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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루파

2014.03.01 03:08 조회 수 : 36



00/



하늘하늘. 하늘하늘. 나뭇잎 어지러이 춤추는 하늘 아래, 남자는 가만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얼굴을 알고 있는 소녀. 

그리고 또 한 명 더. 모를 리 없는─── 꿈에서마저 그릴 정도로, 그립고 또 그렸던 소중한 그의 아이. 

그는 그저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입을 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겠지.

왜냐하면─────





01/



     시에라는 문득, 꿈을 꾸었다. 영체는 기본적으로 꿈을 꾸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 또한 그녀가 조금 예외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추측했다. 그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꿈 속의 꿈이었다. '생전 꿈 속에서 간 곳을, 본 정경을' 다시 한 번 보았다. 그 모습을 자신이 보고 있었다. 자신이 어딘지모를 곳에 도달하여 만난 소년과 이야기하는 것을. 


     하여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지켜볼 뿐이었다. '그 소년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만약 이름을 들었다면 그 꿈 속에서도 그녀는 소년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다면 묻지 않는다 - 혹은, 묻지 않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는 것을, 시에라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허나, 지금은 그 아이의 이름을 몰라도, 누구인지 깨닫는 것은 오랜 시간.. 정확히 말하여, 단 한 순간도 걸리지 않았다.    보자마자 아, 하고 알아내어 버렸으니까. 그리 닮았으메, 모를 리가 없는 것이었다.



   『... 강한 아이로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홀로 무언가를 이겨낸다는 것은,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당장의 즐거움을 끊고 책을 펼치는 것조차 일정 수준의 노력과 인내가 필요할진대, 부모자식으로 태어나 살아 있음에도 결코 볼 수 없게 갈라진다는 것은 오죽 속이 타들어갔겠는가. 시에라는 '분석' 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꿈 속, 소년과 만났던 순간의 시에라는. 

   지금, 자신과 소년의 대화를 바라보는 시에라로서는 그것을 그저 인형 같은 마음가짐으로 '분석' 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 멈출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자신이 아는 양 마음이 아렸다. 감정 자체를, 마치 자신이 느끼는 것처럼. ── 하루 전, 그 아침의 것과 같은 기분의 반복.



   『...귀한 아이야, 힘겹고 어려움을 털어놓는 것은 약한 것이 아니니라. 슬픔도 기쁨도, 입에 담아 나누면 반이 되고 배가 되느니.』



     ─── 네가 앞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갈지 나는 모르나, 행여나 홀로 가득 쌓아갈까 걱정이 되는구나. 

  말할 것 없이, 진심이었다. 시에라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악의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을 가진 적도, 한 적도, 또 할 생각을 한 적 조차 없었으니. 무엇보다도, 지금의 그녀는 오히려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 그리 되지 말아 달라고. 저 때의 자신은, 이유조차 모른 채 저리 빌었지. 속으로 계속, 몇 번이고 되뇌이듯. 가만히 서서, 금빛 머리칼 소년과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며 시에라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알고 있는가─? 그 이유를. ..아아니, 아직 '알고 있다'고, 그리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아는 일이었다. 허나, 이상하게도. 저 때처럼, 그저 어째서 그런지도 모르고, 어째서 아련한지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가는 실타래 같았지만, 희미하게 희미하게. 어렴풋 알고 있었다. 어째서 그러한 기분이 들었는지. 지금도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 그건 분명히...



   『.... 상냥한 사람들은, 많은 자가 그러하니까.』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 아이도, 또 다른 아이도. 모두가 그리했다. 혼자서 모든 것을 지고, 자신에게는 이유조차 한 마디 말을 해 주지 않은 채. 솔직한 마음 같은 것은 끝까지 말해주지 않은 채. 어리석은 자신은 하여 아직까지도, 그 이유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이리 헤매이고 있는데도. 그 때 스스로에게 들었던 감정의 정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이리 답을 찾아 헤매이고 있는데도. 이 또한 그들의 바람일까, 혹은 그들이 자신에게 치루길 바란 댓가일까. 시에라로서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



   "... ... 그들 모두가, 너무나도 상냥해서. ..."



     무심코 그녀는 중얼거렸다. 자신이 소리내어 말한 것을 깨닫고 시에라는 황급히 입을 감추었다. 곱게 감추어두었던 흰 손이, 흘러내린 긴 소맷자락 사이로 빠끔 보였다. 아마 들리지는 않았으리라. 저기 서 있는 그녀는 지금의 시에라만은 알 수 없을 테니까. 그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고서야, 시에라는 다시 천천히 손을 내려, 고이 양 손을 맏잡았다.



 『..만약 제가 정말로 강했다면, 그 분의 눈물을 닦아드릴 수 있었을 거에요.』



     ──아아니, 그것은 아니니라. 시에라는 본디 누군가를 부정하는 일도, 그르다 말하는 일도 없었으나, 저것은 분명히 그녀에게는 그리 보였다. 애처로울 정도로 가녀린 소년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아, 시에라는 살짝 숨을 들이켰다. 저 때는 그저 막연히 그리 생각했을 뿐이었으나,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나, 표현이 무언가 다르더라도. 분명, 분명. 지금 저 아이는, 그 아이들과, 같은 방향으로, 같은 마음으로 그리 했었다는 것을. 그 아이들도 저러한 마음이었을까. 저러한 기분이었을까. 

   이상한 일이었다. 마음을 무언가 무겁게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숨쉬는 것이 힘들고 답답하고, 아팠다. 



   『..어째서? 너는 어찌하여 그러한 말을 했느냐? 스스로 다잡았던 것 또한 있을 것이니라. ...허나 뭣보다도, 네가 그리 하지 않는다면 네 아비를 더욱 괴로이 만들 것 같아서, 가 아니었느냐..?』



     저 때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 지금의 자신에 비해서도 아무것도 모른 채 저리 말했을 것이다. 그녀의 '감성'이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해도 그녀는 '이성'으로 감성을 '분석'하고 '이해'할 수는 있었으니까. 저리 판단하여 그리 말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시에라는 숨을 삼키었다. 희미하게, 손끝이 떨린 것 같다면 기분 탓이었을까. 아아, 바보 같은 자신. 스스로 저리 말해두고서도, 스스로 알지 못했다. 아니, 지금 그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정답인지도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그 아이들이, 어찌하여, 그렇게 행동했는지. ... 조, 금씩. 조,... 금,씩.. 흐릿, 하게나마.. 알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어찌 그렇게 잘 아십니까?』



     글쎄.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시에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모르게. 아직 '지금'의 그녀도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저 때의 자신은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을 터였다. 그러함에도, 맘 속 깊이깊이, 무의식 어딘가에선 저리 깨닫고 있었다는 것일까. 그녀 자신의 모습이니 알 수 있었다. 저 말은 결코 논리로 마음을 이해하여 한 말 따위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저러한 말까지 한 것이겠지.



 『.... 아이야, 비록 괴롭고, 어렵고, 힘들고 또 슬프더라도.  ....아직 너는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느니라. 그 하늘 아래, 저 너머 어딘가, 네가 맞는 이 바람 끝에선 분명 네 소중한 이들 또한 너를 그리며 있을 터이니, ....그러니, 그것만큼은 부디 잊지 말고 살아다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소년은, 곧 깊이, 허리를 숙였다. 어찌하여 네가 내게 그러느냐. 절을 받으면서도 그러할 필요 없다 반복하는 과거의 자신을 보며, 시에라는 쓰게 웃었다. 맞는 말이다. 아이야, 네가 내게 해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 해야 할 것이로다. 네가 알게 해 주었느니. 아니, 그 전에───

   그녀는 살포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저것은, 본디 내가 그 아이들에게 닿길 바랐던 말이었구나."



     뺨에 한 줄기, 이슬 같은 물방울이 도르륵 흘러내렸다.





02/



 『... 저는, 』



     시에라는 바람을 만지듯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지금 실체가 아닐진대, 그럼에도 그녀란 존재를 따라다니듯 그 하얀 발이 내딛은 땅은 푸르렀고 나비가 마치 꽃인 양 그녀 주변에서 춤을 추었다. 따스한 바람이었다. 숲내음 가득해서, 요정이 없음에도 싱그러웠다. 이 바람 끝은 분명, 그에게 닿겠지. 시에라는 살며시, 다시 고개를 돌려 두 명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살짝, 잠긴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이는 손끝에 힘을 주었고, 곧 또렷 말했다.



  『...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께서도.. 부디 저를 잊고...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순간, 투명한 바람이 확, 너른 바다마냥 펼쳐졌고, 곧 다시 산 너머로 날았다. 아아, 도달하겠구나. 시에라는 가볍게 눈을 내리깔았다. 소년 앞의 그녀는 나즈막 좋은 아이라 중얼거렸고, 아이는 답을 구하는 나어린 아이처럼 닿았겠느냐 천천히 물었다. 그 앞의 자신은 분명 닿았노라 말했고, 그에 아이는 또다시 감사하다 말했다. 지나칠 정도로 좋은 아이였다. 저 당시의 시에라가 보기에도, 지금의 그녀가 보기에도. 그리고, 이제 그들은 헤어질 시간이었다. 대화 자체는 많지 않았고, 그마저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둘은 눈을 마주치고, 약속이나 한 듯, 끌리듯 베시시 웃었다. 그 표정 그대로, 과거의 시에라는 살짝 팔을 뻗어, 흰 손가락 끝으로 바람에 한들한들 춤을 추는 금빛 머리칼에 살짝 스치듯 손을 대었다. 



   『...안녕히, 자애롭고, 은혜로운 분이여.』


   『...상냥한 아이야.』


   『...?』


   『─────』

     



"네가 행복해지기를."     



     과거의 시에라는 부드러이 미소지은 채, 가만히 읊었다. 그와 동시에, 지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시에라 자신 또한 함께.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또 살포시 앳된 미소를 품은 소년은 깊이 허리를 숙였다. 화려한 예법도, 절차도 없지만 오로지 진심만을 가득 담아, 소년은 나붓 허리를 숙였고,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소녀 또한, 시에라 자신 또한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소년이 천천히 몸을 올렸을 때, 그의 눈 앞에 남은 것은 사락이는 봄의 녹빛 나뭇잎 소리와 상냥하게 어루만지는 햇살 한 줌 뿐. 

     동시에 시에라는 눈을 떴다.





03/



     시에라는 무심코, 한 쪽 뺨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근래에 들어, 눈물이 헤퍼진 듯한 기분이었다. 아직 날은 해가 채 뜨기도 전의 이르디 이른 새벽이었지만, 시에라는 바깥 공기라도 마시는 쪽이 낫겠다 생각했다. 또다시 이른 아침의 기상인가. 본디 아침이 이른 성품이었으나, 이리 자주 비슷한 꿈을 보고 일어나는 것은 그저 일찍 일어나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나뭇잎 바스라지는 아침이었다. 맨 땅을 촉촉히 밟으며 새벽 공기를 깊게 들이쉬던 시에라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가만 물었다. 익숙한 분위기, 익숙한 공기. 그녀가 아는 한 이러한 바람을 휘감은 자는 단 한 명 뿐이었으니까. 이 때 그녀 주위에 있을 수 있는 자라면 더욱이. 무슨 일이더냐, 소녀는 물었다. 아직까지 전날의 그 쿵쾅거림이 완연히 가신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그래도 어떻게든 평정을 되찾아 유지할 수 있었다. 새벽의 고요는, 그녀를 맑게 되돌리니까.   

   그러나 그녀의 물음에 되돌아온 답은,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짤막한, '고마워'.


     그녀는 빙글 몸을 돌렸다. 그녀를 따르듯, 넘실거린 은빛 물결이 한 바퀴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끔뻑하고는 곧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언제나 생글생글,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진심인지 아닌지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그러한 미소만을 담뿍 흘리던 그는 살짝, 살짝, 아주 희미한 웃음만을 삼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깜짝 놀라게 된 것은 그 휘어진 눈가에 섞인 울음이었지만. 


     시에라는 곧바로, 그가 어째서 그러한 표정을 짓는지 이해했다. 그를 알고 또 그것이 그녀의 기억이었던 이상, 그가 그 중 무얼 보고 저러한 표정을 짓는지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나즈막 중얼거렸다.



   "... ... 바보 같을 정도로 닮은 부자父子로다.  그리 참는 것도 어찌 그리 똑같은 게냐."



     그녀는 몇 걸음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 가만히, 팔을 올려 뻗어 톡톡, 가볍게, 가볍게, 아주 조심스러이 그 뺨을 달래듯 매만졌다. 레이시안은 평소와는 달리, 늘상 하는 그러한 소리도, 행동도 하나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그 슬픈 미소 그대로 말했다.



   "..그러고보니 당신은 그 아이를 보았지."


   "....아아."



     시에라는 올렸던 팔을 살짝, 다시 내려 소맷자락 속에 숨기고는 나즈막히 말했다. 잔잔히, 개울물 같은 목소리만이 고요 속에 울렸다. 알싸한 새벽 바람,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흐릿이 먼 별.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한 아이의..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라면, 본디 그녀를 기쁘게 하였기에.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따스이 만들었기에.



   "... 외모를 제외하면, 어찌 너의 아들이 그리 순하고 상냥할 수 있는지... 그야말로 원숭이가 인간이 되는 그 사이만큼이나 영문 모를 일이지만."


   "..후후, 뼈아픈 한 마디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긴 말은 필요치 않았다. 그저 한 마디 말로도 충분한 감상이었기에. 그 아이를 말하는 것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고 남았기에.



   "... 좋은 아이더구나."


   "... 내가 본 누구보다도, 어떤 사람보다도. ....상냥하고, 착한 아이였어. ....내 아들은."



     소녀는 선선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곧, 가만히 눈을 떠 또다시 읊조렸다.



   ".. 제 자식을 예뻐하지 않는 부모는 없느니. 하지만 너는.. ....뭐어, 인정해 주겠노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네 아들이란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시에라의 말에, 레이시안은 무어라 답하는 대신 그저 빙긋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볍게, 작게 한숨 쉬듯 숨을 내쉰 시에라는 가만히, 무엇인가 생각난 듯, 문득 떠오른 듯 고개를 들고 물었다. 답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 자신의 입으로 듣고 싶었으니까.



   ".... 그래도, 물어는 봐야겠구나.

   ... 네게 닿았느냐."



     순간, 남자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미동도 없었다. 그리고, 곧 가득 씁쓸한 느낌 묻은 미소를 지으며 툭, 하고 대답했다.



   "...시에라, 가끔 당신은... 잔인할 정도로 나를 찌르네. 물론,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


   "... 닿지 않았다면, 내가 이럴 리가 없잖아.

   잊을 수도 없고, 잊을 리도 없는 목소리를 다시 들었어."


   "... 그런가.   ... ... ... 다행이구나."


   "... ...."



     시에라는 그대로 눈을 한 번 내리깔고는, 곧 고개를 돌렸다. 밤하늘의 거뭇거뭇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나무들과, 군청과 검은빛이 어지러이 섞여 서로 물든 이른 새벽 하늘. 문득, 그녀는 레이시안이 그로서는 유달리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천천히 다시 그를 향했다. 그는 툭, 툭.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 이번은, 바로 옆이었는데.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는데.

    .... 결국, 과거의 일이야. ...절대, 닿을 수.. 없어."



     뚝. 한 방울,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구슬처럼, 똑. 똑.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처럼, 똑, 또르르. 한 방울씩, 한 방울씩. 시에라는 멍하니,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알지 못한 채 그저 굳은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어찌 우느냐. 말을 하려 해도 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못내 마음이 시려서, 욱신거리고 또 아파서. 마치 자신이 우는 것처럼, 당장 울음이 터질 듯 슬퍼서. 시에라는, 살짝, 입을 앙다물고는 곧 다시 힘을 풀었다. 살짝, 손끝을 쥐었다 곧 다시 풀었다. 그리고는───


     이상한, 일이었다. 서번트는 살아 있는 인간의 몸 따위가 아닌데. 단지 마력 덩어리일 뿐인데. 

   ───이토록, 이토록 따뜻해서. 오래토록 닿아본 적 없는 온기가, 따스하게 감싸안아서.


     순간, 가득 다가온 따스함에 남자는 움찔, 그렇지만 다시. 오히려, 오히려 품 안에 깃든 그 상냥한 공기에, 온기에, 포근함에 안기듯. 흘러내린 눈물 방울이, 뺨을 타고 내려 소녀의 어깨에 닿았다. 그저, 서로 아무 말 없이, 그렇게 가만히. 가만히. 조용하게, 하지만 무엇보다 따뜻하게. 옅어져 가는 저 하늘 달빛 같은 은사와, 마악 멀찍이서 손을 뻗는 햇빛 같은 금빛이 바람 소리 한 번에 스치듯 겹치었다. 빛을 자아낸 실이 서로 엮이고, 새하얀 꽃 향기와 버들 내음, 새벽 바람의 맑은 향취와 숲내음의 싱그러움이 하늘하늘 함께 녹아들었다. 서녘으로 가라앉는 달빛이 금빛 머리칼을 창백하게 물들이고, 동쪽에서 퍼져오는 금빛이 나붓 춤추는 은사를 금빛으로 물들일 즈음, 가녀린 어깨에 파묻히듯 안긴 흔들림은 서서히 멈추었다.


      하지만, 역시. 이상한 일이었다. 흔들림이 멈춘 후에도, 그저 말 없이, 말 없이. 조용하게, 한동안 온기는 맞닿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그 따뜻함을 잃고 싶지 않아서. 잊은 채 살아온 포근함이 닿았던 손끝에 애달파서.





04/



     천천히, 새하얀 어깨에 쏟아지듯 흘러내린 금색 머리칼이, 아쉬운 듯 아래로 사락이며 떨어졌다. 고개를 든 레이시안은 눈물 자욱 남은 그 표정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는 시에라를 또렷 보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인지 알고 있을까.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또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 본인도 모르는, 못내 걱정 가득하여 잔뜩 흐려진 얼굴로, 시에라는 또다시 가볍게 팔을 뻗어 살짝, 청년의 뺨에 눈송이 내려앉듯 조심스레 얹었다. 흐른 흔적을 닦아내듯, 아직 채 흐르지 않고 맺혀 남은 듯 촉촉한 눈가를 가는 손가락이 살며시 훔치었다.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을 만지듯 한없이 상냥하고 또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것을 거절하지 않은 채, 레이시안은 가만히, 그 손끝이 뺨을 덧쓰는 것을 막지 않았다. 


     소녀는 말이 없었다. 그저 그렇게 뺨을 적신 물기를 닦아내며, 걱정 가득한 눈으로,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길 잃은 어린 아이 같은 투명하디 투명한 눈으로 그저 그를 올려보았다. 누가 보아도 오롯 그의 기분을 그리고 있다. 역시, 이런 세상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너무도 무르고 또 상냥한 소녀였다. 이렇게 오롯 선의만을 가지고 타인을 대하는 존재가 흔할 리 없었다. ...특히, 그, 레이시안에게는. 문득 그 점을 떠올리고, 아니면 그 표정을 보고, 혹은 방금 닿았던 그 온기를 기억해내고, 레이시안의 입가는, 꿀타래 같은 그 눈동자는, 곧 다시 희미한 미소에 물들었다.



   "...반대, 가 되어버렸네."


   "...반대...?"


   "으응, 어제 이맘때는 당신이었는데. ....당신도, 이런 꿈을 꾸었던 걸까나."



     무심코, 시에라는 전날 그녀는 전부 다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상하게도, 그가 묻는 것은 그 꿈의 내용 자체가 아니었다 생각했다. 그렇다면, 무슨...? 어떤 걸, 무엇을 묻는 것인가. 아릿하게 슬픈.. 그런, 꿈?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시에라는 멍하니 그저 그를 올려보았다.



   "...그런, 꿈...?"


   "... 응,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 안타깝고, 슬프고, 애틋한데. ... 또, 그렇게라도 본다면, 보게 된다면 또 그것이 기쁘고. .."


   "... 그 아이가 무얼 선택할지, 그 다음의 일을 생각하면 그것이, 당장 어떻게든 말리고 싶어 몸이 떨리는데 그럴 수 없어도 스스로가 싫어지고, 너무나 분하고, 그럼에도 그 웃는 모습이 너무나 예쁘고 소중하고 또 아련해서. .... ───?!"



     시에라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중얼거렸는지 그녀 본인조차 의식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듯, 맘 속 깊은 곳 어디에서 나온 듯 곧바로 흘러나온 대답. 한 점 더러움 묻지 않은 금빛의 눈이 순식간에 또다시 당황에 물들어 헤매였다. 그 모습을 애련한 듯 바라보던 레이시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남은 것은, 한 발자국 내딛는 것 뿐... 시에라, 지금의 당신은 분명 알고 있어. 알게 되었어. 소녀는 안타까울 정도로 떨리는 눈동자로, 흔들리는 그 애잔한 어깨로 파들거리며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 놀랐다기보다는 흡사,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마악 처음으로 겪는 아이의 떨림과 두려움.



   "..나는,  그저, 그저... 꿈에서도, 가아끔, 그 아이를 볼 때면,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고, ...아, 아니. 항상 꿈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꾸, 언제나 마음 한 켠이..."


   "무겁고, 신경 쓰이고. 자꾸 목소리도, 그 아이가 했던 말도, 한 번도 잊혀지지 않고 오롯 그 표정까지도 기억나고."


   "...?! 어, 어, 어떻게 아느냐!"


   "그야, 당연하잖아. 시에라." 



     레이시안은 웃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한, 그런 미소였다. 꿀 같은 금빛 눈이 물결처럼 흔들리는 햇빛 눈을 담았다. 나, 나는... 시에라는 당황하다 못해 이제는 떨리는 목소리였다. 어째서, 어째서 저 남자는 알고 있지. 어찌하여? 무엇 때문에? 무엇이기에? 그녀는 거의 더듬대다시피 중얼거렸다.



   "하, 하지만 무겁고 그런 쪽으로만 신경 쓰이는 것은 결코 아니라...! 그, 그래도 떠오를 때면, 생각할 때면,"


   "─────그것만으로도 무엇인가 기쁘고."


   "──, 그리고 그 괴로움.. 또한, 그 아이의 선택이란 ... 그들이 고른 길이란 것을 알고 있으니...!"


   "─────하지만 그래도, 그걸 알면서도. 바보 같은 짓이란 걸 알면서도 바꾸어 주고 싶고. 어떻게든 해 주고 싶고."


   "...읏, ...그런 말을 한 적 없지 않았느니..!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도 그 착한 아이들은."


   "─────차라리 울고 화내고 미워하길 바라지만, 오히려 괜찮다며 웃고. 그러면서 오히려 이 쪽을 걱정하고."


   "그, 그래서 더욱, ... 더욱,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도..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그저 막연히, 그런데 특별하게 ..그들이, "





   " " 행복해지길 바라고. " "




     시에라는, 얼어붙은 듯 멈추었다. 동시에 내뱉은 한 마디. 어째서? 어떻게. 그는 어찌하여 그것을 알고 있는 건가.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여전히, 변함 없이, 한숨 쉬는 듯, 하지만 다른 때보다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따뜻한 빛이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비치는 눈. 무엇보다도, 마치 시에라에게 너는 이미 알고 있지 않냐고 말하는 것만 같은, 그런 눈. 그것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말하고 있었다. 시에라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단지 그녀 자신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일 뿐. 모를 리 없는 것이라고. 특히나, '지금'의 시에라라면. 하지만, 무엇이기에? 아직까지 시에라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기에, 어떻기에 그는 이렇게 훤히, 그녀의 생각을 전부 다 알고 있는 것이었나. 그녀는 그와 그녀의 공통점을 휙휙 책장을 넘기듯 생각해 보았다. 전승, 삶. 아니, 이런 것이 아닐 것일진대. 그럼 무엇이지. 방금, 그가 한 말부터. 그의 행동부터. 내가 어제 꾼 꿈. 그가 방금 본 꿈의 장면. 분명히 다른 사람들의, 다른 시대의, 다른 장소의 이야기. 같은 점이라면─────



     아.



     안쓰러울 정도로 파들거리던 어깨마저, 누군가 잡은 듯 멈추었다. 툭, 뺨을 타고 흘러, 바닥에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한 방울. 두 방울. 아, 아아. 시에라는 당황한 듯, 본인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놀란 듯 크게 떴다. 투명한 물방울이 방울방울, 뺨을 천천히 적셔. 어째서 이렇게 되는 걸까, 어째서 이 세상에 내려와 자신은 이리도 울보가 되어버린 것일까. 시에라는 애써 숨을 고르며 눈물을 멈추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이 되는 일 없이.



   "..아, ...어, 어째서...."



     그 두 가지 꿈의 같은 점이라면, 그것은───

     항상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았던, 마음 한 켠 켜켜이 쌓여 있던 그것과 같은 점이라면, 그것은───



"──저는, 괜찮으니. 아버지, 께서는..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그 아이는,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말했을까. 시리고 아팠을 텐데,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일까. 어째서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 시에라의 그 하얀 아이와 같은, 분명히 같은 뿌리의 마음. 작고 작고 연약하고 여린데도, 그럼에도 곧고 꺾이지 않았던──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요. 웃어 주세요."   



     아.


     손끝이, 파들거렸다. 나는, 나는 그 아이에게 해 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오히려 오히려, 다른 모두를 위해, 아니, 다른 모두조차 슬프게 만들었고 그 아이에겐 심지어 누구보다 괴롭고 무거운 짐을 지게 만들었는데. 어째서 그 아이는 괜찮다 웃을 수 있었을까. 어째서, 오히려 자신에게 그러한 말을 한 것이었을까. 닿을 듯 말 듯, 답이 잡힐 듯 말 듯. 한 걸음만, 한 걸음만 더 나아간다면───



"..가엾은, 나의 딸. 누구보다 상냥하고, 아름다운, 나의 빛."   



     아, 아아.


     보이고, 있었다. 시에라는, 이제 한 번 터져버린 눈물샘은 고장난 수도꼭지마냥 한없이 넘쳐흘렀다. 똑, 똑, 방울방울이 아니라, 그저 그저 계속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동안, 그 긴 세월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감정이 한꺼번에, 이제서야, 쌓이고 또 쌓이고, 쌓인 것을 그녀 자신도 모른 채 내버려두다 기어코 터져버려, 멈출 새도 없이 하염없이, 빗물 내리듯 흘렀다. 그것은, 그녀가 몰랐던. 이유를 알 수 없었던, 하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이유 같은 것은 알 수 없었음에도 마음에 걸리고, 슬프고, 하지만 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소중하고 기쁘고, 자랑스럽고. 그리고 우는 것이, 괴로워하는 것이 보고 싶지 않았고. 무슨 짐이라도 대신 지어주고 싶었던, 그것은. 그것은, 마지막 순간, 그 아이가 그리 웃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것은, 분명히────



"───사랑하는, 나의 누이."   



     시에라는, 서럽게 울었다.





05/



     정신없이, 그렇지만 통곡하는 아가씨라기보다는, 오히려 길 잃은 어린 아이의 울음처럼 시에라는 그저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 여직 몰라서 미안해.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당신들만 아프게 해서 미안해. 순간, 따스한 온기가 그녀를 감싸안았다. 아무 말 없이, 불과 수 분 전 그녀가 그리했던 것처럼, 그는 그저 시에라를 부드럽게, 어르듯 끌어안았다. 그것을 심지어 눈치채지도 못한 채, 시에라는 하염없이 그저 울 뿐이었다. 그 오래고 오랜 세월동안 흘려본 적 없는 - 아니,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마음'이 한 번에, 홍수가 난 듯, 둑이 무너진 듯 터져나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리도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를 때, 그들은 무슨 마음이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상냥한 사람들이었던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모든 순간이 스쳐지났다. 주마등과는 또 다른, 모든 기억들. 그 아이의 웃음, 그의 미소. 넘어져서 구른 것을,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일어나서 울음을 터뜨리자 조금 곤란한 듯, 하지만 그래도 어여뻐 꼬옥 안아주었고. 그 옛날 어느 한 밤중에는 함께 몰래 나가 밤의 꽃밭을 구경했고, 몰래 촛불만을 든 채 이불 속, 깜깜한 밤에 서책을 뒤적이다 불을 지를 뻔한 적도 있었고. 그 분이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셨던, 가볍게 무등을 태워 주변의 사람들이 깜짝 놀랐던 그 때도, 그렇지만 결국 모두 다 큰 소리로 웃어버렸던 그 때도. 천둥 내리치고 하늘마저 통곡한 그 밤에 그저 자신의 이름을 부르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반복했던 순간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환히 하늘이 열리고 구름이 개이는 그 날의 그 순간도. 

   모두가, 모두가. 그 모든 순간들이────



     시에라의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속이 진정된 것도 있겠으나, 기진맥진해진 탓도 있었으리라. 아직도 숨은 컥컥 막혔다. 그리도 서럽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소리내어 펑펑 울어본 것은 생전 처음의 일이었다. 목이 메였다. 조금 갈라진 기분도 들었다. 잔뜩 젖은 눈가가 무거웠으나 떨림은 서서히 멈추었다. 그리고, 그제사 시에라는 그녀가 레이시안의 품 속에서 그리 멋대로 통곡하듯 울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평소의 확 얼굴이 벌개져 당황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 조금 멍한 상태인 것일까. 시에라는 그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새빨개진 눈가. 아마 분명히 우스꽝스러울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그저, 나긋이, 하지만 따스하게 노래하듯 말했을 뿐이었다.



   ".... 후련해졌을까나..?"


   "......"



     대답 대신, 시에라는 발개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파들파들 떨리는 호흡이 약했지만, 천천히 천천히, 조금씩 느려지고, 조금씩 깊어지고. 애처로이 흔들리던 손끝도 점차 가라앉았다. 시에라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 꽤 효과가 좋은 진정 방법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생전에는 그다지 쓸 일이 없었지만서도. 그녀는 읏, 하고 복숭앗빛 입술을 오므리고는 양 손으로 눈가를, 양 볼을 살짝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 달아오른 화끈거림이 비로소 조금 식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시에라는 조금 잠긴 목소리로 나즈막 말했다. 면목 없다는 듯, 살짝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흉한 꼴을 보였느니라."


   "전혀 그렇지 않아."



     그렇게 대답하며, 레이시안은 손을 뻗어 눈물을 훔치듯 시에라의 눈가를 가볍게 쓸었다. 아직 남아 있던 뺨의 뜨거움이 비로소 조금 더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 서늘함이 어쩐지 기분 좋아서, 아니면, 그저 그가 말한 대로 '후련해져서', 시에라는 무심코 입끝에 살짝 미소를 걸었다. 그것을 눈치채었는지, 레이시안은 가만 물었다.



   "...당신이 찾던 것, 한 가지는, 찾은 걸까나."


   "...응, ..아마도, 가 아니라. 분명히."


   "그렇구나... 축하, 해 주기 전에, ....후회하지 않아?"


   "후회?"


   "으응. 그걸 깨달은 것. 방금 당신은 그렇게 울 정도로, 그렇게 아팠을 테니까. ..아마,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고."


   ".... 후회, 후회인가.."



     시에라는 이제 살짝 붉은 기만이 감돌 뿐인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잠시 숨을 골랐다. 그가 말한 것들은 전부 다 한 점 그름 없는 정론이었다. 둑이 무너져내린 듯, 무엇인가 마음속을 마구 찌르고 누르고 베어버리고 부숴버리고 짓밟는 것 같은, 그런 아픔이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어서───



   "응, 역시 전혀 그런 생각은 하지 않노라."


   "흐응, ..정말..?"


   "아아. ...확실히 네 말에는 틀린 것이 없다. 많이, 아프더구나. 생전 느껴본 적도 없었을 정도로. 곧게 말하자면, 아직도 한 켠이 아려. 허나.. 이제 나는, 이제서야... 이리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 지만.. 나는 비로소 돌아간 후 그들을 당당하게 마주볼 수 있을 것 같느니."


   "....그렇구나..."


   "꾸중을 듣는다면, 그 오랜 시간만큼의 분을 한 번에 들을 각오도 하고 있고, 정말로 정말로 감사했다고, 정말 소중한, 정말 좋아하는, 이 세상 제일로 자랑스럽다 말할 것이니라. 그리고, ... 아픔만이 아니라, 기쁨 또한 알게 되었기에. ..."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소중한 일인지, 얼마나 힘이 되는 일인지, 그들이 자신을, 자신이 그들을 또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었는지, 비로소 깨달았으니 마음이 따뜻해져. 따스한 난롯가에 앉은 것처럼 마음 한 켠이 오롯 꽉 찬 기분이 들어서, 내 편이 있고.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나 또한 그들을 그리 생각하고. 그러한 마음을 알았다는 것이 어쩐지 뿌듯하고 또.. 아마도, '행복'해서. 시에라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돌아왔다. 아직 운 흔적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으나, 그런 것쯤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반짝반짝.



   "먼저, '다녀왔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어."



     폭신, 폭신. 솜사탕 같은 미소가, 환히 걸렸다.





06/



   "... 아침부터 유난이었도다."



     장밋빛 입술을 살짝 오므리며, 시에라는 톡,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 말하면서도, 표정은 더없이 맑았다. 습하지 않고 깨끗하고 또 상쾌한, 그런 개운한 공기였다. ..그녀의 주변은 항상 그랬지만, 지금 유독 그러한 것은 그녀의 기분 탓일까. 그러한 것에 일말 신경쓰는 것도 없이, 시에라는 깊이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한 시에라의 하는 양을 바라보던 레이시안은 나긋이, 하지만 예고 없이 입을 열었다.



   "...시에라."


   "...응?"


   "부탁..이랄까, 대답해 주었으면 하는 게 있지만."


   "... 말해 보거라."



     시에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애당초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는 성품이 결코 아니었거니와, 지금 같은 기분에, 그것도 그가 묻는 것이라면 그녀는 무엇이든 자신의 가능한 범주 안에서라면 해 줄 용의가 있었다. 그것도, 기꺼이. 시에라가 먼동 트는 곳에서 비치는 빛 같은 눈동자를 그대로 향하자, 레이시안은 천천히 말했다.



   "당신만 허락해준다면,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좀더 특별한 호칭으로 당신을 부르고 싶어. 안될까나?"



     시에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리 물은 남자는 상냥하게 웃었다. 그로서는 드물게도, 티 없고 그림자 없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 미소에 문득 눈을 깜빡이던 시에라는, 자신이 무심코 멍하니 넋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며 또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한 심장 소리를 경동맥이든 부정맥이든 무엇이든이라 애써 -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 생각하려 노력했으며 또 태연을 유지하기 위해 입가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라도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고서야, 시에라는 레이시안의 말을 생각할 수 있었다. 특별한 호칭. 그가 말하는 특별한 호칭이 무엇을 묻는 것인지는 명백한 일이었다. 어렵지 않게 답을 낼 수 있었다. 


     시에라는 살짝 손을 오므렸다. 생전에도 겨우 십수 년 가량만 불릴 수 있었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애써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지금은, 생전이 아니니까. 이제는 곧게 말하자면, 아무래도 괜찮은 거니까. 

   결코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었으면, 바라는 건 아, 아닐 테니까── ...아마도.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어차피 그녀의 이름만으로 그녀가 누군지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말해 주어도 상관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려 무진 정성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그녀의 마음속 퐁퐁 솟아난 물방울은, 수면 위 돌멩이를 던진 듯 둥글게 둥글게 파문을 일으켰고, 그녀는 결국 그 파동에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이름을 불러 주면 좋겠다고. 그 목소리로, 자신을 불러주면, 기쁘겠다고.



   "─── 시에라."


   "으응...?"


   "시에라(Sierra) 가 아니니라. ....조금, 발음을 다르게 해서, 시에라(Shera)"


   "...시에라, .."



     아마, 이 나라의 표기법으로 표현한다면 같은 글자를 사용할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발음은 달랐다. 그녀의 말에서도, 그의 말에서도. 그는 나즈막히, 입가에 머무르듯 몇 번씩 가만히 읊조려보는 기색이었다.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양친이 지어주신 소중한 이름임에도, 그녀는 불리지 않았다. 하여 그 오랜 시간만에 듣는 이름이 아무런 감흥도 없으리라고는 예상치 않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어쩐지, 기쁘고. 가슴 한 켠이 간질간질해서. 깃털로 건드리는 것처럼, 그런 느낌이라서. 



   "후응, 처음 내가 지어 주었던 이름이 시에라(Sierra)였는데..   응, 당신의 이름과 비슷하게 맞았다니, 이건 기쁘네."


   "....믓, 바, 발음이 다르니라! 의미도!"



     그렇게 웃으며 남자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홀릴 것마냥 눈이 곱게 휘었고, 시에라는 순식간에 또다시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저 남자는, 언제나 말하지만 취미가 나쁘다...! 어찌하여 사람을 이리도 뒤흔드는... 그렇지만, 시에라의 생각은 곧 레이시안이 베시시 미소지으며 덧붙인 한 마디에 완전히 기능을 정지하고 말았다. 펑, 하고. 생각이 터지듯.



   "으응, 그렇구나. 사랑스러운 시에라(Shera)"



     수면 위에, 파문이 아닌 폭발이 일어난 느낌이었다. 마치 그런, 그런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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