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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게 글을 쓰고 싶어요

커넬샌더스대령 2015.02.23 00:44 조회 수 :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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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SHEET


소환명 : 샤를마뉴(Charlemagne, Carolus Magnus)
클래스 : 세이버
마스터 : 쥬린 치아키
성   별 : 男
사이즈 : 182cm, 75Kg
소   원 :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면.
혈   통 : 영령/사실체계
속   성 : 질서 악
능력치 : 근력 A / 내구 A / 민첩 A / 마력 E / 행운 A / 보구 A++ 
         HP 100 MP 100 강타 5회(7점 피해), 반격 5회(7점 피해), 맹공 5회( 7점 피해), 방어 10회
스   킬 : 대마력 B, 기승 A, 직감 A+, 카리스마 A
스탠스 :
1) 통상[전투 8점] : 특이 사항 없음
- 첫번째 판정패 : 강타 2, 반격 3, 맹공 2, 방어 1, 패시브 보구로 인한 치명:공격

2) CORONA FERREA[소문 5점] : <방어>에 성공했을 경우 상대에게 1점의 피해.
- 첫번째 판정패 : 첫번째 판정패 : 방어 4, 반격 1, 치명 :공격1 

3) AUT INVENIA VIAM AUT FCIAM[조우 5점] : 특정 물리 판정의 피해점이 2점 증가. 해당 판정이 '첫 번째 판정' 이 아니어도 적용.
- 첫번째 판정패 : 강타 2, 반격 2, 맹공 1, 치명:공격1

4) SOLUM OMNIUM LUMEN[전승 8점] : '이 앞에 영광 있으리' 사용 가능. '첫 번째 판정' 에서 승리했을 경우, 해당 턴에 사용한 다른 판정들의 피해점이 1점 증가합니다. 
- 첫번째 판정패 : 강타 3, 맹공 2, 치명:공격1 (나머지 세장은 플레이 도중 배치하겠습니다)

보   구 :
1) 동쪽으로부터의 선물(LUNAE ORTUS)) : D등급, 상시 해방형 대인보구, 설정 점수 2점
- 소모 마력 없음 
- 판정 당 피해점 : 생명력 2
- : [왕휘] <연속공격>이나 <추가타격> 으로 피해를 입힐 때, <카리스마> 등급 만큼의 피해를 더 입힙니다. 이는 전투 당 2회까지 적용됩니다.
교류하였던 아바스 왕조의 왕, 하룬 알 라시드에게서 받은 사브르.


2) 이 앞에 영광 있으리(Joyuse Lumière)
- 소모 마력 35점, 최대 목표수 2인
- 판정 당 피해점 : 생명력 10
- : 혼돈 혹은 악 속성의 인물에게는 +능력치가 자동으로 발동된 것과 같은 피해를 입힙니다(공적점 혹은 마력으로 발동한 +능력치와 중복되지 않습니다).
+ : [확장] +능력치를 발동시, 공격대상이 대성보구 만큼으로 증가합니다.
+ : [회복] <치명:공격> 으로 피해를 주는 판정마다 3점의 마력을 회복합니다.
뜻은 '환희'. 하루에 서른번씩 색을 바꾸었다는, 햇빛을 형상화한 검이다.
대대로 프랑스 왕의 대관식에 사용된 (영국에서의 커타나처럼) 왕권을 상징하는 검으로써 자리매김했다.
그에게 이 검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2. 역사상으로는...?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의 2대 왕이자 서로마 제국의 황제. 서양에서는 그의 황제 즉위를 신성로마제국의 성립으로 보고 그를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로 칭한다. 전설이나 다름없는 인물이기에 유럽의 왕국들은 자신의 정통성을 카롤루스(이하 샤를마뉴)와 프랑크 왕국에서 찾았다. 통칭 유럽의 아버지.

  742/746/748년 중 하나의 년도(어느 쪽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의 4월 2일 출생. 단신왕 피핀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피핀을 따라 많은 전쟁에 종군하여, 피핀이 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쟁취하는 것과 당시 교황인 스테파누스를 도와 롬바르드 왕국을 물러서게 한 것, 피레네 산맥 너머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것, 아키텐 공국을 복속시키는 것을 함께 하였다. 또한 교황이 프랑크 왕국으로 도움을 요청하러 왔을 때 그를 맞이했으며, 피핀이 교황에게서 왕관을 받을 때 샤를마뉴 역시 동생 카를로만과 함께 후계자로서 왕관을 받았다.

  768년 피핀이 세상을 떠나자,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의 전통에 따라 카를로만과 왕국을 나누어 물려받았다. 샤를마뉴는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아키텐의 서쪽 및 북쪽을, 동생 카를로만은 셉티미니아, 아키텐의 남쪽과 동쪽, 부르군디, 슈바벤, 이탈리아 접경지역을. 피핀은 형제가 화합을 이루어 나라를 이끌어가기를 바랐지만 본디 좋지 않았던 형제의 사이는 분할 상속을 계기로 더욱 멀어졌다. 샤를마뉴는 자신이 장남임을, 카를로만은 자신에게 정통성이 있음을 내세워 서로 자신이 진정한 후계자라고 주장하였다(비주류이기는 하지만 샤를마뉴는 서자였다는 학설이 있다).

  아키텐의 반란은 그런 둘의 분쟁을 격화시켰다. 샤를마뉴가 반란 진압에 들어가며 요청한 도움을 카를로만이 무시한 것. 게다가 카를로만은 샤를마뉴의 영향권이 커질 것을 우려해 비밀리에 반란군을 돕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키텐의 반란은 1년만에 진압되었고 그 때부터 정황은 점점 카를로만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는 그 상황을 타개하고자 정략결혼 및 동맹, 협력을 모색했으나 2년만에 사망했고, 샤를마뉴는 곧바로 카를로만의 영토를 흡수했다.

  이로써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의 단독 왕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프랑크 왕국은 군사력으는 몰라도 재정적으로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즉 지속적인 전쟁의 승리를 통해 전리품을 획득하는 것 말고는 군대를 유지하는 것, 더 나아가 나라를 지탱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샤를마뉴는 그의 치세 동안 거의 매년 전쟁에 나섰으며, 전쟁을 거듭할 수록 국가는 오히려 부강해져갔다.

  샤를마뉴는 랑고바르드 족을 굴복시켜 북부 이탈리아를 장악, 롬바르드 왕국 지배자의 상징인 철관을 머리에 얹었다. 그리고 이슬람 세력을 군사적으로 저지하는 데 성공하여 프랑크 왕국이 가장 강성한 기독교 세력임을 입증하였다. 이러한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은 '전설'로서의 샤를마뉴에게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샤를마뉴의 12기사로 대표되는 무훈시에서 두드러지는 것도 이 부분. 그는 그 외에도 바스크 족, 작센족, 바이에른을 제압하였으며, 북부 슬라브족과 동맹을 맺어 그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넣었다.

  본디 교황과 우호적이었으며 당시 가장 강성한 나라의 왕인 샤를마뉴는 로마의 수호자가 되기에 충분했다. 800년, 성탄절 예배를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방문한 샤를마뉴는 그 자리에서 교황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 뒤에도여러 업적이 있으나 여백이 부족하여 자세한 설명은 생략지속적으로 원정을 나서고 나라의 기반을 다지던 샤를마뉴는, 813년 자신의 아들 루트비히를 후계자로 삼고 자신은 아헨에서 은거하였다. 그리고 814년 1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3. 그렇지만, 그는 사실...

* 주의: 이하의 내용은 전설과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과는 모티브가 같을 뿐입니다. 화형방지바람

  Charles le Magne(Charlemagne), Karl der Große, Charles the Great, Carlo Magno. 정식 명칭은 "CAROLUS MAGNUS CAESAR ET IMPERATOR SEMPER AUGUSTUS AB DEI GRATIA, REX FRANCORUM ET LANGOBARDORUM" 번역하자면 위대한 카롤루스 황제, 주님의 은총으로 언제나 존엄한 임페라토르, 프랑크인과 랑고바드르인의 왕. 본인이 공식적으로 사용했던 표기는 라틴어인 카롤루스 대제.

    ……라고 기록된 사람의 대역. 본명은, '성스러운 누군가'가 지어준 이름인 엘리오르. 뜻은 '신은 나의 빛'.

  단신왕 피핀의 서자로, 샤를마뉴로 기록되어진 인물과는 쌍둥이 형제이다(샤를마뉴 쪽이 형). 부친을 닮아 쉽게 인정받은 형과는 달리 모친을 닮았기에 일찍이 버림 받아 난민촌에서─자신이 누군지도 모른채─자자랐다. 옷도 집도 먹을 것도 열악했음에도 '은혜'로써 여름에도 더위를 느끼지 않았고 겨울에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고. 어렸던 그는 이를 '기적의 빛'이라 칭송하며 계속하여 숭배하였다. 자라나고 자라나, 마지막 순간까지도.

  한편 궁에서는 그의 형 되는 자가 고심하고 있었다. 샤를마뉴의 능력은 동생 카를로만에게 미치지 못하였고, 때문에 그는 이대로라면 동생에게 자신의 세력을 다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결국 그는 기억의 가장 끝자락 무렵 버림 받은 자신의 동생을 이용하기로 했다. 버림 받았다 하나 그도 결국에는 자신의 쌍둥이, 왕족의 혈연. 방패막이로 내세우기에 그 이상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그는 '대역'으로써 왕궁에 오게 되었다. 가장 좋은 옷이 걸렸고 가장 좋은 음식들이 그의 앞에 놓였다. 하지만 대역이기에 그의 궁 생활은 결코 순탄하다 할 수 없었다. 그는 항상 샤를마뉴가 먹을 음식에 독이 있는지 미리 맛을 보아야 했고 샤를마뉴가 '안전상'의 이유로 어디론가 사라지면 그 자리를 채워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불만을 내비치지 않고─속내를 알수 없는 무표정으로─완벽하게 일을 수행했다. 점점 샤를마뉴 본인이 아닌 그를 따르는 사람도 생겨날 정도였다(다만 그것은 좋지 않게 작용하여, 밤중에 그를 진짜 샤를마뉴라고 오인한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재빨리 대응하여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그 일로 인해 등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가 생기고 만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고, 마침내 단신왕 피핀이 승하하는 순간이 왔다. 분할 상속을 받고 형제가 본격적인 대립을 시작하자 그는 대역으로서의 의무에 따라 샤를마뉴의 밑으로 들어가 일했다. 그는 기사단─후에 샤를마뉴의 기사단으로 알려진─과 함께 아키텐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물밑에서 반란을 지원한 카를로만을 독살하여 프랑크 왕국을 통합해냈다. 비록 그가 쓸 왕관이 아니었을지언정.

  하지만 그렇다 하여 평안이 찾아오지는 않았다. 왕국을 노리는 적은 너무나 많았다. 작센, 롬바르드, 이슬람, 슬라브, 동로마…… 모두가 적이었다. 그는 몸을 사리는 샤를마뉴를 대신하여 계속 전쟁에 나섰다. 그는 우선 작센족을 최초의 원정 대상으로 삼아 진격하여 적지 않은 전리품을 얻어냈다. 그리고 샤를마뉴의 명령─정치적 위협을 타파하기 위한─으로, 바로 이듬해에 북이탈리아로 진격해야 했다. 그는 그곳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 롬바르드 세력을 일소하고 교황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였다. 물론 전공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 해 7월, 샤를마뉴는 롬바르디아의 왕을 칭하기 시작했다. 대역인 이상 어쩔 수 없지만 '원본'의 업적만 더 늘려준 셈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해야 옳을 것이다.
 
  평생을, 아니, 죽은 이후에도 영원히 마음을 바칠 '그녀'를 다시 만났으니까.

  꿈과도 같은, 그렇지만 감히 꿈과 비교할 수 없을 광경이었다. 아침 예배, 모두가 넋을 놓고 바라보는 가운데 언제나 아름다운 그녀는 미소 지으며 그에게 검을 건넸다. 햇빛을 한데 뭉쳐 놓은 듯 아름다운 검이었다. 이것을 어째서 나에게... 멍하니 그런 의문을 흘린 그의 뺨에 그녀는 부드럽게 입을 맞추곤 빛가루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달콤한 목소리만이 이것은 꿈이 아니라 알려주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사랑하는 나의─


  기적 그 자체인 하루를 보내고, 그는 그녀가 준 검을 소중하게, 단단히 허리에 찼다. 그녀가 준 검을 통하여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 뒤에도 그는 계속하여 대역으로써 일했다. 대부분은 작센과의,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위시한 싸움이었지만 그러는 반면에 아바스 왕조의 하룬 알 라시드와 교류하는 등 융통성 없게 행동하지만은 않았다. 실제로 그가 보통 무기로써(바꿔 말하면, 소모품으로 사용하는) 쓰는 사브르는 하룬 알 라시드에게 선물 받은 것. 비록 동로마와 결탁한 이탈리아 남부는 결국 굴복시키지 못했어도, 이대로라면 그의 앞날은 평탄할듯 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많은 승리에 위기감이 엷어진 것일까. 에스파니아 원정을 위해 여느 때처럼 출병하려는 그의 앞을 계속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샤를마뉴가 막아섰다. 의아해하는 그에게 샤를마뉴는 고압적인 태도로 말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출병하겠노라고. 그는 거절을 표명했지만 '대역'에게는 거부권이 없다는 사실만을 되새겨야 했다. 그는 그렇게 샤를마뉴와 그의 기사단을 보냈다(그와 기사단의 관계로 말하자면, 기사들은 진즉에 샤를마뉴가 아닌 그에게 충성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기사가 군주의 명에 따르는 직책이라 해도 둘 중 누가 뛰어난지는 누가 보아도 명백했기에).

  샤를마뉴가 승리를 자신했던 출병은, 하지만, 기세가 무색하게도 어이없게 무너지고 말았다. 롤랑의 의부 가느롱을 세객으로 파견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사지라고도 할 수 있는 장소에 자신을 파견한 것에 반감을 품은 가느롱은 에스파니아 왕, 마르실에게 교섭이 아닌 회유를 시도했다. 기사단만 제거한다면 에스파니아와 프랑크는 평화로이 지내리라고. 샤를마뉴가 퇴각할 때에는 기사단이 후미를 맡느라 적은 군대만 남을 테니 그 때 공격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가느롱은 자신이 나서서 롤랑을 뒤에 남기겠다고 장담하였다.

  비록 기사단원 12명 중 10명만이기는 했지만 가느롱의 계략은 성공했다. 10명의 기사들은 2만의 군사와 함께 롱스보 고개에 남겨졌다. 마르실의 50만 군대가 그들을 공격했다. 기운을 소모시키는 차륜전. 기사단은 쉽게 쓰러지지 않았고 많은 마르실의 명장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결국 기사단원들에게도 끝은 찾아왔다. 올리비에는 싸움 도중에 눈을 다쳐 소리에 의지하여 검을 휘둘렀다. 그러는 와중에 같은 기사단원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기사단원 아무도 올리비에를 탓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하여 검을 휘두르고 적을 무찔렀다.

  ……그리하여 간느롱의 간계에 넘어간 진짜 샤를마뉴의 명령은, 기사단 열 두 기사 중 열 명의 참살이라는 비극으로 끝났다. 전력으로서 왕국 제일을 자랑하는 기사들을 겨우 그런 죽음을 맞게 한 것에 대해서,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한 샤를마뉴에 대해, 감정적인 면을 배제하고서라도 그는 기분이 더러워졌지만, 그렇다고 샤를마뉴에게 따지고드는 건 현명한 길이 아니기에 그는 그저 꾹 참았다. 그것은 오히려 악수임에 틀림없기에. 어리석은 자는 본디 제 잘못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으니.

  중요한 것은 이베리아에서의 남은 일이었다. 제아무리 세력이 한풀 꺾였다 한들, 지휘관 열 명이 몰살당한 프랑크 군과 그것을 만들어낸 사라센의 사기는 비할 바가 아니었으리라. 허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현재도 피레네 근교에 존재하는 바스크족─역사상 사실에서는 롱스보에서 기사단을 멸한 건 사라센이 아니라 바스크라는 말이 있다─을 치기로 결심하고, 결국 언제나 그렇듯, 승리하며 받은 것을 되갚아주었다. 그렇게 이베리아, 현 에스파냐 지역은 이제 서구에서는 Frankish Empire라 표현되는 프랑크 왕국의 변경백령이 되었고 그제서야 그는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슬라브와 동로마를 향해.

  또한,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서, 교황과의 관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행적일 것이다. 메로빙거의 왕들이 그러했고, 또 선왕 피핀이 교황령을 기증한 이래, 그 역시 프랑크 왕국의 군주로서─반쯤은 관습화된 의무로─교황을 비호하였으나,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교회에 복종하기는 커녕 자신이 교회보다 우위에 있다 생각하였다. 그러한 그의 생각은 하드리아누스 1세의 선종 후, 후임으로 교황이 된 레오 3세에게 보낸 편지에 드러나 있는데, 그 서신 중 그는 자신에 대해 "모든 기독교인의 지배자요 아버지요 왕이며 또 사제이며, 그와 동시에 수장이자 지도자" 라 표현하며, 교황이 준수해야 할 노선을 지정하였다. 이는 교황권을 억누르고, 자신이 그 위에 서겠다는 분명한 의지가 담긴 표현이었다. 

  그러한 그의, 교회 견제적 행보는 780년 부활절 연휴의 바티칸 방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당시, 그는 일전에 스스로가 약속했던 교황령의 확대 (당시의 바티칸에서, 약 120km 떨어진 페루자의 스폴레토까지. 이는 르네상스기의 소규모 도시국가 하나에 준하는 영토의 넓이다)를 파기하였다. 그는 코로나 페레아를 소유한 롬바르드의 왕으로서, 스스로 독일-프랑스에 걸친 기존의 프랑크 왕국 영토를 넘어 이탈리아마저 완전히 발 아래 두는 통치자가 되고자 했고, 그 권리를 교황에게 양도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아니, 그에게 설령 그렇게, 이탈리아의 유일한 군주가 될 작정이 없었더라도, 왕권을 중시하는 왕이라면 당연한 처사였으리라. 교황에게 그만한 영토를 수여한다는 건 그만큼 그곳에 뿌리를 두고 세도를 부리며 산 옛 로마의 귀족들이나 교회 세력의 확장을 의미했다. 그들의 확장이 그의 통치에 대한 간섭으로 이어지리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무리 신실하다 한들 왕이라는 자리에 대한 생각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이해할 것을, 지독히도─무신론에 차라리 가까울만큼 교회를 불신하는─그가 모를 리 없었다. 4세기 경 기독교가 공인된 이래 교회를 이끄는 무리들은 절대 다수가 '신실함'과는 거리가 먼 수도사의 탈을 쓴 세속주의자들이었으니. 그들이 영토를 갖게 된다면 그 욕심은 한없이 커지리란 건 당연한 일이다.

  기존의 로마 기득권층을 억누르고 교회 위에 서려고 했던 그의 처사에 로마와 교회는 어떻게든 그의 영향력을 끌어내리려 애썼고, 그 중 하나는 레오 3세에게의 비난이었다. 하드리아누스 1세(예루살렘에 아프로디테와 제우스의 신전을 세운 황제의 이름이 교황의 이름이라니 참으로 어울리면서도 웃기는 일이다)의 선종 후, 그가 레오 3세를 즉위시킨 것에 대해, 분명히 '세속과의 연을 버렸을 터인' 하드리아누스의 '조카'와, 로마 교회의 관료들 그리고 귀족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들고 일어난다. 레오 3세가 귀족 출신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간통을 저질렀다, 위증을 저지른 죄인이다, 그들은 외치며 비난하며, 799년 4월. 마침내 교황을 습격하여 폭행까지 하고 만다. 레오 3세는 이 습격 이후 피신하여,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왕을 만나 구원을 요청했고, 그는 직접 군을 이끌고 로마로 내려와 주동자들을 전원 처형시키고 레오 3세를 복위시킨다. 

  하지만 이렇게,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습격이나 받던 허수아비 같은 레오 3세조차도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한 후 정확히 이틀 뒤── 그에게 다른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한 일을 저지른다. 서로마 황제의 관. 성탄절, 그가 미사를 올리던 도중 그 자리의 모든 로마 귀족들이 그를 향해 '아우구스투스' 라 환호했으며, 미사는 곧 황제 대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로, 그가 여태까지 추구해 온 것을 자칫하면 완전히 상태를 뒤엎어버릴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는 여직, 교권 이상의 왕권을 추구하고 실행했으나, 이 '대관식' 에서, 교황이 그의 머리 위에 관을 씌운다면, 그것은 교황에게 황제를 임명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 즉, 황위 계승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된다. 또한, 역대 교황들조차 피핀이나 클로비스 등에게도, 그런 황제 추대 같은 것은 약하디 약한 명분 - 정통성 - 으로 하지 못했는데, 출자가 미약한데다 그럴 만한 법적 권리도, 역사적 명분도 없던 레오 3세가 그것을 감히 실행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의 전기문 '카롤루스 대제의 생애(Vita Caroli Magni)' 에서는, 교황이 만약 이런 - 이 따위 - 계획을 세운 줄 알았더라면 그는 결코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 단언하고 있다. 물론, 현대의 몇몇 학자들은 이러한 묘사와 견해에, 만약 그가 정녕 황제위를 원하지 않았더라면, 후일 그것의 인정을 위해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또 그의 동의 없이 과연 교황이 혼자 그러한,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권력을 가진 그에게 멋대로 그리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표하지만── 그저 탐욕스러운 '진짜 샤를마뉴'도, '샤를 엘리오르' 도, 이미 자신에게 바쳐진 칭호를 거절하는 꼴불견스러운 일은 원치 않았을 것이다. 전자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 후자는 더 강한 왕권을 위해. 이미 바쳐진 이상, 돌이키거나 남에게 뺏기는 웃기지도 않는 꼴을 보인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손에 들어왔다면, 되돌릴 생각이 아닌, 이용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니까.

  그것을 위해 동로마와 지루한 전쟁을 치르거나, 이슬람과 교류를 하던 중─ '기적'이 그를 찾아왔다. 평생 숭배해 마지 않던 '그녀'. 낙원과도 같은 곳에서 꿈과 같은 나날을 '그녀'와 함께 그는 보냈다. 그가 해야 할 일을 해 달라는 '그녀'의 말에 결국엔 돌아와야 했지만…… 그 전에도, 지금도, 함께 보냈던 나날은 결코 잊을 수 없어서. 남겨두고 온 것들이 계속 마음에 밟혀서. 나름대로 후회 없는 삶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마음 한 켠의 짐을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은 뒤에도 벗지 못했다. 그렇게 영령의 좌에서도 회한에 찬 나날을 보내던 도중… 그는 묘한 이끌림을 느끼게 된다. 빛, 기적,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그는, 망설임 없이 소환에 응하였다.
  그리고, 닿았다.




  /4. His Dearest

  * 루루시에(혹은 그 반대)라고 쓰고 망상덕질이라고 쓰는 덕심의 산물입니다.


  손아래 형제의 희생이 있던 왕위 계승 과정을 비롯하여 샤를마뉴와 솔로몬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솔로몬의 옥좌를 모방해 자신의 옥좌를 만들었고 아헨 대성당의 건축양식 역시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그것을 본땄다. 본디 통풍을 앓고 있던 그가 치료제로 쓴 꽃은 솔로몬 왕의 궁을 장식했다는 성모 백합. 게다가 그는 그 꽃을 그 자신의 문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가 초빙한 학자들 역시 그를 솔로몬(그리고 다윗)을 비유하였다. 이는 립서비스적인 성격도 없지 않겠으나,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불리는 시대를 연 인물들이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사람과 감히 '현왕' 솔로몬을 동일시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신성로마의 황제 자리에 올랐을 때─비록 그가 원하던 자리는 아니었음에도─그가 쓰던 왕관은, 솔로몬의 잠언을 왼쪽에 새겼던 보석관. 아니, 오히려 보석관에 화려함을 더하는 대신 잠언을 새기도록 했을 정도로 그가 연인을 생각하였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그 중에서 으뜸은 그가 평생 지니고 있었던, 사랑하는 사람의 조각과도 같은 보석─ 탈리스만이라 해야할 것이다, 탈리스만의 보석은 별이 깃들었다고 하는 솔로몬의 인장과 같은 스타사파이어. 메마른 시대를 살아갈 그를 염려하여 연인이 만든 부적은, 1800여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서야 하룬 알 라시드가 보내는 친교의 선물로써 그에게 돌아왔다. 탈리스만을 탐하여 오토 1세가 그의 무덤을 열고 가져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오토 1세가 가져간 탈리스만은 '샤를마뉴'가 그의 탈리스만을 탐내어 만든 모조품으로, 진짜 탈리스만은 그가 계속 지니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도, 죽은 이후에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빛이 흐릿해졌던 그것은 연인과의 재회 이후 그녀가 힘을 불어넣음에 따라 다시금 밝게 빛났다. 주와이외즈와 더불어 그를 줄곧 지켜주었던 부적.



  비록 1800여년이라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으나, 그와 그녀는 줄곧 이어져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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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주변 인물

샤를마뉴 : 역사상의 샤를마뉴 본인. '엘리오르'의 쌍둥이 형.


카를로만 : 이복동생. 성미가 급하고 한번 화나면 신중함을 잃어버리나,악랄한 샤를마뉴와 달리 주변 사람은 제대로 챙겨주는 착한 사람. 비유하자면 CCC의 신지.  왕으로서의 역량은 샤를마뉴보다 위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단신왕 피핀 사후 정통 왕위를 두고 샤를마뉴와 경쟁하였으며, 결국 샤를마뉴의 지시를 받은 엘리오르의 손에 독살당했다.


단신왕 피핀 : 그의 아버지. 행적은 역사상의 행적 그대로.


베르트라다 : 단신왕 피핀의 부인. 샤를마뉴의 양어머니이자 카를로만의 친어머니로 현숙함과 위엄을 두루 갖춘 엄격한 여인이다. 하지만 남편인 피핀이 다른 여자를 만나더라도 눈 감을 뿐인, 전형적인 중세시대의 여자이기도 했다. 또한 그랬기에, '왕국'을 위하여 카를로만과 샤를마뉴가 대립할 때는 자신의 아들인 카를로만이 아닌 샤를마뉴─정확히는 엘리오르의 편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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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르트 : 단신왕 피핀의 동생. 첩 소생이라는 동질감에 더하여 엘리오르의 능력을 궤뚫어 보았기에 그를 주군으로 섬겼다. 후에는 생 퀘틴 수도원이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앨퀸 : 중세 초기 잉글랜드 출신의 색슨계 신학자이자 교육가. 엘리오르에게 초빙되어 그의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카롤링거 르네상스로 불리는 유럽 대륙의 학예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중 하나는 고대 학예에서 자유칠과를 신학의 예비학과로 편성했다는 것. 이는 중세 대학 교양학부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런 학자의 면모와는 별개로 어둠의 다크, 바람의 윈드 같은 시를 매우 즐겨썼다는 뒷소문이 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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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하르트 : 앨퀸의 제자(본래 평범한 학생이었으나 앨퀸의 추천을 받아 발탁되었다). 엘리오르의 비서이자 프랑크 왕국의 역사가. 로마 교황청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으며, 여러 수도원의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시를 즐기는 스승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만둘 것을 여러번 진언했으나 마이페이스인 스승에게 그의 말이 먹힐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늘 어떤 약통을 소지하고 다니게 되었다고. 그 뒤로 문(文)에서는 아인하르트가, 무(武)에서는 올리비에가 위통 환자로 명성을 드높였다는 슬픈 전설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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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 샤를마뉴의 조카. 샤를마뉴 기사단의 제일 가는 기사이며, 그의 행적을 소재로 한 서사시 '롤랑의 노래'의 주인공. 엘리오르의 빵을 훔쳐 달아난 것이 인연이 되어 발탁되었다. 좋게 말하면 순박하고 나쁘게 말하면 단순한 성품의 소유자. 이 때문에 본의 아니게 절친한 친구인 올리비에의 위통을 더욱 악화시키곤 한다. 검은 익히 알려진 명검 뒤랑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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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에 : 롤랑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조언자. 무모한 롤랑과는 대조적으로 침착한 모습을 보인다. 계략에 빠진 롤랑을 구해주는 것은 예사요, 위기에 빠진 롤랑을 지키다가 최후를 맞기까지 한 대인배.유모 이름 높은 대장장이 안 아시스, 가라스, 무니피칸에 의해 벼려져서 만들어진 9개의 검을 파괴한 글로리우와 빛나는 강철로 제련되고, 황금 칼자루엔 수정이 박혀있다고 전해지는 오트클레르의 소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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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에 : 덴마크의 왕 게오프로이 왕의 아들. 태어날 때부터 요정으로부터 6가지 축복을 받았으나, 아버지를 잘못 만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험한 일들을 겪은 초기사급의 행운 박복한 사나이. 엘리오르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라도 따르는 엘리오르 지상주의자이다. 말이 없고 어두운 인상이지만, 그만큼 철저한 실력을 갖춘 기사 중의 기사. 소바진, 코르탱, 메르베이외즈, 아리마데아 요셉의 향료 등 다양한 무구를 갖고 있다. 제일 애용하는 건 소바진. 코르탱은 소문─주와이외즈와 동일한 소재로 만들어졌다는─이 엘리오르에게 누가 될 거라 여겨 방 깊숙한 곳에 보관해두었다(라고 하지만 아스톨포는 알고 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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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톨포 : 영국의 왕 오토의 아들로, 즉 영국의 왕자……라지만 신분이 무색하게도 그런 면모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긍정적이며 그것이 지나친 나머지 고차원에 사는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괜히 이성이 증발했다는 묘사가 나오는 것이 아닌 셈. 하지만 실제로 이성이 날아간 건 아니며, 사실은 심지 굳은 정말 착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별로 돋보이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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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다만테 : 기사단의 홍일점. 리날도의 여동생으로 "흰 깃털과 방패의 여기사."라는 통칭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로 개종하리라는 예언을 받고 숨어있던 사라센인 로게로를 조교사랑하여 기독교로 개종시키까지 한 여장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큰 키를 가지고 있어 키 작은 기사들은 본의 아니게 위축시키곤 하였다.


마우그리스 : 말라리기, 마우기스로 불리기도 한다. 르노 드 몽토방의 사촌이며 요정에게 길러져 강력한 마법사가 되었다고 한다…… 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 비유하자면 드래곤라자 초반부의 아프나이델. 악마를 불러들여 미래를 예지했느니 하는 건 그의 망상 노트에서 발췌한 기록으로, 누군가가 그것에 대해 물으면 도망쳐버린다. 그리곤 폭풍 이불 발차기.




  /6. 소감

넵 길었습니다. 제 위키 사상 30kb를 돌파한 최대길이의 위키……. 그만큼 애착이 많이 가기도 했지만요ㅎㅅㅎ
사실 제가 처음 0.6을 신청했을 때 원했던 클래스는 캐스터였습니다. 신청글에도 캐스터!!!!!!를 썼었죠(...)

하지만 결과는 밥폐하세이버. 당시엔 이렇다 할 스톡이 없었던지라 누구로 하지?! 하는 패닉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유명한 인물…… 이랄까, 이 쪽 계열(?)에선 주와이외즈로 유명한 샤를마뉴로 가닥을 잡았어요.
캐릭터 메이킹 중에 여러 난항이 있었지만, 이렇게 세이버가 되었던 것이 천운이었습니다. 네. 실로 그러합니다. 정말 이렇게 케미가 터질 줄은 몰랐어요……. 그냥 한 번 구글에 검색해 봤는데 결과가 쫘르륵. 몰라뭐야이거무서워. 심지어 특수 태그에서도 시에라가 루루의 극카운터라는 케미가 있었다죠.
게다가 마리!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알고보니 마리의 조상님이었습니다. 그것도 직계예요! 아무리 샤를마뉴가 서유럽의 아버지라고 하지만 직계일줄은!
비록 루루는 대역이었지만 그래도 마리랑 만났다면 살갑게 지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선 바깥 쪽의 사람에겐 가차 없지만, 안 쪽의 사람들에게는 지극정성을 다하는게 루루라서……. 그 정점이 시에라.

비록 성배는 얻지 못했지만 시에라와 만나기도 했고, 루루적으로는 메데타시메데타시라고 생각합니다.
vs스토쿠 전에서 주와이외즈를 쓰지 못했던건 살짝 아쉽네요. 모두가 모였던 축제 땐 제가 한창 바빴던 참이라ㅠㅠ

마스터셨던 밀퓨 님, 바쁘셨을텐데 자꾸 선언 재촉해서 죄송합니다ㅠㅠ 치아키는 긔여웠어요;ㅅ;
그리고 동맹을 짜준 로하 님, 아하즈 님. 정말 감사합니다.
또 즉사님, 리버티님. 죄송해요…… ㅠㅠ 레릭이랑 버서커랑도 만나 보고 싶었는데 흑흑.

음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정리가 잘 되지 않네요;ㅅ; 그런고로 이만 줄이겠습니다ㅠㅠ
위키 읽어주신 여러분, 그리고 0.6 플레이어분들. 모두 감사합니당!


그리고 시에라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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