년은 그가 누구인지 대강 알 듯한 느낌이었다. 기네비어가 그에게 인사를 건네기 전임에도.



"폐하. 안녕하십니까."



기네비어는 고개를 숙이고, 드레스의 양쪽을 살짝 잡고 들어올리며 우아하게 절했다. 



"그렇게 예를 차리지 않아도 되는데, 기네비어. ...응? 뒤에 있는 사람은...?"


"...저는. ..."



기사왕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아차, 소년은 살짝 곤란한 듯 입매를 오므렸다. 여기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 더 나은 

선택일까, 그가 고민하는 사이, 기네비어는 종종걸음으로 왕에게 다가가 속닥속닥 설명했다. 폐하, 실은...



"..마술이라...."



설마, 납득해주지 못한 것일까. 아서왕은 여전히 조금 고개를 갸웃한 채 소년을 살피는 듯 싶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소년은

따라서 더욱 뻣뻣하게 긴장할 뿐.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은 어디일까. 역시 마술이라는 것일까. 너무 거짓말 같았

을까.



"...헌데, 어찌하여 여인의 몸으로?"


"네?"



소년은 깜짝 놀랐고, 기네비어 역시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놀란 소리를 흘렸다. 그럴 수가. 들켰단 말인가. 아니, 지금 들킨

것은 차라리 문제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완벽한 기사의 예법을 몸에 익히고, 흔한 싸구려 설정이지만 몸의 굴곡은 붕대로 확실히

동여매었다. 역시 너무 계집애 같이 생긴 탓인가. 



"나는 기사들을 오래 봐왔지. 덕분에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구분할수 있거든. .....뭐, 사정이 있을테니 깊게 묻지는 않겠네."


".....감사합니다."


"감사까지야."



그것이 소년이 답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 대답으로 충분했달까, 그다지 큰 문제로 여기지는 않았는지 젊은 왕은 씩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그나저나 멀린을 찾아가는 길이었을텐데, 방해한게 아닌가 모르겠군. 기네비어, 그대에게 계속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네? 네, 물론이예요. 그럼 경... 레이디? 가실까요."



소년─소녀는 조금 떨떠름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곧 쓴웃음으로 바뀌었다. 



"...예, 부디. ...개인적으로는 남아,로 대해주시는 편이 마음이 놓입니다만. ...그, ...그리고, ....음. 폐하. ...초견에 무례한 말입니다만, 

비웃으실 내용이겠습니다만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 말하게."


"...그, 다른 사람들. 도 알아보리라 생각하십니까?"


"흠... 아마 수준 높은 기사들이라면 알아볼지 모른다고 생각하네만..."


"...그렇습니까."



우울하달까, 반쯤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다. 또한 사실, 이 곳에서는 들키든 어떻든 상관 없었다. 어차피

이 곳은 그녀의 땅이 아니다. 그녀의 세상이 아니다. 곧 떠날 곳이니, 상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만약 그녀의 세상에서도 알아보는 이들이

나온다면? 그저 모른 체 하지 않는다면? 물론 한 두 명이 아는 것은 비밀로 남겠으나 그런 이들이 많아지면, 그들이 의도하거나 떠들지

않아도 무의식 중에 정보는 흘러, 소문이 되어 퍼지고 퍼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그녀의 창피는 아무래도 좋다. 비웃음 당하는 것은

아마 그녀의 측근들과 그녀의 부왕. 그러한 꼴은 용납할 수 없다. 또한 무엇보다도, 군이 흔들린다. 신민의 믿음이 흔들린다. 그 병으로

앓아누운 것은 왕자와 왕녀 둘이었으나 죽은 것은 왕녀였다. 열 여섯에서 마악 열 일곱이 된 나이에 죽은 것은 마르그리트 빅토리아였지,

스물 네 살의 에드워드 플랜테저넷이 아니었다. 헌데, 지금 그 사실을 뒤집는다고? 그 때도 당장 크레시의 전투 이후로 올라가는 상승세를

지키기 위해 죽인 마르그리트였다. 살아남은 에드워드였다. 하물며 이제? 그것은 단순히 상승세를 꺾는 것 이상으로 군에 혼란을 주며,

또한 그녀의 기사도에 탄복한 적의 왕마저 모욕하는 지거리였다.


물론 마르그리트 그녀 본인도 언제까지고 가능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여성과 남성의 모습은 달라진다. 아예

늙어 나이를 먹는다면 비슷해질지도 모르나, 이제 열 여덟인 그녀는 앞으로 여성답게 더욱 피어날 날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를 위해

그녀는 조만간 이미 두 번의 결혼을 거친 그녀의 친척, 조안과 혼약할 계획이었으며 그녀의 '사촌', 즉 그녀의 피가 섞이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히 왕가의 피를 이은 조안의 아이 - 비록 그녀와의 혼약 후 만날 누군가와의 아이겠지만서도 - 를 후계자로 삼고, 그 즈음에서

남동생들인 존과 에드먼드가 이름을 높일 기회를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왕세손이 태어나고 더 젊고 어린 왕자들이 활약하기 시작할 

즈음에서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위치를 바꾼다. 현재의 독보적인 지휘관에서, 협력하는 지휘관, 명령하는 지휘관을 거쳐 공무 쪽으로

전향하여, 종국에는 집무실에 틀어박혀 사무에 매진한다.


물론 이것은 가장 이상적인 가정이었지만. 그녀 또한 이 정도로 완벽한 상황과 진행은 기대하지 않고 있으니까.



"뭐, 심려치 말게나. 다들 눈감아줄거야. 꼬치꼬치 캐물을 무례한 사람이 아니거든..... 아, ...형님은 좀 위험할지도."


"...폐하.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아요, 그 말씀."


"앗, 그렇군. 미안하네. ...헌데, 들키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예. ..일단은. ...대답에 감사드립니다."


"뭐... 기네비어의 말을 듣고보니 별로 도움이 되는 대답이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럼, 나는 이만. ...기네비어, 알고 계시겠죠. 

부탁합니다."


"네, 물론이지요."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다시 걸어가는 왕을 배웅한 기네비어는 곧바로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것저것 복잡해진

『소녀』역시 천천히 그녀를 따라 걸었다.



"이 쪽은 별로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곳이예요. 이 쪽으로 가면 안전할거예요."


"배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인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고개 아프지 않으세요?"



꾸벅 목례한 소녀가 아프지 않을까 진심으로 걱정스러웠는지, 기네비어는 조금 고개를 들며 물어보았지만 소녀는 부드러운

무표정인 채 가볍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신세를 지는 입장에서 당연한 것, 그것도 상대가 레이디, 거기에 저보다 신분이 높은 분이라면 두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흐응. 레이ㄷ... 경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제가 왈가왈부할순 없지만...아, 다 왔네요. 멀린님, 계신가요?"


"이런, 비전하. 들어오시오."


"가죠."


"..예."



문을 열고 들어가는 기네비어를, 소녀는 천천히 뒤따랐다. 부디, 돌아갈 수 있기를. 더 이상의 시간을, 이 땅에서 헤매이지

않기를. 자신의 자리를, 그 자리의 책임감을, 자신이 마저 지켜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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