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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칩 쿠키

하로하 2014.04.19 09:26 조회 수 : 14




00/



All those days, watching from the windows

All those years, outside looking in

All that time, never even knowing

Just how blind I'd been

Now I'm here, blinking in the sunshine

Now I'm here,


Suddenly I see standing here, it's oh so clear

I'm where I meant to be

And at last I see the light

and it's like the sky is new

And it's warm and real and bright

and the world is somehow shifted

All at once, everything looks different


And I see you





01/



     아직 희미한 열이 깃든 복숭아 물든 뺨에, 햇살 한 줄기가 내려앉았다. 그 볕이 간지러웠는지, 서서히, 서서히. 번데기에서 깨어나는 나비의 날개짓인 양 눈꺼풀이 가늘게 흔들렸고, 그림자를 드리운 은빛 속눈썹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 사이 곱게 숨어 있던 마알간 햇빛 눈동자가 투명하게 세상을 담았다. 깜빡, 깜빡. 날씨는, 좋았다. 아직 또렷하지 않은 시야였지만, 넓게 내비치는 창에 물든 하늘이 푸르고 또 푸르다는 것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것이었다. 눈부시게 손 뻗은 햇살도, 머얼리 지저귀는 새들의 아침 노랫소리도. 귓가를 간지럽히는 잔바람과, 우윳빛 목덜미를 부드러이 어르는 여름 바람도. 찬연하고, 아름다운 세계. 그리고 소녀는, 천천히 눈을 조금 더 크게 떴다. 살짝 눈꺼풀에 힘을 주는 것이 힘겨웠다. 그리고, 더 넓은 그 하늘이 그대로 비치고, 새하얀 구름이 저 너머 보였고, 그리고, 그리고. 



   "안녕, 사랑하는 시에라. 좋은 꿈 꾸었을까나...?"



     움찔. 시에라는 몸을 떨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도 사랑스러운 듯, 그는 그 꿀을 녹인 듯한 금빛 눈으로 그녀를 오롯 담아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 맺힌 미소와, 그녀의 귀에 또 달콤한 목소리. 그 미소에 순간 머리가 하이얘지는 기분이 들어, 시에라는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부끄러워진 소녀는 시선을 '내리려' 했다. 그렇지만, 마음은 머리보다 앞선 까닭일까 - 그것 또한 느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불과 수 일 전까지는 - 시에라의 오밀조밀한 얼굴은, 금빛 눈은, 장미 향 감돌 것만 같은 입술은, 보드라운 뺨은 고개를 숙이는 대신 한없이 한없이 달디단 미소를 띄웠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인식 범위 밖에서, 혹은 그것보다 더 빨리, 그저 그 순간이 행복하고 또 사랑스러웠으니까. 



   "...응, 좋, 은 아침, 레..이시안."



     그녀 - 시에라가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대답하는 그 목소리는 무엇보다 곱고 맑았다. 비유도 뭣도 아니고, 산사의 종이, 풍경이 내는 것만 같은 청아한 울림. 그녀가 휘감은 공기 자체부터 이미 그 수많은 사람들 누구와도 다른, 상쾌하고 청명한 가을 아침 같은 투명한 것이었지만. 그런 소녀의 목소리가 듣기에 좋았는지, 레이시안은 나즈막히 웃었다. 다른 이에게 보여준 적 없던 티없는 웃음. 그것에 또다시 고동소리가 세차지는 것을 깨닫고, 시에라는 남몰래 귓불을 붉혔다. 들키지 않을 리가 없었지만, 물론.



   "나의 빛, 나의 달, ....내 사랑."



     시에라는 살며시, 시선을 올렸다. 오롯하게, 햇빛마냥 마알갛고 티 한 점 없는 금빛과, 꿀처럼 진하고 또 깊은 금빛이 그저 서로의 모습만을 담았다. 살짝, 레이시안은 손을 움직였고, 가늘지만 또 힘 있는, 시에라의 그것과는 완연히 다른 손가락이 그녀의 뺨에 가볍게 덧썼다. 시원한 느낌. 그 살짝 서늘한 듯한 느낌이 기분이 좋아, 시에라는 무심코 살짝 뺨을 부비었다. 이래서야 마치 쓰다듬 받는 작은 동물 같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가슴 한 켠 어딘가에서 떠올랐지만 이내 뭉실뭉실, 솜사탕 구름에 휩싸이듯 사라졌다. 여전히 얼굴을 사랑스레 물들이면서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시에라를 보며, 레이시안은 세상 다시 없을 것처럼, 무엇보다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는 양 미소지었다. 살짝, 그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기듯 부드럽게 밀었다. 그리고, 그리고.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나의 시에라."



     기쁜 듯, 수줍은 듯, 붉어진 얼굴에 행복한 듯 꽃봉오리 같은 미소가 맺히었고, 금빛과 은빛의 머리칼이, 서늘한 뺨과 달뜬 뺨이, 흐드러지듯 겹쳤다. 





02/



     나의 님은 무엇보다 아름다우니 그 미소가 향기롭고 또 그 목소리는 내 귀에 달콤하구나. 퐁,퐁퐁, 분홍빛 구름에 안긴 듯한 기분 속에서, 시에라는 꿈꾸듯 그리 생각했다. 햇빛 녹여 짜낸 금사도, 북녘 사과에 못잖게 감미로운 금빛 눈도. 몇 번이고 겹쳐진 그림자가, 한 번 더 겹치고 아직은 익숙치 않은 듯 호흡이 서툴어 숨이 가쁜 그녀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음에도, 부러 그리하는 것인지, 레이시안은 가볍게 아기 새가 쪼는 듯 입을 맞추며 그녀의 입술을 덧씌웠다. 그리고 곧, 떨어진 온기가 못내 아쉬웠는지 무심코 고개를 든 - 숨이 가빠 조금 뿌얘진 시야였지만 - 시에라의 눈에 비친 것은 특유의 조금 짖궃은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사랑하는 님. 



   "믓,"



     그녀가 그를 얼마나 애타게 그리워하는지, 그를 얼마나 상망(想望)하는 것인지는 그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았었기에, 하지만 어쩐지 매번 휘말리고 만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시에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작게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을 오므렸다. 그런 그녀를 달래려는 것일까, 레이시안은 그녀가 머리를 뉘인 오른 팔을 움직여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아까처럼, 방금처럼, 얼굴만이 아니라, 그저 꼬옥, 자신의 품으로. 그리고, 만약 레이시안의 의도가 그녀의 뾰로통한 입매를 풀어주려는 것이었다면 그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해도 무방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뾰로통의 ㅃ 자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새빨갛게 달아오른 양 뺨. 당연한 일이다. 뺨에 닿은 피부의 체온 -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감각 그 자체가 그녀의 머릿속을 지우개로 슥슥 지워버렸으니.  시에라는 작게 몸을 움직이려 시도했다. 조금 더, 조금 더 가까이. 이 것으론 아직 부족해.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아. 닿고 있음에도 더 닿고 싶어하는, 안겨 있음에도 더 안기고 싶어한다는 것은 분명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모순된 말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사실인 걸. 하지만 시에라는 그저 '시도' 했을 뿐 결국 순식간에 확, 다가온 통증에 작게 윽, 하고는 몸을 멈추었다. 



   "...괜찮아, 시에라...?"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를 새기듯 사랑스레 보던 레이시안은, 그녀가 미간을 찌푸림과 동시에 황급히 그녀의 등에 팔을 둘렀다. 끌어안듯, 가만히 쓸어주듯 보듬보듬. 시에라는 그제사 몸에 살짝 주었던 힘을 풀었다. 꾹꾹, 긴장한 부분을 풀어주듯 가볍게 누르는 시원한 손길이 기분 좋아 그녀는 새끼 고양이가 갸르릉거리듯 입매를 끌어올렸다.



   "..으응, 그저, 갑자기 움직이려 해서 더 그랬던 것 뿐이니라."


   "부디, 혹시 어딘가 이상하거나 아프기라도 한 곳이 있다면 꼭 말해줘."


   "...응."


   "그럼, 나의 사랑하는 아가씨는 무얼 하고 싶으셨던 걸까나...?"


   "..그, 건."



     그렇게, 갑자기 움직이면서까지. 반쯤은 걱정, 반쯤은 귀여워하는 감정이 담긴 목소리에 시에라는 잠깐 머뭇거렸다. 조금 수줍었던 탓이리라. 아무리 서로 이어지고 또 마음을 확인하고 덧쓰고 서로만을 담아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고, 언제나 뺨이 붉어지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말하거나 돌려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숨기고 싶은 것 또한 결코 아니었다. 그에게 숨기고 싶은 것 따위 없었으며, 말 못할 그런 것이 생긴다는 건 상상만 해도 슬퍼지니까. 물론 간혹 가다 생기는 예외를 제외하고. 하여 시에라는 천천히, 살짝 시선을 애꿎은 창 밖으로 향해 돌린 채 말..을 시작했다가, 결국 다시 그를 마주보았다. 당연한 일이다. 



   "..네, 팔 안에 이리 안겨있대도, ...지금 이렇게, 라면, 네 얼굴이 보이지 않지 않느냐."



     하여, 그것이 슬프니라. 중얼거리면서, 시에라는 간신히 참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눈가에 가볍게 입술을 누른 레이시안은 곧 말을 이었다. 진심을 담아서,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



   "..확실히, 그건 내 잘못이네. 내게는 당신이 보이니까, 그 달빛 머리카락도, 햇빛 눈동자도. 슬프게 해서 미안해, 시에라."



     그는 살짝 고개를 아래로 향하고 동시에 시에라를 조금 끌어올리듯 감쌌다. 그가 조금 내려다보고, 그녀가 조금 올려다보는, 하지만 어느 쪽도 힘들 건 없는, 그저 가만히 서로를 담을 수 있는 그런 눈높이. 그리고, 시선이 맞닿았고, 둘 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 그럼에도 벅차오른 마음은, 다 담기지 못한 마음은 끊임없이, 모든 순간에 점점 더 깊어져서 어쩔 줄 몰랐다. 하여, 하여 아무런 말조차 할 수 없이 결국 말문이 막혀 그리 쳐다볼 뿐이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서로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같은 생각 또 같은 이유로 그리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흔한 비유지만, 마치 영원처럼 둘만이 오롯 존재하는 세계. 또 비유도 과장도 뭣도 아닌, 말 그대로의 '기적'. 

   그렇게, 하염없이 서로를 담았다.





03/



   "....윽,"


   "오야, 시에라. 무리해서 움직이면 안 돼."



     살짝, 레이시안을 따라 몸을 일으키려 하던 시에라는 곧 다시 밀려든 저림에 폭, 하고 주저앉듯 누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시에라를 행여나 이불에 닿으면 아플까 하여 레이시안은 그녀를 재빨리 받치듯 안아들듯 끌어안았다. 그 때까지 감싸안던 이불이 흘러내렸고, 시에라는 그제사 새삼 그 뽀오얀 목덜미부터 보드라운 발 끝까지 피어난 꽃잎 자국을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 우유 같은 피부를 아침 햇살이 어루만져, 마치 명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불러일으켰다. 움찔, 시선을 깨닫고 시에라는 부끄러운 듯 재빨리 양 팔로 몸을 가렸다. 유년기 이후, 침상에서 무언가를 걸치고 잔 적은 생전을 포함해도 드물었으나 그것에 대해 부끄럽다던가 따위의 생각은 해 본 적 없었건만... 오히려 어떠한 감흥도 없달까, 그것이 더 익숙했음에도, 그와 함께할 때에는 언제나 조금 수줍은 것이었다. 

   그런 시에라의 움직임마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듯 못내 귀여웠는지, 또 한 번 가볍게 웃은 레이시안은 먼저 일어섰다. 옆에 적당히 - 던져 두었다, 라는 표현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 두었던 그의 와이셔츠를, 구김을 펴듯 살짝 털고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소녀에게 덮었다. 유리 조각을 만지는 것처럼 지극히 섬세하고 또 소중한 움직임. 행여나 깨질까, 행여나 아플까. 그녀가 부끄럽다는 듯 숨기던 것은 이것으로 대강 가려지긴 했지만, ..이건 또, 이것 나름대로. 레이시안은 살며시 만족스러운 듯 미소지었다. 그의 체격은 남성치고는 오히려 슬렌더한 편이었으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남성치고는'의 이야기. 여성 중에서도 또래보다 가녀린 그녀와는 당연히 몸집이 전혀 다를 수 밖에 없었으니까───말하자면, 어디까지나 전체적으로 가리는 것에 의의를 두었을 뿐, 여전히 헐렁하게 흘러내려, 제대로 옷으로서 기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시에라는 또 시에라대로, 옷가지에 남은 잔향에 또 코끝이 간지러워, 소중한 듯 길게 흘러내린 소맷자락을 꼬옥 움켜쥐었고, 그 하는 모양마저 흐뭇한 듯 바라보던 레이시안은 곧 부드럽게 소녀를 안아들었다.



   "..... 읏,"


   "후후, 당신은 아직 조금 힘들 테니까. 이 편이 낫겠지...?"


   "... 네가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더냐."


   "오야..? 부정은 하지 않겠어.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당신이 불편하다면 하지 않지만..."


   "... .... ... 그렇지는, 않노라."



     결국 샐쭉한 듯 시선을 돌려 대답한 시에라를 보며, 쿡쿡 소리내어 웃은 레이시안은 그녀를 인형처럼 안아든 채 발걸음을 옮겼다. 닿는 온기가, 그 가까움이 기뻐 시에라는 살며시, 그 품에 고개를 폭 묻었다. 




*          *          *




   "시에라, 지금은 괜찮아..? "


     위잉, 가볍게 드라이어의 바람 소리가 울리는 사이에서, 레이시안은 가만 물었다. 뺨의 눈물 자욱이야말로 사라졌지만, 상냥한 소녀는 아마도 마음 한 켠에 계속 담아 두고 있었겠지. 그가 괜찮다 말했음에도. 그나마 처음으로 그것을 보았을 때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것보다는 조금 나아졌을까나. 등에 남은 흉터 정도야 그는 메마르듯 아무렇지 않게 된 지 오래였지만, 그녀는 그 때 뚝뚝, 진주알 같은 눈물을 흘렸더랬다. 네가 이런 아픔을 겪었던 것이 싫다고, 네가 이런 상처를 입었던 것이 싫다고. 네가 괜찮다 하여도 내가 아프니, 네가 그리 가만히 괜찮다 말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이 아릿하니, 그것이 너무너무 슬프고 가슴 아프다 하여 울었다. 애잔한 듯 그 고운 손끝으로 상처를 덧쓰고, 애달픈 듯 가만히, 입술을 대어 지그시 눌렀다.  레이시안으로서는 닿은 적 없던 곳에 닿은 온기가 오히려 놀랄 정도로, 그 순간 새겨질 정도로 상냥했던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의 사랑스런 아가씨, 그의 상냥한 연인. 이 세상에서 오직, 그만의 소녀. 다른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빼앗아갈 수 없는.

   시에라는 나붓 흩날리는 머리칼이 뺨을 간지럽힌 듯 살짝 고개를 흔들고는 잔잔히 미소지었다.



   "으응, 괜찮느니."



     이제는 적어도 그 때 - 처음의 그 때마냥 한없이 아련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애처로이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은 마찬가지인 일이었으니까. 그 마음이 따스하고 기뻤지만, 그렇대도 그녀가 슬퍼해하는 쪽을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는 괜찮다는 듯, 새벽 하늘마냥 말갛게 미소를 머금었고, 레이시안 또한 끌리듯 함께 빙그레 웃었다. 

   그 첫 날에도, 그녀는 이렇게 웃음지었지. 이런 표정으로. 살짝 그의 뒷모습에 얼굴을 묻고 있다, 곧 들고, 그를 꼬옥 끌어안은 채. 이제 네가 이런 상처 따위 입는 일은 없게 하겠노라고. 자신이 약속하겠노라고. 그렇게 말하곤 이리 웃었다. 



   "다행이다... 온도는 괜찮을까나..?"


   "그것이야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근일 드는 생각이메,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네가 나보다 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드느니."


   "오야, 그렇다면 기쁘지만... 으응,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일지도, 당신은 나의 '사랑하는' 시에라니까."


   "...?! .... .... 반박할 수가 없, 지 않느냐, ...조금 분하구나."


   "후후, 솔직한 당신도 귀여워."


   "?! 그, 그그그러니까 그러한 말을 그리 귓가에 대고 하면...!"



     점점 물기가 사라지는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레이시안은 살짝 그 끝자락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시에라의 머리카락을 이리 쓸어내리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그가 그녀에 대해 싫어하는 것이 어디 있겠냐마는, 아가씨의 머리칼에 손을 댈 수 있는 것은 동서고금 일종의 특권이었으니까. 부모형제나 배속의 여자 사용인이 아닌 남성에 대해서는, 정말로 정말로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것 - 보다 범위를 좁히자면, 일반적으로 정인에게만 허락된 것이니까. 그녀 생전의 일이야 정말이지 본의가 아님에도 그가 닿지 못할 시간 밖이었으나, 지금은 아니기에. 깨끗이 감겨주는 것도, 하늘하늘 이리 매만지는 것도, 작은 빗으로 빗어내리는 것도 머리 모양까지도, 오직 그만이. 

   시에라는 매우 귀한 수제의 인형처럼 미동 없이 가만히 앉아 얌전히 있는 모습이었다. 자신이 움직이면 레이시안이 불편할 테니까. 오직 동그랗게 뜬 눈의 금빛 눈동자만이 못내 신경이 쓰이는 듯 이리저리, 레이시안이 손을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또르르 향했다. 그리고는 문득, 머리가 움직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시에라는 하얀 팔을 위로 향했다. 다시 걸친 맞지 않는 헐렁한 셔츠의 소매가 주르륵 아래로 쏟아졌다. 



   "..오야..?"



     그 섬섬옥수가 향한 것은 남자의 뺨. 턱과 뺨이 이어지는 곳을, 시에라는 가볍게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가득가득, 마음을 담아서 조심스레, 보드랍게. 무슨 일일까나, 하는 듯 한없이 상냥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향한 레이시안에게, 살짝 고개를 올려 눈을 마주한 시에라는 자그맣게 말했다.



   "...그냥, 닿고 싶었느니."



     레이시안은 기쁜 듯 웃었다. 네가 마치면 내가 그, 네게 해 주어도 되겠느냐고 시에라는 물었다. 이미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마치 처음으로 할 때 묻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매 순간순간이 그런 느낌인 걸. 그리고 그녀의 그런 생각을 안다는 듯, 레이시안은 나긋이 대답했다. 그래 준다면 영광이야, 나의 별. 

   시에라는, 살짝 그를 그녀 쪽으로 끌어당겼다.





04/



     익숙한 손놀림으로, 레이시안은 달걀을 팬 위에 깨뜨렸다. 동글동글하게 가운데로 모인 노른자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솜씨 좋게 잡은 그는, 문득 하트 모양이라던가로 만들어 보면 그녀가 기뻐해 줄 것인가를 잠깐 생각했다. 물론 답은 기뻐해 줄 것이었다. 아마 그가 계란 노른자를 터뜨리다 못해 통째로 새까맣게 태우더라도, 이 세상 무슨 진미보다도 맛있게 먹을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피곤할 테니 이런 간단한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제대로 된 식사 - 치즈와 버섯, 토마토와 시금치를 담뿍 섞고 크림을 살짝 넣어 보드랍게 만든 오믈렛이라던가, 너무 얇은 것을 바싹 익혀 다 바스라지는 그런 게 아닌 제대로 된 도톰한 베이컨, 아니면 갓 구운 따뜻한 브리오슈와 크루아상에 이즈니 무염 - 그녀는 자극적인 것을 즐기는 입맛은 아니었다 - 버터를 듬뿍 바른 것이라던가, 다섯 종류의 베리를 얹은 폭신한 팬케이크 같은 것들 - 를 먹어 주었으면 하지만, 그가 그리 물었을 때 시에라는 달빛 머리칼을 사락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던 것이다. 그 때 눈을 질끈 감고 강하게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던 것도, 그 직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며 말했던 것도 새긴 것마냥 선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악 달걀 프라이 한 장을 재빨리 옆으로 옮긴 레이시안의 등 뒤에, 작은 온기가 매달리듯 닿았다. 꾸욱, 끌어안는 듯한 느낌, 그의 허리에 감긴 작고 고운 손. 또다시 자신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는 한 쪽 손을 움직여 그 자그마한 손을 꼬옥 맞잡았다. 깍지를 끼듯 살짝 강하게 쥐었다가, 또 보들보들 쓰다듬듯 어루만지듯 부드럽게.쓸었다..가, 가볍게 포개었다. 



   "시에라."



     내 작은 새... , 그의 목소리에 대답하듯 시에라는 레이시안의 어깨 너머로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가볍게 파들파들 떨린 손, 까치발을 띄고 있다는 것이 바로 떠올라, 머릿속에 그 모습을 그리곤 조금 웃어버렸다. 



   "아직 무리하는 건 바라지 않지만... 물론 발돋움하는 당신도 더없이 사랑스러워."


   "윽, ..이, 이 정도는 괜찮느니라!"


   "흐응, ...그럼, 그렇다고 해 둘까나."


   "'그렇다고 해 둘까'는 무슨 의도인 게냐..! ..아, 아무튼. ...그, 내가 무언가 도울 것이 없나 해서."


   "이렇게, 당신이 계속 꼬옥 안아 준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지만... 아야, 아파. 시에라."

  


     새벽 바람마냥 사그라드는 웃음을 흘린 레이시안은 그 말에 움찔한 시에라가 가볍게 손끝을 꼬집자 전혀 아프지 않다는 것이 한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짐짓 아픈 척을 해 보였다. 물론 그를 모를 리 없는 시에라는 작게 볼을 부풀렸지만.



   "그렇다면 식탁을 차리는 걸 조금 도와주지 않겠어..?"


   "식탁인가... 응, 알겠느니. 잼.. 이랑, 버터..랑, 우유... 랑, 접시..."


   "후후, 고마워, 시에라. 그러고보니 당신이 우유에 넣을 꿀..은,"


   "괘, 괜찮느니라! 오히려 너무 달지 않을까 싶느니, 이 시대의 그건 아무리 귀하다는 걸 먹어도 조금, 인공적인 맛이 나서..."


   "그런가... 그건 어쩔 수 없을지도. 하지만 조만간 장을 보러 나가게 되면,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으응... 하지만 정말 괜찮느니. ...."



     잠시 머뭇거리던 시에라는, 곧 마음을 정한 듯 톡, 하고 중얼거렸다. 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무엇보다 내게 달콤하노라. ...하여 거기에 더 달큰한 것은 필요치 않기에... 그 수줍은 마음을 들은 레이시안은 곧 두어 번 눈을 깜빡이고는 이내 유리 구슬이 굴러가는 양, 가을 바람인 양 투명하게 웃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의 꽃. 입 속으로만 가볍게, 밖으로 내뱉지 않은 말을 중얼거린 그는 톡, 하고 노른자가 보기 좋게 부푼 반숙을 조심스레 접시에 덜었다. 그리고는 토스트기에 시간을 맞춰 두었던 빵을 톡, 하고 함께 꺼내어 발걸음을 돌렸다.

   예쁘게, 또 정갈하니 보기 좋게 차려진 식탁을 보고 - 최근은 항상 그랬지만 - 입가가 피는 것을 자각하며 그는 새하얀 접시를 내려놓았다.



   "빵도 직접 굽는 게 좋을텐데,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서 조금 아쉽네..."


   "나는 전혀, 아무런 불만도 없노라. 레이시안. 또.. 그대와 함께 이걸 사러 나가는 것 또한 즐거웠고. 가게의 노부부도 상냥하고 인심이 좋아 좋았느니라."


   "아아, 그렇게 말해준다면 기쁘지만. 가게의 주인..은, 확실히, 특히 당신을 귀여워하는 것 같았네."


    "응, ... 믓, ..레이시안, 또 너는 먹지 않는 게냐."


   "으응..? 아아, 하지만 나는 당신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 걸."


   "..읏, .... .... 자, 아─ 해보거라."


   "오야..? 이건.. 후후, 아──"



     시에라는 톡, 하고, 갓 데운 보드란 빵의 한 조각을 떼어내 버터를 조심조심 바르고 입에 넣어 오물거렸다. 그 모이를 먹는 아기 새와 같은 모습에, 레이시안은 양 손의 깍지를 낀 채 턱을 받치듯 괴고 그녀를 흐뭇한 듯 미소지으며 바라보았다. 먹는 것만을 보아도 배가 부른 것처럼. 하지만 시에라 쪽에서는 그가 거의 먹을 생각도 없어 보이는 것이 조금 신경이 쓰였던 것일까. 딸기 잼을 고르게 펴 바르는 것에 집중하던 그녀는 곧 레이시안을 쳐다보고는, '또 먹지 않는 게냐'라며 쀼루퉁한 듯 눈을 가늘게 뜨곤 볼을 부풀렸다. 이어진 그의 대답에 살짝 귓불을 붉히며 입가를 삐죽였기에 부풀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곧 정말이지 사람을 걱정하게 만든다는 듯 - 레이시안은 언제나 느끼고 있는 기분으로 - 한숨을 가볍게 폭 쉬고는 살포시 빵을 조금 떼어내어 내밀었다. 그리고 살짝 넣어주는 순간, 시에라는 손가락 끝에 닿았던 감촉에 무심코 몸을 움찔했다. 부, 분명히 고의였을 것이다. 그의 표정이 - 매우 만족스러운 듯한 - 무엇보다 좋은 증거이리라. 



   "..응, 정말로 맛있네...."



     도대체 무엇이 맛있다는 건지 매우 신경이 쓰이지만, 물어보면 절대로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시에라는 흰 빵을 꿀꺽 삼켰다.





05/



   "만약 힘들거나 피곤하다면, 정말로 괜찮은 척 하지 말고 꼭 말해 줘야 해, 시에라..?"


   "응, 알겠느니. 약조하겠노라."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모여 있는 거리. 길을 걷는 연인 한 쌍은 드물 것도 아닌 흔한 것이었겠지. 물론 그것이 저 둘과 같이 그저 입 다물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잡아끌다못해 사람을 홀리는 자들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들은 그런 자들이었기에 거리 한복판에서 모세의 기적을 선보이며 걷고 있었다. 본인들은 주변인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달까.. 이미 시야에도 없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그저 미남미녀라 칭할 범주였다면 사람들 또한 모델이니 셀러브리티니 하는 말을 떠들며 몰래 사진을 찍고 수군거리고 감탄하며 지켜보겠으나, 그 둘의 경우에는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단순히 이미 현실이 아닌 것 같은 미모를 넘어, 똑바로 바라보고 감히 이래저래 말할 수 없는, 어쩐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그 자리 만인의 머릿속을 채웠다. 조금 숨이 갑갑해지는 그런 느낌까지도. 

   그들이 그나마 다시 숨통이 트인 것은, 여자아이 쪽이 무어라 남자에게 말을 하고, 그가 그녀를 상냥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을 때 즈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나마 그런 감각을 물에 푼 듯 녹여주는 것이 소녀의 존재인 듯 싶었다. 소녀가 무엇이라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제사 자신들이 인파를 말 그대로 가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들은 살짝 길 한 구석으로 기울어 걷기 시작했다. 



   "레이시안, 레이시안. 그러고보니, 이 근처에 치아키가 좋아하는 마카롱을 파는 곳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느니. 이후 돌아갈 때, 잠시 들러서 조금 사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만... 괜찮겠느냐?"


   "물론, 사랑하는 시에라. 당신의 생각.. 하물며 그런 것에 내가 반대할 리는 없어."


   "그렇느냐, 다행이로다. ...그 아이가 기뻐해 주면 좋겠느니."


   "후후, 치아키..라면 정말로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레이시안의 말을 듣고서야, 시에라는 조금 기쁜 듯 웃었다. 비록 그 덕분에 자신 깊숙이 있었지만 자각하지 못하던, 논리로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의 마음이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시에라는 그런 것에 조오오금 자신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오히려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에 가까웠지만. 배시시 미소지으며, 그녀는 살짝, 손을 여전히 그의 손에 깍지를 끼고 꼬옥 서로 잡은 채 조금 더 레이시안 쪽으로 살짝 달라붙었다. 그가 살짝 놀란 듯 했다가 곧바로 기쁘게 웃어주는 것이 행복했다. 한없이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갑자기 사랑스런 당신은 무슨 마음이 들었던 걸까나, 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에 시에라는 조금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그냥.. 어쩐지, 문득.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같은 자..도 아닌, '네'가 ... 그, 나의... 정인이란 것이 기뻐서. ..조금, 자랑하고 싶어져서...."


   "...이건 또, 기쁜 말이네. 나의 달, 나는 항상 당신이 내 연인이란 것이 너무나 기쁘지만."



     그렇게 말하며, 레이시안은 살며시 그녀를 조금 더 끌어안았다. 가까이 잡아당겼다. 숨기려는 듯, 자신만이 보겠다는 듯. 세상에서 오직 그만의 작은 새, 시에라는 조금 뺨을 붉히고는 그의 몸짓에 휩싸이듯 끌어안겼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게 된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고, 그 잔향을 쫓듯 그녀는 살짝, 얼굴을 묻었다.



   "...응...?"



     새끼 토끼마냥 가볍게 뺨을 부비던 시에라가 빼꼼 뜬 금빛 눈이 어딘가를 향한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좇듯, 레이시안 또한 살짝 고개를 돌렸고, 그들의 금빛 시선이 닿은 곳은 마악 점원 아가씨가 바삐 정돈중인 꽃가게. 카페들이 많은 거리인 탓일까, 아담하고 예쁜 꽃집이었다. 물론 그들이 기억하는 땅의 싱그러운 꽃에는 안타깝게도 비할 바는 되지 않았으나, 여전히 자그맣고 풋풋한 예쁜 꽃들이었다. 

   톡톡, 시에라는 레이시안의 소매를 가볍게 두어 번 잡아당기고는 그를 올려보았다. 가고 싶다, 고는 그대로 말하지 않는 것이 또 드문 모습이었다. 평소의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곧게 하는 성품이었으니까. 금빛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를 담는 모습을 사랑스레 바라보며, 레이시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기쁜 듯 웃고는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어머, 어서오세요───"



     성실하게 또 점원이 건넨 인사에 마주 인사를 돌려주며, 시에라는 망설임 없이 걸었다. 멈춘 곳은 새하얀 꽃들이 한가득 꽂혀 있는 화병 앞. 살짝, 쪼그려 앉아 꽃을 자세히 보는 소녀가 섬섬옥수를 뻗어 꽃에 스치자 마악 봉오리 피워낸 듯 싱그러워지는 하얀 빛. 아침 이슬을 머금은 듯 아름답게 피어난 꽃을 보고 기쁜 듯 웃음 담은 채, 시에라는 마치 보라는 듯 레이시안을 올려보았다.



   "..백합, 에.. 은방울꽃, 인가. 하얗고 예쁜 꽃이네, 응. 시에라.. 마치 당신처럼."


   "...?! 그, 그런...말은...."


   "어머나, 은방울꽃에 백합... 혹시 부케로 쓰실 것 찾으시는 건가요? 꽃 미리 골라두시려는..?"


   "부, 부케...?!"


   "오야, 그건..."


   "앗, 제가 잘못 봤나요..? 그럼 죄송해요, 어떡하나.. 두 분이 아무리 봐도 딱 그만한 연인 같으셔서..."



     점원은 멋쩍은 듯, 혹은 조금 송구하다는 듯 곤란한 눈매였다. 시에라는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져서, 레이시안은 꽤 무엇인가가 마음에 드는 입매로. 그리고 수 분 후, 그들이 가게에서 나올 때, 시에라의 왼쪽 손에는 조금 구깃한 맛이 있는 종이에 곱게 쌓인 백합꽃과 은방울꽃 한 다발이 꼬옥 쥐여져 있었다. 아직 꽃망울 갓 맺힌 꽃들이건만, 곧 있으면 흐드러질 듯 가득가득 예쁘게 풍성하게 묶은 꽃다발을 기쁜 듯 바라보는 시에라를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던 레이시안은, 슬쩍, 흘끗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역시, 예상대로 가득가득 향해지는 시선들에, 그는 살며시 팔을 뻗었다. 

   시에라를 살짝, 잡고 끌어당겨서, 그의 품에 꼬옥 대고 살짝 머리를 눌러 깊이 안는다. 그의 품 안에 꼬옥 가두듯, 아무도 아무도 보지 못하게.



   "...아름다운 꽃에 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꽃에 모여드는 것은 꽃과 달리 아름다우리라는 법이 없으니까. 특히나, 저런 까마귀들이라면."


   "...레이시안...?"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 시에라, 내 사랑, 다른 사람들이 본다고 해도 당신이 곁에서 없어지는 일은 없다는 걸 아는데, 계속 붙잡고 싶네..."


   "믓, 그렇다면 ... 그, 그저 이렇게 계..속 잡고 있으면 될 일이 아니더냐."


   "후후, 그러면 될까나. 있지, 사랑스런 시에라. ...잠깐 당신의 눈을 나에게로 향해주지 않겠어..?"



     시에라는 조금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기는 것이 싫을 리 없었던 것인지 파고들듯 품에 깊숙이 들었다. 달빛 받은 계곡물처럼 흐르고 또 흐르는 머리칼이 물결치듯 흘러내렸고, 그는 그녀를 감싸안았다. 귀염부리는 새끼 동물처럼 배시시 웃던 시에라가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우듯, 오로지 비치는 것은 레이시안 그 혼자 뿐. 그리고 그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응, 역시.. 잠깐으로는 안 될 것 같네. 





06/



   "으으, 배가 부르구나. 너무 많이 먹은 듯 싶노라."


   "그게..? 시에라, 당신은 조금 더 많이 먹어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귀여운 작은 새."



     배가 빵빵해졌다는 듯 후아, 하고 깊게 숨을 내쉬는 시에라의 허리에 레이시안은 가볍게 팔을 감았다. 새침한 듯 부끄러운 듯 조금 시선을 살짝 피하다가도 결코 거부는 하지 않는 것이 또 귀여웠다. 역시, 그 전날 밤 탓에 조금 피곤했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식곤증일까. 시에라는 가볍게 고개를 톡, 했다가 황급히 붕붕 고개를 저었다. 그 양을 지켜보던 레이시안은 살며시 그 손을 시에라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다소 서늘한 손의 온도에 움찔하며, 시에라는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보았다.



   "시에라, 만약 당신이 피곤하거나, 힘들거나 졸리면 내가 안고 가도 되지만... 그게 시선이 신경 쓰인다면 택시를 타는 방법도 있겠고. 원한다면 영체화해서 빠르게 돌아가는 것도 괜찮지만..."


   "으응, 아니니라. 버거란 것이 배가 불러 조금 평소보다 더 과식한 느낌 탓이니라. ...거기에, 그대와 이리 걷는 것도 마냥 좋으니. 내가 그 와중에 졸음을 느낄 겨를이나 있겠느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피곤하면 꼭 언제든 말해 주어야 해..?"


   "응. 알겠느니."



     시에라는 살폿 웃었다. 확실히 그녀는 지금 익숙하지 않을 정도의 양을 먹은 탓인지 조금 빙글빙글한 느낌이었으나 - 아픈 것은 아니었다 -, 별로 무리될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애당초, 그녀가 현대를 아직 잘 모른다며 부탁해 결국 알아서 다 주문했던 그가 나온 음식을.. 그 높은 버거란 것을 전혀 무너뜨리거나 흐트러뜨리는 일 없이 나이프로 곱게 썰어 주었고, 그것에 감탄하다 그가 입 안에 넣어주는 것을 받아먹다 하면서 있다보니 어느 틈에 그 정도로 먹게 되었던 것 뿐. 

   시에라는 가볍게 고개를 붕붕 젓고는 문득 조금의 짓궃음이 생긴 듯 확, 하고 꽃다발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얼굴을 소복이 맺힌 흰 꽃이 가렸고 그의 입가를 간질였다. 마냥 귀여운 장난에, 레이시안은 파도거품 사라지듯 웃음 흘렸다.



   "시에라."



     그에 깨어나듯, 조심스레, 시에라는 말간 햇살 같은 눈을 빠끔, 꽃 위로 내밀었다. 장난스러운 미소가 눈매와 볼 가득 맺혀 또다른 꽃을 피웠다. 햇빛 눈동자가 지금 밤하늘 끄트머리에 걸린 초승달마냥 곱게 포개졌다. 생전의 그녀는 아마, 거의 지을 줄도 몰랐을 그런 장난기 어린 미소. 아무도 분명 본 적 없었을 그런 표정을 입가에 맺은 채, 시에라는 부러 뾰로통한 척 말했다.



   "네가 좋아하는 꽃들이 아니었느냐."


   "후응, 맞지만 틀렸어, 시에라."


   "...맞지만 틀렸다는 건....?"


   "그 꽃들도 좋아하지만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여기 있는 걸."



     말과 동시에, 레이시안은 부드럽게 소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그의 품 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꽃다발이 망가지지 않게, 하지만 누구보다 가까이. 두근, 두근, 하는 고동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밤의 강가는 조용해서, 희미하게 흔들리는 가로등 빛과 머얼리 번화가의 불빛, 그리고 대교의 야간 조명이 비치는 불빛의 전부. 인적조차 드문 곳에서, 서로를 확인하는 듯, 서로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듯. 사과마냥 발갛게 얼굴을 물들인 시에라는 잠깐 망설이듯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는, 그녀는 발돋움하듯 까치발을 들었고, 그림자가 이어졌다.

   입술에는 하지 못하는, 살짝 입술 윗쪽이어야만 간신히 할 수 있는 그런 수줍은 입맞춤. 꽃잎 같은 입술을 지그시 누른 시에라는, 곧 서서히 떨어졌다. 이어졌던 것이 떨어지는 게 못내 아쉬운 듯, 안타까운 듯. 놓고 싶지 않아. 그러한 마음으로. 

   하지만 그러한 그녀의 아쉬움은, 그저 순간일 뿐이었다. 살짝 예상치 못했다는 듯 눈을 깜빡였던 레이시안이, 그녀를 끌어당겼고, 살짝, 몸을 숙였고──



    "────,"



     시에라는, 눈을 크게 떴다. 따뜻한 온기가 이어졌다. 살짝 살짝 건드리듯, 마치 장난을 치는 것처럼, 사탕을 주었을 때처럼 서로 얽혔고, 살짝 감았다 곧 풀어주었다. 시에라는 놀란 탓에 그만 멈추었던 숨을 터뜨린 듯 가볍게 - 가쁘게 -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익히 체감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녀의 정인은 짓궃은 남자였다.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 또한 그저 사랑할 뿐이었지만. 그리고 또, 그녀 같은 망설임..이랄까, 수줍음이 없어서일까. 그녀가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한다 싶으면 곧바로 그의 수십 수백배로 그녀에게 돌려주었으니까. 그녀는 그저 행복하고 수줍게 기뻐할 뿐이었다. 손과 손 사이에 온기가 계속 흐르고, 둘 다 먹먹한 듯 그저 눈을 마주보고. 물론 그것 역시 일상이었다. 당연한 말이었다. 사람의 말로 그들이 가진 마음을 오롯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나마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영국의 극작가 정도나 되어야 시도나 해 볼 법한 일이었다.

   도저히, 말로 전할 수가 없어. 그것이 항상 못내 애틋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림자가 다시 겹쳐졌고, 이어진 것이 떨어졌음에도 그들은 서로 이마를 포개듯 맞댄 채, 호흡마저 생생한 그 거리에서 겹치듯 겹치듯 닿을듯 닿지 않을 듯, 속삭였다. 



   "정말 사랑해. 나의 꽃. 나의 달. 나의 빛."


   "...나의 주인, 나의 님... 나도, 정말로, 정말로 좋아해.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 아슬아슬한 거리마저 아쉽고 또 사랑스러운 듯, 시에라도 레이시안도, 그저 그런 채로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시에라는 그의 뺨을 덧쓰든 보드라이 어루만졌고, 레이시안은 그녀를 더욱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그 머리를 살며시 눌렀다. 

   그리고 그 후, 그들이 손을 서로 이은 채 돌아가며 나눈 말들은 또 다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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