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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비밀글

Reiarine 2012.11.26 05:19 조회 수 : 2



 00.


 여자는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지옥같던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던 시간도 잠시였다는 걸 저주할 여유도 없이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불이 꺼진 채로는 눈이 가려져있지 않아도 들어온 것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뭔가를 준비하는 듯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지만 그녀에게는 전혀 좋은 소식이 아니었고 오히려 공포를 증폭시킬 뿐이었다.


 "이름이 뭐지?"


 들려온 것은 남자의 목소리었고 그것은 그녀를 절망시키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름이 뭐냐고 했어. 또 귀를 막아두기라도 한 건가?"

 "크리, 콜록, 크리스틴…."


 재촉하는 카이엔의 물음에 크리스틴은 간신히 쉬어버린 목소리로 대답할 수 있었다. 말투가 조금 신경질적으로 변했을 뿐 카이엔이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자 크리스틴은 잠시 안심할 수 있었다.


 "소리라도 지른 건가? 누가 듣고 도와주러 올까봐? 그 정도면 내가 먼저 듣고 찾아오지 않았겠어?"


 카이엔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비웃음이 섞여있었다. 크리스틴이라는 여자가 지른 소리가 물론 자신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는 걸 그녀도 알아챘는지 궁금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벌써부터 그녀를 몰아붙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사… 살려주세요. 제발… 뭐든지, 시키는대로 뭐라도 할 테니까…"


 크리스틴의 애원에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멈췄다. 카이엔은 준비하던 걸 잠시 멈추고 크리스틴에게 다가갔다.


 "뭐든지 하겠다고?"

 

 카이엔의 물음에 크리스틴은 고개를 끄덕여댔다.


 "네, 제발… 그러니까…"

 "아까 어떤 여자가 왔었지?"


 이번 물음에는 크리스틴이 답하지 않았지만 상관하지 않고 카이엔은 계속 말했다.


 "너를 죽이지 말라고 하더군. 평소처럼 가지고 놀면 될 것이지 왜 꼭 죽여야 하냐고 하던데. 그래도 뭐든지 할테니 살려달라고 할 거야?"


 크리스틴은 애원했던 것과 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아무런 느낌도 없이 칼침을 놓은 남자가 '가지고 노는' 것과 죽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끔찍할 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땡."


 그녀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카이엔은 가차없이 시간종료를 알렸다. 그때까지도 크리스틴은 어느 쪽이 더 끔찍할 지 결정할 수 없었다.


 "오른팔을 풀어주지. 쓸데없는 짓을 하면 손을 잘라서 네 몸 속에 쳐넣을테니까 얌전히 있어."


 카이엔의 협박에 겁을 먹은 크리스틴이었지만 그가 말한 대로 묶여있던 오른쪽 팔을 풀어주자 오랜만에 신체의 자유를 맛 본 그녀는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좋아, 마지막 기회를 주지."


 마지막 기회라는 말에 크리스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렇게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지금 네 손 바로 앞에 두가지 물건이 있다. 둘 중 하나를 잡아."


 카 이엔의 말대로 손을 뻗어보자 두가지 물건이 만져졌다. 하나는 매끈한 느낌의 무엇인가였고 하나는 싸늘한 느낌의 금속 같은 것이었다. 크리스틴은 두 가지 물건을 만지며 그것들이 어떤 물건인지 알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른팔을 제외한 몸 전체가 침대에 묶여있는 채였고 뻗은 오른팔에 살짝씩 닿는 물건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이번에는 타임오버는 없지만 빨리 선택해줬으면 좋겠는데."


 내 용과는 다르게 재촉하는 카이엔의 말에 어느쪽을 선택해야하나 갈등하던 크리스틴에게 기적같이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싸늘한 금속은 칼이었다. 카이엔이 들고 다니던 나이프였다. 살았어, 운이 좋았어, 다행이야 하는 생각과 함께 크리스틴은 외쳤다.


 "이거요, 이걸로 할게요!"


 크리스틴은 매끈하던 물건 쪽을 손에 대며 말했다.


 "그래, 그 쪽이란 말이지?"


 카 이엔은 키득 웃더니 침대에 묶여있는 크리스틴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양 발, 왼쪽 팔을 차례로 풀어준 카이엔은 계속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크리스틴도 웃고 있었다. 이런 하룻밤 악몽같은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에 신에게 감사드릴 정도였다.


 "앉아. 그리고 가져가."


 카이엔의 명령에 크리스틴은 고분고분 따랐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고 카이엔이 건네주는 것, 자신이 선택한 매끄러운 물건을 받았다. 분명 나머지 하나는 칼이었고 이건…


 "…잔?"


 그녀가 선택한 것은 유리잔이었다. 매끈한 유리잔에 맥주가 담겨 있던 것이다.


 "마셔."


 카이엔의 말에 크리스틴의 의심이 다시 되살아났다. 이렇게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 분명 평범한 맥주가 아니었다. 미약…? 아니면 혹시…

 그런 의심에 잔 안에 든 것을 쏟아버리려던 크리스틴의 손은 카이엔에게 제압당했다. 그리고 남은 카이엔의 한 손은 그녀의 턱을 잡고 침대에 찍어눌렀다.


 "아아아악!!"


 침 대에 크리스틴을 쓰러트린 카이엔은 그대로 무릎으로 그녀의 배를 찍어눌러서 움직일 수 없게 했다. 배쪽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크리스틴이 비명을 질렀지만 카이엔은 들은 체도 안하고 크리스틴의 입을 억지로 벌려 잔 안에 든 것을 크리스틴의 입 속으로 쏟아넣기 시작했다.


 "그, 콜록! 그만…!"


 크리스틴은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억센 손힘에 머리가 침대에 박혀버린 것 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필사적인 저항도 아무런 소용 없이 카이엔은 크리스틴의 입으로 잔에 있던 걸 전부 쏟아부었다.


 "켁, 크흑… 켁,"


 할 일을 마친 카이엔이 자신의 몸을 누르던 걸 그만두자 크리스틴은 곧바로 일어나 기침을 터트렸다. 강제로 마신 것이 속에서 올라오는 듯 했다.


 "콜록, 콜록…. ……하아."


 억지로 밀어넣어진 액체에 기침을 토해냈지만 크리스틴은 딱히 어떤 이상은 느낄 수 없었다. 독이 들어 있어 마시자마자 피를 토하며 죽을 줄이라도 알았지만 당장에는 아무런 안좋은 느낌도 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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