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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치(기) 올림픽

로하 2014.02.21 08:27 조회 수 : 1




     『Attention Please, There will be performance of...』


적막한 가운데, 그 끝을 고하는 안내 방송만이 치직거리며 울려퍼졌다. 아무도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 약 한 시간 후라면 모를까, 적어도 지금은. 다들 제 속 꼬이는 것만이라도 어떻게 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겠지. 탓할 것은 없다. 서로 도끼눈으로 노려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근거 없는 험담을 궁시렁대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페어 플레이를 하고 있는 셈이니까.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기실을 나와서, 경기장으로 향하는 그 길목. 그녀가 곧 눈의 요정마냥 춤출 빙판 위, 하이얗게 퍼질 은사를 곱게 땋아 묶은 소녀는 곧게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 돼?"



어느샌가 다가온 남자의 목소리. 소녀는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했던 것인지, 혹은 차가운 공기 속 가벼이 닿은 따뜻한 숨결에 놀란 것인지 사알짝 몸을 움찔 떨었다. 가녀린 어깨가 부서질 것처럼 순간 흔들렸다. 그제사, 소녀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투명한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뒤에서 부드럽게 끌어안은 남자의 꿀 같은 눈을 오롯 담았다.



"... 아무래도, 부정은 하지 않아."


"흐응. ..이건, 당신 같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다니. 사랑하는 시에라, 내가 파트너로서 실격인 걸까나...?"


"...?!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그냥 이건... 첫 출전하는 종목.. 첫 올림픽이니까...."



후후, 그렇다고 해 둘까.. 남자는 애정을 담뿍 담은 목소리로, 마치 져 준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시에라, 라고 불린 소녀와 남자, 샤를은 프랑스의 피겨 올림픽 대표 선수로, 현재 그들의 순번까지 약 20여 분을 남겨 둔 상황이었다. 단지 그들이 그들 각자의 게임─ 남녀 싱글을 기다리는 것이었다면 이리 떨리지는 않았으리라. 마치 눈의 요정이란 찬사를 들으며, 내려앉는 모든 얼음 위에서 그 투명한 은과는 다른 금빛 우승을 차지해 온 시에라나, 빙판 위의 황제라는 별칭이 굳어진 지 오래인 샤를 역시 그러한 기록을 이어나가며 피겨에 그리 강하지 못했던 조국 프랑스를 당당한 피겨 강국으로 만들어 온 두 천재였으니까. 


그러나, 이번은 조금 달랐다. 혹 오해를 불러 일으킬까 말해 두자면, 샤를도 시에라도 이미 ── '당연하다는 듯' 개인 남, 녀 싱글에서는 본인들의 최고 기록을 가뿐히 깨뜨리는 - 다시 말해 세계 신기록으로 - 우승을 차지했으나, 또 다른 게임 하나가 남았으니까. 


그들이 이번에 처음으로 또 출전하게 된 페어 스케이팅.


말 그대로, 남녀가 서로 함께 호흡하며 맞추어야 하는 빙판 위의 파드되. 본디 프랑스의 페어 스케이팅 대표는 다른 선수들(그들 역시 연인이었다. 이 둘과 마찬가지로.)이었으나, 연령적인 문제와 컨디션 난조가 겹치어 반 년 전 급작스레 대표팀을 그만두게 된 것이었다. 가장 유력했던 후보는 안타깝게도 여성 선수 쪽이 발목 부상. 하여, 그 여성 선수를 대신하여 프랑스 내 올림픽 대표팀 대표가 간곡히 부탁하며 또 관련 부처에서까지 정중한 서한을 보낸 끝에, 소녀. 시에라가 그녀를 대신하여 페어 스케이팅의 여성 파트까지 맡게 되었고(솔직히, 시에라는 싱글 대표가 페어 대표까지 맡을 수 있었던 것인지 그 때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헌데, 여기서 또 발생한 문제가 파트너 포지션이었던 남성 선수의 급작스런 은퇴 발표.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언뜻 듣기로는 척추에 병이 있던 것이 발견되었다 했다. 단순한 일상 생활이나 코치로서 조금 움직이는 것 정도는 무리가 없지만, 선수로서 연습을 계속한다면 기록은 커녕 몸을 망칠 것이 뻔한, 그런 병이라고. 어디까지나 공개적인 이유였지만.


각설하고, 그렇게 또 빈 남성 선수 포지션을 누구로 채울지, 상부의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에라 셀레스타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남성 선수가 누구인지, 그들 뿐 아니라 전국민.. 아니, 스케이트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즉시 대답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하여 샤를까지 페어 스케이팅의 대표로 발탁되었고, 그들은 순식간에 스포츠 란의 일면, 유력 주간지와, 프랑스에서는 심지어 일간 신문의 제일보를 장식했다. 단순히 매우 훌륭한 운동 선수를 넘어, 그들은 외모도 연기도 무엇도, 그야말로 할리우드의 영화 배우 이상의 주목 대상이었으니까. 여러 가지로. 넋을 잃고 볼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녀 선수. 천재적인 재능. 훌륭한 집안. 그것만으로도 이미 신문 일면 소재로는 충분했지만, 거기에 그 둘이 서로 한 시도 떨어지지 못할 정도로 깊은 사랑에 빠진 사이란 것은 신문 일면을 넘어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라 해도 좋았다. 



"므.. 믓, 또 내게 져 준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전혀, 나의 사랑스런 시에라. 당신이 무엇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는지, 내가 모를 리 없잖아...?"



움찔. 소녀는 또 한 번 가볍게 몸을 떨었다. 정말이지, 둘러대는 것도 비밀도 통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녀의 연인은. 그렇다 하여 그녀가 그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도, 또 말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나, 그래도 그저 말하기 부끄러운 것은 조금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으면 바란 것이었다.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있어 가감이 없는 그와는 달리, 그녀는 그리하기에는 조금 수줍었으니까. (물론 남자는 그러한 그녀의 반응이 귀여워 부러 더 그냥 넘어가지 않았지만 그것을 구태여 그녀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남자가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사실, 연기를 선보인다는 것 자체는 어떠한 긴장도 무엇도 없었다. 그 정도 시선에 겁먹거나 긴장할 정도로 그녀는 보기보다 배짱 있는 소녀였다. 거기에 이미 경력이 오래다면 말할 것도 없겠지.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혹여, 혹여. 혹시라도. 만약이라도 그녀가 그에게 무언가 방해가 되는 일을 해 버릴까, 그러한 실수를 내어 버릴까 하는 것이었다. 얼굴 발그레져 그렇게 계속 전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그를 그리는 마음 또한 지지 않았기에, 그에게 무언가 폐를 끼친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그러한 행동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어떻게든 전부 다 주고픈 마음인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면 그보다 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은 없을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 시에라. 당신은 당신인 채로 있어 줘. 그것만으로도, 무엇보다도 충분하고 또 기쁘고 행복해."


".... 읏,"



아, 또 귀여운 표정. 자신의 말에 또 귓불을 발갛게 붉히는 시에라를 보고, 샤를은 나즈막히 웃었다. 저리 말하면서, 그녀는 만에 하나 그가 어떠한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을 결코 탓하거나 하지 않겠지. 오히려, 그녀라면 그것이 실수라는 것을 그 둘 밖에 알 수 없도록 우아한 변주로 만들어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가 한 실수는, 그녀에게 있어서는 폐도 무엇도, 아니, '실수'조차도 아니었으니까. 그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있어서 더 바랄 것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그가 그녀를 생각하는 것에도 마찬가지란 것을, 그녀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 싶었다. 



"....그렇지...?"



소녀는 달아오른 얼굴로 희미하게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모습이 또 사랑스러워 샤를은 조금 소리를 내어 웃을 뻔한 것을 억눌렀다. 지금 그리 했다면 아마 또 발끈해서 무얼 웃냐며 또 빙글빙글 표정을 바꿀 테니까. 물론 그 모습 또한 보고 싶기는 했으나, 그것은 경기 후로 잠시, 잠시만 밀어두자고 결정했으니까. 오히려, 경기 후에 귀국 일정을 마친 뒤 둘이서만 어디론가 떠나 지내다 올까 싶었다. 시에라는 오랜만에, 미국에서 수의학과 역사학, 건축학을 공부중(전혀 다른 학문 세 개를 동시에 공부한다는 이 부분에 대하여 말할 때 그녀는 작게, 배부른 고양이처럼 자랑스런 미소를 지었다)인 동생이 아헨에 교환 학생으로 왔다며 그 곳에 가 볼까 하는 어조의 말을 지나가듯 던졌지만, 유감스럽게도 샤를은 그러고픈 생각은 그다지 없었다. 물론 시에라가 그녀의 동생, 아도니야를 만나 하루 정도 셋이 함께 식사도 하고 이곳저곳 산책 정도 다니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불만이라 할 것까지는 없었으나, 아헨 공대의 공학부에서 머리칼을 쥐어뜯어가며 공부하고 있을 그의 동생, 카를로만을 만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반길 수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가 정말로 정말로. 다른 선수들이 안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절규할 정도로 긴장감 없는 생각을 하며 시에라를 바라보는 동안, 소녀는 작게 입을 오므렸다. 연기의 실수 유무 또한 걱정되는 일이다. 허나, ...



"...그런데 내 귀여운 아가씨의 표정이 그대로인 건, 역시.. 심판 때문...?"


"..... 부정은, 하지 않아."


"그렇구나..."



이번 올림픽에서는, 다들 설마설마 했었으나 예상대로의 부정 판정 의혹이 물밀듯이 터져나왔다. 시에라와 샤를의 우승의 경우, 워낙 압도적인 실력으로 '감히' 금메달에 대해 부정하게 볼 정도의 짓은 하지 못했으나, 피겨 싱글의 여자 동메달. 남자 은메달 등에 대해서는 이미 자국 선수에 대한 편파 판정 의혹이 강력하게 제기되는 상황이었으며, 특히 여자 싱글에서 4위를 차지한 선수에 대해 들끓었던 온라인은 아직도 그 열기 식지 못했으니까. 그것은 샤를과 시에라가 보기에도 같았다. 둘 다 그러한 것에 함부로 입을 열거나 어느 한 쪽 의견을 드는 성품은 아니었기에 별다른 발언은 없었으나, 그들이 보기에도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판정이었다. 동메달을 탄 선수의 트리플 토룹은 그 수가 부족했음에도 가산점을 지나치게 받았고, 무엇보다 엉덩이가 닿지 않았다 뿐이지 이미 반쯤 미끄러졌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으니까. 남자 은메달을 수상한 수상자의 경우에는, 심지어 한 번 넘어지기까지 했음에도 그 메달을 탔다는 것에 분개를 넘어 조롱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자국 심판의 애정을 듬뿍 받는 남녀 선수가 마치 그들을 의식한 양 페어 스케이팅의 대표로 출전했고, 지금 한창 연기중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바로 그들. 마치 노린 것 같은 순서와, 잔뜩 자만심 가득한 - 시에라의 손위자매는 이것을 '가정교육 못 받고 자란 예의 없고 건방진 아이 같은 천박함' 이라 평했다 - 얼굴로 페어에서의 금메달도 확신한다 인터뷰하는 것을 보고, 편파는 각오한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 노력한 결과로 정당한 승부로 은메달을 받는 것에는 이의가 없었다. 뭣보다, 그들은 겨우 반 년 혹은 그 이하 전에 페어가 된 팀이었으니까. 수 년, 혹은 십 수 년을 이 순간만 보고 살아온 선수가 우승한다면 당연히 진심으로 축하하며 또 존경을 표해야 마땅한 일이었고 그리 생각했으나, 저런 것은 싫었다. 시에라는 호전적인 성격은 아니었으나, 한 번 경기에 들어가면 지는 것을 좋아하는 성품 또한 되지 않았으니까. 하물며, 하물며...



저러한 것에, 저런 반칙에. 샤를을 가운데가 아닌 그 옆 자리에 서게 하는 것 따위, 정말로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순간, 손끝에 온기가 닿았다. 그제사 시에라는 자신이 무심코 손에 힘을 주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손이 끌리듯 올라가고, 살짝, 닿는 온기. 그녀의 손등에, 마치 동화 속 왕자님처럼 살며시 입을 맞춘 샤를은 살짝 미소지었다.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상냥하고, 또 소년 같은 마알간 표정. 단지 그것만을 보았을 뿐인데, 포근한 공기에 안기는 듯한 기분으로 시에라는 그를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 시에라... 아직, 저들은 우리가 무얼 보여줄 지 모르잖아..?"


"그건 그렇지만.."



사실이었다. 그들은 제목만을 공개했을 뿐, 프로그램의 내용도 무엇도 공개하지 않았다. 싱글의 쇼트나 프리는 드레스 리허설까지 공개했지만. 이것만큼은. 차라리 리허설을 하지 않겠다며 그들은 리허설조차 나가지 않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비밀주의는 딱히 아니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누군가 같은 곡을 쓴대도, 심지어, 안무를 그대로 베낀다 하더라도.



그들의 곡은, 그들이기에, 그들만이 오직, 함께하기에 할 수 있는 곡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대로 하면 그만이야. ...은메달...을 타더라도, 괜찮잖아?"


"하, 하지만.. 나는.... !"


"후후, 사랑스런 시에라. 당신이 걱정하는 대로, 그들이 금을 가져가더라도, 그게 '무슨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



순간, 시에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그저 거기까지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그 속에 숨겨진 말을 그녀는 이해했다. 자신이, 있던 것이다. 금메달의 존재 자체를, 그 연기 자체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지워버릴 수 있다는. 모두가, 경기장의 모두가 뇌리에 박고 또 기억하고 나가는 것은 오직 그들의 연기가 되리란 것을. 목에 거는 색 따위 아무래도 좋다. 허나, 경기장 밖의 승리자는. 철저하게 그들을 짓밟고 모두에게 그 존재를 새길 것은 그녀와 그가 되리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금이라면 얼마든지 가져가 비참히 가라앉으라고, 그는 당당히 선언하고 있는 것이었다.



"..... 그렇지, 시에라?"



그녀는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정정, 올려다 보아야 했지만. 또렷이 보였다. 아, 그녀가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자신감 가득하고, 약간은 오만하고, 그러면서도 장난기, 혹은 재치가 희미하게 담긴 그러한 미소. 오직 그에게만 어울릴, 그럴 표정이었다. 그래, 그의 말이 맞았다. 시에라는 서서히, 손 끝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소녀의 입가에도, 끌리듯 미소가 천천히 담기기 시작했다. 맑고 곧은, 허나 희미하게 또 뚜렷하게, 그리 담긴 자신감이 그 맑은 금빛 눈에 서서히 차올랐다. 



"아아. ...그렇네."



샤를과 시에라는 눈을 마주보았다. 그들이 지금, 꽤 비슷한 느낌의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은 그리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는 가볍게 미소지은 채, 마치 그녀를 에스코트하듯 한 쪽 팔을 내밀었다. 또 익숙한 동작으로, 소녀는 그 팔에 자신의 손을 사붓 걸쳤다. 바깥의, 경기장에서 들리는 소리는 소란스러웠다. 아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가볍게 미소짓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Alors maintanent, ─────Commençons la fête"




축제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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