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힣ㅣ냐ㅓㄹ미러ㅣㅁㄹ

??? 2014.03.29 01:21 조회 수 : 6



  /0.


  L'Amour brille sous les étoiles,
  D'une étrange lumière.
  La Terre entière, en parfaite harmonie,
  Vit sa plus belle histoire.

  L'Amour brille sous les étoiles,
  Illuminant leurs cœurs.
  Sa lumière éclaire à l'infini,
  Un sublime espoir.







  /1.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서 달이 밝게 빛나는 밤이었다. 모든 것이 잠든 고요함 속에서 달빛 부서지는 소리가 손에 잡힐듯 했으며, 땅은 눈을 입은 듯 하얗게 빛났다. 그 백색이 얼마나 짙은지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시에라는 풍경이 어째서 이렇게 창백한 것인지 의아하게 여겼다. 시에라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깨달았다. 차갑고 둥근 달이 그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이지러진 곳 없는 완연한 보름달. 달에서부터 뚝뚝 흘러넘치는 빛이 모든 것들을 덮고 있었다. 시에라는 한없는 생경함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차 한 잔의 물이 식었을 무렵 시에라는 고개를 내렸다. 이번에는 달빛 대신 널리 펼쳐진 꽃밭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달빛에 젖어 푸르게 빛나는 흐드러지게 핀 꽃. 이따금 부는 미풍이 꽃잎과 대를 부드러이 흔들었다.

  문득 시에라는 그 꽃들 속에 섞인 무언가를 발견했다. 동시에 그녀가 이 곳에 온 이유를 되새겼다. 시에라는 그 무언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곧 꽃밭에 누워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알던 것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달빛 때문에 유독 하얗게 보인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녀가 그의 옆에 있다면, 남자 역시 그녀의 옆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에라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남자의, 살며시 닫힌 흰 눈꺼풀이 소녀가 남자를 '마주 보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작정인가. 소녀는 입을 열려고 했다. 그리고 밖으로 흘러나왔을 터였던 그 말은 갑자기 사라졌다. 소녀는 자신이 입을 다물었음을 깨달았다. 어느새 소녀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금빛 눈. 형태가 좋은 입술에 언제나와 같은 온화한 미소가 맺혔다.



  "무슨 일……?"



  '오야'가 아니라 '무슨 일'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그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시에라는 가슴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낮의 그 일은…… 아니아니, 지금 동요하는 것을 들키면 안 되었다. 시에라는 부러 눈썹을 찡그린 채 그에게 말했다.



  "네, 네, 네가 보이지 않기에 찾아 왔을 뿐이니라. 아, 방을 비우는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라는 지적은 하지 말거라. 나도 알고 있으니까."



  남자, 레이시안은 그럼 어째서 왔느냐 묻지 않았다.



  "당신도 이곳이 마음에 든 걸까나……?"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말하려던 시에라는 다시 입을 앙다물었다. 시에라는 생전에도 제 2의 생─비록 임시라고는 해도─을 얻은 요즈음에도 진심만을 말했으며, 거짓말에 대해서는 입 속으로 굴려본 적 조차 없었다. 만약 여기서 그녀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방식을 깨어버리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옳은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 전 꽃밭을 봤을 때 매료되어 버리고 말았으니까.

  시에라는 결국 대답했다.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노라. 확실히 이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을 이 도시에서 본 건 처음이구나."


  레이시안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는는 몸을 일으켰다. 문득 불어온 실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에, 어깨에, 등에 붙어있던 꽃잎이 하늘하늘 가볍게 떨어졌다.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생각했어."



  균형 잡힌 꽃의 색깔의 입술이 약간 사이를 두고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어떨 때는 달이 없는 밤처럼 잔혹하게 그녀의 마음을 찌르던 목소리지만, 지금은 부드러이 감싸듯 시에라의 귓가에 내려앉는다. 평소보다도 달콤하고, 상냥하고, 따뜻하게. 갑자기 어째서일까. 혹시 낮에 쓴……? 아아니, 지나친 낙관은 아니되느니. 시에라는 고개를 붕붕 젓고는 입을 열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느냐."



  레이시안은 다시 미소 지었다.



  "아아, 그 쪽에서는 안 보이는구나…."



  레이시안은 손을 살짝 꽃의 바다 속에 담갔다. 시에라는 살짝 기대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문구를 적어둔 책이 나올 것이라 조금, 아주 조금은 기대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레이시안이 꺼낸 것은 전혀 다른 물건이었다. 레이시안의 유려하게 헤엄치던 손은 이윽고 묵직한 술병과 잔을 꺼냈다. 그가 보여주듯 들어올린 그것들을 소녀는 유심히 응시했다. 이국의 글씨로 덮인 라벨.



  "이것은?"

  "전통주. 꽤 좋은 게 있어서, 가져왔어."


  
  그제서야 시에라는 꽃향기와는 다른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는 것을 느꼈다. 향기롭고 맵싸한…… 술의 향기다. 시에라는 손을 들어 코를 살짝 가렸다. 본디 그녀는 술에 강하지 않았으며 당연히도 그것이 독한 술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런 시에라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레이시안이 든 병에 표시된 알코올 도수는 꽤 높았다. 지금까지 그녀가 이 향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 주변에 가득한 꽃 때문이었으리라. 시에라는 문득 어지러움을 느꼈다.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으나 어지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에라는 몸을 뒤로 당겼다.



  "머리가 아프구나."

  "당신은 술에 약하구나…."



  시에라를 보며 레이시안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는 기품마저 느껴지는 동작으로 다시 병을 내려놓고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중천에 머무는 빛을 채운 술에 담듯 들어올렸다. 만족한듯 바라보다가, 입가에 가져가 흘려넣는다. 마치 물을 마시듯 흰 목울대가 익숙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던 시에라는 문득 그가 한 가지를 잊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주지 않는 것이냐."



  입술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그녀가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토라진 기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에라는 당황하여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하지만 시에라는 그녀의 눈이 살그머니 레이시안 쪽으로 향하는 것은 막지 못했다.
  레이시안은 웃었다.



  "당신의 부탁은 거절할 수 없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해둘까."



  레이시안은 의미 깊어 보이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녀를 아이 취급하는 미소가 명백했다. 어차피 영령인 이상 보이는 나이는 실제 나이와 연관이 없거늘! 시에라는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머리 한 곳에서는 그것이야말로 어린 아이 같은 행동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동시에 떠오른 부당한 취급에 대한 항의를 해야 한다는 뜻이 그것을 눌렀다. 시에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면 내가 이 곳에 더 있을 이유는 없구나. 나는 이만 돌아가겠노라."



  시에라는 새침하게 몸을 돌렸다. 그녀를 덮은 은사가 잠깐 유려하게 흩어졌다가 다시 그녀를 감쌌다. 소녀의 발 밑에서 푸르게 빛나던 꽃잎이 소녀의 푸른 의복과 엉기다…… 가, 그 안에 삼켜졌다.






  /2.

  시에라는 그녀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히 하늘과 꽃밭을 바라보고 있어야 할 그녀의 시야는 예상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꽃들을 담고 있었다. 하늘은 온 데 간 데 없이, 오직 지상만을. 게다가 이 온기는…… 시에라는 조심조심 시선을 올렸다. 검은 웨스트와 느슨하게 묶인 넥타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시에라는 펑 하고 무엇인가 폭발한 듯한 소리를 들었다. 물론 그녀는 그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주변에 폭발음을 낼 만할 물체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시에라는 곧바로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레이시안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 보았다. 정정. 내려다 보았다.
  신장 차이로 언제나 그녀는 레이시안을 올려다 보아야 했지만, 지금만은 달랐다. 그 전까지는 서 있거나 앉아서 고개를 꺾어 그를 보았다면, 지금은 그의 위에 엎드려서 그를 내려다 보는 모습이다.
  갑작스러운 변화 때문에 충격은 좀 늦게 찾아들었다. 시에라는 머릿속이 새하얘져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하지만 시에라는 말을 맺지 못했다. 레이시안이 그녀의 어깨를 꼭 끌어안은 탓이다. 거의 공황상태에 빠져 시에라는 뻐끔뻐끔 입을 움직였다.



  "어, 어서 놓, 놓아라!"



  시에라는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바동댔다. 하지만 체구의 차이에 힘의 차이까지 더해져, 시에라의 시도는 오히려 그녀를 그의 팔 안에 단단히 붙들어매는 데에 일조했을 뿐이다.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한 레이시안에게, 시에라는 다시 소리쳤다.



  "그대는 역시 심술궂은 사람이로다!"



  레이시안은 온화하게 말했다.



  "실로 냉정한 판단. 후후… 당신 다워."


 
  그는 쿡쿡 웃었다. 배부른 고양이 같은 웃음이었다.
  고양의 앞의 쥐, 혹은 늑대 앞의 양. 문득 떠오른 글귀에 시에라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바로 지금이 그런 상황─물론 후자가 그녀고 전자가 레이시안인 상태로─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는 레이시안에게 붙잡혀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시에라는 자꾸만 불이 붙으려는 머릿속을 애써 다잡으며 어떻게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 고심했다.

  하지만 그녀가 애써 꺼뜨리려는 불씨에 레이시안은 다시 기름을 부었다. 소녀를 감쌌던 팔에 힘을 뺀─ 하지만 한층 농밀하게 시에라를 안은 레이시안은 그녀의 귓가에 고개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옭아매듯, 속삭였다.



  "……Mon petit oiseau rare, Sherra."



  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느껴지는 파급력이 다른 법이다. 그것이 듣는 사람의 이름, 즉 그 사람의 자아정체성을 결정하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레이시안이 다름아닌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는 사실은 시에라에게 그동안 예상하던 것 이상의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시에라는 또다시 펑 하는 소리를 들었다.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뜨거워졌으니까. 시에라는 (비록 그지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터무니 없이 모자라기는 했지만)지금까지 이러했을까 싶을 정도로 냉정함을 끌어모아 말했다. 



  "또, 또또또또, 시, 시, 시, 실없는 소리를…."



  레이시안은 시선을 들었다. 입가에 물들어 있던 아름다운 미소가 좀 더 깊어진다.



  "실없는 소리라니, 슬퍼. 나름의 호칭인데."

  "호칭?"



  레이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사이를 두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애칭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까나…?"



  이제는 펑, 소리가 아니라 커다란 폭음이 들린 것만 같았다. 시에라는 멍하니 레이시안을 응시했다. 그런 모습에 레이시안은 그 특유의 미소로 시에라를 마주 볼 따름이었다. 아니, 특유의 미소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다. 시에라는 문득 그 안에 섞인 다른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녀를 향한 호감일까, 흥미일까, 아니면──
  그 때 레이시안이 입을 열었다.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그는 조용히 읊조렸다.



  "There be none of Beauty's daughters
   With a magic like thee
   And like music on the waters
   Is thy sweet voice to me
   When, as if its sound were causing
   The charmed ocean's pausing,
   The waves lie still and gleaming,
   And the lull'd winds seem dreaming."



  레이시안은 빙긋 웃으며 시에라의 헝클어졌던 머리칼을 살며시 바로잡아 주었다.
  시에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가슴 속이 새하얗게 물든 듯한 기분이 들었다. 크게 충격을 받아서는 아니다. 그녀의 마음은 이제는 온화하면서도 다양한 감정으로 가득차 있었으니. 설마, 설마…? 시에라는 긴장하여 레이시안을 바라보았다.
  레이시안은 살풋 미소지었다.



  "답례가…… 아니, 대답이 되었을까나?"



  무엇에 대한 답례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기쁨, 설렘, 수줍음이 한데 섞여 빙글빙글 돌다가, 꽃이 피듯 조심스럽게 피어난다. 시에라는 문득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상한 일이다. 슬프지 않은데도 이렇게 눈가가 뜨거워지다니. 시에라는 재빨리 눈을 꾹 감았다. 이런 때에 눈물을 보이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간파했는지 레이시안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웃었다. 그가 말했다.



  "후후, 역시 당신은 새하얗네…."



  새하얗다. 시에라는 레이시안이 말한 단어에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그것을 물어볼 틈은 없었다. 레이시안이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감쌌기 때문이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윤곽을 따라 그리듯 그녀의 얼굴을 덧썼다. 그녀의 턱에서부터 볼까지, 전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천천히. 쭉 올라올 것만 같았던 손가락은 그녀의 눈 밑에서 멈췄다. 엄지로 광대뼈 부근을 매만지며 레이시안은 말했다.



  "아니, 지금은 빨갛다고 하는게 맞을지도…."



  시에라는 지금까지 그녀의 머릿속을 뒤덮었던 생각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윽. 나도 아는 사실을 더 이상 말하지 말거라!"

  "오야, 알고 있었구나. 아름다운 시에라."

  "무무읏……. 또, 또 그런……."

  "아, 더 붉어졌네…."



  시에라는 입술의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레이시안은 가해자이고 그녀는 피해자인 상황이었다. 무엇에 대한 가해자와 피해자인지는 제쳐두고서라도. 중요한 사실은 정작 피해자는 말을 못하고 가해자가 저리 천연덕스럽게 굴고 있다는 것이다.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걸 넘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시에라는 이곳에 벼락이라도 내려오지 않을까─약간은 그러길 바라며─ 생각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고요한 하늘의 모습에, 시에라는 결국 절망과 민망함과 분노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섞인 심정으로 소리쳤다.



  "그러니까, 아무리 상호 마음을 공유하는 사이라고 해도──"

  "상호 공유…?"



  시에라의 심정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레이시안은 여전히 미소지은 채 고개를 갸웃했다. 시에라로서는 정말 화가 날 정도로 천연덕스러운 모습이었다. 분명히 그녀에게 '보여주려는' 고의적인 행동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시에라는 이번에는 므믓, 하는 소리를 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화를 내는 순간 레이시안의 의도대로 될 뿐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시안의 행동은 언제나 시에라의 생각을 넘어섰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예외가 아니었다. 레이시안은 살짝 몸을 들어 고개를 숙였다. 정확히는 그녀의 목 부근에.



  "내 쪽에선, 아직 부족한데."



  동시에 시에라는 뺨을 쓸어넘기던 레이시안의 손이 목으로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피부에 닿은 서늘함에, 시에라는 언제나 옷깃으로 덮여 있던 부분이 밖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인이 무엇인지는 굳이 추론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번에는 명백한 감촉이 전해졌다.



  "……."



  따뜻하고, 부드럽고.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레이시안의 입술이었다. 마치 깃털 같이 내려앉은 그것에 시에라는 왜인지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레이시안의 행동은 불가해할지언정 적의는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하는걸까, 시에라 본인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레이시안은 안심했는지─ 혹은 애초에 그렇게만 있을 생각이 아니었는지 살짝 그녀의 목을 깨물었다.



  "……윽."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와 시에라는 눈을 꽉 감았다. 레이시안은 말했다.



  "오야, 아팠을까나…?"



  시에라는 눈을 감은채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과 달리, 그녀는 이번에는 정말로 대답할 수 없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시에라는 그저 눈을 감고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감각 중 하나가 닫히면 다른 감각은 더욱 예민해지기 마련이었다. 레이시안이 방금 전 깨물었던 곳 보다 좀더 위에 있는 피부를 입술로 어루만지는 것을 시에라는 보다 생생히 느꼈다. 조금 전보다 좀 더 세게 깨무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혀로 윤곽을 덧쓴다. 그러면서도 그 모든 행동은 마치 깨지기 쉬운 조각품에 접하듯 섬세했다. 시에라는 무의식적으로 레이시안의 몸 위에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쥐었다 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았다. 처음 겪는 일, 처음 접하는 감촉. 향긋한 꽃내음이 머릿속을 흐뜨러뜨린다. 시에라는 거의 방어적으로 숨을 죽였다. 레이시안의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 깍지를 낀다.



  "후후, 시에라."



  시에라의 목에 입맞춤한 레이시안은 작게 웃고 말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거의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상냥하고, 무방비해…."



  그 말에 시에라는 눈을 번쩍 떴다. 레이시안의 말의 안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레이시안은 어느새 고개를 들고 똑바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온화한 미소, 꿀타래 같은 금빛 눈, 그녀와는 다른, 사르륵 흘러내린 금빛 머리칼. 술의 영향인지 살짝 붉은빛을 띄는 새하얀 피부.

  그렇지만 시에라는 레이시안은 행동이 그를 잔뜩 침식한 취기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마셨던 술의 양은 그저 약간 기분이 좋아지는 정도였을 터이다. 즉 레이시안은 이 모든 행동을 멀쩡한 정신으로 한 것이다. 정말로 그가 느끼기에는, '부족해서.'



  "역시…… 지독히 심술궂은 남자로다. 예고라도 해주면 좋지 않았느냐."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생각과 달리 어리광을 부리는 느낌이라서, 시에라는 움찔했다. 레이시안은 부드럽게 웃었다.



  "후후, 다음부터는 그렇게 할게."



  레이시안은 손을 올렸다. 아직 손을 풀지 않았기에 당연한 수순으로 시에라의 손 역시 같이 올라가게 되었다. 그는 눈앞에 끌어당겨진 하얗고 작은─그의 손에 비하여─ 손가락 끝에 입맞춤했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손을 풀었다.



  "끈질기구나."



  아까 그러했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시에라는 볼을 붉히며 말했다. 레이시안은 대답없이, 이번에는 정말로 그 특유의 미소로 시에라를 마주 보았다. 그런 레이시안을 흘겨보고 시에라는 몸을 일으키……려 하다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풀썩. 날아오른 꽃잎이 부드러이 그녀를 감싸듯 휘날리다가 흩어져갔다. 레이시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설 수 있겠어?"

  "당연한 것을 묻는구나. 그 정도야 당연히 할 수 있느니라."



  시에라는 다시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시에라의 다리는 이번에도 주인의 기대를 배반했다. 시에라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다리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레이시안은 무릎을 굽혔다. 그의 팔이 등을 받치고, 다리 밑으로 파고들어서… 시에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그녀를 안아올린 것이다. 시에라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다리를 파닥였다.



  "이건 또 무슨 짓이냐!"

  "당신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안될까나…?"

  "그 정도는 나 스스로 할 수 있느니라! 내려 놓아라!"

  "사람들의 눈에 띄어버려…?"

  "빙 돌아가면 되지 않느냐!"

  "확실히, 당신의 말도 일리가 있네…."



  레이시안은 드디어, 오늘 시에라가 그를 만난 이래로는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라는 희망을 갖고 레이시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쪽이 더 빠를거야."



  그러나 레이시안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시에라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어버린 시에라를 보며 즐겁게 웃은 레이시안은 그녀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집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시에라는 레이시안이 술과 술잔을 놓고 왔음을 지적하려 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다시 가서 회수하면 되는 일이었으며, 지금 그렇게 했다가는 이렇게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지고 말 테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안겨 가다니. 시에라는 문득 조금전과는 다른 민망함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되어서야 처음부터 끝까지 레이시안의 뜻대로가 아닌가. 그와 만난 이래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시에라는 이번만큼은 그 정도가 조금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거점에 도착할 때 쯤은 다시 설 수 있을 정도로는 기운이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에 시에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가서 레이시안이 '예고를 하겠다'고 말을 했으면서도 돌발적인 행동을 했던 사실에 대해 응징을 가해도 늦지 않으리라. 시에라 본인이 느끼기에도 별로 효과는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경고만큼은 확실히 될 수 있도록 강하게 나서면 될 터였다. 시에라는 마음속에 재차 다짐을 새기며 살짝 눈을 감았다.






  /3.

  시에라는 적지도, 많지도 않은 시간이 흘렀을 때에 눈을 떴다. 주변은 고요했다. 시에라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익숙해진 그녀의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레이시안이 그녀를 안아올린채 걷고 있었다. 시에라는 차츰 머릿속이 명료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째서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그…… 꽃밭에서 대답을 듣고, 걸어가다가, 그에게 손을 잡혀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순간 이성이 확고하게 되돌아왔다. 시에라는 다시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짐을 알았다. 하지만 부끄럽다 해서 얌전히 그에게 안겨갈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에게 '응징'을 가해야 했다.
  그렇지만 입을 연 것은 레이시안 쪽이 빨랐다. 그가 말했다.



  "좋은 꿈 꾸었을까나?"



  레이시안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채색된다. 시에라는 볼을 부풀렸다. 꿈을 꾸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그렇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시에라는 다른 것을 말했다.



  "분명히, 예고를 하고 행동하겠다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시에라는 입을 다물었다. 소리내어 말하기는 부끄러웠던 탓이다. 그녀의 모습에 레이시안의 입가에 이번에는 의미 깊은 미소가 어렸다.



  "이렇게…?"



  레이시안을 마주보다가 시에라는 고개를 확 숙였다. 휘말려서는, 휘말려서는 정말로 아니되느니.
  역시나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는지 레이시안은 즐겁게 웃을 뿐 대답을 촉구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방에 도착하는 데에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으나, 시에라는 그렇게 긴 5분은 처음 같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문을 닫은 뒤 레이시안은─시에라로서는 다행히도─ 순순히 그녀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시에라는 부러 그를 흘겨본 뒤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시에라는 눈앞의 풍경이 사라지는 모습을 기묘하게 바라보았다. 바깥에서는 아무런 위험도 감지되지 않았다. 즉 이것은 외부적인 요인이 아니라 내부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뇌리에 여러 가능성이 스쳐지나갔지만 그 중에서 시에라가 납득할 만한 것은 없었다. 시에라는 땅이 빠르게 올라오는 모습을 마치 먼 곳에서 지켜보는 느낌으로 바라보았다.

  그 때 시에라는 자신의 몸을 붙잡는 손길을 느꼈다. 시에라는 고개를 돌렸다. 레이시안이 그녀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아."



  시에라는 그제야 자신이 넘어질 뻔했음을 깨달았다. 레이시안이 자신을 부축해주었다는 사실도. 당황하여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에라에게 그는 말했다.



  "괜찮아?"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에는 평소와 달리 그녀를 놀리는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에라의 가슴 속에 평소보다 더욱 큰 파문을 남겼다.



  "너무 오래 안고 있던 걸까나. 미안해."

  "……."



  레이시안의 팔을 밀어낼 생각은 하지 못하고 시에라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사과를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 그의 표정을 본 시에라는 한번 더 놀랐다. 레이시안은 정말로 걱정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에라의 양 뺨이 재차 발그레해졌다. 문득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짐짓 눈길을 돌리며 시에라는 말했다.



  "……아니다. 고맙, 구나."



  레이시안을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시에라는 그가 미소지었음을 기색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말했다. 조금 전처럼 온화하게.



  "천만에. 설 수 있겠어?"



  시에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전 꽃밭에서 있었던 일이 반복되리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에. 그러자 레이시안은 살풋 미소지으며 그녀를 다시 안아들었다.

  시에라가 상황을 알아차린 것은 한 박자 뒤였다. 시에라는 소리쳤다.



  "자, 잠깐! 그렇다고 해서 또…!"

  "달리 부축할 방법이 없으니까."



  천연덕스러운 레이시안의 대답에 시에라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의 모습에 레이시안은 만족스럽게 웃고는 그녀를 다시 이불 위에 내려놓았다. 시에라는 볼을 부풀렸다.



  "정말 한결 같구나, 그대는."



  레이시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모습을 담은 금빛 눈이 온화하게 휘었다.



  "후후, 명판결이네."



  시에라는 누운 채로 레이시안을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레이시안은 그녀를 두려워하기는 커녕 웃음을 깊게 할 뿐이었다.

  처음 방에 들어섰을 때 처럼 다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밤의 손길 아래 모든 소리는 잠들어 있었다. 두 사람만이 있는 방 안은 고요했다. 방 너머의 소리나 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달빛이 그녀와 남자를, 방의 풍경을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방 안은 무겁도록 고요했다.

  침묵을 깬 것은 레이시안의 목소리였다. 몸을 일으키며 그는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이것으로."



  잘 자, 시에라. 그렇게 말하고 레이시안은 몸을 돌렸다.
  시에라는 문득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를 지금 보내고 싶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는 때때로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뛰어넘는다면 거리를 단번에 좁힐 수 있지만, 그냥 흘려보낸다면 그 때까지 해왔듯 천천히─ 느릿느릿,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좁힐 수밖에 없는 순간. 시에라는 지금이 그 순간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는 게 좋지? 시에라는 번민했다. 비록 서로 마음을 '공유'했다고는 하나 단지 그 뿐이다. 이런 순간은 좀처럼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사람이 아니라 영령인 그녀라 할지라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몸을 일으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잠깐, 레이시안."



  레이시안은 걸음을 멈췄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무슨 일…?"



  시에라는 안절부절 못하여 그를 마주 응시했다. 레이시안을 불러세우기는 했으나 무슨 말을 해야할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생각이 얽히고 섥혀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단 한가지 뚜렷한 감정─ 안타까움을 그녀의 얼굴에서 읽었음일까, 레이시안은 다시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시에라는 말했다.



  "레이시안, 나는……."



  레이시안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진지하게 그녀의 말을 들으려는듯, 그리고 눈높이를 맞추듯 자리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행동에 시에라는 적어도 한 가지 결심만은 굳힐 수 있었다. 그녀는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나는, 그, 그대가, 가지 않았으면, 하느니라."



  레이시안은 눈을 깜빡였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나를 붙잡다니, 드문 일이네."

  "므믓. 그렇지만,"

  "으응. 알았어.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옆에 있을게."



  레이시안은 무릎을 세워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 미소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시안은, 그로서는 드물게도 아무 의도가 없이 한 행동이겠지만 시에라는 오히려 그 모습에 가슴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안타까움이 더해지는 것도. 곁에 있어주겠다고는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지금까지와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다. 시에라는 우물쭈물하여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물론 일반적인 성인 남녀, 즉 이성이라면 이 상황에서 아무 일도 없는 것이야말로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영체인 그들에게는 구실도 있었다. 하지만 시에라는 레이시안이 평소의 행동과는 달리 그럴─속된 말로 그녀를 탐하려는─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행실이 바르다 할 수는 없었으나 레이시안은 그럴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평소 많은 여자가 그에게 매료된 것이다. 무릇 여자에게 저속한 남성은 곧 경멸의 대상이었으니. 당연하겠지만, 레이시안도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이상 그녀의 말에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을리는 없다. 아니, 감이 뛰어난 그라면 그녀가 그를 부른 순간 깨달았으리라고 시에라는 생각했다. 그러나 시에라는 동시에 레이시안의 마음 안에 속된 의도는 전혀 없을 뿐더러, 그녀가 원하지 않는 한 절대 그런 일은 하지도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



  다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져 시에라는 레이시안에게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부끄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이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셀 수도 없는 '그렇지만'이 마음 속을 맴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조금 전과 같으면서도 다른 의문에 시에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때 레이시안이 말했다.



  "시에라."



  예고 없이 이름이 불려 시에라는 깜짝 놀랐다. 몸을 움찔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시에라는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무, 무, 무슨 일인가."

  "이 쪽을 보아 줘."



  노력도 부질없이 시에라는 어깨가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시에라는 낭패했다. 계속 평정을 가장했다면 모를까 이런 반응을 보여놓고서 망설인다면 이상한 오해를 사버리고 말 것이다. 결국 시에라는 다시 레이시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시에라는 조심조심 레이시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꿀타래 같은 금색 눈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 너머에서 어떤 생각이 오갔을까, 시에라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레이시안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아."



  시에라는 시선을 피했다. 역시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레이시안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녀는 정말로 현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성. 레이시안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시간에 쫓겨 당신 자신을 몰아붙이지 마. 지금이 아니더라도 때는 있으니까."



  시에라는 다시 시선을 들었다. 그녀가 조금 전 생각한 그대로였다. 레이시안은 서두르지 않는다. 비록 이 순간을 흘려보내는 일이 될지라도, 적어도 '그런' 일에 있어서는 그의 의도를 그녀에게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시에라는 자신의 양손을 마주잡았다. 그녀는 숨을 들이쉬었다.
  레이시안은 선택권을 오롯이 그녀에게 맡겼다.
  시에라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 호흡뒤 다시 눈꺼풀을 열었다.



  "……싫지, 않느냐."



  레이시안은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에라는 말을 이었다.



  "물론 네가 내 고ㅂ…… 아니, 내가 적어둔 글귀에 답을 해준 사실은 정말, 정말 기쁘다. 하지만 그것과 이, 이, 이건 별개의 이야기이니. 너는 수많은 여성들을 만나보았다 알고 있노라. 그런데 하필 나와…… 그, 그, 그, 그렇게까지 깊은 관계가 된다면……."



  ……그것이 싫지 않느냐, 그리 묻는 것이니라. 거의 잦아드는 목소리로 시에라는 말을 끝맺었다.
  레이시안은 눈을 깜빡였다. 시에라는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깊게 묻었다. 여러모로 숙고하여 던진 질문이었지만, 막상 그가 싫었다고 대답하면 어찌해야 하나…… 겁이 났다.
  문득, 레이시안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닿았다.



  "내가…? 그렇지 않아."



  시에라는 고개를 들었다. 레이시안이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니까."



  어떤 미사여구도 곁들이지 않은 오롯한 대답이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 담백하기까지 한 대답에, 시에라는 지금까지의 번민이 눈녹듯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에라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 그렇…… 구나."

  "아아."



  레이시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시선을 내려 제 손을 바라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많은 여성들을 만났다고는 해도… 그것이 진실된 관계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아. 으응, 친절하게 대해주기는 했지만. 그건 그녀들이 '여자'였으니까. 그렇지만 지금 내가 당신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은 그런 것과는 달라. 좀 더 따뜻하고, 뜨겁고…… 그렇네, 불길 같아."



  레이시안은 다시 시선을 올렸다. 꿀타래 같은 금빛 눈이 햇살 같은 금빛 눈을 담았다.



  "별로 믿음직하게 들리지 않으리라는 건 알아. 하지만 이런 일은 생전에는 느끼지 못했어. ……분명 처음 당신과 만났을 때는 흥미 뿐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나."



  그렇게 말하며 레이시안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미소 지었다. 개구쟁이 같은 미소─그가 지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은─에 시에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후후, 소리내어 웃고 레이시안은 말했다.



  "당신을 탓하는 건 절대 아니야. 잘못이 있다면 내 쪽. 이걸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잘못? 그대가?"

  "으응, 잘못. 왜냐하면 한 눈을 판 건 나 자신이니까."

  "한 눈이라니…?"



  시에라는 어째서인지 그녀 자신이 자꾸 사소한 질문을 반복하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레이시안은 살짝 고개를 기울여 그녀를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미소가 좀 더 깊어진 것 같은 느낌은 단지 그녀의 기분 탓이 아니리라…… 레이시안은 말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사실은 소원을 빌고 돌아갈 생각이었어. 현세를 바라보는 건 그 동안의 유예. 소원을 위해 서두르다간 오히려 일을 그르칠지도 모르니, 정말 아쉬움이 없도록……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어. 물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겁기도 했지만."

  "……악취미로다."

  "으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아, 왜 알면서 고치려는 생각이 없느냐는 말은 하지 말아줘. 후후, 고마워. 아무튼 조금 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처음 생각은 그랬어."

  "…과거형이로구나."

  "그거야, 당신을 만났으니까."



  시에라는 입을 다물었다. 레이시안은 다시 고개를 들고 똑바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현세에는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그 생각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건 내가 손에 넣고자 하고 싶은 게 아니야. 내가 갖고 싶은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당신."

  "……."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이런 건 생전에 다른 여자들에게서 받았던 느낌과는 달라. 그 때는 이렇게…… 간절히 바라는, 그런 감정은 없었어. ……후후, 스스로 말하려니 자랑 같지만, 나는 내가 감정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전부, 당신 때문이야. 그렇게 말을 맺고는 레이시안은 웃었다. 책망하는 듯한 말의 내용과는 달리 짓궂으면서도 온화한 웃음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에라는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라."

  "오야, 그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슬퍼할 거야…?"

  "믓.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않느냐!"

  "후응, 들켜버렸네."



  레이시안은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시에라가 입을 열기 전, 그는 다시 예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게 품을 빌려 준 사람은 지금껏 없었으니까."

  "무슨……?"

  "글자 그대로의 의미. …애초에, 생전에는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 흘린 일도 없었지만. 날 그렇게 다독여준 사람은 당신 뿐이야."



  그의 말에 어울릴 대답을 찾지 못했기에 시에라는 침묵했다. 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지 레이시안은 말을 계속했다.



  "그 전부터 당신에 대한 호감은 없지 않았어. 하지만 당신이 날 다독여 줬을 때…… 그 때 확실히 자각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무엇, 을……."

  "당신에 대한 마음."



  고백에 대한 답변은 이미 들었음에도, 그 직설적인 말에 시에라는 눈을 크게 뜨고 레이시안을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입가에 맺힌 미소 그대로 시에라를 바라보며, 레이시안은 물었다.



  "당신은, 어떨까나."



  그 답지 않게─아니, 어쩌면 매우 그 다운─소박한 어조의 의문이었다.
  시에라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어떨까, 라니.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시에라는 자문했다. 그녀는 그동안 어떠했는가. 지금은 어떠한가. 놀랍게도 시에라는 그녀가 그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레이시안이 말한 대로 불길 같은 뜨거움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얼굴이 발갛게 되며, 심장이 빨리 뛰는 현상도.

  생전에는 결코 있지도,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이 곳에 내려온 목적을 생각해 보면 당연하겠지만.

  모두, 그 덕분이다. 비록 처음에는 가슴 아린 말을 하곤 했지만, 덕분에 그 '가슴 아린' 느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와는 반대로 가슴이 뛰는 느낌도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녀로서는 알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감정들도, 알게 되었고.

  더 이상 그녀의 마음 속은 백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색이 섞이고 섞여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진 화폭이었다.

  생전과는 전혀 달라진 마음.
  이렇게 변한 이유는, 모두 그와 만났기 때문에.



  "……나도, 나도 같느니라."



  시에라는 어렵사리 서두를 뗐다. 긴장되어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그녀는 말을 끊지 않았다. 레이시안은 그녀에게 그의 진심을 들려주었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그것에 답해야 했다. 맞잡은 자신의 양손에 힘을 꼭 주고 시에라는 말했다.



  "나 역시, 너를 만난 뒤로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느니라. 아예 모르던 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도. 또한, 너와 마찬가지로……."



  시에라는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그녀 쪽에서 그의 눈을 담으며 시에라는 말했다.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대해주는 것은 '처음'이었느니. 비록 흥미를 위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그렇게라도─ 똑같이, 동등한 위치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어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노라."



  시에라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가볍게 숨을 들이 쉬고는 다시 말했다.



  "…그것이 '기쁨'이라고 알게 된 것은 그 다음이었노라. 너는 계속해서 나를 그렇게 대해주면서도 날 격려하는 말 역시 빼어놓지 않았으니. 처음에는 너의 그 독설이 힘들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니 그건 나를 위한 일종의 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구나. 게다가 최근에는 날 북돋아주는 말 역시 해주었고."

  "북돋아주는…."

  "아니라고는 하지 말거라. 그대, 분명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하였지. 그렇다면 날 달래줄 때 그대가 했던 말 안에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노라고, 말할 수 있느냐."



  잠깐이었지만, 레이시안은 빈틈을 찔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에라는 짐짓 장난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맺히는 것을 느꼈다. 아, 이 역시 그를 만났기 때문이다. 시에라는 자각했다. 생전에 그녀는 결코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으니. 좀 더 몸을 일으켜 레이시안과의 거리를 좁히고 시에라는 말했다.



  "……하여, 조금 전에도 말했으나, 나 또한 그대와 마찬가지이니라. 모르는 것을 알게 해주었고, 그대와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나를 대해주었어. 그럴진대 어찌 그대를 조, 조, 좋…… 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시에라는 그때까지도 맞잡고 있던 자신의 손을 풀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레이시안을 바라보았다. 비록 레이시안이 하는 것 처럼 '사랑한다'고는 부끄러워 말할 수 없지만, 원래는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여 그에게 자신의 말을 전할 정도로 그녀는 그를 좋아했다. 겉으로는 부러 매정하게 대할지언정 속으로는 자신의 행동에 그가 상처입으면 어쩌나 발을 동동 구를 정도로.
  레이시안은 빙그레 웃었다. 조금 전의 미소처럼 그 다운 소박한 웃음이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기뻐, 나의 시에라. 아아, 이런 말을 들은 것도 처음이네."

  "므으. 나 역시 너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게 처음이니라."

  "오야, 그럼 나와 당신은 같구나."



  레이시안은 매우 기쁜 듯 말했다. 그의 그런 말에 시에라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아기새가 날갯짓하듯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같다니, 정말로…… 정말로 벅찬 일이다. 그야말로 '처음' 알게 된 감정.

  시에라는 숨을 삼켰다. 역시 그녀는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좀더, 좀더 그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말로는 다 전해지지 않는 이 감정을 어떻게든 전하고 싶었다. 글……은, 아니 된다. 시에라는 스스로의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직접 얼굴을 보아도 모자란데, 어떻게 글로 전할 수 있을까.

  시에라는 레이시안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눈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시에라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그녀와 '같다'. 시에라는 결심을 굳혔다. ……그녀는 겉으로 보이는 연령은 그렇지 않을지언정 이미 성인이었다.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여성.



  "그렇, 느니. 정말로 그렇느니."

  "……시에라?"

  "……그렇다면, 되었다."


  시에라는 심호흡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를……."



  시에라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입을 다물었다. 각오에도 불구하고 역시 뒷말까지 끝맺는 건 그녀로서는 무리였다.
  하지만 레이시안은 온전히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은 듯 했다. 그의 금빛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가, 긴 속눈썹에 제 모습을 반쯤 감추었다.

  시에라는 숨을 삼켰다. 두근. 두근. 귓가에서, 가슴 속에서, 안인지 밖인지조차 알 수 없는 곳에서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고동. 역설적이게도 고동은 제 주인에게만큼은 소리가 아니다. 도구가 없다면 사람은 남의 고동 소리를 들을 지언정 자신의 고동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시에라는 갑자기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와 달리 레이시안은 오롯이 그녀의 고동을 듣고 있는 게 아닐까. 초조감에 시에라는 손을 쥐었다 폈다.

  그런 그녀의 손을 레이시안의 손이 붙잡았다. 다소 서늘한 온도와 검을 잡은 사람 특유의 굳은살에 시에라는 그가 장갑을 끼지 않았음을 알았다. 시에라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레이시안을 응시했다. 레이시안은 자신이 잡은 그녀의 손을 조용히 내려다 볼 따름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을, 손등을 어루만지던 레이시안은 이내 천천히 깍지를 꼈다. 시에라가 아무 거부의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는 깍지 낀 그녀의 손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시에라는 손가락 끝에 닿는 따스한 감촉에 손을 움찔했다. 그러나 레이시안은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부드러이 그녀의 손을 자신의 볼에 가져다 댄 레이시안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이 깃털 내려앉듯 시에라의 손바닥에 닿았다.



  "……시에라."



  남자의 목소리는 고요하고, 온화했다. 시에라는 시선으로 다음을 촉구했다.



  "정말로…… 정말로 괜찮겠어……?"

  "……아아."



  시에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해도 처음 경험하게 되는 일 앞에서 사람은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아무리 '궤'를 벗어난 시에라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것이 '그런' 일임에야. 그녀의 속내를 읽었는지 남자는 말했다.



  "지금 당신이 싫다고 말한다면, 나는 하지 않아."

  "……."



  마치─보통이라면 반대의 상황에서 쓰일 단어이겠지만─유혹하는 듯한 말이었다. 시에라는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느니라. 나는 어린 아이가 아니니. 그리고……."



  시에라는 몸을 일으켰다.



  "정말로, 정말로."



  시에라는 똑바로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사람일진대…… 싫다고 할리가 없지 않느냐. ……샤를."



  레이시안─ 샤를은 이번에는 정말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속내를 보여주지 않던 눈이 동그랗게 뜨여 시에라를 멍하니 바라본다. 굉장히 그 답지 않다 느껴지면서도 기묘하게 괴리감은 없는 표정이었다. 그를 만나고 나서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에 시에라는 잠시 상황을 잊고 즐거운 웃음을 지었다.

  그런 시에라를 보던 샤를 역시 이내 미소지었다. 정말로 기쁘기에 짓는 티 없는 미소.



  "아아, 물론이야."



  샤를은 그녀의 손에 다시 한번 입맞추었다. 그리고 정중하게 손을 풀고서는, 이번에는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조각상을 대하듯 부드러운 움직임은 행여나 그녀가 공포를 느낄까 배려하는 것일까. 시에라는 숨을 죽였다. 샤를은 미소지은 그대로 온화하게 말했다.



  "……사랑해, 시에라. 정말로, 사랑해."



  앞으로 그녀가 할 일에 비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말이었지만 시에라는 볼이 붉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마치 정말 순수한 소년의 사랑 고백 같지 않은가. 그런 그녀를 보던 샤를은 빙긋 미소지었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눌렀다.






  /4.

  가볍게, 여러번. 새가 부리를 쪼는 것처럼. 이어 샤를은 시에라가 그곳에 있는지 확인하듯 좀더 깊게 입맞춤했다. 그는 부드럽게 시에라의 혀를 감고 입 안을 덧썼다.



  "……윽."



  시에라는 그녀도 모르게 새어나가려는 목소리를 꾹 눌러참았다. 그녀는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샤를에게 초콜릿을 주었고 샤를은 '답례'로 그녀에게 사탕을 주었던 때. 그것은 일반적인 방식─손으로 사탕을 건네는─이 아니라 직접 맛을 보게 해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마치 지금처럼. 그렇지만 잠깐 스쳤을 뿐인 그 때와는 달리 샤를은 직접적으로 그녀를 어루고 있었다. 시에라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심리적으로도, 실제로도. 그 때 샤를이 그녀의 혀를 놓아주었다. 그는 가볍게, 아이를 안심시키듯 표층을 핥고는 입을 뗐다.

  빠르게 호흡하며 산소를 어느정도 되찾은 시에라는 멍한 눈으로 샤를을 바라보았다. 샤를은 붉게 물든 그녀의 광대뼈 부근을 쓰다듬어 주었다.



  "힘들었을까나…?"



  시에라는 고개를 저었다. 숨이 가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물러나고 싶지는 않았다. 샤를은 온화하게 웃고는 이번에는 시에라의 코 끝에 입술을 떨어뜨렸다. 다음에는 이마에, 관자놀이에, 귓가에. 부드러운 입맞춤에 시에라는 호흡이 마저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샤를은 짓궂어지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한 듯 했다. 시에라는 귓불을 살짝 깨무는 샤를의 행동에 다시 어깨를 긴장시켰다. 시에라는 그가 미소짓는 기색을 눈치챌 수 있었다. 시에라는 볼을 부풀렸지만, 훅, 귀에 가볍게 불어들어온 입김에 다시 목소리를 죽이고 몸을 떨었다. 후후, 하고 작게 웃는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다음 순간 시에라는 시야가 변하는 것을 느꼈다. 샤를이 그녀를 부드럽게 눕힌 것이다. 조금 전의 꽃밭과는 정반대로 샤를은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그는 시에라의 목덜미에 낙인을 찍듯 입술을 눌렀다. 상냥하고 강하게 여러번 빨아올리고, 혀로 윤곽을 더듬는다. 그 때처럼 시에라는 눈을 감았다.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다르다. 이번에는 장소가 그녀의 방이라는 점이, 그리고…… 조금 전처럼 입맞춤으로 끝나지는 않으리라는 점이.



  "……."



  시에라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하지만 샤를은 오히려 그녀의 반응을 부추기려는듯 손가락으로 아직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옷 너머로부터 쇄골을 덧쓰고, 그 아래로 손을 내렸다.

  샤를은 그녀의 옷을 끄르지는 않았다. 샤를은 옷 너머로 그녀의 가슴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응……윽……."



  부비듯 접하던 샤를의 손가락이 위를 건드리자, 시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흘렸다. 샤를의 입술에 기쁜듯한 미소가 어렸다.



  "여기, 일까나……?"



  천 너머로부터 형상을 확인하듯 빚어올린 뒤, 손가락 안쪽으로 어루만진다. 시에라는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샤를의 손길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혀 다르다. 또다시 목소리를 내버릴 것 같아서 시에라는 이제는 입술의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이 이상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반응을 긍정으로 받아들였을까, 샤를은 노래하듯 말했다.



  "겁내지 않아도 괜찮아."



  달래는 듯한 입맞춤을 시에라의 입술에 떨어뜨리고, 샤를은 그녀의 옷자락에 손가락을 걸었다. 시에라의 피부를 감싸고 있던 천이 하늘하늘 흘러내렸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목, 애련한 쇄골, 가녀린 어깨가 드러났다.

  그녀의 정신과는 달리 몸은 아직 완연한 성인 여성의 그것이라 할 수 없다. 하여 시에라는 문득 불안감을 느꼈다. 그가 자신의 몸을 보고 혹시라도─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겠지만─부정적인 측의 감정을 나타내지는 않을지. 

  그 걱정은 기우였던 듯하다. 샤를은 그 모두를 부드러이 어루만졌다. 정중한 입맞춤이 화상처럼 깊은 자욱을 남기는 것을 시에라는 알았다. 그러나 시에라는 샤를을 밀어낼 생각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하게도. 이윽고 샤를은 그녀의 가슴을 가린 속옷을 풀었다. 시에라의 몸을 타고 내려가던 그것은 곧 나붓이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시에라는 몸을 떨었다. 추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샤를은 어떤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시에라는 직접적으로 샤를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슴을 가리고 싶은 충동을 참는 것이 고작이었다. 시에라는 입을 막지 않은 다른 손으로 시트를 꼭 잡았다. 그 때 샤를이 속삭이듯 말했다.



   "……예뻐, 시에라. 역시, 당신은 매우 아름다워."



  유혹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시에라는 천천히 샤를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빛깔의 금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꽃 같은 색의 입술에는 기쁜 듯한, 달래는 듯한, 혹은 그녀를 꾀는 듯한 미소가 채색되고.
  시에라는 더 이상 얼굴이 붉어질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그그그러니까, 실없는 소리를 하지 말아라!"

  "오야, 그렇게 느껴졌어…?"



  하지만 진심인걸. 이어진 온화한 말에 시에라는 입을 다물었다. 가끔 이렇게, 샤를은 어떤 꾸밈새도 없는 말로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때에 시에라는 그의 말에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며 즐겁게 웃은 샤를은 그녀의 쇄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새하얀 피부 위로 주홍색 꽃이 핀다. 시에라는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도 그러했지만 그가 남긴 자국들은 며칠 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샤를은 이번에는 시에라를 마주보지 않았다. 샤를은 시에라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한번도 남의 손이 닿지 않은 부분에 샤를의 손가락 끝이 닿는다. 윤곽을 빚는 것 같은 움직임에 시에라는 눈을 꼭 감았다. 작게 웃은 샤를이 부푼 곳을 부드럽게 손으로 감쌌다. 



  "아,"



  천천히 어루만지다가. 문지르다가. 샤를은 가장 위쪽에 피어난 꽃에 입을 대고 상냥하게 들이마셨다. 혀 끝으로 봉오리를 누르거나 굴리며, 그는 입에 머금지 않은 한편의 윤곽을 손으로 덧썼다. 시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흐트러뜨렸다. 처음에는 간지러웠던 감촉이 어느덧 열을 늘려간다. 시에라는 몸이 움찔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응……으, 응, 응……."



  나비가 꿀을 찾듯 한편의 봉오리를 어루만지고, 다른 한 편을 손가락 끝으로 누르거나, 굴리거나, 비빈다. 집요한 희롱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시에라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상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점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늪은 늪이되 달콤한 늪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위험하다고, 적어도 시에라 본인은 그렇게 느꼈다. 그녀는 빠져나올 힘도 빠져나올 생각도 들지 않았으니까.
  문득 샤를이 말했다.



  "소리를 참으면 안돼…."



  시에라의 예민해진 살갗은 그저 스칠 뿐인 한숨에도 자신을 붉게 물들였다. 샤를은 살짝 미소지었다. 배부른 고양이…… 시에라는 멍하니 그런 단어를 떠올렸다. 꽃밭에서의 기억이 문득 고개를 내밀었다가 하얀 파도에 밀려 사라져갔다.

  작게 웃은 샤를은 그가 입에 머금고 있던 봉오리를 깨물었다. 부드러울 뿐이었던 좀 전과는 전혀 다른 접촉이었다. 강한 자극. 시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소리를 냈다. 그 즉시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한 번 새어나간 목소리는 다시 그녀의 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샤를의 입술이 아름답게 휘었다.



  "그렇게.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시에라.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지니까."

  "……무, 엇이……."

  "당신이 기뻐하고 있을지, 싫어하고 있을지."

  "응, 윽……."



  시에라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녀의 유려한 달빛 눈썹이 살짝 가운데로 모였다. 그녀는 이렇게 흐트러져 있건만 샤를은 어디까지나 그 다운 모습 그대로다. 시에라는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이럴, 때, 그런 말을, 하, 다니. 그대는, 참으로…… 심술, 궂구나."



  샤를은 단지 후후, 하고 이번에도 그 답게 웃었다. 그는 손을 시에라의 옆구리로 헛디디듯 미끄러뜨렸다. 한번 더 꽃에 입맞춤을 한 뒤, 그는 복부를 천천히 입술로 더듬었다. 자극에 떠는 가는 허리와 등을 달래듯 쓰다듬고,



  "……."



  내려앉는 서늘함에 시에라는 마지막으로 골반에 걸려 있던 것이 끌러짐을 알았다. 금빛 눈이 크게 뜨였다가, 눈가를 덮은 주인의 양 손목 뒤로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그녀 자신과 샤를을 차단하고 시에라는 간헐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정말로 물러설 수 없는 곳 까지 온 기분이 들었다. 샤를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지만 시에라는 차마 그를 마주 볼 수 없었다. 시에라는 자꾸만 미끄러지는 다리를 오므려 무릎을 세웠다.

  그러나 시에라의 행동은 그녀의 외도와는 다른 형태를 빚어냈다. 무릎에 샤를의 손이 닿았을 때 시에라는 자신이 역효과를 불러왔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조금 늦었다. 조금 전 손이 닿은 부분에 깃털처럼 내려앉은 따스함에 시에라는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허벅지 뒤쪽에서부터, 점점 위로, 부드럽게 핥아올리는 감촉에 다시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샤를은 정말 아슬아슬한 부분에서 멈췄다. 시에라는 가만히 팔을 내렸다. 그녀는 자꾸만 내려가지 않으려는 시선을 억지로 아래로 끌었다. 천천히, 천천히…….

  샤를과 눈이 마주치자, 시에라는 양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각오는 했지만 역시 부끄러웠던 탓이다. 가림막이라 하기에는 너무 엉성했지만 시에라는 그래도 똑바로 그를 마주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샤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생각 이상으로 길어지자 시에라는 차츰 걱정에 빠졌다. 그는 어째서 입을 열지 않는 것일까. 그녀의 행동에 화가 나서? 그것이 아니라면 너무 기가 막혀서?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에게 실망해서?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었다. 시에라는 손가락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틈새로 샤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샤를은 특유의 짓궂은 미소를 짓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 그렇게, 보지, 말아라!"



  시에라는 황급히 손가락을 다시 모았다. 부끄러웠다. 모든 것이. 시에라는 보드라운 발가락을 꼭 오므렸다. 그런 시에라의 모습에 샤를이 살며시 미소지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당신을 두고 눈을 감으라니. 잔인하네, 당신은……."

  "그그그그러니까, 그런 말도 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며, 시에라는 발을 다시 펴고 시트를 톡톡 쳤다. 샤를이 즐겁게 웃는 소리가 귓가에 간지럽혔다.



  "……응. 그런 모습도 정말 사랑스러워, 나의 시에라."



  시에라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든 그가 더 '짓궂게' 행동하도록 만든다면 모를까, 멈추는 데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조용히 있고만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 상황은 너무나 불공평했다. 그녀는 그 때문에 이렇게 평상심을 잃고 있는데 그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무엇인가, 무엇인가… 샤를에게 좋은 반격이 될 만한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시에라는 다시 손가락을 열고 조심스럽게 시선을 굴렸다. 곧 그녀는 손을 내렸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는 눈을 반짝 빛냈다.



  "그대…… 샤를."



  이번에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시에라는 내심 안도했다. 샤를은 미소를 지은채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일까나?"



  시에라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어째서 그대는 그대로 있는가. 나만 이렇게 있는 것, 은, 불공평하다……."



  시에라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돌렸다. 겨우 가라앉혔던 호흡이 다시 가빠지는 것을 느낀 시에라는 스스로를 안정시키기 위해 심호흡했다. 조금 전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무 효과도 없을 뿐더러 말한 그녀 본인을 더욱 민망스럽게 하는 방안을 반격이랍시고 생각해냈다니.

  그 때 옆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에라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올렸다. 사륵 흘러내린 금빛 머리카락이 그녀의 코끝을 간질였다. 시에라는 바로 코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샤를의 얼굴에 흠칫 놀랐다. 황급히 얼굴을 가리기 위해 올린 손은 샤를의 손에 허무하게 막…… 히지는 않았다. 샤를은 손을 그대로 시에라의 어깨로 가져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 움직임에 놀라 시에라는 오히려 얼굴을 가리지 못했다. 그녀는 허공에 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샤를이 말했다.



  "싫어……?"



  헝클어져있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겨주는 손길만큼이나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시에라는 귓볼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때 또 다시 그런─ 직접적인 말을 건네오다니. 그렇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젓지 않았다. 조금 전 한 말은 그저 그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심리로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시에라는 샤를을 바라 보았다. 샤를은 잔잔한 미소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시에라는 손을 꼭 쥐었다. 그녀는 말했다.



  "……연모로 비롯된 이런, 행위…… 는, 서로를 오, 온전히 받아들이는 의식……이라 들었느니라. 그, 그런데 자신을 드, 드러낸 사람은 나, 나, 나 뿐이지 않느냐."



  시에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가 빠끔히 시선을 들어 다시 샤를을 올려다 보았다. 조심스러운 시선에 무엇을 느꼈는지 샤를은 작게 웃었다.



  "아아, 그랬지."



  샤를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몇 번 더 매만져주고는 손을 들었다. 은빛 머리칼이 사각이며 주변에 부드럽게 떨어진다. 시에라는 새삼 고동이 빨라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샤를에 의해 열에 물들 뿐이던 때도 부끄러웠던 건 같다. 그렇지만 그녀의 기분은 그 때와 조금 달랐다. 고백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 소녀가 이러할까 싶은 수줍음이다. 입술에 내려온, 가벼운 입맞춤. 시에라는 볼을 발갛게 붉혔다. 그녀의 모습에 샤를도 재차 웃었다. 눈꺼풀에, 볼에, 코끝에. 접할 뿐인 가벼운 감촉이 느껴졌다가 사라졌다.



  "당신이 원한다면."



  샤를은 그렇게 말하며 느슨하게 묵고 있던 넥타이에 손을 가져갔다. 천천히 매듭을 푸는 움직임에 시에라는 어째서인지 초조감을 느꼈다. 문득 알아차렸을 때는 그녀의 손이 그의 손을 제지하듯 잡고 있었다.



  "무슨 일 일까나…?"



  샤를은 고개를 갸웃했다. 시에라는 자신의 손을 응시했다. 어째서 그녀는 이런 행동을 한 것일까. 하지만 그녀가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그녀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그러니, 불공평하다, 말하지, 않았는……."



  시에라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무의식 중에 한 행동이었지만, 그 무의식 가운데에서 아예 그런 생각─그녀가 방금 말한─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 된다. 그녀는 그의 손길에 그녀를 오롯이 드러냈는데, 그녀는 그렇게 못하다니. 정말로 불공평한 일이다. 시에라는 샤를의 손을 잡은 그녀의 손에 꾹 힘을 주었다.
  그녀를 지켜보던 샤를의 눈이 온화한 빛을 띄었다. 샤를은 즐거운 듯 웃고 말했다.



  "후후, 당신 말대로네."



  끄덕 끄덕. 시에라의 고개가 작게 절구를 찧었다. 샤를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그의 손에 겹친 시에라의 손을 다른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넥타이 위에 올렸다.



  "부디."



  샤를은 그의 손을 내렸다. 시에라는 숨을 삼켰다. 그녀가 넥타이를 만져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연히 그녀는 넥타이를 매어본 적도 풀어본 적도 없었다. 물론 아무리 처음 하는 일이라도 그녀에게 실패란 뛰어난 조각가가 조각상에 흠집을 내는 것만큼이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시에라는 그녀가 이런 상황에서도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시에라는 다시 샤를을 보았다. 샤를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긍정의 표시다. 시에라는 후우 숨을 들이쉬고는 손을 움직였다.

  시에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서툰 움직임이었지만 매듭은 순순히 그녀의 뜻에 따랐다. 하나의 띠처럼 된 넥타이를 시에라는 조심스레 끌렀다. 이어 시에라는 샤를의 웨스트의 버튼을 하나씩 풀어냈다. 마지막 버튼까지 푼 시에라는 잠깐 고민에 잠겼다. 이것도 조금 전의 넥타이처럼 끌러야 할까? ……샤를이 꽃봉오리 피우듯 그녀의 옷을 어루었던 것을 떠올리면 그래야 할 듯 싶었다. 시에라는 머뭇머뭇 샤를의 웨스트를 쥐었다. 정말로 그녀가 그를 '온전히' 드러내주게 하려는 듯 샤를은 그녀를 제지하지 않고 가만히 보았다. 시에라는 천천히 샤를의 웨스트를 그에게서 떨어뜨렸다.

  다음은…… 시에라는 심호흡했다. 평소 샤를은 셔츠의 단추를 가슴 위까지 풀어 놓았고 그것은 오늘이라고 해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위에 자리하던 웨스트도, 넥타이도 없어 옷자락이 좀 더 벌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쇄골에 시에라의 얼굴은 홍시가 되었다. 새삼, 그가 이성이라는 사실을 시에라는 실감했다. 날렵한─물론 단어 자체는 여성에게도 쓸 수 있지만─모양의 쇄골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의 것이다. 그 아래로 살짝 드러난 흉부 역시. 시에라는 손을 꼭 쥐었다가 폈다.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을 샤를의 셔츠깃에 살짝 대었다. 손가락 끝으로 그를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시에라는 단추를 하나 하나 뺐다.

  문득 시에라는 그의 팔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했다. 죽 누워 있던 그녀와 달리 샤를은 그녀가 넥타이를 풀기 시작할 때부터 팔로 그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샤를은 그녀에게 조바심을 내거나 움직임을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니, 그렇기에 시에라는 걱정을 거두지 못했다. 샤를이라면 아프건 아프지 않건 내색을 하지 않을 테니까. 시에라는 단추를 푸는 움직임을 좀더 빨리 했다. 하나, 둘 단추가 풀리고, 마침내.



  "……."



  드리운 셔츠자락이 그녀의 살갗을 간질였다. 시에라는 흠칫하여 어깨를 움츠렸다. 아직 열이 남은 피부에 그 감촉은 너무 선명했다. 그렇지만 다음 순간 시에라는 샤를의 어깨에 손을 댔다. 그가 그녀에게 그러했듯이, 그녀도 그를. 시에라는 손을 움직였다. 나비 날개에 맺힌 물 매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툭, 하고. 떨어진 셔츠가 우는 소리를 냈다. 시에라는 조심스럽게 샤를을 바라보았다. 그의 오롯한 몸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평소 깃 사이로 나타나던 쇄골, 여자인 그녀와는 다른 형태의 흉부, 복부. 늘씬하지만 결코 깡마르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근육이 붙지도 않은 맵시 있는 몸이다. 문득 시에라는 그녀가 그의 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화끈거리는 볼을 가리며 황급히 눈을 샤를의 얼굴로 돌렸다.



  "……펴, 평소에도, 그리 보이기는 했다만, 그대, 전사 같지 않구나."



  더듬거리는 목소리에 샤를은 빙긋 웃었다. 무엇을 생각한 것일까, 그 웃음이 서서히 '짓궂은' 빛깔을 띈다.



  "실망했어…?"



  살짝 쉰듯 한숨과 함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떨어져 내렸다. 귓볼이 부드럽게 깨물리고, 이어 눈꺼풀에 내려앉은 입맞춤. 붉게 물든 눈가를 샤를의 손가락이 세심히 닦아냈다. 이번에는 맨살이 직접적으로 맞닿아 시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후후, 그렇게 말해주니 기뻐. 나의 시에라."



  샤를은 엷게 웃었다. 샤를이 이제 무엇을 하려는지 안 시에라는 긴장하여 그를 보았다. 샤를은 그녀를 안심시키듯 무릎에 입술을 접했다. 그리고 점점 안쪽으로 미끄러뜨렸다.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시에라는 다리를 움직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금세 그것을 그것을 포기했다. 잘못했다가는 또다시 조금 전 같은 일이 일어날 테니까. 그녀는 더 이상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고 싶지는 않았다.

  하여 시에라는 볼을 사과처럼 물들인 채 샤를의 행동을 지켜 보았다. 새벽녘 풀잎에 맺혔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드는 이슬 같은 곳에 고아한 금빛 눈길이 닿는다.



  "그, 그런 곳을, 그렇게, 바라보지……."



  시에라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지금까지 의식하지 않던, 여자로서 부끄러워 느끼는 마음이 그녀의 뇌리를 가득 채워가고 있었다. 장미 꽃잎 같은 입술을 깨무는 그녀의 모습에 샤를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잔잔히 웃었다.



  "……사랑하는 시에라. 당신의 마음은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마. 당신은 누구보다 아름답고, 예쁘고, 귀여워. 정말로 사랑스러워."



  시에라는 이번엔 샤를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가 정말로 그녀를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시에라는 조용히 숨을 죽이며 고개를 세로 저었다. 그녀의 모습에 샤를은 다시 온화하게 미소지었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화심을 상냥하게 어루만졌다.



  "…!"



  가는 허리가 움찔 뛴다. 시에라는 필사적으로 소리를 억눌렀다. 그곳에 이번에는 따스하고 보드라운 것이 닿았다. 그리고.



  "아, 아……."



  조금 전 그녀의 꽃술을 대하던 샤를의 손가락. 아픔은 없었다. 허나 지금의 가느다란 이물감은 그녀가 처음 경험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시에라는 시트를 꼭 쥐었다. 샤를의 손가락이 그녀의 안을 매만지는 감촉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시에라는 세우고 있던 무릎에 다시 힘을 주었다. 그런 그녀를 달래듯 샤를은 다리 안쪽을 부드럽게 빨아올렸다. 안에 접하던 손가락이 상냥하게 꽃술을 어룬다. 그녀가 아픔을 느끼지 않도록 표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부드럽게 누른다. 시에라는 다리가 움찔거리는 것을 억누르며 발가락을 세게 오므렸다.



  "응…… 아, 아아, ……."



  샤를의 손가락이 다시 그녀의 안에 닿았을 때, 시에라는 재차 입술을 깨물었다. 샤를은 세게 손대면 부서질 지고의 예술품을 대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였다. 매만지고, 미끄러뜨리고. 손 위에 내려앉은 꽃잎에 이르듯.



  "……윽!"



  샤를이 손가락에 살짝 힘을 줬을 때, 시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뛰었다. 시에라는 어느새 그녀가 그의 손가락을 꼭 붙들어 매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힘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의도와는 달리 그녀는 꾹 샤를의 손가락을 감쌌다. 샤를이 기쁜 듯 웃는 것 같았다….



  "아, ……아, 응, 후응, 아, 아아……."



  조금 전 닿았던 곳으로부터 느껴지던 자극이 조금씩 강해졌다. 그럴수록 시에라는 점점 정신이 어딘가로 아득하게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상실감에, 그리고 처음 느끼는 감각에 시에라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샤를이 매만져 주었던 은사가 시트 위로 요염히 흩어지며 그녀의 몸에 내려앉는다. 달콤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



  "아름다워, 시에라. 정말로…… 매우."



  아득히, 좀 더 아득히. 시에라는 시트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제는 샤를이 손가락을 뺄 수 없을 정도로 억누름을 느꼈다. 갑작스럽게 시에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지금의 그녀는 그녀가 아니게 된 것 같았다. 마치 그녀가 알고 있던 자신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시에라는 눈을 꼭 감았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도르륵 뺨을 타고 흘렀다. 시에라는 입을 열었다.



  "샤, 를, 그, 만…… 이제…… 그……만. 나, 나는……."



  말만으로는 생각을 오롯이 전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시에라는 눈을 떴다. 그녀는 어깨를 떨며 샤를을 올려다 보았다.



  "샤, 를, 나는……."

  "시에라……?"



  샤를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빼냈다. 방 안에 다시 고요가 찾아들었다. 밤의 정적 속에서 시에라의 간헐적인 호흡 소리만이 그들의 주변에 내려앉았다. 샤를은 다른 쪽의 손으로 시에라의 어깨를 가만히 감쌌다. 그는 시에라를 살그머니 껴안았다.



  "미안해, 시에라. 무엇이 싫었어…? 무서웠던 걸까나."



  시에라는 말했다.



  "나, 나는, 몰랐다. 이런 건……."



  시에라는 입을 다물었다. 충분히 각오하였다고 생각했으며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자꾸만 도망치려고 하고 있었다. 이런 그녀를 샤를은 어떻게 생각할까…. 생각이 계속 부정적으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시에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그대가 무섭다는, 뜻은, 아니다. 그대는, 상냥하니까."



  샤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그녀가 말하기를 기다리려는 듯. 시에라는 말을 이었다.



  "그토록, 배려해 주었는데, 이리, 이리 물러서다니. 나는, 정말로 겁쟁이로구나."

  "……."



  시에라는 눈을 감았다. 이런 때 그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는 그녀는 역시 겁쟁이일 것이다. 시에라는 마음 속으로 샤를에게 미안해하고 또 미안해했다.
  그 때 샤를이 좀 더 강하게 그녀를 껴안았다. 샤를이 말했다.



  "쉬…… 괜찮아, 시에라. 잠깐 눈을 떠 주겠어……?"

  "……."



  시에라는 빠끔히 눈을 떴다. 샤를은 조용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니까. 무서워 할 것 없어."

  "……그런, 것인가……?"

  "으응."



  샤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온화한 목소리와 표정에 시에라의 마음이 점차  가라앉았다. 시에라는 천천히 팔을 올려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두려운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시에라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혹여, 혹여……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다."

  "전혀 그렇지 않았어."



  샤를은 어지러이 흩어져 있던 시에라의 머리카락을 들어 입맞춤을 떨어뜨렸다. 시에라는 도자기 같은 뺨에 홍조를 띠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손을 움직여 그의 얼굴을 잡았다. 무슨 일…? 시선으로 물어오는 샤를에게 대답하는 대신 시에라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을 눌렀다. 표면을 마주할 뿐인 서툰 입맞춤. 하지만 샤를은 기쁜 듯 미소 지으며 그에 응해주었다. 시에라의 마음 속에서 설탕 과자 같은 감정이 부풀어 올랐다. 퐁, 퐁 하는 소리를 내며 터져 그녀의 마음을 적신다. 시에라는 천천히 손을 샤를의 어깨에 내렸다. 그녀는─여전히 부끄러웠지만─조용히 말했다.



  "샤를."

  "응."

  "……이젠, 괜찮다. 그러니까……."



  시에라는 있는 힘껏 샤를을 응시했다.
  아아, 하고. 샤를은 잔잔히 웃었다.
  샤를은 시에라의 어깨를 껴안고 있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도드라진 날갯죽지를 스치고, 척추를 덧쓴 손이 미끄러지듯 가녀린 허리에 닿았다. 시에라는 살짝 몸을 움찔했지만 이번에는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정말로, 정말로 각오가 되었으니까.



  "나는 남자니까…… 얼마나 아플지는, 짐작할 수 없어. 그러니까…… 혹시 아프다면 이야기해 줘."



  시에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은 아직 어깨를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 그의 손을 겹쳐 조심스레 깍지를 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양 옆으로 내렸다. 시에라는 숨을 흘리며 그의 손을 마주 쥐었다. 온화하게 웃은 샤를이 그녀에게 기대듯 움직였다.



  "……응,"



  시에라는 목소리를 삼켰다. 지금은, 아팠다. 화상 입은 듯 뜨겁고, 괴로웠다. 샤를이 어루만져 주었음에도. 그러나 시에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손가락에 얽힌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시에라는 조금 전도, 지금도, 샤를이 그녀를 소중하게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처음 겪는 일에 무서워하는 그녀를 몰아세우지 않고 그녀가 마주할 수 있도록 차분히, 그녀를 이끈다.



  "윽…… 아,"



  시에라가 신음하자, 샤를은 살며시 그녀를 끌어 안았다.



  "역시, 아플까나……."



  익숙한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은 울림으로 귓가에 내려 앉았다. 시에라는 고개를 저었다. 괴로웠지만 버틸 수 없을 정도의 아픔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와 정말로 마음이 이어지는 것이라면 그녀는 참아낼 수 있었다. 그녀의 속내를 읽었는지 샤를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응……."



  신체적으로도, 마음 속으로도, 가장 깊은 곳까지. 아무도 닿지 않은 곳까지. 그녀를 번롱시키며 그가 파고든다. 무섭다 느낄수도 있는 내딛음이었지만 시에라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본디 그와 그녀는 서로를 채웠으므로. 문득 그녀의 눈앞이 부옇게 변했다. 시에라는 눈을 깜빡였다. 잠깐 맑아졌던 시야는 곧 또다시 흘러넘친 물방울에 흐려졌다. 시에라는 단단히 잡고 있던 샤를의 왼손이 그녀의 눈초리에 살풋 접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가까이 있을 손가락 끝이, 한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있는 아름다운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시에라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시에라는 꼭 눈을 감았다 떴다. 투명한 물방울이 그녀의 눈가를 타고 영롱히 떨어졌다.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샤, 를. 샤를."

  "응."



  샤를은, 단지 짧게 그렇게 대답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의 움직임을 읽은 것처럼. 이렇게 이어져있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시에라는 자신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들어 그녀의 눈가를 매만지는 샤를의 손을 잡았다.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응."

  "슬픈 것이 아닌데. 아픔 때문이, 아닌데."

  "응."



  샤를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는 조금 전 그녀가 했던 것처럼 그저 살짝 닿을 정도로 입술을 내렸다. 그가 그곳에 있다고 말하듯. 시에라는 또다시 도르륵, 눈물 흘리고 그의 어깨를 껴안았다. 이윽고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잘 참아 냈어, 나의 시에라."



  주어가 없는 말이었지만 시에라는 샤를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가장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림이 안타까울 정도로 선연하여 시에라는 한숨을 흘렸다. 샤를이 말했다.



  "괜찮아…?"

  "괜, 찮, 느니라."



  분명히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되어 있을 것이다. 아직도 아프고, 쓰라리다. 하지만 시에라는 다시 괜찮다 말하며 샤를을 보았다.



  "사랑해, 시에라. 당신을 사랑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부드럽게 울리는 달콤한 목소리가, 포근함을 담고 사랑을 속삭인다. 시에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맺힌 물방울이 다시금 흘러내리고. 찰나 동안 시야가 맑아져 시에라는 상냥하게 미소 지은 샤를을 볼 수 있었다. 계속 그를 보고 싶다. 시에라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나도 그대를 좋아한다. 샤를."

  "으응."



  샤를의 손가락이 눈가를 훔쳤다. 애정과 따스함과 자상함을 담뿍 담은 목소리로 샤를은 말했다.



  "나의 시에라, 좀 더 들려줄 수 있을까. 나에 대한 마음을, 좀 더.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샤, 를."

  "그리고 좀 더, 나에게 매달려주지 않을래…?"



  오싹할 정도로 달콤하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시에라는 멍하니 샤를을 바라 보았다. 그는 정말로 사랑스러운 정인을 바라보듯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니, 그의 마음에서 둘은 이미 같을 것이다. 이미 수없이 속삭인 사랑한다는 말과 둘도 없는 보물에 접하는 듯한 행동을 본다면. 시에라는 새삼 귓볼을 물들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 아 한다, 샤를. 정말로, 좋아한다."

  "더…… 좀 더."

  "좋아하고, 좋아하고…… 정말로, 나는, 그대를 좋아한다."

  "응."



  샤를은 다시 그녀의 손을 쥐었다. 얽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가장 깊은 곳의 욱신거림이 커져 시에라는 작게 허덕였다. 아픔이, 괴로움이, 샤를의 상냥함과 뒤섞였다. 한데 모인 감각들은 결정이 되어 부풀었다가 꽃에 내려 앉은 눈송이 녹아내리듯 서서히 서서히 이슬이 되었다. 시에라의 머릿속이 하늘하늘, 달콤하게 물들어 녹아갔다. 시에라는 하이얀 하늘처럼, 흐려지는 것 하나 없이 밝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의식이 조금씩 사라지는 감각을 느꼈다.



  "샤, 를. 샤, 를……."

  "시에라, 시에라."



  달콤한 음성을 떨어뜨리는 복숭아색 입술에 샤를은 입맞춤했다. 닫힌 입술을 조심스럽게 열어 혀를 감아 올리는 샤를의 행동에 시에라의 몸은 또다시 주인의 의도와는 달리 움직였다. 꾸욱, 행여나 그가 곧 사라질새라.



  "아윽, 아, 응…… 아!"

  "시에라. 아름다워, 시에라. 나의 시에라."



  시에라는 상대가 샤를이라는 것만으로도 지금처럼 모든 것을 맡기어도, 완전히 무방비한 모습이 되어도 두렵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녀를 사랑한다 속삭여주는 말이 행복했고 또 기뻤다. 이런 느낌은 몰랐다. 이런 기쁨과 안도감을 시에라는 알지 못했다. 이것이 정말로 좋아한다는 것일까, 시에라는 생각했다. 그것을 가르쳐준 사람은 샤를이다. 좋아한다는 것도, 사랑도, 기쁨도, 행복도. 모두. 그는 지금도 알려주고 있었다. 계속 전해주고 있었다. 행동으로, 눈으로. 목소리로. 시에라는 샤를의 손을 놓았다. 그녀는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샤를, 좋아한다, 샤를."



  채워져 간다. 시에라는 그의 목에 건 팔에 힘을 주었다.



  "응, 나의 시에라. 사랑해, 시에라. 사랑해."



  가득 가득, 채워진다. 매우 따뜻하고 상냥한 것에 감싸이듯. 새초롬한 잎새를 닮은 욱신거림을 아주 조금 품고. 시에라는 눈물을 방울 방울 떨어뜨렸다. 소중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을 어떤 허례 없이 좋아한다 말할 수 있는 기쁨에. 그에게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기쁨에. 그에게 기댈 수 있고 그를 지지해줄 수 있는 기쁨에.



  "샤를, 샤를. ……아, 윽, 샤를."

  "응."

  "좋아하니까, 정말 좋아하니까……."



  내 곁을, 떠나지 말아다오. 거의 매달리며 전한 말에 샤를은 웃었다.



  "물론. 그 대신."



  당신도,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어줘. 그렇게 말하는 상냥한 목소리가 근처에서, 먼 곳에서─ 그녀에게 스며들 듯 떨어져내렸다.






  /5.

  향기 없는 달콤함이 아스라히 내린다. 잔향에 가취하여 시에라는 숨을 천천히 들이 쉬었다. 그녀는 조용조용 샤를을 올려 보았다. 햇살 같은 금빛을 꿀과 같은 금빛은 피하지 않았다. 샤를은 그녀가 못내 사랑스럽다는 듯 입술에 미소를 그리며 그녀의 상기된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서늘한 온도가 기분 좋아 시에라는 조심스럽게 뺨을 부볐다.



  "평온하다, ……샤를."

  "아아, 나도."



  떨어진 샤를의 손가락이 조곤히 시에라의 목을 쓸었다. 살짝 곤혹스러운 듯한─그렇지만 여전히 온화한─웃음을 짓고 그는 말했다.



  "목, 아프지는 않은 걸까나…?"

  "……."



  시에라는 대답하려 했다가, 다시 닫았다. 조금 전 그토록 샤를을 부른 탓에 그녀의 목은 다소 까끌해져 있었다. 큰 소모도 아니었으니 잠깐 영체화를 했다가 돌아오면 회복되겠지만 시에라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샤를에게 안겨 있는 지금은. 시에라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참을 만…… 하느니라."



  샤를은 후후, 웃었다.



  "무리하지 않아도 되지만……. 아아, 물론 나는 당신의 순아한 목소리도 좋아."



  시에라는 조금 전 부터 자꾸만 달아오르기만 하는 자신의 얼굴을 원망했다. 어째서 그녀는 익숙해질 대로 들은 말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걸까. 하물며 그런…… 일을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시에라는 얼굴이 방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붉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시에라는 당황하여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지만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미소를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오야, 빨개졌어."



  흔들리던 시에라의 시선이 멈칫, 멈췄다.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태도에 시에라는 문득 오기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시에라는 항의의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하려던 말은 그녀의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때마침 닿은 샤를의 입술에 그녀의 입술이 막힌 탓이다. 가볍게 시에라의 입술을 누른 샤를은 화사하게 웃었다.



  "시에라. 나의 시에라."

  "──."

  "사랑해. 사랑해. 누구보다도."



  흘러넘치는 마음을 전하듯 온화하게 속삭인다. 단순해서 아름답고 소박하기 때문에 오롯이 와닿는 말이었다. 시에라는 스르르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이유로 볼을 발갛게 하며 시에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찌르르, 가슴이 떨렸다. 시에라는 미소지었다. 조금 쑥스럽게.

  깊은, 그러나 포근한 침묵이 그들 위로 장막을 내렸다. 문득 시에라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봄햇살 같은 따스함이 그녀를 온화하게 감싸고 있었다. 기대기 좋은 따스함이다. 가만가만 머리카락을 빗겨내리는 손길에 시에라는 다시 한 번 꾸벅, 고개를 움직였다. 그에 맞추듯 조용하게 샤를이 말했다.



  "졸린 걸까나…?"



  시에라는 아니라고 대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답 대신 그녀는 작게 하품을 했다. 쿡쿡 웃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눈 감아도 돼, 시에라."

  "─으음, 하지만……."

  "쉬이……."



  샤를은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내렸다. 시에라는 반쯤 몽롱함에 잠겨 샤를을 바라보았다. 샤를……? 약하게 흘린 목소리에 샤를은 잔잔히 웃었다. 그는 살며시 입을 열었다.



  "L'Amour brille sous les étoiles, D'une étrange lumière……."



  시에라는 점점 아래로 감기려는 눈꺼풀을 어렵게 들어 샤를을 눈에 담았다. 샤를은 어디까지나 온화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다. 고요함 가운데에서 그들의 주변을 맴도는 그것은, 조곤조곤, 달콤하고도 온화한 목소리에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포근한 자장가가 되었다. ……좋은 노래구나. 부르는 사람이 그대이기 때문이겠지만. 시에라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은빛 속눈썹이 팔랑이며 하얀 뺨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잠에 빠져들기 직전 시에라는 샤를을 안은 팔에 꼬옥, 힘을 주었다. 살짝 미소짓는 기색이 느껴지고. Bonne nuit, Mon chou Sherra. 온화한 목소리가 부드러이 그녀를 감싼다. 아아, 미소 지으며 시에라는 답했다. 무엇이라고 답변했는지는 졸음에 취하여 시에라 본인도 잘은 몰랐다. 하지만 샤를이 환하게 미소 지은 모습이 기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다시금 내려 앉은 입술의 온기를 느끼며, 시에라는 완연히 잠에 빠져들었다. 폭신폭신한 부드러움에 싸여, 따스함에 안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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