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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마 2013.06.12 20:43 조회 수 : 16



  /1.


  그는 침상에 누운 채 생각했다. 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나붓이 내려앉았다가 떼어진 소녀의 입술은 가끔 원래 가야 할 곳을 잃고 그의 손 위에 떨어지곤 하는 나뭇잎보다도 가벼웠다.

  하지만 그것이─ 그 행동이 그의 마음 속에 일으킨 반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입술이 피부에 닿은 감촉이 화상을 입은 듯 아직도 선명했다. 그는 무심코 볼에 손가락을 가져가다가 그 사실을 깨닫고 다시 내렸다.

  비유하자면 한 점 파문 없는 연못에 돌을 던져 넣은 것과 같았다. 돌이 만들어낸 물결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색을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수면 가장자리까지 제 분신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는 그 물결 위에 둥실둥실 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짧지 않은 시간을 부유하던 그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어보았다. 새가 날갯짓하듯 세찬 박동.

  그는 다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는 뇌리를 꽉 채운 감정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늦은 밤이었지만 졸음은 물결에 밀려 사라져버렸는지 그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한참 후, 그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이름을 붙이는 데에 성공했다. 그는 자기자신에게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가슴이 세차게 뛴다. 긴장하게 된다. 눈을 떼지 못하게 된다.
  이 세가지 명제에서 나올 수 있는 결론은 명백했다. 왜 그렇게 길게 고민했는지 허탈해질 정도였다.

  그녀는 적이었다. 그것도 지금까지 만난 어떤 적보다도 무시무시한.







  /2.


  며칠 뒤 왕에게 기묘한 보고가 날아들었다. 왕자가 집무실에 틀어박혀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헤알드레드는 아직 나이가 어려 그의 집무실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왕자는 헤알드레드가 아니라 베오울프를 일컬음이 분명했다. 그 점은 왕의 의문을 자극했다. 왕은 말했다.



  "갑자기 농성이라도 부리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옵니다. 다만 대련을 할 때나 침수에 드실 때 말고는 문밖 출입을 아니하십니다."



  고개를 좀더 깊게 숙이며 신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러하시기 전에는 왕실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을 빌려갔다고 하옵니다."

  "책을?"

  "예. 병서란 병서는 다 가져가셨다고."



  흐음. 왕은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잠시 동안 고민하다가 왕은 물었다.



  "자네는 어찌 보는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기초부터 시작하려는 마음을 품으신 게 아닌 이상은……."



  신하는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왕자가 병서를 쓸어가듯 빌려가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왕은 그런 신하를 책하지는 않았다. 왕국에서 가장 강한 검사가 그런 행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모두가 그럴 테니까.

  흐음. 왕은 고민했다. 의혹이 생기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가 직접 찾아가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생각 끝에 헤알드레드를 보내기로 했다. 헤알드레드가 상대라면 왕자도 순순히 입을 열 터였다.






  /3.


  여느 때처럼 헤알드레드는 자신의 형님의 방을 찾았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인사를 하고, 형님이 일을 대충 마무리할 때까지 지켜보거나 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소한 잡담을 나누고 나서 본격적으로 대화에 접어들었을 무렵 헤알드레드가 꺼낸 말은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형님 형님, 요즘 형님에 대한 소문이 파다해요."



  형님이라 불린 남자, 베오울프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렌델 모자를 쓰러뜨린 일은 이미 오래 전에 유명해졌으니 저리 호들갑을 떨며 말할 만한 소재는 아니었다. 바다 괴물들을 물리친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최근에 또 누군가를 물리쳤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헌데 소문이라니, 갑자기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의 반응이 미덥지 않았는지 헤알드레드는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형님이 갑자기 이상해졌다던가, 삶에 대한 의욕을 잃었다던가, 갑자기 모든 힘을 잃어버린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구요."

  "……어째서?"

  "그야 형님, 요즘 집무실 밖으로 왠만해선 안 나오시잖아요. 병서까지 몽땅 빌려가셨고."



  헤알드레드는 베오울프의 옆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베오울프가 집무를 보는 책상 말고도 여분의 탁자가 놓여 있었으며, 평소 미결재 서류가 자리잡고 있던 그 위에는 수많은 병서들이 서로 부대끼고 앉아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헤알드레드의 손가락을 따라가 본 베오울프는 아아,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헤알드레드를 보았다.



  "저것이라면, 이미 다 읽었도다."



  그러니 전혀 문제될 것 없다, 베오울프는 그런 뜻으로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헤알드레드가 원하던 대답과는 노르만과 그들의 심리적 거리만큼이나 떨어져 있었다. 헤알드레드는 말했다.



  "형님, 그걸 물은 게 아니라구요오."

  "하면?"

  "갑자기 왜 다시 병서를 처음부터 읽는 거예요? 그것도 집무실에 틀어박히시면서. 솔직히 지금 형님의 행동에 나라 안의 전사들이 얼마나 좌절하고 있는지 아세요?"



  헤알드레드는 또다시 볼을 부풀렸다. 사실이었다. 외모가 곱상하게 생겼다 해도 베오울프는 나라에서 가장 강한 전사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병서를 탐독하는데 열중하여 꼭 필요할 때가 아니고선 방 안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다. 기초부터 다시 익히겠다는 양.

  그 소문에 전사들은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같을 천재를 마주한 범인들의 한마디, 즉 '난 뭐지'를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전사들 중에는 ─비록 아직 전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헤알드레드 역시 속해 있었다. 굳이 왕의 은근한 떠봄이 아니었더라도 헤알드레드는 결국 베오울프에게 진상을 묻기 위해, 혹은 동생으로써의 투정(?)을 부리기 위해 찾아 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베오울프는 그 나름대로 복잡한 속내를 껴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으레 그렇듯 다른 사람들의 심정은 이렇다 할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따라서 헤알드레드의 말은 베오울프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베오울프는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 보였느냐."

  "그렇게 안 보이는게 이상하죠."



  헤알드레드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표정에 베오울프는 헤알드레드를 길러낸 연장자로서의 미소가 입가에 맺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리 상대가 헤알드레드라고 해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가슴이 세차게 뛰고 긴장하게 되며, 눈을 떼지 못하는 절대 대적할 수 없는 적이 생겼도다, 그런 적은 여의 생애에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이니라, 하여 어떻게 하면 상대할 수 있을지 병서를 참고하고자 하였노라…… 어떻게 그렇게 말하겠는가?

  결국 베오울프는 기본적인 것이 제일 중요한 것 아니냐는, 그가 생각하기에는 퍽 엉성한 답변으로 헤알드레드를 납득시켜야 했다. 다행히 평소 그가 전사로서 쌓아온 명성 덕분인지 헤알드레드는 다소 시무룩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헤알드레드를 전송하고, 베오울프는 의자에 앉아 병서 더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헤알드레드에게 말했던 대로 병서는 이미 정독을 끝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읽어왔던 책이니 이해하는데 전혀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그가 찾는 적에 대한 대적법은 나와 있지 않았다.

  베오울프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책을 읽어도 없는 구절이 새롭게 생기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 사이에 병서를 읽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여간 민폐를 끼친 게 아닌 셈이었다. 베오울프는 집무를 마치고 책을 반납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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