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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9 06:28 조회 수 :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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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서번트는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은 살아 있지 않다. 그들을 이룬 피와 살은 그들의 마력과 완벽하게 등가를 이룬다. 성배의 안배로 육체를 얻어 현계하였더라도 단지 그 뿐인 것이다. 그들은 실체를 할 수 있는 영체일 뿐 실체가 아니다. 실체에게는 몸을 유지할 마력이 필요 없다.

  바꿔 말하자면 서번트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마력이라는 뜻이다. 애초에 그들이 불려온 목적만을 생각하면 생전의 자아나 개성 같은 것은 사족에 불과했다. 마술사들은 영체인 성배를 만질 수 없기에 같은 영체인 그들을 불러냈을 뿐이니. 오로지 필요에 의한 관계다. 그리고 그런 관계에서 보통 주인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종속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종 된 자들이 오로지 자신의 말에 따르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종속된 사람─ 서번트에게는 자아와 개성과 욕구가 있었다. 본디 주인(master)보다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던 그들은, 자아를 박탈당하지 않음으로써 단순한 마술사들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생전 그대로 사고하고 행동했고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려는 마스터와는 대립했다. 마스터에게 절대명령권이라는 령주가 있다 하나 힘은 그들이 압도적으로 우위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모든 서번트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서번트들은 오로지 마스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본분에 충실하게 마스터의 말을 따랐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런 행동 역시 서번트들이 각자만의 개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레이시안은 그 모든 사실이 매우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원래대로라면 필요없을 자아와 개성이 서번트들에게 깃들어져 있다는 사실도, 그 덕분에 주인과 하인이라는 명칭이 무색해졌다는 사실도, 지금 그의 육체를 이루는 것이 실제로는 피와 살이 아니라 마력이라는 사실도. 레이시안은 '하인'을 다루지 못해서 쩔쩔매는 '주인'의 얼굴을 보는 것을 굉장히 즐거워했으며, 그것은 '주인이 하인을 다루지 못한다'는 상황 자체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더해 레이시안은 오히려 영체이기에 편리한 점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리적인 간섭이나 공격을 아예 무시할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모든 것들은 실체가 있던 생전에는 전혀 체험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레이시안으로서는 일석이조나 다름 없었다.

 레이시안이 즐거움을 느끼는 대상은 비단 그걸로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그가 보는 모든 것에서 흥미를 느꼈다. 그는 발달한 현대 문물과 사람들의 사고에 감탄했다. 질주를 멈추지 않는 문명을 찬탄했다. 또한 그와 같이 성배전쟁에 참여한 이들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을 짓밟아서라도 성배전쟁을 바라는 그들의 모습은 레이시안이 보기에 매우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지금, 레이시안의 입가에는 평소와는 다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1.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특별할 점 하나 없는 빌딩이었다. 눈에 뜨이는 색으로 칠해진 것도 아니었고 모두가 한번쯤 눈길을 줄 만한 명품을 팔지도 않았다. 즉 번화가 어디에나 있으며, 어느날 갑자기 다른 것과 바꿔치기 되어도 그 건물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흔한 건물이었다.

  레이시안은 그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전에 그러했듯 눈길로 풍경을 훑으며.
  하지만 형태는 비슷할지언정 레이시안의 행동은 예전과는 다른 의미를 품었다.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자들을 찾기 위함이었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 레이시안은 그가 찾고자 하는 사람의 위치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어렵지 않게 방향을 찾아낸 레이시안은 곧 그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비록 빌딩숲에 가로막혀 모습은 커녕 그 사람이 있는 장소마저 보이지 않기는 했지만 레이시안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가로막는 것들이 있다고 해도 그의 눈앞에 사실은 그 사람이 있다는 일은 변하지 않는다.
  레이시안은 문득 그 사람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 사람의 목소리를, 사뿐한 몸짓을, 빛나는 표정을 회상했다.



  "…후후, 선연하네."



  그 무엇보다도 뚜렷하다.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다. 레이시안은 두가지 뜻을 담아 나직이 읊조렸다. 이슬보다도 살포시 내려앉는 듯한 모습과 대조적으로 그 사람은 맑고 또렷했다. 정정.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이 아니라 언제라도 곁에 있는 빛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여, 대답은. '괜찮느니라'. 그리 쉽게 미치고 무너져 내려주지 않을 터이니. 한 번 선택한 것이라면, 그 끝의, 그 답에 닿을 때까지. 그것이 어떠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아마도,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며 또 '하고 싶어하는 것'이니까. 나는─── 포기하지 않아.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정확히는 자신의 만족감을 채우기 위해 부러 던진 독설에도 굴하지 않고.



  아아. 네 말이 그른 말이라 하더라도, 또 악의 있는 말이었을지라도, 혹은 그저 무의미한 독설일 뿐일지라도, 나는 그러한 것을 싫어하지 않노라. 하물며 네 말은 그른 것이 없으며, 나 또한 인정하는 것들. 그렇다면 네 말과 내 생각이 다를지라도 그것을 내가 함부로 그르다 싫다 말할 수는 없는 일일 터다. …더하여, 네 말을 곱씹으면 나 또한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기분이니, 그것을 어찌 밉다 생각할 수 있다 생각하느냐. 너는 의도치 않은 것들이겠지만… 네 말은 내게, 길을 열어주는 듯한 기분이 드는구나.



  그 때 그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던가. 어떤 목소리로 자신의 뜻을 나타냈는가. 레이시안은 살며시 숨을 내쉬었다. 감탄 섞은 한숨이었다.



  "길을 열어준다니. …아아,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당신. 나는 그저 내 만족감을 위해서였을 뿐, 선택하고 걷는 건 당신 스스로 한 일이었는데. 물론 그렇다고, 내 손으로 이끌어줄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없는 그 사람에게 레이시안은 속삭였다. 연가를 부르듯 잔잔하고 나긋한 목소리였다.

  그 사람은 잠시, 아주 잠시 머뭇거리다 덧붙였더랬다.



  무엇보다도, ……네가 그러한 말을 해 준다는 것이, 너와 같은 상대로 대해 주는 것 같아. …나로서는 기쁘구나.



  당시 레이시안은 그 사람의 상냥함에 살짝 놀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눈 앞에서 말을 들었던 그 때보다도 더욱 명료하게 그 사람의 말을 되새겼다. 그러던 중 레이시안은 차츰 입가에 다른 종류의 웃음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레이시안은 이번에는 정말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어째서. 하필. 왜.
  지금인 걸까.

  레이시안은 생전과 현재를 포함하여 단 한 번도 무언가를 잊기 위해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정말로 잊을 수만 있다면 과음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지극히 감성적인─레이시안 본인조차 자신에게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은─측면의 발로였고 언제나 냉정했던 그의 이성은 부질없는 회피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레이시안은 손을 들어 가슴팍을 그러쥐었다. 마치 소리가 나지 않는 피리를 억지로 불듯 그는 목소리를 짜내어 말했다.


  "누구보다도 선한 당신. ……당신은 정말, 잔인해."


  분명 그는 현세를 좋아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모습이 좋았다. 성배전쟁에 참가하는 모든 영령을 흥미롭게 보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현세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느낀 종류의 즐거움이었다.

  성배전쟁 동안이라는, 이미 기간이 정해진 삶. 남은 시간. 생명. 아쉬움이 없도록 하고 싶은 일은 모두 행한다. 미련은 남지 않게. 현세를 즐긴 뒤, 무엇보다도 귀중한 소원을 이루고 좌로 돌아간다. 소환된 이후 레이시안은 그에 맞게 행동했다. 성배전쟁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그는 전쟁과는 별개로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했었다.

  그 사람은 또래보다도 체구가 작았다. 늘 아름다운 것들을 보아서인지 그 사람의 눈은 티없이 맑았다. 마치 연못 위에 피어난 연꽃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결코 온실 속의 화초는 아니었다. 주어진 일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으며 어떤 역경에도 쓰러지지 않았다. 즐거움을 채우기 위해 꽃대─그 사람 자신의 의지─를 꺾으려 한 그의 '짓궂은' 행동에도, 상처 입은 표정을 지을지언정 그 다음 순간 꼿꼿이 고개 들어 그를 마주보았다. 절대 스러지지 않겠다 당당히 말하며.

  그야말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동시에 그에게는 가장 잔인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어차피 시한부인 두번째 삶─정확히는 두번째 삶의 껍질을 뒤집어쓴, 성배를 갈구하는 여정이었기에 마음을 두지 않으려 했다. 생전이라면 몰라도 현재의 레이시안에게 '지금'은 그저 유예 시간일 뿐이었다.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일과도 성배를 쟁취할 때까지 해 볼 만한 일을 모두 즐기려는 일환 중 하나였다. 원래대로라면 그것 역시 영령의 좌로 돌아갔을 때 이따금 떠올릴 만한 그런 추억거리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집착 없이, 가볍게.

  집착 없이, 가볍게? 

  후후, 레이시안은 자조하며 웃었다.



  ──포기하지 않아.



  아아, 그랬지. 레이시안은 읊조렸다.
  그야말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
  ……그렇기에, 동시에 그에게는 가장 잔인한 '사람'의 모습.
  무언가를 잊기 위해 한 번도 하지 않은 행동을 하려 한 그와는 다른. 눈앞에 어떠한 광경이 있어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

  사실은 처음 말을 섞었던 그 때가 모든 것이 어긋난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에게 흥미를 가진 그 순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이 곳, 이 옥상에서, 그녀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말을 했던 그 순간 예정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시에라(Mon petit oiseau rare)."



  나는,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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