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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사랑

2009.01.06 15:48

악마성루갈백작 조회 수:439

 

"가령, 너만을 따라주고, 너만을 바라보고, 너만을 사랑하고, 너만을 쳐다보고, 너만을 좋아하고, 너만을 쫓아오고, 너만을 위해주는─그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봐, 저건 어디의 판타지냐? 있을 수 없다. 있을 수 없어. 그런 사람, 있을 리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말도 안 된다. 완전히 규격 외의 존재라고. 그런 인간이 존재할 리가 없잖아? 가정 자체가 그릇되었다. 이런 결함제품에 인간실격인 녀석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거야말로 난센스다. 여기서 수식어를 덧붙이자면 절대로, 라고 해야 될까. 영어로 표현하면 Never. 한없이 0%에 수렴하는 확률이다. 어쨌든 이걸로 증명완료(QED). 한 끼 식사거리도 되지 못했군.


"…그러니까 가령이라고 했잖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너한텐 농담도 못하겠다."


네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만들었잖아, 라고 반박하려던 걸 애써 참았다. 어떤 식으로든 이유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건 내 신조에 어긋나는 일이다. 빌어먹을, 완전히 녀석의 손바닥 위에 있는 기분이군. 쳇, 미묘하게 짜증나는 상황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나.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그렇다면, 넌 그 사람을 좋아할 수 있겠어?"

"아니."


0.1초도 소비하지 않고 딱 잘라 부정했다. 나로부터 그런 대답이 나올 거란 예상은 전혀 하지 않은 것인지 녀석은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하단 듯이 나를 쳐다봤다. 어이, 그 정도는 예상 범위 안이잖아? 아니면 아직도 나란 사람의 본질을 눈치 채지 못한 거냐? 나 참. 귀찮게 됐군.


"왜 아니라고 생각하지? 너만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매우 기쁜 일이고, 너로서도 싫은 상황은 아닐 텐데?"


그래, 이런 결함제품에 인간실격인 사람을 좋아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분명히 행복한 일이겠지.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상대를 좋아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정말로 단 한 줌도 상관없는 이야기다. 일반론을 끌고 오는 건 자유지만 거기에 날 적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완벽한 오산이다. 단지 타인까지 자신 안에 끌어들이려는 끈끈한 삶에 찬동하지 않는 것뿐이지만.


"넌 타인의 호의에 대해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해? 아무리 그래도 전에 ○○가 너를 좋아했던 것은 틀림없었어."


틀림없었다라, 묘하게 확정짓는 말투로군. 그런 식으로 타인의 기분을 제멋대로 단정 짓는 건 실례다. 뭐, 딱히 태클을 걸 마음도 들지 않지만. 난 타인의 인생에 간섭하려 할 정도로 오만하지 않으니까. 이것 참, 무기력 자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절로 한숨이 나오는군. 역시 평소대로 하는 게 낫겠어.


"너를 좋아하니까 너도 나를 좋아해라? 어이어이, 그런 건 단순한 협박이야. 유감이지만 난 상호주의자도 아니고, 호의에 호의로 돌려줄 만큼 성격이 좋은 사람도 아니야."


나는 타인에게 호의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단지 다른 사람이 나에게 호의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할 뿐이다. 그녀가 아무리 나에게 애정을 보냈다고 해도 내가 그것에 대해 보낼 수 있는 것은 곤혹과 당혹, 그리고 무관심이란 마음뿐이었다. 때문에 결함제품. 때문에 인간실격. 나란 놈은 정말이지 어중간하군. 스스로 자신에게 기가 찼다. 기가 차기는커녕 경멸할 정도다. 뭐가 어찌됐던 결국엔─


"어차피 그것뿐이었으니까…."

"음? 무슨 말 했어?" 녀석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무 소리도 안했어."


내가 그녀에게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내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 나 참, 정말이지. 정말로 시시하기 짝이 없다. 너무 볼품없어서 써먹을 데가 없다. 뭐 이런 헛소리가 다 있지.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들먹거릴 정도로 난 성실한 성격이 아닌데 말이야. 아, 귀찮아.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헛소리지만."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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