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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오

ISR 2014.04.16 13:21 조회 수 : 3

다과회가 끝나고, 수도사 찰스와 아시아토는 교회 안에 마련된 조그마한 방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주본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한 명이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그러더라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겉모습 쪽으로나 성격적인 쪽에서) 일단 얼굴을 붉힌 쪽은 아시아토였다. 찰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수도사로서의 나에게 볼일이 있다고 하더니, 계속 그러고만 있을 셈인가?"

아시아토는 고개를 들었다.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말했다.

"들어주셨으면 하는 게 있어서요. 그런데, 진지하게 말하려고 하니 조금 부끄러워서...헤헷."

"처음 내게 말했을 때는 충분히 진지하지 않았던 건가?"

"아뇨아뇨, 그럴 리가요! 하지만 전에 입밖으로 꺼냈을 때는 조금은 욱했던지라 별로 부끄러움을 못 느꼈거든요. 그래서 주저없이 말할 수 있었던지도 몰라요."

이제 본론에 좀 가까이 가볼게요, 하고 아시아토는 말했다.

"가까이 가본다?"

참으로 이상한 표현이군, 하며 찰스는 중얼거렸다.

"음 그러니까.. 설명할 게 많거든요. 아니지, 설명하고 싶은 게 많아요. 들어주실 수 있는 거죠? 수도사니까?"

"바쁜 몸이다만... 하아-."

찰스는 다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들어주도록 하지, 시시한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좋겠군."

"시시한 이야기랄까... 어떻게 들릴지는 잘 모르겠네요. 일단 시작할게요."

그녀는 입을 열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맹세를 하러 왔어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바보같아 보이는 맹세를. 제가 바라는 건 찰스 씨가 이걸 들어 줬으면 하는 거에요. 다른 의도는 없어요."

"맹세, 인가."

"네. 저는 제 손 닿는 한 최소한의 희생자만으로 이 성배전쟁을 끝낼 거에요."

아시아토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말했다.

"사실은 아무런 희생 없이 성배전쟁을 끝내고 싶지만, 벌써 몇 명이나 희생되어 버렸죠. 그래도 저는 최선을 다할 거에요. 죽게 하지 않고, 죽이게 하지 않겠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왜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묻고 싶군. 성배전쟁이 애들 장난이 아니란 건 알 테고, 참가자들이 필사적인 소원을 지녔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텐데."

"처음엔 조금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어요. 왜 하필 전쟁일까? 이유는 금방 알았어요. 다들 죽고 죽이려고만 해요. 겉으로는 얌전해 보이면서도, 마지막에 와서는 다들 서로를 죽일 생각이에요. 그러면서 그걸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죠. 저는 그걸 이해할 수 없어요. 그리고 납득할 수도 없고. 저는 서로 죽고 죽이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고 보여주고 싶어요. 그리고 그 와중에 아무것도 모르는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지 않게 막겠어요."

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루한 이야기가 되리라 생각했지만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이 소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이루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도록 만든 '근본'이 궁금해졌다.

"궁금하군."

"네?"

그의 혼잣말에 아시아토가 되물었다. 찰스는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보기에 너는 보통 인간으로 보인다. 조금 마력을 다룰 줄 알고, 성배전쟁의 마스터라는 것 이외에는 무력한 인간이지. 그런데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드는거지? 나는 그게 궁금하다."

"저, 저는..."

아시아토는 말하려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정말로 말해도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듯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러는지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중요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죠. 그건 그사람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가끔씩만 그 존재감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적어도 육신이나 영혼 중 하나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의 경우는 굉장히 크게 그 영향을 받고 있어요."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그걸 알아요. 거부할 수 없고, 거부할 생각도 그다지 없어요. 그게 있기에 전 살 수 있으니까. 비록 그게 저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켜 버렸지만...

저는, 아니 나는, 모두를 사랑해요."

아시아토는 그 말을 내뱉었다. 그 말투에서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이 세계가 좋아. 푸른 하늘이 좋고, 든든히 나를 받쳐주는 땅이 좋아. 힘들게나마 꽃을 피워내는 저 초목들을 사랑하고, 망가져버린 자연의 순환 속에서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동물들도 사랑해. 비록 자연을 배제해 버린,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은 건물일지라도 나는 좋아할 수 있어. 하지만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은, 정말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야. 선도 악도 가리지 않고 사랑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비록 그들이 나를 슬프게 해도, 나는 그들을 사랑해. 비록 그들이 이미 죽었던 자들일지라도, 영웅으로 불렸든 악마로 불렸든,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이러는 거야. 불가능해 보여도 도전하는 거야. 왜냐하면 나는..."

사랑하고 있는걸. 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찰스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에 휩쓸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는 자세를 바로잡고 말했다.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축복이라고들 하지, 너는 그 선물을 너무 과하게 받았을지도 모르겠군."

찰스의 눈빛은 처음의 지루함을 담은 눈과는 다르게, 신기한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말투도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그대의 맹세에 대해 얘기하자면, 그것이 그대의 소원이라면 내게 막을 권리는 없겠지, 개개인의 소망이 있고, 성배는 그대의 소망에 의해 그대를 호출한 것일테니. 그 결말이 과연 어찌될지는 흥미롭게 고대하고 있겠네. 작은 어린양이여."

고마워요, 하고 아시아토는 찰스에게 대답했다. 찰스는 그녀가 안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의심하는 존재다. 아무리 굳은 믿음을 지니더라도 언젠가 흔들리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그녀는 어떻겠는가. 불가능한 일을 해내겠다고 선언한 존재다. 겉으로는 강한 척 하더라도 역시 불안했을 것이리라.

정말로, 흥미로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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