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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체동

2008.11.20 01:17

pe脫 조회 수:736

군대에서 썻던겁니다.

네? 이상하다구요? 뭐라구요? 잘안들려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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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동??, 적외赤外

 


어느덧 등교 길의 밤나무에 달린 가시들이 빨갛게 익는 가을이다. 여름의 더위는 이미 자취조차 찾아 볼 수 없고, 겨울을 앞둔 말간 하늘에 입김이 운무를 더하는 날씨가 되었다.

이제 고2의 막바지를 바라보는, 예비 수험생인 소녀는 아직 사람들에게 들켜 이른 계절에 떨어지지 않은 채로, 날카롭게 벼려진 가시를 사납게 내리 꽂을 준비를 하는 밤송이들을 조심스럽게 피해 등교 길에 나섰다.

날씨가 조금 추워서인지, 소녀는 청색이 살짝 섞인 짙은 검정의 교복 위에 상아모양의 단추가 달린 코트를 입고, 등에는 귀여운 자수가 놓인 옅은 주홍빛 가방을 메고 있었다. 단정히 빗은 조그마한 어깨를 살짝 넘긴 검은 생머리는, 소녀의 걸음에 따라 율동 있게 흔들렸다.

소녀의 이름은 은비활. 그녀의 할아버지가 순 한글로 지어준 이름이지만, 이름 자체가 썩 여성스럽지 못해 소녀는 자신을 은비, 라고 불러주길 바라곤 했다. 이름의 의미는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답다고 자신하는 소녀지만, 그 의미를 파악해 주는 사람은 이제껏 한명도 없었고, 자기 이름의 의미를 굳이 광고하고 다니는 쑥스러운 일을 할 정도로 소녀가 철면피인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은비는, 소녀가 자신을 그렇게 불러주길 바라니 이렇게 부르겠다. 은비는 청신(淸新)고등학교의 정문으로 향하는, 희한하게도 밤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널따란 대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가 뒤에서 은비의 이름을 불렀다.

“은비야! 안녕!”

“응. 안녕, 유린아.”

은비는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하고, 한손을 힘껏 치켜들고 좌우로 흔드는 유린을 향해 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유린은 두다다다 달려 은비의 곁에 섰다.

“헥! 헥!”

“아침부터 땀 흘리게 왜 뛰고 그래?”

유린은 오랫동안 뛰었는지, 약간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흥건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약간 질책하는 말투에도, 유린은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싱긋 웃어 보였다.

“헤헤, 은비가 저 멀리서 보이 길래, 힘껏 뛰었지 뭐야.”

“…도대체 어디서부터 뛰어 온 거야?”

“저기서!”

유린은, 오른손의 손가락 하나를 펼쳐 대로에서도 한참 떨어진 고가도로를 가리켰다.

“저기서 내가 보인단 말야?”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해 보이는 은비에게, 유린은 여전히 미소 짓는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이지! 은비한테선 무지무지 귀여운 오라가 흘러나온다고? 멀리서도 한눈에 딱 알아 볼 수 있지!”

그러고서는 콱 껴안는다. 세상에나, 귀여운 오라라니. 그런 부끄러운 소리를 마구 해대는 유린이 신기하면서도, 은비는 당장 생사에 직결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욱! 숨 막혀!”

또래 여학생 중에서는 약간 작은 키인 은비는, 마찬가지로 또래 여학생보다도 훨씬 큰 유린의 품에 쏙 들어왔다. 이미 충분히 발육이 완료된 유린의 가슴에 얼굴이 묻힌 은비는 바둥바둥거리며 유린에게서 떨어졌다.

“아침부터 참! 부끄럽게!”

은비는 소리를 빽 지르고, 발개진 얼굴을 휙 돌리고는 학교로 뛰었다. 그 뒷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유린은 속으로 쿡, 하는 웃음을 흘리고, 아침부터 뜀박질을 하느라 흐트러진 긴 포니테일 머리를 손으로 간단하게 다듬으며 금세 은비를 따라잡아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은비야. 시험 준비는 다 한거야? 시험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무언가 떠보는 듯한 유린의 말투. 제대로 적중했는지, 은비의 얼굴에 당혹의 빛이 어렸다.

“아, 그게… 하고는 있는데, 응. 저기… 제대로 되는 것 같지는 않고….”

횡설수설. 유린은 빙글빙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

“하, 하지만… 유린도 공부해야 하잖아?”

“후후. 걱정 마시라! 우리 바보스럽게 귀여운, 아니지. 실제로 바보스러운 은비를 위해, 이 똑똑하고 위대하신 유린님이 시험 전날까지 특별히 과외지도를 해줄 테다!”

과외라는 단어에 솔깃해진 은비는 양손을 가슴께에 모으고는, 두 눈을 반짝였다.

“와아. 정말? 고마워!”

아침 등교 길부터 펼쳐지는 소란스러움에, 지나가는 학생들이 모두 한번씩은 은비와 유린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청신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으레 한두 번씩 보았을 광경이기 때문에 신경을 끄고 학교에 가는 길에 열중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가끔은 있는 법이다.

“아침부터 난리도 아니군. 그거, 너 바보다, 라고 말하는 거라고?”

“으, 응?”

기습적으로 뒤에서 들려오는 남학생의 목소리. 의기소침해진 은비가 뒤를 돌아보니, 매일같이 같은 반에서 볼 수 있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 너머가 보이지 않는 두꺼운 안경 때문에 정확한 생김새는 알 수 없는 남학생이었다.

“대성! 은비한테 무슨 말이야?”

“음? 난 방금 네가 얘한테 바보라고 했던걸 말했을 뿐이야.”

“윽!”

그렇게 보면 그럴 수도 있다. 아니, 확실히 맞다. 수업시간에 수업도 꾸준히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모범적인 학생인 은비이지만, 이상하게도 성적은 중하위권에서 맴도는 것에 비하면,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공부하면서도 늘 상위권에 드는 유린에 비하면 바보인건 맞다. 실제 그렇게도 말했지만….

“그래도 실례라고. 그런 거!”

“아침부터 시끄럽네. 그러다 밤송이 떨어진다, 너.”

대성은 마치 날파리가 옆에서 앵앵거린다는 듯한 말투로 대꾸하곤, 뒤에서 씩씩거리는 유린과 어쩔 줄 모르는 은비를 두고 앞장서 걸었다.

“야이…!”

-따콩

“으앗! 괜찮아, 유린아?”

정말 떨어지다니.

“괜찮아? 괜찮아?”

“괘, 괜찮아! 이런 것 정도!”

오기일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유린을 보며, 은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밤송이가 꽂힌 유린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흐에, 유린. 밤송이 가시가 박혔다고?”

“저, 정말?”

그제야 호들갑. 유린은 조심스럽게 머리에 꽂히다시피 한 밤송이를 떼어 내었다. 정말 머리에 박혔는지, 떼어낼 때 따끔한 것이 피라도 난 것 같았다.

“이게 다 저 녀석 때문이야!”

떼어낸 밤송이를 집어 던진 유린은, 씩씩거리면서 밤나무에 괜한 화풀이를 했다.

-쾅!

…여자가 발로 걷어찬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우렁찬 소리. 주변의 학생들이 일제히 ‘움찔’한 것은 은비만의 착각일까?

-후드득!

“꺄악!”

그 발길질에 복수하듯, 유린의 머리 위로 서너 개의 밤송이가 일제히 쏟아졌다. 은비는 머리 위에 밤송이 하나를 얹고, 아니 정확하게는 꽂고 있는 유린을 여전히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이….”

“유, 유린아?”

“용서 못해!”

-딱!

“꺅!”

뭔가 상당히 희극적인 모습이다, 라고 생각하는 주변 학생 일동이었다.

 

 

 

 


체동??, 적홍赤紅

 

 

 

김대성은, 일찌감치 학교에 등교한 후 자기 자리에 앉아 늘 그렇듯 즐겨 읽는 책을 펼쳐 들었다. 책의 겉표지에는 둥근 원과 그 안을 빼곡히 채운 글과 그림으로 가득했고, 그 주변으로 역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흉측한 괴물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금박으로 쓰인 화려한 필기체의 영문.

“너 또 판타지 소설 읽냐?”

대성의 옆자리의 의자를 빼고, 그 자리에 앉으며 학선은 툭 내뱉듯이 말했다. 학선은 옅은 흑갈색 머리카락을 벅벅 긁으며 졸린 표정으로 하품을 하였다.

“아침부터 책 읽으면 안 졸려?”

“뭐, 판타지 소설 읽는 게 취미잖아.”

대성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오늘 수학 쪽지시험이 있는 거 알긴 아냐?”

다시 한번 하품. 머리 긁는 행동을 멈추지 않고 창문을 비스듬히 바라보며 말하는 학선을, 그제야 책에서 시선을 떼며 쳐다보았다. 기실, 막 한 장을 다 읽고 넘기려던 참이었지만 말이다.

“원래 시험은 평소 실력으로 보는 거야. 거기다 내가 언제 그런 거 신경이나 썼나?”

“하긴. 넌 원래 그랬지. 나는 그렇지 못해서 공부하러 가련다. 콱! 쪽지시험 망해라!”

악담을 퍼붓고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향하는 학선에게, 대성은 콧방귀를 한번 뀌어주고는, 두터운 안경을 고쳐 쓰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향했다.

하지만, 넘겨진 다음 장을 읽으려던 대성의 행동은 그의 책상을 부숴질듯이, 아니 조금만 더 힘을 주었다면 틀림없이 부숴 졌을 정도로 무식하게 쳐버린 한 여학생에 의해 중단되었다.

“김! 대! 성!”

대성의 시선은 다시 책을 떠나 그 여학생으로 향했다. 여자 치고는 비교적 큰 키라, 또래의 조금 키가 작은 남학생과 엇비슷한 키를 가지고 있는 긴 포니테일 머리의 여학생이었다. 지금은 그 예쁘장한 얼굴이 꽤나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지만.  물론 대성의 관점에서 말이다.

“아. 오늘 아침의 그 시끄러운 여자애.”

“여자애라니…!”

이 시끄러운 여자, 이름이 뭐더라, 라고 생각하는 대성이었다. 코트를 입고 있어 명찰이 안 보였던 탓도 있지만, 같은 반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름 하나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데는 대성 본인에게 더욱 큰 이유가 있었다.

그는, 관심이 없으면 완벽하게 신경을 꺼버리는 타입이었다. 심지어,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이름조차 못 외운다고나 할까. 당연하게도, 아니 이상하게도 남녀공학인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여자에 지지리도 관심이 없어 같은 반 여자애들 이름이라고는 반장 이름 정도밖에 모르는 대성이었다.

그가 여자한테 관심이 없으니, 여학생들 역시 그에게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 늘 그 너머가 보이지 않는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수업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소설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대성은, 당연히 괴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너, 사과해!”

대성은 버럭버럭 이라는 수식어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그 시끄러운 여자애가 앞으로 떠밀 듯이 내세운 작은 키의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게 달구고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하긴, 반 학생 전부가 이 쪽을 쳐다보는데, 부끄럽지 않을 레야 않을 수 없겠지.

“거 참 시끄럽군. 정말 민폐라고.”

왠지, 대성은 자신이 한 말이 같은 반 학생들로부터 묘하게 지지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이상한 분위기를 읽었는지, 유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묘한 침묵과 따가운 시선. 유린은 그 때문인지 한풀, 아니 두 풀 정도 꺾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 어쨌든 사과하라고.”

“….”

대성은 잠시 고민했다. 내가 이 여학생한테 뭘 잘못했더라. 아니, 그보다 이런 애가 반에 있긴 했었나.

“빨리…!”

결국 다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뭘 사과해야 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한 대성은, 다른 방법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첫 번째 수업 일분도 안 남았어.”

“그, 그래서?!”

“오늘 첫 번째 수업은 수학이고, 시험 전 마지막 쪽지 시험이야.”

“아차!”

그 때 마침, 대성을 구원하는 듯한 수업 시작 종소리가 울렸다.

“대성! 내기다!”

아니 웬 난데없이.

“그래. 그래. 그 내기 들어주면 더 이상 시끄럽게 안하는 거지? 좋아 할게.”

유린은 기가 막힌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이야기도 안했다고?

“오, 오늘 쪽지시험에서 너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두면, 은비한테 사과하는 거다!”

“그렇게 사과 받고 싶은 거냐. 알았으니까, 선생님 들어온다고?”

“익!”

뭔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밀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유린이었으나, 구실이라도 하나 잡은걸 다행으로 여기며 잽싸게 자리에 앉았다. 은비는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교실의 여기저기를 힐끗거리며, 역시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보니, 오늘 쪽지시험이었지.

자리에 앉아 책상 위를 정리하며, 은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무척이나 소란스러운 진행이었다. 그 소란의 원흉일 유린의 등을 가볍게 흘겨보았다. 유린은 코트를 벗다, 은비의 시선을 느꼈는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유린은 배시시 웃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에휴.”

한숨 푹. 은비는 그런 유린이 싫지만은 않았지만, 확실히 민폐라고 할 수는 있었다. 민폐라는 말에 이번에는 옆쪽을 슬쩍 쳐다본다. 이제껏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은비는 대성의 바로 옆자리였다. 1인용 책상이 보급되어 옛날의 짝꿍이니 하는 그런 것은 없었지만, 가운데의 길 하나를 사이로, 분명 은비와 대성은 바로 옆자리였다.

그리고 보니 이름이 김대성이었지.

언제나 조용히 별난 소설을 읽느라 별로 눈에 띄는 남학생도 아니고, 그 너머가 보이지 않는 안경 덕분에 관심을 얻지도 못하는 남학생, 이라는 것이 은비의 김대성이라는 남학생에 대한 평가의 모든 것이었다. 안경 아래로 들어나는 깔끔한 턱 선과 깨끗한 피부가, 그리 못난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안경 때문에 도무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뭐, 상관없으려나.”

은비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리고, 책을 펼쳤다. 어쨌든, 당장 쪽지시험이 임박해 있고, 어제는 일로 바빠서 공부를 소홀히 했다. 쪽지시험을 보기 전까지 어느 정도 주어질 시간에 최대한 기대는 수밖에.

 


수업 끝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교실의 학생들은 탁, 하고 긴장의 끈을 놓쳐 버렸다. 그놈의 시험, 이라는 단어가 절로 입 밖으로 흘러넘치는 학생들은, 쉬는 시간이 돌아오자 서로 점수를 매기기 바빴다. 진짜 시험은 아니지만, 자신의 실력을 테스트 하는 기회임에는 분명하니까.

“자, 몇 점이야?!”

아니나 다를까, 유린은 자신의 쪽지시험지를 팔랑팔랑 흔들면서 대성의 앞에 나타났다. 물론 옆에 마치 부록처럼 은비를 끼고서 말이다. 은비는 또 다시 끌려온 자신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어쩌다 자신이 유린의 자존심 싸움에 끼어들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만 했다.

“안 매겨 봤는데.”

잔뜩 흥분해 있는 유린에게, 대성은 책상 서랍에서 소설책을 꺼내 들며 대꾸했다.

“정 그러면 네가 매겨 보든가.”

관심 무憮. 어찌 보면 뻔뻔할 정도로 태연 작약한 그 모습에 한번 또 벌컥 하려는 유린을 은비는 뒤에 깍지를 껴 낑낑거리며 간신히 제지하였다.

“좋아 좋아. 그럼 네 그 철면피를 철저히 뭉개주마!”

…라면서 열혈 적으로 점수를 매기기 시작하는 유린. 하지만 하나하나 채점을 하면서, 그 자신만만한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점점 놀란 표정으로 바뀌는 은비 역시 그리 크게 상황이 다르지는 않았다.

“마, 만점?”

세상에 이걸?

은비는 헤에, 하는 표정이 되서, 이미 감탄해 버린 상태였다.

“난 반도 못 맞았는데.”

은비의 중얼거림에, 그 열혈적인 채점상황을 흥미 있게 지켜보던 학생들은 동감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다 맞았다고? 저 소설 광이? 라는 표정이랄까.

“너, 너 커닝 페이퍼지?!”

“맘대로 생각해.”

그러는 동안에도 책장을 하나 넘기며 유린에게 대꾸하는 대성. 그의 시선은 책에서 도저히 떠나가질 않았다.

유린은 패닉, 이라는 단어가 매우 잘 어울리게 굳어 버렸다. 은비는 그런 유린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 보더니, 대성에게 헤헤, 웃어 보이며 은비를 끌어다 자리에 앉혔다.

“정신 차려봐, 유린아?”

-꼬집

은비는 입가를 씰룩거리고 있는 유린의 볼살을 꾸욱 꼬집어보았다. 반응이 없었다. 충격이 컸나?

-찰싹

이번에는 약간 힘을 주어 뺨을 쳤다.

빨갛게 달아오르는 유린의 볼살에, 은비는 아차 싶었다.

“너무 셌나?”

하지만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그 때, 쉬는 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은비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유린을 힐끗 힐끗 쳐다보며 자리에 앉았다.

 


결국 유린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은 학교 수업이 모두 끝난 뒤였다. 제법 자신 있어 하는 공부에서 밀린 것이 그렇게도 억울한가 싶었지만, 은비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왠지 그랬다간 유린의 분노의 꿀밤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꿀밤, 하니까 아침의 밤송이를 얻어맞는 유린이 생각나 버린 은비는, 그만 쿡, 하고 웃어 버렸다.

“쿡쿡쿡.”

어깨를 작게 들썩거리며 웃는 은비를, 유린은 수상쩍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뭐야? 그 웃음은?”

“헤에, 아무것도 아니야. 응. 응.”

하지만 유린의 얼굴을 마주본 은비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풋.”

“안 가르쳐 줄 거야?”

가뜩이나 기분이 꿀꿀한 유린으로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트리는 은비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유린은 심술궂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은비의 고운 양 볼을 꼭 집고 주욱, 늘였다.

“으에에. 아허….”

눈물까지 찔끔.

흐에엥, 거리면서 울먹이는 은비를, 유린은 한숨을 푹, 내쉬고 한마디를 내뱉으며 가슴에 꼭 끌어 앉았다.

“귀여워!”

“웁! 웁!”

 


간신히 유린의 품에서 탈출한 은비는 발갛게 물든 양 볼을 쓰다듬으면서 유린에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응. 저 녀석 미행 중이야.”

유린이 까닥이는 손가락을 죽 따라 가보니, 저 앞에서 걸어가는 대성이 보였다. 그나저나 미행이라니.

“왜?”

“사과를 받아내고 말겠어!”

이정도면 집요하다. 도대체 무슨 사과를 받고 싶어 하는 지, 이제는 헷갈리기까지 하는 은비였다.

 


등하교 길의 주가 되는, 밤나무 가로수가 끝나는 부분에 이르자,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로에서 흩어져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고 있었다. 대성은 시의 중심가로 향하는 길을 가고 있어서, 애초에 유린의 계획을 실행 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그 계획이라고 해봤자, 사람들 보는 곳이 적은 곳 까지 미행한 후에 결판(?!)을 내겠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은비는 오히려 사람들이 점점 북적이는 거리에 다다르자, 유린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맞잡은 손에 힘을 꼭 쥐었다. 그 압박을 느꼈는지 못 느꼈는지, 유린의 시선은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쿵!

“앗!”

유린이 한눈을 팔며 걸음을 걷느라, 유린의 손을 붙잡고 있던 은비는 그만 지나가는 사람의 팔에 부딪치며 손을 놓치고 말았다. 키가 약간 작은 편에 속하는 은비는 순식간에 사람들 어깨 너머로 유린을 놓치고 말았다.

“으아앗! 아야….”

은비는 방금 전에 사람과 부딪쳐 빨갛게 물든 콧등을 살살 문지르며, 유린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흐에, 어쩌지? 나, 미아가 되어 버린 건가?”

미아, 라고 하기엔 어감이 조금 미묘하게 어긋나는 것 같지만, 본인이 그렇게 생각 한다면야. 은비는 울먹이는 듯한 눈동자로 연신 주변을 살폈다.

-쿵!

“꺅!”

“읏!”

이번에도 역시 엉뚱한 곳을 보고 걷다가 앞서 걸어오던 사람의 등에 콧등을 콱, 박아 버렸다. 짜릿한 아픔에 은비는 눈을 꼭 감고 코를 양손으로 감쌌다.

“아파….”

“으윽, 깜짝이야. 괜찮아요?”

은비는 살짝 눈을 떠 보았다. 흑청색 교복 겉의와, 왼쪽 가슴에 조그맣게 자리한 푸른 잎을 틔우는 나무 모양의 마크가, 은비와 같은 학교의 학생임을 알려 주었다.

-꾸벅!

“으아…. 죄, 죄송해요. 딴 데 신경을 쓰다가 그만.”

은비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죄송해요, 죄송해요. 를 연발했다. 은비와 부딪친 남학생은 은비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고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부딪치신 곳은 괜찮아요?”

상냥한 말투. 유린에게서 떨어져 미아(?!)가 되어 버린 은비는, 그 상냥한 말에 울컥, 눈물이 났다.

“흐엥….”

“에?”

당연히 남학생으로는 당황할만한 상황. 자기가 부딪쳐놓고는 울어 버리다니. 자고로 울고 있는 여자만큼 다루기 힘든 것은 없는 법이다.

“저기, 울지 마요. 예?”

그렇게 말하면서, 남학생은 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 손수건을 받아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고는, 손수건을 건네준 남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어?”

얼굴이 마주친 순간, 남학생과 은비는 둘 모두 굳어 버렸다. 남학생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은비에게 물었다.

“너, 우리 반 애 아니니?”

“어… 응…!”

약간 말을 더듬는 은비. 남학생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유린이 뒤쫓는(?) 대성이었다. 대성을 좇던 유린은 은비를 찾느라 대성을 놓쳤는지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이름이 뭐더라….”

“으, 은비활이라고 해!”

“은비활?”

-끄덕끄덕!

되묻는 대성에게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은비. 은비의 이름을 들은 대성은 잠시 ‘은비활’이라는 이름을 되뇌다가 말했다.

“이름이 참 이쁘다. 한글 이름인가봐?”

이쁘다라는 이야기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은비. 은비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비활이라. 은빛 비가 내린 후의 무지개인가….”

-두근!

은비는, 대성이 자신의 이름인 은비활의 정확한 의미를 맞춰버리자 심장 고동이 빨라짐을 느꼈다. 자신이 그 무엇보다도 자랑스레 여기는 이름의 의미를….

“…응.”

은비는 고개를 숙인채로 간신히 대꾸했다.

“음. 그럼 비활 이라고 불러야하나?”

“으응.”

가족을 빼 놓고는 아무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이름. 은비가 아닌, 비활. 은비는 조심스럽게 대성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그 때, 대성은 안경을 벗은 후, 주머니에서 안경닦이를 꺼내 안경을 쓱쓱 닦았다.

“그럼 나중에 또 보자.”

양 안경알을 닦고, 안경을 다시 쓴 대성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뒤돌아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은비는 그 인사에 대꾸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굳은 채로 가만히 서 있던 은비에게, 유린이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헥, 헥! 은비야. 찾았다! …응? 왜 그래 은비야? 은비야?”

굳어있는 은비의 얼굴 앞에, 유린은 손바닥을 휙휙 저어 보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래? 흠… 할 수 없지. 김대성, 이 녀석도 놓쳤고. 오늘은 집에 돌아가자.”

대성, 이라는 단어에 움찔, 반응하는 은비. 하지만 이미 뒤돌아 걸음을 옮기고 있는 유린은 그런 은비의 행동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은비는 샤워를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연한 분홍색의 상하의는 사랑스러운 하트가 여기저기 그려져 있었고, 나이에 걸맞지 않는 아기자기한 프릴이 포인트를 주고 있었다. 샤워를 방금 마친 탓에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자신의 키만 한 곰돌이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는 은비의 모습을 유린이 본다면, 분명 덮치듯 달려들어 품 안에 꼭 넣고는 ‘귀여워!’를 연발한 만한 모습이었다.

은비는 침대 위에 앉아 품 안에 안은 곰 인형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은비는, 복잡한 심정으로 낮에 만났던 대성을 떠올렸다.

-두근, 두근!

낯선 심장고동. 은비는 마지막의 대성의 두터운 안경 뒤에 숨겨져 있던 연한 갈색 빛의 눈동자를 기억해 내었다.

“으응….”

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

“예쁘고 다정해 보이는 눈동자였어.”

그리고 그 너머로 비치는, 너무나도 깨끗한 영혼의 그림자.

“응. 예뻤어.”

자기가 말해 놓고도 부끄러운지, 곰 인형의 등에 얼굴을 폭, 박는 은비.

“푸하!”

은비는 숨이 막혔는지 오래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버렸다.

은비는 왼손을 들어 보았다. 손목에는 검은 끈으로 된 팔찌가 채워져 있었고, 그 팔찌의 끝에는 연한 노란빛으로 물들어 있는 구슬이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그치?”

자문일까? 팔찌에 달린 노란 구슬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마치 은비의 물음에 대답하는 듯이.

 

 

 

체동??, 주황 朱黃

 

 

 

다음 날, 학교에 가면 대성의 얼굴을 도대체 어떻게 봐야하지, 하고 밤새 고민했던 은비의 눈물겨운 노력에 하느님도 감동하사 친히 오늘을 휴일로 내려 주셨다.

…농담이고, 오늘은 토요일이다. 그것도 모르고 밤을 지새웠던 은비는 무척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일이 휴일이었다는 것을 깜빡한 건 하느님의 탓이 아니었으니까. …랄까나. 은비는 속으로 납득할까보냐! 하고 한번 버럭, 외쳐 주었다.

은비는 침대 위에 쪼그려 앉은 채로, 흰 빛이 스며드는 베이지색의 말끔한 커튼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열어놓고 잠들었는지,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의 찬 공기에 흰 빛을 머금은 채 얕게 펄럭이는 커튼은 마치 오로라와도 같았다.

은비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중얼거렸다.

“오늘이 휴일이었지.”

새삼스럽게 중얼거렸다. 일어났으니 당연한 수순으로는 얼마 남지 않은 시험을 준비 하는 것이 인지상정. 하지만 은비는 오늘따라 왠지 공부가 하기 싫었다. 평소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은비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끼이익

적막한 집안에 은비가 문 여는 소리만이 조용히 들렸다. 당연하게도,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은비밖에 없었으니까. 은비는 늘 상 겪는 일이면서도 왠지 쓸쓸함을 느끼며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 아침은 계란 프라이이.”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굳이 즐겁게 소리 내어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쓸쓸하니까.

순식간에 계란 프라이 하나를 구워낸 은비는, 널찍한 4인용 식탁에 혼자 앉아 ‘잘 먹겠습니다.’ 하고 외치며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푼을 내려놓았다.

왜냐하면 목이 매여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았으니까.

“히잉….”

눈물이 나오려 하자 억지로 눈꺼풀을 깜박여 참아낸다. 평소에는 이 정도로 쓸쓸하지는 않았는데. 은비는 어제의 그 예쁘고 상냥함 품고 있는 눈동자를 기억해 내었다.

눈은 마음과 영혼의 창. 은비는 손쉽게 그 눈동자 뒤에 드리워진 영혼의 그림자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차갑게 겉을 굳히고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영혼의 그림자. 이제껏 수많은 사람들의 눈동자 너머를 보아온 은비였지만, 대성의 눈동자 뒤에 있었던 그것의 존재는 은비에게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올 정도였다.

-두근, 두근.

“그것만 보지 않았어도… 눈물까지는 안 났을 텐데. 히잉….”

그립다. 온기가.

문득, 어제 대성이 에게 받았던 손수건을 기억해 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꺼내 거실에 고이 내려놓았던 그것. 은비는 그것을 찾아내, 얼굴에 흥건히 묻은 눈물을 닦아 내었다.

“흐끅!”

그만 울자. 그만 울자.

은비는 속으로 다짐하며, 더 쏟아지려고 하는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가을 하늘은, 참 야속하게도 시리도록 맑았다.

 


유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등 뒤에는 책이 들어가 있는지 묵직하게 내려앉은 가방을 메고 있었고, 늘 그렇듯 한 묶음으로 꼭 매어 늘어트린 포니테일의 머리가 콧노래의 리듬에 맞춰 위아래로 흔들렸다.

유린은 한참을 걷다, 푸른색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초인종을 꾹.

-딩동댕

개성이라고는 고양이 발톱의 때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초인종이 몇 번 더 울리고, 그제야 대문이 ‘끼이익’ 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살짝 열렸다. 그 열려진 틈 사이로, 은비의 머리통이 빼꼼, 하고 나왔다.

“안녕, 무슨 일?”

비교적 낮은 위치로 머리가 나온 걸로 보니, 잔뜩 허리를 숙인 것 같았다. 유린은 그런 은비의 머리를 빤히 내려보다가, 왼손으로 머리를 꾹 내리 눌렀다.

“왁!”

역시나.

은비는 몇 번 허우적거리다, 제 풀에 못 이겨 대문 밖으로 넘어지듯 튀어 나왔다.

“은비야….”

“으, 응.”

“너 또 집안에서 굴러 다녔구나?”

“아, 아니야!”

아니긴. 은비는 어제 잠들었던 분홍빛 잠옷을 입고 있는 그대로, 집 앞에서 유린의 부비부비어택을 받아야 했다.

“우우. 은비야 넌 왜 그렇게 귀엽니?!”

“꺄악!”

 


“헥. 헥. 헥. 그,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잔뜩 지친 표정으로 혀까지 쏙 빼물고는 헥헥거리는 은비를 비교적, 아니 상당히 멀쩡한 표정의 유린이 대답했다.

“응, 시험도 얼마 안 남았잖아? 공부하러 도서관 가자고.”

“에, 하지만 아직 옷도 안 갈아입었는데.”

“기다릴게!”

“그, 그리고 씻어야….”

“기다릴게!”

“아니, 무엇보다 오늘 조금….”

“기다릴게!”

“응….”

은비는 결국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다시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은비가 들어가고 나자, 유린은 문기둥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닫힌 대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 괜찮아 졌나 싶었는데. 또 울어버린 건가….”

그렇다면, 더 노력해서 즐겁게 해 줘야지.

“나에겐 그 수밖에 없으니까.”

 


은비가 준비를 마치고 다시 대문으로 나올 때 까지, 유린은 기대있는 그 모습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은비가 다시 대문을 조금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자, 굳어있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하게 펴지며 은비를 꼭 품에 넣어 버렸다.

“유린, 너 때문에 머리가 엉망이 되었어…”

“내가 뭐얼?”

뭐냐니. 은비의 머리는 처음 대문으로 나올 때와는 달리, 유린이 품에 넣고 짤짤 흔들어댄 덕분에 이리저리 부산스러워져 버렸다. 유린은 그 모습을 키득키득 거리며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머리끈 두개를 꺼내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유린은 자신이 만든 작품, 두 줄로 나눠 내려묶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이상한 행복에 젖은 표정을 해 보였고, 은비는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지 볼에 바람을 잔뜩 넣은 채로 걸음을 빨리 놀렸다.

-찌링!

“아?”

“어?”

갑작스러운 진동. 그리고 그 진동에서부터 파생되는 묘한 방울소리와도 같은 울림.

유린은 목걸이를 옷자락 사이에서 꺼냈다. 목걸이 끝에는, 은비의 팔찌에 달려 있던 노란 구슬과 똑같이 생긴, 하지만 빨갛게 물들어 있는 구슬이 달려 있었다. 은비 역시, 팔찌를 들어 노란 구슬을 바라보았다.

-찌링! 찌링!

은비의 노란 구슬, 유린의 붉은 구술이 다시 한번 맹렬히 진동하면서 묘한 음을 뿜어내었다. 은비와 유린은,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시험을 앞둔 고2란 말이야….”

계속되는 구슬의 울림에, 유린은 한숨을 섞어 푸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태평하기만 한 유린의 얼굴과는 달리, 은비의 얼굴은 눈에 띌 정도로 굳어 버렸다.

“유린아….”

“알았어, 알았어. 가자, 이거지?”

짐짓 쾌활하게 말하는 유린. 은비와 유린은 잠시 서로 시선을 마주친 뒤, 천천히 걷던 걸음의 속도를 올렸다.

 


화창한 하늘 덕에 말끔해 보이는 대로와 달리, 빌딩과 빌딩 사이로 비좁게 나 있는 좁디좁은 골목은 그나마의 햇빛도 받지 못해 음습하기 그지없다. 최근 몇 주간 비가오지 않은 관계로 딱히 흠뻑 젖어 골목을 애용하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는다지만, 하루 종일 햇빛을 받지 못하는 벽면이 축축한 것 까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하지만 이러한 골목이라도 앞에서도 말했듯이 애용하는 사람은 있는 법. 애초에 한국의 도시라는 것이 도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학생이나 가난한 사람들의 입맛대로 만들어진 녀석이 아니다 보니, 어디론가 가기 위해서는 지름길을 아련히 떠올릴 정도로 빙글 돌아가게 되기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옛날부터 지름길이라고 하면 으레 좁고, 음습하고, 마치 깡패나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부분 이런 상상은 현실과 잘 맞아떨어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지름길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겠는가? 물론, 그 상상 중에 귀신이 튀어 나올 것 같다, 라는 것은 대부분 부정당하겠지만 말이다.

 


“아얏! 아야… 정말이지….”

빌딩과 빌딩 사이, 좁게 나 있는 길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골목을 조심스럽게 지나가던 한 여성이 낮은 탄식 소리를 내었다. 남자친구와 만나러 가는 도중, 그만 약속 시간에 늦어버려 자주 애용하던 골목길로 들어선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까. 워낙 장애물이 많아 조심스럽게 다닌다고 했지만, 급한 마음에 그만 다리를 삐끗하고 말았던 것이다.

“괜히 하이힐 신고 온 걸까.”

여성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신고 있는 하이힐을 벗어 보았다. 다행히 굽이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은 듯해,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갸르릉

“응?”

그때, 여자의 앞, 골목길이 틀어지는 부분에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여자는 하이힐 구두를 다시 신고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보통 이런 곳에서 짐승 소리가 들린다면 겁부터 먹고 봐야 할 일이었으나, 그 소리가 무척이나 가늘었던 데다 어딘가 매력적으로 들리기까지 해서 여성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틀어지는 부분으로 다가갔다.

-갸르르릉!

“여우?”

여성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으레 TV에서나 볼 수 있었던 여우의 모습을 한 동물, 아니, 여우라고 해두자. 여우를 직접 보게 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양이나 개도 아니고 여우라니.

그 여우는 탐스러운 금갈색 털을 가지고 있었는데, 느릿하게 살랑거리는 길고 풍성한 꼬리가 매우 매력적이었다. 눈을 반쯤 감고 입을 쩍 벌리며 다시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는 여우를 향해, 여성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여우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발딱

여자의 손이 닿기 직전에, 여우는 쪼그려 앉아있던 자세를 고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반쯤 감았던 까만 눈을 반짝 뜨고, 여성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잠시 멈추었던 꼬리를 다시 살랑살랑 흔들면서 여자의 다리 밑으로 다가갔다.

“어마?”

갑작스런 여우의 친근해 보이는 행동에, 여자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여우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눈높이 까지 들어올린 여우는 ‘끼잉’하는 작은 울음소리를 낼 뿐, 무척이나 얌전했다.

“누군가 기르던 여우 일까나.”

그러자, 여우가 마치 하품을 하듯 입을 쩍 벌렸다. 가지런히 난 이빨이, 무척 날카로워 보였다. 그리고 여자는 그 다음을 생각할 수 없었다.

 

 

 

체동??, 청황淸黃

 

 

 

여우는 그 탐스러운 금갈 색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성의 배 정 중앙에 웅크리고 앉았다. 하지만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멀쩡히 살아있던 여성의 배는, 숨을 쉬지 않는지 그 어떠한 기복의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죽은 걸까?

여우는 그 여자의 배 위에 앉은 채로, 한 차례 바르르 몸을 떨고는, 고개를 들어 멀리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마치 불만족. 무엇에 불만족 한 것일까?

“Open Fire, Guided Missile!”

그 때, 골목 저편에서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그리고 퍼져 나오는 이질(異質)의 기운. 여우는 소리가난 방향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좁디좁은 골목의 양 벽을 깡총이듯 타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못하는 듯, 가볍기 그지없고, 속도 또한 쾌속(快速). 그 여우의 뒤로 조금 전의 외침이 들려온 곳에서부터 시작한 단발의 빛줄기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여우의 금갈 색 꼬리를 따라 빌딩 사이를 날았다.

붉은 빛줄기가 여우에 닿기 직전에, 여우는 벽면에 뒷다리를 박차며 반바퀴를 빙글, 돌았다. 뒤쫓기던 여우는 순식간에 반전하여 빛줄기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키이이이잉!

한낱 미물임이 분명할 터인 여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두개의 사각형. 그리고 빠르게 어긋나며 펼쳐지는 둥근 원.

-콰앙!

이어지는 폭발음.

처음 빛의 탄(彈)을 쏘아내었던 여자는, 그와 비슷한 모양의 원의 진(陣)을 이미 몇 겹 그려 놓은 채로 허공에 그려낸 방어진(防禦陣)위에 서서 쭉, 기지개를 피는 여우를 노려보았다.

다시 한번, 여자의 입에서 날카로운, 마법의 시동되는 언(言)이 울려 퍼졌다.

“Summon The Gunbarrel!”

-파직! 파직!

이번엔 좀 전의 시시한 빛줄기 따위가 아님을 보여 주려는지, 지면에서부터 시작되는 보기에도 짜릿한 붉은 번개 줄기다발이 번쩍이며 여자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둥근 마법진을 동반한 3M 가량의 긴 총신. 그것이 언(言)에 이어 발동된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여우는 그 모습에 움찔, 하고 반응하더니 딛고 선 방어의 진을 더욱 견고히 했다.

“Charge, Project Missile!”

-쿠웅!

육중한 포격음. 소환되어진 빛의 대포에서 마법(魔法)의 이질(異質)적인 기운으로 뭉쳐진, 좀 전 보다도 더욱 거대한 빛줄기를 토해 내었다. 그와 동시에 퍼지는 둔탁한 충격파, 그리고 그에 의해 흩날리는 먼지는 방금 토해낸 빛줄기가 사람 하나는 우습게 없애버릴 물리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너무나도 이해하기 쉽게 암시해 주고 있었다.

-콰앙!

“Recharge!"

-우우웅!

명중시켰다지만 다음을 대비해 다시 한번 빛을 품는, 나란히 배열된 마법진. 그 마법진을 등불삼아, 마법의 빛을 뿜어낸 여자의 모습이 어렴풋이 들어났다.

예상대로 분명 강력한 마력의 탄(彈)을 정통으로 맞았던 여우는 털 끝 하나 그슬리지 않은 채, 빙그르르 돌며 땅에 사뿐히 안착했다. 여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을 노려보았다.

진에서 뿜어 나오는 빛에 드러난 모습은 놀랍게도 정유린 이었다. 그녀는 오른손에 예의 그 붉은 구슬을 쥔 손을 앞으로 곧게 뻗은 채, 주변에 마법진을 둘러치고 있었다. 그 마법진들은 여전히 주변 공기에 공진음을 내뿜으며 섬뜩한 붉은빛을 뿌리고 있었다.

여우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런 도시에 마법사?”

의외로 들려온 목소리는 어린 여자의 것. 하지만 유린은 그에 대꾸하지 않았다. 좁은 골목을 타고 내달리는 세찬 바람이, 유린의 묶어 내린 머리카락을 말없이 흔들 뿐이었다.

-우우웅!

소환되어진 사격의 마법진이 다시 한번 진동을 시작했다.

“으앗, 잠깐 잠깐! 우리 진정하고 말로 이야기하자?”

마법으로 꾸며진 것이 분명한, 아니. 여우의 입에서 사람의 말이 나오니까 당연히 정상은 아니겠지만.

여우는 자신의 정면으로 방어적 의미를 담은 마법진을 만들어 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새 인간 마법사들은 성격이 너무 급하다니까.”

“인간을 죽여 놓고 인간 마법사에게 자비를 바라는 건가, 요물(妖物)?”

“요물(妖物)이라, 칭찬으로 받아 드릴께.”

유린은 미간을 모았다.

“말장난 하고 있을 시간 없어.”

-우웅!

“알았어! 알았다고. 쳇. 어차피 내가 원하던 영혼은 아니야.”

원하던 영혼? 유린은 그 어감이 매우 거슬리다고 생각했다. 여우는 말을 끝내자마자, 쓰러져 있는 여성의 배 위에 올라타고 콧등을 여자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후욱

그러자 낮게 내쉬어지는 숨자락. 그 소리를 확인하자마자, 유린은 뒤도 돌아볼 것 없다는 듯이 마법진을 거두고는 자리를 떠났다.

“아, 같이가?”

“더 이상 볼일 없어. 그리고 너한테 영혼을 빼앗겨줄 정도로 호락하지도 않아.”

“흐응, 나도 마법사의 영혼을 뺏으러 덤빌 정도로 무모하진 않다, 뭐?”

어디가 그렇게 급한지 전속력으로 달음박질하는 유린의 뒤를, 여우 한 마리가 쫄래쫄래 따라나섰다.

 


은비는 동시에 두 군데에서 퍼지는 인간이 아닌 것들의 기운중 하나를 좇고 있었다. 하나는 유린이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오겠다면서 달려갔고, 은비 자신은 남은 하나를 향해 걸음을 빨리했다. 은비가 좇던 기운은, 복잡한 도시의 중심가를 벗어나 위치한 상당히 널찍한 공원에서부터였다.

은비는 공원 입구에 잠시 멈춰 섰다.

“결계(結界)….”

말 그대로. 공원 안과 그 밖을 격리 시켜 버리는 고도의 술(術).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만만치 않음을 직감한 은비는 꼴깍 침을 삼켰다. 제발 유린이 조금이라도 빨리 자기 쪽으로 와 주길 바라며, 은비는 조금 전부터 손에 꼭 쥐고 있던 노란 구슬을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내리 쬐는 환한 햇볕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반투명한 구슬.

조용히 눈을 감고 그 구슬에 속삭이듯, 은비는 술(術)의 언(言)을 외었다.

“푸르고 붉게 내달리는 그대는 적을 찔러 가르는 검이로소이다.”

낮은 음률의 노래하는 듯한 중얼거림에 따라 빛을 더하는 구슬.

“검(劍). 호출(呼出).”

-파아앗!

환한 대낮의 거리에서도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눈부신 광채. 그것을 밤에 보았다면 분명 휘영청 보름달을, 눈부신 가로등을 비할 수 없을 것이리라. 그리고 허공으로 스러진 빛의 사이로, 새로운 검이 나타나 있었다. 길고 곧은, 하지만 아무런 장식도 없는 평범한 검. 그 길이는 은비의 키만큼이나 커서, 그것을 양손으로 비스듬히 들고 있는 은비의 모습은 어찌 보면 부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쾌검(快劍).”

은비의 입이 살짝 열리며, 식(式)을 읊었다.

“섬(閃), 절단(切斷).”

감겨있던 눈꺼풀이 들어올려지고, 본래 검정이었을, 하지만 지금은 또렷한 노란 빛으로 빛나는 은비의 눈이 결계를 직시했다.

그리고 베어낸다.

-쩌어억!

이곳과 저곳, 자연(自然)이 만들어내지 않은 결계의 막은 은비의 의도에 따라 그녀의 침입을 허락할 정도의 길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은비는 양손에 쥔 검을 자연스럽게 옆으로 늘어뜨린 채, 결계 안을 살폈다. 결계가 맞는지 싶을 정도로 자연럽게 흘러가는 바람과 흩뿌려지는 태양빛. 밖에서 본 것이 아니라면, 지금 있는 곳이 결계 안이 맞는지 조차도 헷갈렸음이 분명할 정도로 정교한 결계였다.

은비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이 도시 주변에 살고 있는 요괴(妖怪)중에, 이러한 결계술을 펼쳐낼 만한 힘을 가진 녀석이 있었던가?

하지만 생각은 길어지지 않았다.

“우아악!”

비명소리. 은비는 순식간에 그 소리와의 거리를 좁혔다. 짧은 순간에 뒤로 밀려가는 공원의 풍경. 그리고 시야에 잡히는 것은….

“늑대…?”

회색 깃털. 흰색 갈기. 날카로운 길쭉한 주둥아리의 입술 아래로 들어난 날카롭기 그지없는 이빨. 굳건한 네 다리와 음울한 검은빛으로 반짝이는 발톱….

은비가 늑대를 발견한 순간, 늑대 역시 은비를 발견 했는지 다른 곳을 향하던 시선을 은비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은비는 포악한 광기(狂氣)가 어려 있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쉬익!

판단은 미룬다. 인간의 도시에서 결계를 펼치고, 공격적 행위를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공격당할 조건을 충분히 갖추었다. 그러니,

“중검(重劍)…."

내달리던 다리가 굳건히 대지에 박혀, 무게 중심을 낮춘다. 늘어뜨렸던 검이 달려오던 힘 그대로 위로 치솟는다. 자세를 낮춰 자신의 키만 한 검을 컨트롤해내, 베어 올린다.

적의를 품은 은비의 노란 눈과 광기를 품은 늑대의 회색 눈이 마주쳤다. 품은 뜻은 다르지만 내지른 의미는 같다.

살의!

“단애(斷崖)!”

-후웅!

검식(劍式)의 이름처럼, 묵직함을 닮은 검기가 빠져나갈 틈 없는 빼곡함을 가지고 일제히 몰아친다. 사람의 가녀린 몸은 우습게 살라버릴 늑대의 검은 발톱이 검기의 절벽에 가로막혀 옴짝달싹 못하지만, 그 상황은 은비의 검 역시 마찬가지. 요기(妖氣)를 머금은 음울한 검은 발톱은 중검의 묵직한 검기마저도 뚫고 뛰쳐나오려 하고 있었다. 은비와 늑대 주변의 모든 초목이 비명을 지르며, 그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원형의 충격파에 허덕인다. 연약한 풀은 찢겨져 하늘을 날고, 가느다란 가지는 부러져 땅바닥에 내팽겨 친다.

은비는 한발 물러나며 내질렀던 검을 한껏 옆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앞서 있던 발을 조금 더 앞으로 강하게 내딛으며 몸을 비틀어, 그 궤적에 묵직한 검기를 대각선으로 실어 내지른다.

“천근(千斤)!”

-콰앙!

정면으로 쏠려오던 힘의 방향이 갑자기 틀어진 바람에, 회색늑대는 무게중심을 잃고 기우뚱 거렸다. 하지만 무슨 수를 쓴 건지, 순식간에 늑대의 몸이 뒤로 밀려나 강하지만 느릿하게 몰려오는 검기를 피해 물러나, 애꿎은 땅만 파해 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치. 늑대의 눈은 단 두 번의 부딪침에 충만하던 광기 대신 다른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경계?

은비는 검을 옆으로 비틀어 쥐고는 다음의 충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것은 침묵 뿐.

늑대의 입이 열리며, 날카롭게 빛나는 이를 드러냈다.

“마법사인가.”

반쯤의 짐승의 울림이 섞인 기묘한 중저음. 한국어가 아니지만, 늑대가 내뱉은 언어는 모든 것에 뜻으로서 통하는 언어. 은비는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은비는 노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를 한껏 낮췄다.

“오지 않으면 간다.”

냉정하고 무심한 눈길이 늑대의 전신을 훑는다. 늑대 역시지지 않고 몸을 뒤로 바짝 당기며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도록 뒷다리에 힘을 더했다.

“어째서 인간의 도시에 침입했는지는 묻지 않겠다.”

고조된 긴장에, 은비의 한마디가 툭 떨어지자 얕은 파문이 일었다. 그리고 은비와 늑대 모두 앞으로 뛰쳐나간다. 늑대는 힘차게 도약하며 검은 발톱을 휘둘러온다. 적중하면 분명 사망에 이를 치명적인 요기와 힘이 서려있음이 분명한 공격. 은비는 힘 있게 한발자국씩 내딛으며, 낮춰진 자세에서 검을 끌어 올려 내려친다. 적용된 식(式)은 중검(重劍). 사용된 술(術)은 적을 바스러뜨리는,

“파쇄(破碎)!”

검이 이끌고 내려치는 검기는 허공을 찢어발기는 듯한 굉음을 내며 떨어진다. 한 낯임에도 검에서부터 일어나는 기(氣)가 뿜어내는 빛이 눈을 가릴 정도로 환하게 피어올랐다.

-쿠우우!

결계 안에서부터 출렁이듯 퍼지는 기파. 그 위력에 견디지 못하고 둘을 감싸는 공간이 글자 그대로 바스러져 나갔다. 유리창이 깨져 나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며 퍼지는 공간의 파문은 파쇄의 위력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파지직! 파지직!

그 위력적인 검기를 중화하기 위함이었을까. 길게 자라 늘어진 늑대의 흰색 갈기가 올올이 치켜 올라, 같은 색의 무언가를 머금고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은 구현화(具現化)된 요기(妖氣). 퍼져나가는 일그러지는 공간의 파장은 마치 늑대 주변만 피해 가는 듯 상쇄되어 밀려나간다. 더 낮게, 더 낮게 몸을 낮춰가는 늑대의 발톱은 더욱 요란(擾亂)한 검은 빛을 띄었다.

-쿠우우!

-파지직!

서로의 힘이, 오로지 눈앞의 적을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 힘이 거대해질수록, 그에 의해 일그러지고 왜곡되어 밀려나는 공간과 시간은 그 둘의 충돌을 더더욱 더뎌 보이게 하고 있었다.

 


-후우

 


두 힘이 부딪히려는 순간, 귓가로 들려오는 나지막한 숨소리. 은비와 늑대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숨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고, 둘 중 은비는 경악에 휩싸여 눈을 크게 치켜 뜰 수밖에 없었다.

“대성!”

비명처럼 울려 퍼지는 은비의 목소리. 적의를 담아 노랗게 빛나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빛을 잃어 검어지고, 그 다음에야 폭발하는 듯한 충돌음이 공원을 가득 메웠다.

-콰앙!

 

 

 

 


체동??, 초록草綠

 

 

 

 

 

 

유린은 뒤꽁무니에 금갈색 여우 한 마리를 매달고, 은비와 헤어졌던 장소에 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두리번.

“어느 쪽이었지….”

정 반대쪽으로 찢어지긴 했었지만, 이미 충만하던 이질의 기운은 많이 옅어져 있던 덕분에, 정확한 위치는 다시 한번 추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음, 나 말고 다른 녀석 찾는 거야? 응?”

“으아, 귀찮아! 제발 좀 떨어져, 이 여우야!”

“음, 내가 여우가 맞긴 한데, 왠지 그렇게 들으니까 기분이 나쁘다.”

“….”

유린은 여우와 상대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한 후, 손에 쥔 빨간 구슬에 힘을 더했다. 체온 외의 또 다른 온기가 구슬에서부터 밀려 올라오면서, 유린이 원하는 것을 행하기 시작한다.

“Close Search."

유린을 중심으로 퍼지는 미세한 진동. 여우는 쪼그려 앉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늦은 오후라지만, 유린과 여우가 있는 곳은 도로 한복판. 보기 드문 여우가 사람을 따라 쫄랑거리며 쫓아다니는 모습이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지 않을 수 없었다.

“으아, 신경 쓰여. 너 저리 떨어지라니까? 왜 자꾸 따라다니는 거야?”

“그야 뭐….”

여우는 말을 얼버무렸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다고는 느끼고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유린으로서는 아무리 요괴라지만 함부로 공격을 행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법칙(法則) 이니까. 유린은 한숨을 폭 내쉬고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은비의 위치를 대략 탐지해 낸 다음 속도를 높였다.

달리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린과 여우가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문 한가한 도로변의 커다란 공원이었다. 여우는 공원 앞에 도착하자마자, 코를 킁킁거리더니 유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결계…이긴 한데, 상당히 망가졌는걸? 그것도 안에서부터.”

“그 정도는 아니까, 친한 척 하지 마. 그나저나 의미(意味)를 잃은 결계라. 주인은 이미 사라진 건가.”

설치자가 사라졌다지만, 결계는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유린은 완전히 부서뜨리고 들어갈지 잠시 고민했지만,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틈…? 은비가 만들어 놓은 건가.”

유린은 은비가 조금 전에 베어 버린 결계의 틈을 발견하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금갈색의 여우 역시 유린을 따라 폴짝, 결계 안으로 뛰어 들었다.

결계 안은 엉망진창 이었다. 대규모 힘의 충돌이 있었음을 쉽게 가늠할 수 있었던 유린은, 처음 느꼈던 ‘이쪽의 요기의 크기’와 은비의 힘을 가늠해 보고는 약간의 안도가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한 일은 없겠지.

하지만 그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은비야!”

유린은 공원 한복판에 널브러져 있는 은비를 발견하고는 기겁을 하며 은비에게 달려갔다.

“은비야? 은비야! 정신 차려!”

피투성이.

은비의 상태를 표현하기에 아주 적절한 단어였다. 은비의 등을 받쳐 든 손에 흥건히 젖어드는 핏물을 보고, 유린은 다시 한번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 찢어진 옷가지. 그리고 그 옷 밑으로 들어난, 마치 난도질당한 듯한 상처들과 상처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핏물은 은비가 입고 있는 밝은 색의 옷가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유린은 급히 치료마술의 언을 외웠다.

“아….”

치료마술의 흰색 빛이 은비의 전신에 머물자,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그 덕인지 정신을 잃었던 은비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려, 그 아래의 흐릿한 검은 눈동자를 드러내었다.

“은비야, 정신이 들어?”

“유린아…?”

“다, 다행이다! 죽는 줄 알았다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에헤, 미, 미안. 괜히 나서서….”

“아니야. 아니야. 내가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유린의 눈가에서 물방울이 몇 개가 흩어 떨어졌다. 그 물방울이 볼 언저리에 떨어지자 은비는 두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나 때문에… 우는 거야?”

“아니야….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 한거니까, 네 탓이 아니라고?”

“이히히, 다행이다.”

은비는 멋쩍게 웃으며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 때 까지도 온 몸에 머무는 흰색 빛은 지워지지 않았다.

“아. 대성이는?”

“대성? 무슨 소리야?”

“으응, 대성이가 요괴한테 습격당한 것 같았어. 아, 저기 있다.”

은비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유린은 은비의 어깨를 힘주어 누르며 제지했다.

“내가 보고 올 테니까, 여기서 쉬고 있어.”

“응….”

유린이 대성이를 찾아 상태를 살펴보는 동안, 은비는 힘겨운 한숨을 내쉬고, 근처에 있는 나무를 찾아 몸을 기댔다. 유린이 유지해주고 있는 빛에 의해 조금씩 치유되고는 있다지만,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치명상에 의한 데미지가 쉽게 가실 리가 없었다. 은비는 몸을 기대고,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대성의 존재를 깨달은 은비는 지금 이대로 힘이 맞붙으면 대성 역시 온전할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파쇄의 힘을 거두고 방어의 술을 펼쳐낸 은비는 비록 치명상을 입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늑대 요괴에게도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그리고 늑대가 결계 밖으로 물러나는 것 까지 확인 했고….

-욱신

“아윽!”

옆구리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에 은비는 더 이상 생각을 이을 수 없었다. 갈비뼈라도 나간 걸까. 좀 전의 싸움에서 몇 가지 의문이 남긴 했지만, 일단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성에게 큰 상처가 없을 거라는 데에 안도했다.

은비의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았는지, 대성의 상태를 살펴보러 간 유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은비에게 돌아왔다.

“큰 상처는 없어. 요력이 내부에 침투해서 기절한 것뿐이라서, 응급조치는 했으니까. 조금 뒤에 깨어나서 집으로 알아서 돌아가겠지.”

“에? 그래도….”

“네 몸 걱정부터 해!”

버럭, 외치는 유린의 목소리에 움찔한 은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한 은비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너덜거리는 옷자락이 거슬렸지만, 이 정도면 죽은 것 보다 나은 것 아니겠는가? 은비는 대성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떨어진 곳에 대성이 편한 자세로 누운 채 있었다. 기절 했는지 눈꺼풀은 내리 감겨 있었고, 항상 쓰고 다니던 두꺼운 안경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은비는, 상처가 없다는 데에 안도를, 눈을 감고 있다는 것에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고는, 안경을 주워 대성의 눈에 씌워 놓았다.

유린은 그런 은비의 행동을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다 다시 버럭, 외쳤다.

“집에 가자! 집에 가서 치료 더 해야 할 거 아니야?”

“으, 응!”

 


“그런데 결국 오늘도 시험공부는 못하겠구나.”

“그러네…. 아, 맞다. 유린아.”

“응?”

“혹시 대성이 눈동자 본적 있어?”

“눈동자?”

유린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그리고 보니 한번도 없다?”

“그래?”

“그건 왜?”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 맞다. 오늘, 마법을 쓸 때 처음으로 드디어 ‘나를 속이지 않고’ 싸웠어.”

“정말?”

“응. 처음부터는 아니었는데, 마지막에 딱 한번.”

“그래도 지금부터 조금씩 더 연습하면, 언젠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거야.”

“그치?”

“응, 물론이지!”

“에헤헤.”

“음. 그런데 이 여우 녀석 어디로 간 거지?”

“무슨 여우?”

“혹시 나 쫓아오던 여우 한 마리 못 봤어?”

이번엔 은비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없었는데?”

“이상하네.”

 


여우는 계속 유린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다가, 쓰러져 있는 대성을 두 눈에 담은 순간부터 그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무 위에 가만히 앉아서 대성을 내려보다가, 다시 내려와 조심스럽게 대성의 옆에 다가와 코끝으로 손가락을 톡, 톡 건드려 보기도 하고.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반쯤 열려있는 손바닥을 혀끝으로 할짝 이기도 하면서 대성의 주위를 왔다 갔다 했다.

“으윽….”

그제야 반응을 보이는 대성. 대성은 낮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뒤척였다. 여우는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으아으….”

대성은 좀 전보다도 더욱 긴 신음소리를 내며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흐릿한 하늘. 어느새 저녁이 되어 가는지 느릿한 햇볕이 서쪽 건물 꼭대기에 아슬 하게 걸터앉아 있었다.

“으윽!”

다시 치밀어 오르는 두통에, 대성은 몸을 일으키다 말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웬 두통이지….”

아니, 그것보다 왜 쓰러져 있는 거지.

대성은 자신이 왜 공원에 쓰러져서 두통을 겪고 있는지, 그에 대한 이유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까….”

휴일에 심부름 때문에 잠시 나왔다가, 지름길인 공원을 가로지르고… 그리고…?

“그리고 어떻게 됐지?”

이상하게도, 공원 가운데에 이르렀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와 날씨 때문인지, 한참을 바닥에 누워 있어서인지 몸속에 치밀어 오르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 뿐이었다.

“저, 저기….”

“응?”

갑자기 손에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 그리고 옆에서 들려오는, 어딘가 수줍은 듯한 가는 목소리에 대성은 고개를 돌려 보았다.

“누구?”

대성은 미간을 모으면서 물었다.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데, 자신의 옆에 왠 꼬마 여자아이가 대성의 손에 양 손을 얹어놓고 있었다.

“아, 아… 몸은 괜찮으셔요?”

“어? 그리고 보니 좀 추웠는데, 괜찮아졌네.”

좀 전 까지만 해도 온 몸을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던 한기가, 이상하게도 간데없이 사라졌다. 소녀는 대성의 손 위에 얹었던 손을 슬며시 거두며, 대성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몸을 베베 꼬았다.

대성은 소녀의 행동을 빤히 쳐다보다가, 문득 물었다.

“누구야?”

“옛?! 아, 저… 그게….”

대성의 물음에 화들짝 놀라며 말을 더듬는 소녀. 대성은 고개를 갸웃 하고는 다시 물었다.

“이름말이야 이름.”

“이, 이름 말씀입니까? 예, 그러니까….”

여전히 말을 더듬는 소녀의 모습을, 대성은 찬찬히 훑어보았다. 가냘픈 몸매에 분홍빛 예쁜 원피스를 차려입고 대성의 바로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그 아이는, 길게 늘어뜨린 금빛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흘러내려 그나마 가냘픈 몸매를 더욱 가련하게 만들고 있었다.

“초… 초계(初悸)라고 해요.”

“초계?”

대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이 소녀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대성이 궁금한 것은 소녀의 동그스름한 턱이나 콧잔등 같은 외모는 동양적이었지만 머리카락이나 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도저히 동양적인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한문 이름이라니.

“초계라…?”

다시 한번 이름을 되뇌는 대성. 눈을 가늘게 떴다가, 알겠다는 듯이 손바닥을 마주치며 말했다.

“처음의 두근거림! 맞지?”

“예? 아, 예….”

맞춰 버리다니. 소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급조한 이름이었지만, 바로 그 뜻을 알아 맞춰 버리다니.

“그런데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던 거지? 혹시 알고 있어?”

“그게… 지나가는데, 그, 저… 쓰러져계셔서, 그게 그냥 지나가지 못해서, 아, 저…. 실례가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그래도 그게 아니라….”

횡설수설. 귀까지 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푹 숙인채로 횡설수설 하는 소녀의 모습에 대성은 그만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그러니까 내가 쓰러져 있어서 옆을 지켜 준거구나.”

“예… 예.”

“고맙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는 대성. 약간 현기증이 도는지, 잠시 넘어질 뻔 했지만, 허리를 약간 넘기는 소녀의 부축에 제대로 설 수 있었다.

“고마워.”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에, 참 부끄럼이 많은 꼬마구나, 라고 생각해 버린 대성은 소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러자 고개를 들어 대성을 마주 바라보는 소녀. 대성은 빙긋, 웃어 주고는 소녀를 공원에 둔 채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음날, 일요일 아침. 몸이 무척 피곤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대성은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어제 낮의 반 정도가 기억에서 송두리째 사라져,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하아, 일주일 운이 없으려고 그러나.”

대성은 어제 그저께 빌려 놓았던 소설책 3권을 흘깃 바라보았다. 이거, 오늘 반납해야 했지.

대성은 아침은 먹을 생각도 안한 채로, 책을 봉투에 쓸어 담은 뒤 집을 나섰다. 간편하게 차려입은 채 길가를 걷던 대성은 문득 자신이 공원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제 여기서 기절했었지.”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위험이 있다면 피해 가는 게 인지상정. 대성은 공원을 돌아서 가기로 결심했다. 워낙에 큰 공원이라 돌아가려면 조금 오래 걸리지만, 불안한 것 보다는 낫지 않을까.

“아, 안녕하세요!”

“어? 안녕. 여기 사는가보구나?”

“예…!”

어제 그 금발머리 소녀, 초계를 보고는, 대성은 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소녀는 두다다다 달려, 대성의 옆에 나란히 섰다.

“어, 어디 가세요?”

“응, 책 반납하려고.”

“에, 예.”

그리고 침묵. 대성은 책방을 향해 걸으면서도, 이 소녀가 왜 자신의 옆에 서서 걷고 있는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것 참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할지.

 


은비는 오늘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평소 같은 ‘주말 우을증’도 없었고, 공부하러 가자는 유린의 꼬드김에도 룰루랄라. 도대체 뭣 때문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던 유린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쁘지는 않지, 라면서 넘겨 버렸다.

“그나저나 상처는 괜찮아? 특히 골절….”

“응, 괜찮아! 조금 욱신거리긴 하지만… 이정도면 평소 생활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겠는걸.”

“그래? 다행이다.”

아마 평소처럼 부비부비어택을 자제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일지 모른다. 은비는 그런 유린을 빤히 바라보다가, 양 손을 내밀어 자신의 눈높이 보다 위에 있는 유린의 볼을 꽉 붙잡았다.

-콱!

“어제 일 또 생각하는 거야? 글쎄 난 괜찮대도?”

“으아아…. 어 하느 지시야….”

다시 에잇, 하고 기압을 넣은 유린은, 거꾸로 은비의 볼살을 꼬집었다.

“우아! 아허!”

사태 역전. 결국 둘은 한참을 옥신각신 하다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하하. 아우… 옆구리 쑤셔.”

“후후. 무리하지 말라구.”

“알았어. 알았다니까?”

그 때, 유린은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저거… 대성이 아냐?”

“응?”

곧바로 유린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린 은비. 유린의 말대로, 그곳에는 대성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두근!

“아….”

“뭐, 괜찮은 것 같다.”

“응….”

갑자기 잔뜩 긴장한 목소리. 유린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은비를 내려 보았다. 어느새 유린의 뒤에 몸을 반쯤 숨긴 은비는 대성이 걸어오고 있는 곳을 조심스럽게 쳐다보다, 대성의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소녀에 시선이 닿았다.

-파지직!

순간, 유린의 목걸이에 달려 있는 붉은 구슬이 그것을 감추고 있던 옷 속에서 뛰쳐 올라와 붉은 빛을 뿜어내었다. 유린은 그것을 낚아채면서, 무릎을 살짝 굽혀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은비야, 내 뒤로.”

“아, 응.”

대성은 자신의 앞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인사를 하려던 참에, 사납게 노려보는 유린의 얼굴에 그만 움찔, 해버렸다.

“뭐야, 그 눈빛은. 마치 날 때려죽이려는 것 같은 눈빛 같은데…?”

반쯤 이죽이는 말투가 섞여 있지만, 저 눈빛을 보면 정말 때려죽일 것 같았다. 대성의 옆에 약간 떨어져 조심스럽게 걷던 소녀 역시 그렇게 느꼈는지 대성의 손을 껴안으며 슬그머니 뒤로 숨었다.

소녀가 대성의 손을 잡자, 유린에게서부터 시작되는 마력의 량이 더욱 증폭되었다.

물론,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을 리가 없는 대성은 그냥 왠지 분위기가 험악해 졌다, 라고 느꼈을 뿐이었다.

“떨어져.”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유린. 그 소리를 들은 대성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뭐? 아니, 다짜고짜 째려보면서 하는 소리가 그거야?”

“떨어지라고, 도대체 무슨 해코지를 하려는 거야?”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상당히 심각한 오해. 변명거리를 찾던 대성은, 뒤에서 자신의 옷을 꾹 잡아당기는 손길을 느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금발의 소녀는 고개를 조용히 가로젓고는, 대성의 앞으로 나섰다.

“뭐, 아는 사이야?”

“예…. 같이 다녀 주셔서 고마워요.”

“응? 뭐 그게 어려운 일이라고. 그럼 난 이만 간다.”

“예.”

소녀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대성은 짧게 미소를 짓고는 소녀에게 손을 흔들며, 유린을 힐끗 쳐다보았다.

“도대체 뭘 의심하는 거야?”

하지만 유린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성은 유린 뒤에 가만히 서 있는 은비를 발견하고, 인사를 하려 했지만 시선을 회피하는 은비 덕분에 실패로 돌아갔다.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가?”

뭐, 원래 나를 싫어했었지. 대성은 나지막이 중얼거리고, 옆길로 몸을 틀었다.

대성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소녀는 대성의 앞에서 수줍고 예의 바르던 모습을 집어 던지고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칫, 너희만 아니었어도 계속 있는 건데.”

“뭐, 뭐?”

기가 막힌 것은 유린만이 아닌 것 같았다. 은비 역시 무의식 적으로 손목의 노란 구슬을 꼭 잡았을 정도였으니까.

“이 불여우 같으니,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설마 대성의 영혼을 뺏어먹으려는 작정이냐?”

영혼, 이라는 이야기에, 오히려 깜짝 놀란 쪽은 은비였다. 물론 유린의 뒤에 있어서 유린은 알 수 있었지만, 그 모습을 본 것은 여우뿐이었다.

“뭐, 대성님의 영혼이 어떤 영혼인지는 저 여자아이는 아는 것 같은데?”

“…대성님?”

유린은 소녀의 ‘영혼’이라는 이야기 보다, 대성‘님’에 더 큰 반응을 보였다. 한쪽 눈썹을 실룩이면서, 유린은 정말 기가막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으니까.

“너, 귀신한테 홀리기라도 했냐?”

“어머나, 내가 귀신인데, 귀신한테 설마 홀리겠어?”

“그럼 방금 제정신으로 한 소리야?”

“말했잖아? 뒤의 저 아가씨라면 알 거라고. 물론 너도 알겠지. 나를 포함한 모든 요괴는 사람들의 영혼을 찾아다닌다는 것을. 그것도 ‘순도 높은’”

유린은 무슨 새삼스러운 소리를 하고 있냐는 듯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말을 이었다.

“뭐, 저 안경을 누가 씌웠는지는 몰라도, 참 잘 생각한 것 같아. 나같이 한눈에 인간 영혼의 색을 읽어낼 수 있는 상급요괴가 아니라면 눈치조차 못 챌 뻔했잖아?”

“무슨 소리야?”

“후후. 그 예쁜 영혼이란. 나 같은 새침한 여우요괴들은 그런 예쁜 영혼 앞에 서면 행복해 어쩔 줄 모르지만, 다른 요괴는 어떨까? 이제까지는 안경으로 보호 받았지만, 어제 분명 나 같은 상급 요괴한테 습격을 받았던 것 같은데?”

“흥, 결국은 영혼을 빼먹을 작정이잖아? 이 요괴야!”

소녀는 오른손 검지를 들어 유린의 눈앞에 척, 세우고는 좌우로 까닥였다.

“모르는 소리! 그런 예쁜 영혼은 살아서 약동할 때 그 아름다움이 더하는 법이라고. 우리 여우요괴같이 아름다움을 아는 요괴들은 오히려 대성님을 지키려 들걸?”

다시 나왔다. 대성님. 유린은 다시 한번 눈썹을 씰룩였다.

“그런데….”

소녀는 몸을 빙글 돌렸다.

“어제 습격을 보아하니 나 같은 상급 요괴가 대성님 영혼을 눈치 챈 것 같은데, 어제 한번으로 조용히 넘어갈까? 지금까지는 내가 계속 지키고 있었는데.”

“아…!”

반응은 유린이 아닌, 이제까지 조용히 서 있기만 하던 은비에게서 터져 나왔다. 은비는, 분명 무서울 정도로 깨끗한 대성의 영혼을 안경 너머의 눈에서 읽어 내었다. 분명, 그것은 세계에 드물 정도로 아름다운, 반짝이는 영혼이었다. 모든 요괴가 탐내고 찬미할 만한.

은비는 아픈 몸을 하고서도, 뒤로 돌아 대성이 사라진 곳으로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은비야!”

“너도 빨리 가는 게 좋을걸.”

“이익, 다음에 보자!”

“메롱, 이다. 다음에 보자는 악당 치고 제대로 된 악당 없더라!”

“…!”

유린은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은비의 뒤를 좇기 시작했다.

뒤에 남긴 여우 요괴, 초계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빙글거리던 얼굴을 사악 굳혔다.

“대성님이 무사하셔야 할 텐데. 으음….”

잠시 고민. 그리고 대성의 영혼 옆에 있을 때 느꼈던 편안함을 기억해 내었다.

“나도 가야겠다!”

소녀 역시, 은비와 유린이 사라진 곳을 향해 달음박질 쳤다.

 

 

 

 


체동??, 해청海靑

 

 

 

 


어둡다. 하지만 눈부시다. 그 이유가 까만 배경에 폭발하는 듯한 불꽃 때문이 아닐까.

빨갛고 노란 혀를 날름거리는 불에 의해 덥게 달구어져 치솟는 열기는 주변의 산소를 모두 소모하고, 남은 것은 재와 사람은 숨쉴 수 없는 죽어버린 공기.

산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통나무집은 이제 그 형태조차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게 타들어가 우르르 무너져 버린 지 오래.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치밀어 오르는 열기는 주변 나무에 힘없이 매달려 있는, 바짝 마른 나뭇가지들을 지글지글 타들어가게 할 정도였다.

꼬마는 조금 멀리 떨어진 나무 뒤에 숨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꼬마가 있는 곳까지 열기가 밀어닥쳐, 숨이 턱턱 막혔지만 꼬마는 치솟아 오르는 검은 연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눈부신 열기와 새까만 어둠의 경계에서 춤추는 그림자. 꼬마가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것을 살라먹은 불꽃의 저편에, 요괴의 춤추는 그림자가 흐릿하게 그려졌다.

꼬마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다. 다만 입을 꾹 다물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삼키려 애쓸 뿐이었다.

 


그것이 은비가 처음으로 마법사가 되기로 결심한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마법사였지만 착하고 심약한 딸만큼은 마법사가 되지 않기를 바랐었다. 요괴와 싸우며, 귀신을 물리치는 생활이 정상적일 리가 없는데다 마법을 쓰면 쓸수록 상처받을 자식을 지켜 볼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모가 자신의 눈앞에서 살해당한 충격 때문이었을까. 이를 악물고 복수를 위해 마법을 익혔고, 은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명의 어엿한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본디 심약하고 마음이 여렸기 때문일까.

마법은 이질, 즉 이 세상이 아닌 것을 세계에 사역시키는 능력. 따라서 자연을 찢어발기고 울부짖게 만들수록 더욱 강력한 힘이 사역되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 더욱 강력한 힘을, 자신을,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더욱 강력한 힘을 원했던 은비는 그 때에 이르러선 자기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었다. 그 어떤 참혹함속에서도 오로지 적의를 위해 내달릴 수 있는 마음의 갑옷을.

그리하여 결국 원수를 갚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상하게도 이후로는 ‘마음의 갑옷’이 아니면 마법을 쓸 수조차 없게 되었다. 복수라는 편파적인 감정에 이질의 기운을 쏟았기 때문일까. 마법을 쓰면 쓸수록, 갑옷을 더욱 단단히 여미면 여밀수록 튼튼한 철판속의 여리고 심약한 마음은 점점 병들어가고, 나약해져만 갔다.

하지만 이제야, 자연을 찢어발기는 참혹함 속에서 마음의 갑옷이 아닌 순수한 자기의 의지로 그것을 행했다.

그 의지는 다름이 아닌,

그녀의 소중한 것을 지키는.

 


은비는 다리에 힘을 주어 땅을 박찼다. 떠난 지 얼마 안 됐으니, 금방 마주 칠 수 있으리라. 다행히, 길이 엇갈리지는 않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의 뒷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대성아!”

은비는 목청껏 대성을 불렀다. 대성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 비활?”

대성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선을 피하던 은비가 이렇게 급하게 달려오는 것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간신히 대성을 따라잡은 은비는, 옆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는 잔뜩 굽혔던 허리를 폈다.

“무슨 일?”

대성이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응, 그러니까.”

순간, 은비는 말문이 턱,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하나. 널 지키러 왔다고? 그런 부끄러운 말을?

은비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보니, 길가에서 마주친 이후로 처음이지 않은가!

“아무것도 아니야! 그, 그나저나 대성이는 어디 가는 거야?”

“흐음, 오늘따라 그걸 물어보는 사람이 유난히 많네.”

겨우 두 명 째지만,

“책방에 책 반납하러 가는 거야. 너는?”

“에, 아,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어!”

“그래?”

대성은 은비의 대답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같이 책방이라도 갈래? 음, 너는 만화나 소설 같은 거 안보나?

은비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니, 나 만화책 좋아해! 엄청!”

그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을 본 대성은, 문득 어제 만난 소녀가 생각나 쿡, 하고 웃어 버렸다.

“뭐, 뭐야? 왜 웃는 거야?”

대성의 그 태도에, 약간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은비는 왼쪽 볼을 부풀리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귀여워서.”

“으, 으에?”

은비는 꽤나 어벙한 소리를 내며 몸을 반보 뒤로 뺐다. 귀엽다니, 그런 말을 저런 무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초계는 유린이나 은비와는 다른 길로 향했다. 아주 잠깐 곁에 있었지만 이것저것 물어본 덕에, 대성이 대충 어디로 향할 건지 가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지름길…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지름길이 평범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은 아님을 짚고 넘어가겠다. 어쨌든 먼저 대성이 향할 곳에 도착한 초계는 대성이 올 때 까지 가만히 기다리기로 했다.

가만히 있는 다고는 하지만, 귀여운 외모와 등허리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금발머리 때문에 더욱 가녀려 보이는 몸매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책방 앞 은행나무 가로수에 기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번씩 받으며, 한쪽 발을 톡톡 두들기던 소녀는 멀리서 익숙한 ‘느낌’을 받고는 그 쪽으로 몸을 향했다.

한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을 따뜻하고 포근한 영혼. 온 생을 추운 겨울 속에서 사는 초계에게, 보드랍고 푹신한 오리털 이불과도 같은 느낌을 안겨준 영혼의 주인이.

초계는 작은 다리를 놀려, 대성의 앞에 섰다. 그리고 꾸벅.

“아, 안녕하세요!”

“어… 어?”

대성은 무의식 적으로 인사를 받다가, 자신의 앞에서 여전히 우물쭈물하고 있는 소녀가 분명 조금 전에 저 뒤쪽에서 헤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었다.

“어떻게 여기에?”

“에, 그, 그게….”

대성은 횡설수설하려고 하는 초계의 머리에 손을 턱 얹었다.

“자주 만난다. 그치?”

“예….”

초계는 얼굴을 푹 숙이고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세 번째 만남이지만, 이 따뜻함이 낯설다.

대성의 옆, 약간 뒤 쪽에서 조심스레 따라다니던 은비는, 여우요괴의 ‘마치 소녀 같은’ 행동에 기가 막혔다. 이런 불여우 같으니! 라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지만, 대성의 앞이라 차마 큰 소리는 치지 못했다. 은비는 소심한 적의를 담아 대성 앞에서 꼬리를 살랑대는 여우요괴, 초계를 살짝 흘겨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초계는 힐끗 은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뭐, 뭐하는 짓이야?!”

은비는 비명처럼 외쳤다. 세상에, 자신은 건들지도 못하고 있는 대성의 팔에 대롱, 매달려 자신에게 혓바닥을 내미는 게 아닌가! 대성은 은비의 외침에 깜짝 놀랐다.

“비, 비활아? 내가 뭘?”

“으아, 아무것도 아니야…!”

은비는 빨개지는 얼굴을 감추고 위해 고개를 팩 돌렸다. 대성은 자신의 팔에 늘어지듯 매달리는 초계의 머리를 토닥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히잉.”

은비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하고 앞서 걸어가는 대성의 등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왠지 어제 다쳤던 옆구리가 욱신, 하고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욱신욱신

“아파….”

가만히 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은비에게, 대성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비활아. 안와?”

“으, 응! 갈게!”

아파도 괜찮아. 옆에서 너의 상냥한 눈동자를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괜찮아.

 


그 시각 유린은.

“으아, 여기가 어디지?”

한참 뛰어다녔는지, 유린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을 매달고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분명 본적이 있는 곳이긴 한데.”

문제는 본적이 있는 거리, 라는 게 아니라 찾는 사람이 여기에 없다는 것 정도.

“흐에, 또 놓쳤어!”

유린은 분명 길치는 아니다. 하지만, 사람을 쫓아가는 것에 한해서 길치가 되는, 아주 특이한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은비야아아.”

유린은 손나팔을 하고 은비를 불렀다. 주변 사람들이 힐끗 힐끗 쳐다보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은비의 이름을 힘껏 외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음?”

“아.”

책을 고르고 있는 대성의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성의 뒷모습을 나란히 서서 빤히 바라보던 두 여자, 은비와 초계는 동시에 나지막한 단발마를 내뱉었다. 그리고 서로의 시선이 얽힌다.

잠시의 침묵.

침묵은 짧았지만, 행동은 빨랐다. 초계는 대성의 등 뒤로 빠르게 다가가, 뒤를 지키며 섰다. 은비는 손목의 노란색 구슬을 꼭 쥐며 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이질(異質)의 기운이 충만한 거리. ‘아차’ 한 사이에 일대를 둘러싼 결계에 꼼작 없이 갇혔다.

“이전의 늑대일까….”

은비는 작게 중얼거리며, 구슬에서 늘씬하면서도 그 길이가 자신의 키만 한 검(劍)을 호출(呼出)해 내었다.

자연스럽게 검을 늘어뜨리고, 주변을 둘러본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거리. 파란 하늘도, 회색톤 도시도.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하던 도로에 아무도 없다는 것 정도?

“….”

텅 빈 도로에, 휘몰아치는 바람만이 소리를 낳는다. 은비는 쥐어진 검에 힘을 더했다. 검은 눈이 노랗게 빛난다. 덧씌워진 갑옷은 적의. 쥐어진 검에서 건너편을 일그러트릴 정도로 강렬한 아지랑이가 솟구쳤다.

“올 테면 와봐.”

지켜 보일 테니까.

솟구치는 살기. 내달리는 투기. 부딪쳐오는 살의!

-쾅!

은비는 간신히 몸을 틀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위로 쏟아지는 둔중한 충격에, 잠시 몸을 비틀거렸다. 다행히 추가 타격은 없었다.

첫 번째 공격의 주인은 바로 요전번의 회색 늑대였다. 그 늑대는 어제와는 달리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자세를 낮춘 채 은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발톱에서 뿜어 나오는 요기와 살기가 수그러들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늑대의 입이 열렸다.

“어제의 빚을 갚으러 왔다.”

은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빚? 넌 영혼을 가지러 온 게 아니야?”

“물론, 그 영혼 덕분에 어제는 좀 흥분을 했었지. 하지만, 그것만큼 너에게 남긴 빚도 크다.”

늑대의 자세가 더욱 낮아졌다. 대화는 더 길어지지 않았다. 은비도, 늑대도 말을 길게 늘여가면서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서로의 기세가 충돌했다.

두 번째 충돌 후, 늑대는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상하군. 왜 어제의 검식을 쓰지 않는 거지?”

대답 대신 은비는 곁눈질로 책방 쪽을 향했다. 여기서 충격파가 휘몰아치는 기술을 썼다간… 대성에게 들켜 버리고 말거다. 은비가 말했다.

“그런 커다란 검식 말고도, 너를 상대할 검식은 많아…!”

은비가 향했던 시선을 따라간 늑대는 무언가를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키려는 것인가. 뭐, 상관은 없겠지. 네가 전력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나 역시 전력을 다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버려라!”

-쿠오오오!

농담은 아닌지, 늑대의 털 사이사이에 요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풍성하게 부풀러 오르는 늑대의 모습에, 은비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물러서지는 않는다. 몸에, 쥐어진 검에 의한 식(式)을 인식 한다.

“중검(中劍)의 도(度).”

상체를 숙인다. 검이 크게 들린다. 자세가 낮고, 들려진 검은 높다. 따라서 내려치는 힘은 강하다!

-쾅!

술이 따르지 않는 식 뿐인 검술에, 늑대는 움찔하며 뒤로 한발자국 밀려났다. 은비는 곧바로 한발, 강하게 디디며, 중검의 식을 담아 검을 떨쳐 내었다.

-쾅! 쾅! 쾅!

처음 한발자국을 제외하고, 늑대는 단 한번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번 충돌에 한번의 무방비 상태. 하지만 그 한번 한번이 전력이기에, 함부로 흘리지 못하고 함부로 역습하지 못한다. 다만, 둘 모두 온 힘을 다해 발톱과 검으로 상대를 두들길 뿐.

은비는 충돌에 의해 튕겨진 검을 끌어당기는 대신 몸 전체를 한바퀴 휘둘렀다. 검이 묵직한 회전을 따라 부딪친다.

-콰아앙!

“후우.”

“크르릉.”

잠시의 침묵. 이번에는 늑대 쪽에서 달려온다. 그 약간의 텀에, 은비는 다시 한번 자세를 낮추며 몸을 한바퀴 회전시켰다.

-부우웅!

검이 은비 주위를 힘껏 회전하며, 달려오는 늑대의 옆면을 후려칠 요량이었지만 늑대는 요령껏 점프하며 은비의 위력적인 공격을 피하면서 발톱을 내밀었다. 하지만 불안정한 자세에서 나오는 공격이, 빠르고 위협적일 수는 없었다. 은비는 헛도는 검을 다시 힘껏 끌어당기며 발톱을 방어해 내었다.

-까드드득!

길지만 얇은 검면을, 요기가 어린 검은 발톱이 스치듯 지나가며 불똥을 튀겼다. 그 풍성한 화광이, 결계(結界)로 인해 이미 이 세상이 아니게 된 이 곳을 환히 밝혔다.

늑대는 가볍게 지면에 내려앉으며, 정면이 아닌 측면을 빙글빙글 돌면서 비어있는 은비의 틈을 향해 발톱을 내질렀다. 공격만큼이나 방어에도 위력적인 중검(中劍)으로 막지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시간을 끌어서야 뒤에 있는 대성이 의심할 것이 번했다.

속전속결(速戰速決).

“그렇게 나오겠다면….”

낮게 내려앉은 은비의 자세가, 처음으로 앞으로 기울었다. 넓게, 그리고 굳건히 땅에 박혀 검력의 기반이 되었던 발자국이 좁아지며 빨라졌다. 높게 올려 강하게 내려치던 검이, 가볍고 낮게 휘둘리기 시작했다. 중검(中劍)의 식이, 눈 깜작할 사이에 쾌검(快劍)의 식으로 변해간다.

“쾌검(快劍), 풍령(風鈴).”

-부우우우!

이제껏 강맹하게 떨쳐내었던 검격(劍擊) 부드럽게 흘러간다. 바람을 닮은 흐름을 따라 내지르는, 눈부시게 빠른 검이 묘한 울림을 허공에 남겼다.

-바우우우!

-추아아악!

좀 전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강력한 위력은 실리지 않았지만 서로 치명상을 남기기 충분한 격돌이, 충돌음 없이 계속되었다. 단지, 둘의 격돌은 스쳐 지나갈 뿐. 은비는 가볍게 발을 놀렸다. 검을 끌어올려, 어깨 위에서 직선을 만들고 최단 거리를 향해 질러온다.

늑대는 네 발을 동시에 박차 훌쩍 물러나려 했지만, 길쭉한 검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다. 검을 향해 발톱을 내질러 보았지만, 검은 흐릿한 흔들림으로 가볍게 발톱을 피해내었다. 그 움직임에, 바람의 울림이 함께했다.

-부우우우!

-피잇!

처음으로 성공한 공격. 은비는 다섯 걸음 이상 물러서 검을 축 늘어뜨렸다. 두 손으로 꼭 쥔 강철의 검 끝은 바닥에 가볍게 올려져 있었고, 그 끝에는 붉은 물방울이 하나, 대롱 매달려 있었다.

늑대는 공격당한 그 자리에서, 등어깨 부분에 길게 나 있는 상처를 힐끗 쳐다보았다. 풍성히 부풀어 오른 흰빛 갈기 사이로, 붉은 번짐이 일었다.

“크르르….”

노려보는 늑대의 눈길에, 은비의 노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마주한다.

이제까지는 마치 애교였다는 듯이 늑대의 온 몸이 움찔움찔, 알수 없는 힘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늑대의 몸이, 근육이 울룩불룩 튀어나오기 시작하면서 몸집이 점점 더 커졌다. 본래도 사람 키 만했을 늑대가, 3M가 넘는 무시무시한 크기로 커지더니, 이윽고 뒤의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섰다. 그 높이가 어찌나 높은지, 은비는 고개를 위로 한참 꺾어야 늑대의 시선을 마주 할 수 있었다.

-꼴깍

은비는 무의식 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이런 마물이 탐낼 정도로, 대성의 영혼이 가치가 있는 것일까?

-후우웅!

늑대의 팔이 번쩍이는 발톱을 달고 내려쳐 온다.

빠르게, 몇 번 발을 놀려서야 간신히 발톱의 사정거리에서 비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피한 줄 알았던 공격의 여파가 은비의 왼팔에 작은 자상(刺傷)을 남겼다. 피가, 주르륵 흘러 팔뚝을 적셨다.

“치잇.”

검세를 약간 낮추었다. 좀더 기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확실한건 여기서 이 늑대(이젠 늑대 인간인가?)를 막지 못한다면, 뒤에 남아있을 불여우만이 대성을 지킬 유일한 방어선이라는 것이다.

“그런 믿음직스럽지 못한 방어선 따위에….”

-부우웅!

이격이 날아온다. 은비는 잠시 낮추었던 검세를, 한껏 들어 올렸다. 중검과 쾌검을 넘어서 그 다음의, 환검(幻劍)의 식(式)이 펼쳐졌다.

“대성을 맡길 수는 없지!”

 


초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평범한 사람조차도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로 강렬한 요기와, 살기가 과하게 버무려진 투기. 그리고 마력의 온갖 이질(異質)의 기운이, 포스터로 인해 바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려진 윈도우 너머로 아주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본래 여우 요괴란 장난이 심하지만 본성이 모질지 못해서, 남을 확실히 해칠 수 있는 기술을 대부분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다만 적지 않은 요력으로 상대를 골탕 먹이고 도망치는 일을 좋아할 뿐이었다.

여우요괴, 지금은 변신(變身)으로 작고 예쁘장한 소녀가 돼 버린(…) 초계는 여전히 책꽂이 앞에서 마음에 드는 책이라도 골랐는지 서서 책읽기에 여념이 없는 대성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좀 전 까지만 해도, 북적거리지는 않지만 한두 명씩 들리던 손님들도, 심지어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주인조차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이 현실이 아닌 공간에 남겨진 인물이라고는 자신과 대성, 그리고 그 여자인간 정도였지만, 책에 얼마나 열중하고 있는 건지 대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속 책장을 넘길 뿐이었다.

-쿠구구….

문득, 윈도우 너머로 은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땅에 약간의 진동이 일었다. 오싹한 이질의 힘들이 스며든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슨 일이지’라고 생각 할 법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역시나 요지부동.

초계는 다시 그런 대성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꺼운 안경으로, 대성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비쳐 보였다.

초계는 대성의 눈동자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다가, 문득 초계는 대성의 눈동자를 직접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은 마음의 창. 지금도 포근히 느껴지는 영혼의 향기에 취해 있는데, 그 눈동자는 얼마나 깨끗하고 맑을지.

초계는 조심스럽게 대성의 옆으로 돌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성의 안경 너머를 바라보려 애썼다.

하지만, 처음에도 그랬듯이 대성의 안경은 그 너머의 눈동자를 ‘어떤 외부의 힘’으로부터 완벽하게 지켜내고 있었다.

“칫….”

“음?”

약간 삐져서 흥, 하고 내뱉은 소리에 대성이 반응을 보였다. 대성은 무슨 일인지 싶어 초계를 내려 보다가, 반쯤 부풀어 오른 불에 슬며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 미안. 미안. 너무 몰입 했나…. 정말 미안해. 지루했어?”

초계는 자신에게 사과해오는 대성을 어색하게 회피했다.

아, 얼굴이 너무 가깝잖아…!

고개를 도리질 치는 초계의 볼은 은은히 홍조를 띄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런 게…. 매번 안경 때문에 눈을 직접 본적이 없어서….”

말하고도 부끄러운지, 초계는 팔을 배배 꼬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대성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초계의 머리에 얹었다.

“앗….”

낮은 탄성. 순식간에 다가오는 따스함에, 초계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위에서부터 차가움을 씻어 내리는 포근함.

대성은, 문득 허락 없이 머리를 만졌다는 것에 미안함을 느끼며 손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새 초계의 작은 두 손이 다가와 대성의 손 위에 자신의 두 손을 얹어 버렸다.

마치 즐기는 듯한 소녀의 표정에 대성은 장난스럽게 손으로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그리고는 빙긋 웃어 버렸다.

초계 역시 문득 정신이 들고 마주하는 대성의 웃음을 맞받아 주었다.

-쿠르릉….

다시 한번 바깥에서부터 울리는 진동. 대성은 그제야 옆에 은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비활은?”

대성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은비 뿐 아니라, 책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깨닫기 전에 초계는 대성의 팔을 죽 잡아 당겼다.

“으응, 그 언니는 잠깐 바람 쐬러 나간다고 했어요. 여기 있으면 돌아온다고….”

“뭐? 아아. 너무 지루했나. 미안, 너한테도 그렇고. 나가봐야 하겠는 걸?”

밖으로 향하려는 대성의 발길을, 초계가 다시 붙잡았다.

“에, 그러니까… 마실 거라도 사온다고 했으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예?”

“하지만….”

대성은 말꼬리를 흐렸다. 주인도 없고, 이래서야 책도 빌릴 수 없다. 여기서 계속 서서 읽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초계는 대성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고는,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려는 대성의 발목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조금은 과한 반응에, 대성이 의문을 품으려고 하는 찰나에….

-챙그랑!

포스터가 마치 벽지처럼 발라져 있는, 보통 사람이라면 맨손으로 깰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튼튼한 윈도우를 가냘픈 몸매의 인간이 뚫고 책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체동??, 청람靑藍

 

 

 

 


“으윽!”

바닥에 널브러진 은비는 약한 신음소리를 내었다. 옆구리에서부터 움찔거리며 올라오는 통증이 정신을 사납게 만들고 있었다. 손에 쥔 검을 바닥에 찍고, 지팡이 삼아 간신이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움찔, 옆구리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이전에 다친 상처가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를 하고 있었다. 통증으로 인해 아찔한 정신을 필사적으로 가다듬었다.

“어디까지 날라 온 거지….”

흐려지는 시선을 가다듬자 은비를 둘러싼 배경이 뚜렷해졌다. 널브러진 책, 비디오, DVD….

“책방?”

“비활아?”

아차, 하는 순간에 뒤에서 들려온 대성의 목소리. 은비는 눈을 다시 한번 질끈 감았다. 은비의 노란 눈동자가 순식간에 빛을 잃고 검어졌다.

“대, 대성아….”

“어떻게 된 거야? 너, 그 상처는 뭐야?”

다가가려는 대성의 소매를, 초계가 꾹, 잡았다.

“왜 그래?”

초계는 말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 대성의 앞에 섰다.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죄송해요. 지금은 몸을 숨겨주세요.”

“뭐?”

“더 싸울 수 있겠어, 인간여자? 정 안되면 바톤 터치라도?”

초계는 대성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은비를 향해 말했다. 약간 위화감이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분위기상 대성은 반쯤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흥. 절대 대성 이한테 손도 못 대게 할 테니까!”

도대체 무엇에서부터? 무엇을? 대성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비활이가 왜 칼을 들고 있는 거지? 상처는? 초계는 여기에 대해 뭘 아는 거지?

대성은 생각이 길어졌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은비의 눈동자가, 순간 노랗게 빛났다.

-투콱!

입구 부분의 천정이 폭발하듯 먼지를 떨어뜨렸다. 먼지 덩어리는 은비의 바로 위로 떨어져 내렸다.

 


폭발과 동시에 초계는 또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내뻗은 오른손에서 희미한 빛이 어리고, 그 빛은 순식간에 방어의 의미를 품은 진을 그려 내었다.

-콰드득!

밀려오는 충격파, 그리고 휘몰아치는 날카로운 살기. 초계는 후들거리는 오른팔을 왼팔로 부축했다.

-쿠우웅!

다시 한번 울리는 육중한 충격음. 이번에는 멀리서가 아니라, 바로 앞. 초계는 다시 한 겹, 방어 막을 둘렀다.

-화악!

2파. 방어 막을 지탱하는 팔이, 저릿할 정도의 위력이 휘몰아쳤다. 어느새 뒤로 밀렸는지, 초계의 어깨가 턱, 하고 대성의 가슴에 닿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괜찮아?”

대성도 바보가 아닌 이상, 초계가 무엇인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초계를 중심으로 좌우에 위치했던 책은 이미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의해 잘게 짓이겨 허공에 흩뿌려지고 있었고, 바닥은 메마른 논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으니까.

초계는 등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에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더 밀리면, 뒤에 있는 대성이 다친다. 이 정도의 파괴력이면 오랫동안 이질(異質)을 접해온 요괴인 자신은 몰라도, 인간인 대성은 확실히 죽는다. 절대, 절대 이 이상 물러날 수 없었다.

초계는 약한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거센 바람에 맞서는 우둔한 나무처럼, 굳건히 대성의 앞에 섰다.

살기와 충격파 사이로 스며든 바람줄기가, 눈을 간질였다. 초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기필코 지키겠어.”

 


유린은 멀리서부터 폭발적으로 뻗어오는 요기(妖氣)에 몸을 움찔했다.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뿜어 나오는 요기의 종류는, 언젠가 한번 경험해 보았던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최근….

“대성이가 위험한건가.”

유린은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씹었다. 초조해지면 손톱을 씹는 버릇은, 유린이 옛날부터 그렇게 고치려고 애썼지만 여전히 튀어나오는 버릇이었다.

“익, 또 씹었잖아. 이러다가 손톱 못생겨 지겠다.”

태연하게 말하면서도 유린의 손에는 어느새 붉은 빛으로 반짝이는 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거리는 제법 멀었다. 도대체 얼마나 길을 잘못 들었는지는 몰랐지만, 만일 은비가 그 쪽으로 가 있다면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유린은 어제 은비의 치명상을 떠올렸다.

“안돼….”

아직 상처도 다 낫지 않았을 텐데…!

다급해진 마음만큼, 유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한참을 달려서야 유린은 결계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결계의 겉 표면에 손을 대어 보았다. 주변에 아무 이상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결계의 경계에 정확히 서서, 결계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는 유린의 표정은 진지했다.

결계의 경계부분에 올린 손바닥에서, 미미한 진동이 울려왔다. 안쪽에서 휘몰아치는 마력과 요력이, 이 튼튼한 결계마저도 뚫고 뛰쳐나오려 하고 있었다.

“안돼…!”

붉은 구슬을 말아 쥔 손이 위로 들렸다. 주먹이 끝을 향하고, 다시 세차게 내려쳐진다. 동시에 유린의 입에서 마법(魔法)의 시동(始動)되는 단어가 흘러 나왔다.

“Gun of the Shot!"

-콰앙!

해지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면, 남아있는 방법은 단순하다. 자신같이 보조마법에 문외한에 가까운 마법사는, 오로지 마력으로 부딪힐 뿐이다. 폭발이 일었지만, 결계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다시 손이 들리고, 내려쳐진다.

“Strike!"

-콰앙!

“My Fist!"

-콰앙!

“On the Obstacle!"

-콰아아앙!

외부의 이질적 충격으로부터 완고히 버티던 결계가, 그제야 사람 한명이 들어갈 수 있을 법한 구멍이 뚫렸다. 여러 번의 폭발음에 주위를 돌아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유린은 이미 오른손의 흥건한 피를 훔치며 결계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악! 하악!”

언제나 굳건히 쥐여있던 검이 힘없이 늘어졌다. 그 검만큼이나 은비의 몸 역시 온 몸의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채 십여 분도 되지 않는 격전에 이미 대부분의 마력을 쏟아 부어버린 은비는 이 이상 전투를 속행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중검(中劍)과 쾌검(快劍)을 기반으로 한, 익숙지는 않지만 더욱 강력한 환검(幻劍)의 식이 은비의 마력을 순식간에 갉아먹고 있었다. 거기에, 어제의 전투에 치료되지 않은 상처와 이 몇 십 분의 전투로 입은 상처에 의해 누적된 피로는 이미 한계치를 넘고 있었다.

하지만 무리하게 환검을 이끌어낸 덕분인지, 마주하고 있는 늑대인간의 상태 역시 크게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흰색 깃털과 반짝이는 요기를 머금은 흰색 갈기는, 이미 반쯤 피로 얼룩져 있었고, 늑대머리 역시 여기저기 자잘한 상처가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상처를 입고 지쳤음에도 늑대의 발톱과 은비의 검은 여전히 무서울 정도로 섬뜩한 예광을 잃지 않았다.

“환검(幻劍).”

다시 한번, 은비는 환검의 식을 취했다. 그 모습에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늑대 인간 역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발톱을 세웠다. 발톱에, 검은 안개와도 같은 요력이 흘렀다.

“은하(銀河)…!

-번쩍!

분명 낮임에도, 결계의 영향인지 어두컴컴하기 그지없는 이곳에 눈부시게 환한 빛이 피어올랐다. 은비의 양손에 거머쥔 검에서, 빛으로 형상화된 검기가 솟아났다. 순식간에 수십, 수백 개로 범람한 검기는 치명적일 정도로 날카로운 살기를 품고 마치 세차게 내려치는 폭포수처럼 늑대인간에게 휘몰아쳤다.

“쿠오오오오오오!”

그 범람(氾濫)의 정면에서, 늑대는 하늘을 향해 긴 울음소리를 목청껏 뽑아내었다.

-콰아아악!

검기가 지면을 꿰뚫는 둔탁한 울림. 은비는 멈추지 않고 다시 한번 검을 허공에 치켜들었다.

“어디 견딜 수 있으면 견뎌봐!”

-쿠와악!

채 검기의 빛무리가 가시기 전에 다시 한번 쏟아지는 검기의 물결. 두 번째 물결에 이은 세 번째 물결까지 뽑아낸 은비는, 그게 마지막이었다는 듯이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충격에 의해 일제히 하늘로 솟구친 먼지가,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은비는 잔뜩 지친 한숨을 연신 뿜어내며, 그 안개 너머를 꿰뚫으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아연실색하여 중얼거렸다.

“말도 안돼…?”

“크르륵….”

이성이 주체할 수 있는 한계 너머까지 요력이 폭사했는지, 이미 살기와 투기로 범벅되어 있던 눈동자는 희게 까뒤집어져 있었고, 반쯤 벌린 입에서는 끈적거리는 침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하지만 치솟아 오르는 요기가 부풀리는 늑대의 갈기는 마치 고슴도치처럼 빳빳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 은비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저 옛날. 자신의 가족 역시 그렇게 살해당했으므로….

그때, 늑대의 얼굴이 은비 옆으로 슬쩍 돌아갔다. 그리고 들려오는 발자국소리. 대성 이와 초계의 발자국 소리임이 분명했다. 늑대는 그 소리를 따라 오른발을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었다.

-쿵!

거대해진 늑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콘크리트가 풀썩, 내려앉았다. 은비는 비명처럼 외쳤다.

“대성아 도망쳐!”

늑대의 손이 올라가고, 요기로 똘똘 뭉친 검은 발톱이 전보다 두 배도 넘게 길어졌다. 늑대가 허공을 날랐다.

 


초계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저 인간 여자가 이기게 되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대성에게 이미 들켜버린 데야, 이렇게 도망치기도 힘든 책방 구석에 숨어 있다가 인간여자가 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대성은 꼼짝없이 죽고 말 것이다. 절대, 그런 일만은 벌어져서는 안되었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요. 예?”

초계는 대성의 옷자락을 세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조금 전, 휘몰아친 폭발음과 번뜩인 검, 그리고 발톱.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설명은 나중에 해드릴게요. 일단 도망쳐요, 제발!”

초계는 애원하듯 말했다. 대성을 올려다보는 초계의 눈동자에 작은 이슬이 맺혔다.

“제발!”

“저 괴물….”

그제야 대성의 입이 열렸다.

“나를 노리고 온 거야?”

“그건…!”

초계는 대답을 망설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초계의 잡아당김에, 대성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가까이서 충돌음이 일어났다.

-카드득!

-콰앙!

자욱한 먼지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와 작은 인영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고, 그 배경음으로 또 한번 폭발음이 울렸다.

-쿠웅

“비활은… 아니야. 그래, 네 말대로 일단 도망가자.”

대성은 초계의 이끌림에 따라 먼지 사이를 달렸다. 달리는 방향의 반대쪽에서 이번에는 눈부신 빛이 뻗어 나왔다. 자연히, 대성과 초계의 시선이 향한다. 초계의 손이 대성을 이끌고,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대성은 밀려드는 충격파에 몇 걸음 뒤로 물러서야 했다. 다시 재촉하는 초계의 작은 손에 이끌려, 발걸음을 빨리한다. 다시 두 번에 걸쳐 펼쳐지는 빛의 향연과, 울렁이듯 퍼지는 충격파. 그 바람에, 대성은 그만 초계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야….”

초계가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초계는 충격이 가해진 건지 멍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지만, 뒤에서 내리누르는 묵직함에 다시 내려앉았다. 힘들게 고개를 비틀어, 위를 보니 대성이 초계의 바로 위에 덮치듯 감싸 앉고 있었다.

“으윽…. 어어? 꺅!

힘들게 대성의 품에서 빠져나온 초계는, 대성의 등을 보고 작은 비명을 질렀다. 세차게 날아오는 파편이 대성의 등에 서너 개가 박혀 핏물을 뽑아내고 있었다. 그 핏물에, 이미 대성의 등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아아…! 조, 조금만 참아요, 대성님!”

초계는 양 손을 겹쳐 모아 대성의 등에 바짝 대고는, 치료의 능력을 가진 요력을 일으키려 했다.

-후욱!

어느새 초계와 대성의 앞에 나타난 늑대가 흉측한 발톱을 후려쳤다. 막 치유를 위해 막대한 요력을 뿜어내려던 초계는 그 요력을 온전히 방어 식으로 돌렸다.

-카드드득!

늑대의 발톱이· 초계 코앞을 스쳐 콘크리트 바닥에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비스듬히 세워진 방어막이 발톱에 의해 요란한 불꽃을 튕겨 내었다.

초계는, 다시 한번 모든 요력을 동원해 더욱 두터운 방어 식을 세우려 했지만 처음 내려친 반대쪽 발톱이 사정없이 방어식 위를 내려 쳤다.

-콰드득!

두 번째 공격은 간신히 막아냈지만, 방어 식은 형편없이 무너져 내렸다. 초계는 그 짧은 틈에 간신히 두 번째 방어 식을 열었지만, 또 다시 후려치는 발톱에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조금만…!”

세 번째, 네 번째. 방어 식을 세우고, 찢어내는 동작이 다섯 번에 걸쳐 반복 되었을 때, 늑대는 발톱 대신 이빨을 들이밀었다. 방어식이 막 찢어진 상태에 다음 방어 식을 짜느라 무방비 상태가 된 초계의 가냘픈 상반신이 이빨 앞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죽음을 직감한 것일까. 초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리감긴 눈꺼풀 위로, 대성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가슴속에 스쳐 지나가는 온기.

여기서 죽으면, 대성님은 어떻게 되는 거지….

-콰드득!

아주 딱딱한 무엇인가가, 잘게 씹히는 소리. 초계는 잠시 동안 그것이 자신의 몸뚱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참 눈을 감고 있어도 통증이 밀려오지 않자, 내심 이미 죽어버린 게 아닐까, 라고까지 생각해 버렸다. 지금 자신, 여우요괴의 영혼에 치미는 따스함을, 다시는 느끼지 못할 거라는 데에 아쉬움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런데 따스함?

“괜…찮아?”

약간의 신음성이 섞인 목소리. 초계는 그 목소리에 움찔, 반응하며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최근에 은비 말고는 아무에게도 들어내지 않았던 눈동자가, 초계의 정면을 향해 있었다.

검은 눈 뒤로 비치는 시릴 정도로 맑은 영혼에 초계는 푹, 빠져버렸다.

“어… 아….”

심각한 상황임을 망각한 초계는 반쯤 벌린 입으로, 의미 없는 소리를 내었다.

“초계야? 괜찮아?”

초계의 몸을 안고 늑대의 이빨을 피해 몸을 날린 대성은, 초계를 안아 몸을 힘들게 일으키며 물었다. 작은 초계의 몸은 대성의 품에 꼭 들어왔다. 대성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초계의 몸을 안고, 늑대를 피해 달아나려 마음먹었다.

-투곽!

하지만, 채 두 걸음 내딛기 전에 등 뒤에서 터져 나오는 충격파에 다시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초계를 안고 있어서 등 뒤부터 넘어진 대성은, 좀 전에 다친 상처에서 찌릿, 하고 올라오는 통증에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아픔에 내리감았던 눈꺼풀을 슬쩍 들어올리자, 대성은 자신 바로 앞에서 발톱을 치켜드는 늑대인간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손이 높게 들리고, 대성은 그 마지막 모습을 담아내려는 듯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리고 늑대의 희게 까뒤집은 눈과 마주쳤다.

-움찔

늑대의 발톱아 막 내려쳐지려는 찰나, 늑대의 몸 전체가 부르르 떨었다. 대성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 늑대의 흰자위가, 천천히 제 색을 되찾았다.

“크르르르!”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 하지만, 그것은 대성이 못 알아듣는다는 것이지, 마법사들조차 못 알아듣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뜻으로 만물에 통하는 언어. 깨우치지 못한 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잠시 멈추었던 발톱이, 다시 한껏 젖혀진다. 그리고….

 


“너로군. 그 영혼을… 가져가주마!”

한껏 마력을 돋우고 있던 유린은, 귓가에 들려오는 ‘언어’에 다급함을 느꼈다. 저 늑대는, 분명 대성을 죽일 것이다. 사실, 유린에게 대성이 죽든 말든 크게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일단 자신도 마법사인 지라 요괴에게서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대의명분과 함께 바닥에 몸을 뉘인 채로도 ‘대성아!’를 중얼거리는 자신의 친우, 은비를 위해서라도 저 늑대를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릴 필요성이 있었다.

이미 임계점까지 치솟은 마력은, 시전자의 가공만을 남겨 놓은 채 허공에 너울거리고 있었다. 유린은 양 옆으로 벌리고 있는 양 손을 좁혀, 수인을 맺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뛰어난 검사인 은비의 파트너인 만큼, 유린 자신 역시 수준급 이상의 마법사였다. 그런 마법사가 시동어가 아닌 수인으로 가공Cast 하는 마법이, 평범한 파괴력일리는 없었다. 늑대 녀석의 발톱이 내려쳐지려는 찰나, 유린은 목청껏 외쳤다.

“야이 늑대 녀석아!”

마법의 도움을 받은 유린의 목소리는 주변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컸다. 조금 전까지의 광기 가득한 늑대였다면 반응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무엇에 정신을 차린 건지 발톱을 멈추고 유린 쪽을 바라보았다.

“이거나 드시지! Duel Guided Missile!”

-피잇!

얇은, 하지만 강력한 두개의 빛줄기가 옥상의 유린에게서부터 늑대를 향해 내리 꽂혔다. 약간의 차이를 두고 날아오는 미사일의 첫 번째는 발톱으로 갈라내었지만, 두 번째는 쳐내지 못하고 자리에서 이탈했다.

-쾅! 콰앙!

마법탄환 두개가 바닥에 꽂히며, 요란한 폭발음을 내었다. 다시 한번 유린의 손가락이 허공을 맴돌다 늑대를 향했다. 허공에 충만하게 너울거리는 마력 중 일부가 유린의 손가락질에 뽑혀, 가공Cast되어 물리력으로 구현embody된 마법이 허공을 날았다.

“Sniping!”

-찌잉!

공기를 가파르게 울리며 날아가는 세 번째 탄환이, 허공에서 막 착지하려던 늑대의 왼쪽 허벅지를 꿰뚫었다. 분명 치명타는 아니었지만, 늑대의 움직임을 잠시 봉할 정도의 시간을 벌 수는 있었다.

유린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양 손이 늑대를 향하고, 마법의 언이 외어지고, 그리고 비 실체의 마력이 마법으로서 실체화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Earth…!"

늑대가 내딛은 땅을 중심으로, 널따란 원과 함께 복잡한 도형이 새겨졌다. 그것은 일제히 붉은 빛을 머금고, 허공에 마법의 언어를 비춰 내었다. 늑대가 채 마법 진을 벗어나기 전에, 유린의 손은 주먹을 쥐었다.

“Spike!"

-콰지지직!

평평했을 땅이, 일제히 치솟는다.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창이 되어, 허공을 향해 맹렬히 날아올랐다. 늑대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돌의 창날 안에서 팔과 다리가, 그리고 몸이 꿰뚫렸다. 하지만 회복이 어려운 것은 아니리라. 늑대는 허공을 향해 주둥아리를 벌려 음산한 울음소리를 뿜어내었다.

“우우우우!”

“시끄러워, 이 여자 울리는 늑대야!”

유린은 의미 불명의 말을 뱉으며 마지막 남은 마력 모두를 짜내어, 치명타를 준비했다.

“어두운 하늘을 가르는 빛줄기여!”

유린의 양손과 시선이 하늘을 향한다.

“찰나와 억겁의 시간을 잇는 순간이여!”

시동어와 수인에 이어, 주문의 영창에 이른다.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고, 그 어느 것 보다 맹렬히 흐르는 뇌신의 힘을 비나니!”

결계에 의해 흑회색으로 채색된 허공에, 마치 태양을 대신하듯 붉게 작열하는 마법진이 천천히 그려졌다. 감히 좌시할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마력이 자신을 뽐내듯 허공에서, 지면을 향해 눈부신 빛을 뿌려 대었다.

“나, 작열의 마법사 정유린이 여기에 당신을 부르도다!”

자연에 시동어를 던져 마력을 이끌어낸다. 흐르는 마력을 수인으로서 붙잡고, 고정된 마력을 주문으로서 구체화 시킨다. 이것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마법의 발동(發動).

“Call Lightning!"

-번쩍!

 


시간을 집어삼키는 빛줄기. 그 잠시의 번쩍임 속에 숨겨진 억겁. 분명 찰나임에도, 그것이 떨어진 곳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압력(壓力)은 영원.

주변에 있는 모든 인물은, 그것이 너무 가까워서 허공을 찢어발기는 충격음조차, 이미 지나간 뒤. 따라서 듣지 못한다. 멍멍한 귀를 애써 회복하고는, 은비는 번개가 낙하한 지점에 시선을 두었다.

-파즈즉!

잔류한 전기가 허공을 태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망막에 어린 빛의 잔상이 거두어지자, 그 곳에는 요력도, 부풀어진 몸도 간데없는 평범한 늑대 한 마리가 남아 있었다. 회색 털도, 흰색 갈기도 여기저기 시커멓게 그을렸지만, 상태는 비교적 좋아 보였다.

“….”

은비는 아직 놓치지 않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검은 손에 붙들려 용케 놓치지만 않고 있을 뿐, 더 이상 휘두를 기력 따위 남아있지 못했다.

늑대는 고개를 들어 경악에 휩싸인 유린을 바라보았다. 유린은, 움찔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주변의 마력이란 마력은 모조리 끌어 써버린 바람에, 아주 간단한 방위(防衛)마법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발동시키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대단하군.”

늑대가 입을 열었다.

“이천년 동안, 나를 이렇게 몰아붙인 마법사들은 너희 둘이 처음이었다.”

이천년. 은비와 유린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흘러들어온 이름 있는, 그래서 좀 강한 요괴이거니 싶었지만, 이천년이라니. 그 세월이 가진 의미는 결코 녹록치 못했다.

“오늘은 물러가지만, 저 소년의 영혼은 기필코 가져가겠다.”

뒤로 돌아서는 초췌한 몰골의 늑대를, 그 누구도 막아서지 못했다.

“그리고, 이건 선물이다. 어디 한번 저 소년을 끝까지 지켜봐라.”

늑대는 고개를 허공으로 치켜들고, 그 특유의 울음소리를 뽑아내었다.

“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요력을 담아 길게, 길게 내뿜어지는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 은비와 유린은 순간 몸이 오싹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 가파른 울음소리에 멍한 상태에서 깨어난 초계는 얼굴을 붉히며 기절한 대성의 품에서 떨어졌다. 늑대는 사라졌고, 가슴을 쓸어내린 은비와 유린은 대성에게로 다가갔다.

“이 상처….”

은비는 대성의 등에 흥건한 핏자국을 보며 작은 탄성을 내었다.

“미안….”

고개를 푹 숙인 초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은비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억지로 들어 대성의 볼에 손을 대었다. 안경은 깨어졌는지 맨 얼굴이 들어나 있었다. 하지만 기절해 있는데야 눈동자가 보일 리가 없다. 묘한 아쉬움, 그리고 안타까움. 은비는 유린을 돌아보았다.

“쳇. 알았어. 치료할게. 나는 치료 전문이 아닌데….”

유린은 투덜거리면서 대성의 등에 밝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손을 올렸다. 출혈이 멎고, 치료가 시작되었다.

초계는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인 채 대성이 치료받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결국,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초계의 안타까움이 반영되어서인지, 작은 귀와 꼬리가 축 처진 채 살랑거렸다.

“응?”

은비는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고 초계를 돌아보았다. 초계의 금발머리 위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모직치마 아래로, 금갈 색 털이 뒤덮인 여우귀와 꼬리가 드러나 있었다.

“너 어째서 변신이?”

“우웅. 한껏 요력을 사용한데다, 좀 전의 늑대요괴가 내지른 귀곡성(鬼哭聲) 때문이야.”

약간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 이번엔 유린이 물었다.

“귀곡성? 그 마지막 울음소리?”

“으응. 그건 주위의 모든 요괴에게 내는 일종의 신호 같은 거야. 좀 전의 의미는, 여기 사냥감이 있으니 마음껏 사냥해 보아라, 정도.”

“그럼….”

“일단 벗어나야 돼. 여기서 이탈한다 하더라도 잡귀들이 계속 쫓아오겠지만, 아마 이 자리에 그대로 있다간 이 근처의 모든 요괴가 다 튀어나올 거야.”

은비와 유린의 시선이 마주치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 치료된 대성을 은비와 유린이 부축하며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결계가 천천히 사라지고, 초겨울의 따사로운 햇살이 폐허가 된 대로를 비추었다.

 

 

 

 


체동??, 자주紫朱

 

 

 

 


단 하루만에, 가을의 날씨가 한층 더 차가워진 느낌이다, 라고 대성은 생각했다. 등굣길의 밤나무에는, 이젠 거의 밤송이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마도 주말 사이에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몽땅 따 간 것이겠지.

가을 들어 처음 꺼내 입은 검정 코트 사이로 차가운 가을바람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대성은 코트를 조금 더 여몄다. 올해 가을은, 전해 보다 부쩍 일찍 추워진 것 같았다.

“그래도, 춥다는 것이지….”

대성은 아직도 등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통증이 왠지 낯설었다. 유린의 말로는 깨끗이 나았다지만, 그게 더 믿기 힘든 사실이란 건 부정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정확히 3일전의 이 시간과 다를 바 없는 풍경. 긴 가로수의 등굣길, 하얀 입김을 뿜으며 걸어가는 학생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대성, 자신의 손에 소설책이 들리지 않았다는 것일 뿐.

대성의 가방은 오랜만에 매우 가벼웠다. 어제의 일 덕분에, 늘 상 첫 주말이면 소설책으로 그득하던 그의 가방이 텅 비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대성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아침에 초계에게서 받은 작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찬 공기가 주머니 안까지는 미치지 않는 것인지, 그 작은 주머니를 쥔 손은 따뜻했다.

 

 

 

 


제대로 혼자서 서서 걷지도 못하는 은비를 부축한 유린은, 설명을 요구하는 대성을 무표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피가 스며 나오는 은비의 옆구리를 한쪽 손으로 꽉 압박한 유린은 별로 능숙하지 못한 치료마술을 발동시키며 초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요괴나 자신이나, 지금 대성에게 이질(異質)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침묵을 지키며, 서로가 맡은 환자를 치료한다. 유린은 은비를, 초계는 대성을.

그 조용함에 대성은 문득 짜증을 느끼며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초계는 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손을 대성의 등에 살며시 가져다 대고 있었다. 대성은 등 뒤로 느껴지는 온기에 마음을 놓으면서도, 점점 사라져가는 통증에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성 자신이, 아무리 판타지 소설을 즐겨 읽는다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소설. 허구를 사실처럼 꾸며 쓴 것에 불과한 글 조각들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눈에 닥친 것은 현실. 허구가 아닌, 진짜 현실 속에서 벌어진 말 그대로의 ‘판타지’적인 사건에 평범한 사람이 궁금증을 느끼지 않으면 그것이야 말로 환상일 것이다.

다시 이어지려고 하는 긴 침묵을, 대성이 깨트렸다.

“좋아. 설명하지 않는다면 추궁하지는 않겠어. 설명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면, 내가 더 이상 아무리 언성을 높여봐야 소용이 없겠지.”

의외로 빠른 포기에, 오히려 당혹감을 느낀 것은 초계와 유린 쪽이었다. 유린은 정신을 잃어버린 은비를 추스르며 말했다.

“미안. 네 말이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우리가 경계하는 수준 이전까지는 말해 줄 수 있겠지. 거기에 대한 설명은, 나보다 저 여우가 더 말 잘해 줄 거야. 나는 은비를 집으로 데려가서 치료해야겠어. 아마, 내일 하루정도는 꼬박 치료해야 할 테니까.”

그 말만 남기고 유린은 사라졌다.

골목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있는 대성은 한 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초계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초계의 어깨가 살짝 움찔, 하고 떨렸다. 대성은 안경을 벗어 약간 휘어진 다리를 매만지고 다시 착용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약간의 한숨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말이다. 초계는 다시 안경을 착용하는 대성에게서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요력을 집중했던 손을 대성의 등에서 떼었다.

“자, 이제”

대성이 말했다.

“설명해 줄 수 있는 데 까지 해줄래?”

좀 전보다 더욱 차분해진 목소리. 싸늘한 날씨임에 가슴속에 퍼지는 따스함을 즐기면서도, 대성의 내부에서 점점 차갑게 가라앉은 이성에 긴장해야 했다.

“예. 가능한 한.”

은비는 대성의 등 뒤에서 앞으로 나와 길바닥에 가지런히 무릎을 꿇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꼭… 평생 동안 비밀로 지키셔야 해요.”

“응.”

“또한, 제가 할 이야기들은 한 치의 왜곡도 없는 진실이여요. 물론, 제가 아는 한도에서요. 그리고 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대성님이 알고계신 세계관과 어긋날 수도 있어요. 그래서 받아들이지 못하신다 하더라도 저는 두 번 설명할 수 없어요.”

“응.”

간단한 대답. 하지만, 그것에 진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초계는 안경 너머로 살며시 비치는 대성의 눈동자를 바라보려 애쓰다가, 결국 포기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한 가지 고백할게 있어요.”

잠시 뜸을 들인 초계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는 ‘인간’이 아니에요.”

“알고 있어.”

초계는 반쯤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떻게…?”

그 격렬한 반응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대성이었다.

“으, 응. 그게, 너나 비활이나 보통 사람이 겪을법한 상황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인간이 아니라고 한건데….”

대성의 말에, 초계는 맥 빠진 표정을 지어보였다. 초계는 탐스러운 금발 머리끝을 양손으로 꾹꾹 잡아당기면서,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그 여자는, 분명히 인간이에요. 제 말은….”

초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한 호흡 내쉬고, 다시 긴장된 눈을 들어 대성을 똑바로 바라본다.

…이제까지는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마음을 둔 것에서부터 거부당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초계의 입술을 망설이게 하고 있었다. 잠시의 머뭇거림으로 용기를 낸 초계는 왼손을 가슴에 얹고, 대성의 얼굴을 곧게 쳐다보았다.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저는 인간의 모습을 잠시 빌린, 여우일 뿐이에요.”

“여우?”

대성은 반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학교를 향해, 자신의 교실을 향해, 자신의 자리에 앉는 것. 평소라면 이런 것에 의미를 부여할 리가 없는 그런 단순한 행동 중에, 대성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 ‘보였다.’

이것이 초계가 말한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걸까나.

대성은 작게 중얼거리며, 가방을 의자에 걸고 시선을 창 밖으로 두었다. 평소에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구덩이조차, 알게 됨으로서 보인다. 이런 거….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게 속여져 왔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저 구덩이.”

갑자기 대성의 옆으로 다가온 유린이, 창문 밖에 대성의 시선이 향하는 구덩이를 향해 손가락을 폈다.

그 구덩이는 운동장 한쪽 구석에 사람의 키만 하게 패여 있는, 지름 3m정도의 구덩이인데, 비가 오는 날이면 빗물이 그득히 들어차는, 하지만 메울 엄두를 내지는 않고 있는 구덩이였다. 그 크기 때문에 공놀이를 하다가 공이 빠지기도 하지만, 아무도 불평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왜 저기에 구멍이 뚫려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으니까.”

“맞아. 그 여우한테 어느 정도는 들었구나.”

그 ‘여우’라는 단어에, 대성은 아직도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왼손이 움찔, 하고 작은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것. 그것이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이쪽 세계로 넘어오기 위한 키워드니까. 이쪽에 대해 듣는 것, 그 자체가.”

대성은 그제야 창문 밖을 향하던 시선을 유린에게 두었다.

말쑥한 키에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입은 유린은 짧은 단발머리 뒤로 넘겨 핀으로 고정시키며, 그녀의 흰 얼굴에 아무 표정을 입을 열었다.

“저 구덩이, 딱 1년 전이었지. 은비가 학교 학생 몇 명을 집어삼킨 녀석을 단칼에 운동장 구석에다 꼽아버렸던 게.”

“은비? 아, 비활….”

그제야 대성은 은비가 자리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리에 없는 것뿐이 아니라, 가방도, 외투도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책상. 학교에 나오지 않은 이유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은비가 어느 정도 상처를 치료하는데 하루. 그 늑대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야.”

유린은 뒤돌아서며 말을 이었다. 마침, 첫 교시 시작을 알리는 전자 벨이 시끄럽게 울리며, 유린의 말과 뒤섞였다.

“오늘 하루는 잔챙이들뿐이니, 알아서 살아나. 그 정도도 할 수 없다면, 나나 은비나 너를 그 늑대에게서부터 지켜낼 수 없을 테니까.”

“왜….”

종 울림이 끝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학생들이 자리에 하나 둘 앉기 시작한다. 그 소란스러움 사이로 대성이 질문했다.

“날 지키려고 하는 거지?”

아직 한번도 묻지 않았던, 그 무엇보다 가장 궁금했던 사실을, 그제야 대성은 입 밖으로 꺼냈다.

“우리가 지키는 것은 ‘너’가 아니야.”

대성의 질문에 잠시 멈춰 섰다가,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단지 우리는 숙명으로서 인류를 지키고자 하는 것일 뿐.”

“그래, 인류란 말이지.”

유린의 멀어지는 등을 대성은 힘없이 바라보았다.

 

 

 

 


가을답지 않은, 우중충한 먹구름이 그득한 하늘. 햇볕이 닿지 않는 대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곳에 도달할 여름을 고하는 듯 싸늘한 한기를 머금고 있었다. 회색 톤의 콘크리트와 시멘트, 보도블록이 어우러져 그 한기는 더욱 음산한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다.

여우 한 마리. 옥상에 앉아 멀리 하늘을 바라보는 여우는, 잠시 고개를 돌려 옆구리의 틀 사이를 헤집었다.

간질간질.

풍성한 금빛 털이 여우의 머리를 폭, 감싸 앉았다.

“역시 틀린가.”

여우는 다시 시선을 멀리 던졌다. 그 시선의 끝에는 밤나무로 둘러싸인 언덕 중턱에 위치한 청신(淸新)고등학교가 닿아 있었다. 여우가 휘익 둘러본 장소 하나 하나가, 그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니까.”

네 다리로 곧게 선 여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 금빛 털 만큼 화려한 금빛의 요기가 살며시 일어, 여우가 서 있는 옥상의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흠집을 남겼다. 그 흠집이 하나, 둘 늘어나자 그것은 흠집이라기보다 그림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 있었다. 마치, 하늘의 별을 형상화 한 듯한 무늬가, 멋들어지게 바닥에 새겨졌다. 그 그림은 여우의 털을 닮은, 환하지만 차가운 금빛을 머금고 있었다.

여우, 초계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 다음 장소로 향했다. 작은 몸집에서 나온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점프력으로 옆 건물로 뛰어오른 초계는, 털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에 몸을 한차례 떨며 단 한번 마주했던 대성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따뜻했는데….”

작은 중얼거림을 남기고, 여우는 빠르게 네 발을 놀렸다.

 

 

 

 


지금은 수업시간. 대성은 가만히 앉아 칠판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의 나날이라면 당당하게도 소설책을 펴 놓고 독서에 심취할 그이지만, 당장에 빌려온 소설책이 하나도 없다는 게, 그리고 비어있는 옆자리가 신경 쓰여 무언가를 할 겨를이 생겨나지 않았다.

그 때, 칠판과 대성의 사이에 희끄무리한 연기 같은 것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멍하니 시선을 던지던 대성은, 순식간에 그 것에 초점을 모았다. 그 연기는 그 너머가 흐릿하게 비칠 정도로 진하게 모여들어,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대성을 향한 방향으로, 울렁거리며 기묘한 형상을 그려냈다.

-질끈!

대성은 눈을 꼭 감았다. 두터운 안경 너머로 보이는 기형(奇形)의 이물(異物)이, 아직은 익숙할 리가 없었다. 작은 주머니를 쥔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초계가 마지막으로 선물해준 이 ‘이질(異質)에서의 결(結)’이란 의미를 담은 주머니가 언제까지 제 기능을 해줄지 몰랐다.

오늘 오전 들어, 이런 안개 모양의 귀(鬼)만 벌써 열여덟 번째 보는 것이었다. 그 텀도,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아는 만큼.’

문득, 대성은 어제 저녁에 해준 초계의 이야기의 한 토막을 떠올렸다. 그래,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알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

그렇다면, 본 이후에는?

대성은 더 이상 생각하기 싫어졌다.

그리고 그 때, 점심시간을 알리는 차임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학생들이 우르르 일어나, 끼니를 때우기 위해 움직인다. 그 혼잡함 사이로, 흐릿해진 안개는 어지러이 날아가 버렸다.

대성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인가.”

초계는 새벽부터 시작한, 학교 주위를 한바퀴 돌면서 새기는 기묘한 무늬를 다시 한번 새기기 시작하면서 중얼거렸다. 이제까지 백 수십 번 해왔던 것처럼, 환하지만 차가운 금빛의 요기가 어리고, 느릿한 바람이 휘몰아친다. 거기에 날카롭게 형상화된 힘이 실려 여우가 선 바닥에 깊은 무늬를 그려낸다.

-움찔

마치 차가운 가을바람을 즐기는 듯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반쯤 내려감은 눈이 가늘게 떨렸다.

초계는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금빛의 환한 요기는 여전히 자신의 일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늑대…?”

“그때 그 여우인가.”

초계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흰 갈기를 바람에 날리는 회색 늑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제, 서로에게 살의를 품었던 그 늑대였다.

늑대는 힐긋, 여우가 새기는 문양을 쳐다보았다.

“결계(結界)인가. 이질과 현실의 분리라. 하는걸 보니 이 도시 전부를 감싸려는 모양이군.”

“….”

초계는 마지막 선을 그리고는 요기를 거두었다. 바닥의 무늬가 희미하게 금빛을 머금으며, 동작을 확인시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니까. 너를 막아서기엔, 나는 아직 어려.”

“…어차피 저 영혼은 오늘 중으로 내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다. 너희 여우와 나는 어차피 지향점이 다르니, 충돌은 피할 수 없겠지. 하지만 여우여,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이미 이천년간 저 영혼을 기다려왔다.”

“한번 마주친 것만으로도 폭주할 정도로?”

초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도 마찬가지지 않는가. 여우여. 나는 그 영혼을 만난 첫날에 이미 영혼을 투영하는 창, 눈동자를 보았다. 그때의 충동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수준이지.”

늑대의 시선은 학교를 향하고 있었다. 초계는 늑대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자세를 낮췄다.

“너를 이길 자신은 없어. 애초에 그렇게 살아가지도 않았으니까.”

“말했잖은가, 여우여. 너는 날 이길 수 없다. 설사 그것이 우연의 힘을 빌어 당위성을 파헤치고자 하더라도 말이다.”

“난 어려운 말은 몰라. 하지만, 이 늑대야, 네가 말했듯이 너, 늑대와 나, 여우가 지향하는 바는 틀리기 마련이지. 나는 그 옆에서 머무는 것  만으로도 족해. 영혼은 살아서 숨쉴 때가 더욱 아름다운 법이야!”

초계의 말은 처음은 잔잔히, 하지만 끝에 갈수록 격렬해졌다. 마지막에 이르러선 거의 외치는 수준으로 내뱉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지만 여우여. 아름다움은 그것을 취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무엇을 얻고자 함이냐. 너 역시 사람의 영혼을 취하지 않는가? 이제 와서 인간의 영혼에 용서를 구하고자 함인가?”

“흥. 꽃조차 피지 못할 잡초와 예쁜 꽃이 피어날 풀은 다른 법이지. 비록 아름다운 꽃은 꺾지 않는 게 예의라는 것은 알지만, 잡초를 밟으면 안 된다는 자상함까지는 기대하지 말아줘!”

자세를 낮춘 초계의 온 몸에서, 금빛 요기가 폭출(爆出)했다. 자그마했던 여우의 몸집이 뼈가 바스러지는 듯한 소리를 동반하며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그것은 풍성한 금빛 털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 아니라, 여우의 몸, 그 자체가 부피를 늘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금빛을 머금은 풍성한 꼬리가 부드러운 원을 그렸다. 그 원을 그리는 꼬리가, 마치 그림자를 끌고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두개로, 세 개로 늘어났다.

“내 앞에서 그를 해친다면, 나 역시 전력을 다해 너를 막아설 테니까!”

“그런가. 너의 진신(眞身)을 들어낼 정도로 의지가 강하다면, 구백년 요기를 상징하는 구미호(九尾狐)여. 나는 그대를 박살내리라!”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30층 높이의 아파트 꼭대기에서, 금빛 광휘(光輝)와 백색 기둥이 솟구쳤다.

 

 

 

 


-움찔

은비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기묘한 감각이 둔해진 신경 너머로 전해진다. 손목에 걸린 노란 구슬이 찌링찌링 시끄럽게 울렸다. 은비는 힘들게 눈꺼풀을 들었다. 이미 한낮인지 커튼 너머로 스며드는 햇빛은 충분히 눈부시게 방안을 밝히고 있었다.

작은 현기증을 이겨내고 몸을 일으킨 은비는 어제 저녁, 늑대가 떠나간 이후로부터의 기억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또한 자신이 오늘 하루는 반드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사실도. 외부의 상처와 골절은 유린의 마법으로 대부분 치료되었을 테지만, 고갈된 마력(魔力)은 반드시 휴식으로서 채워야 했다. 아니면, 저 요괴들처럼 이질의 힘을 갖춘 무언가를 섭취 한다든가. 그것은 요물일수도 있고, 다른 하급 요괴의 령(靈)일수도 있고, 인혼(人魂)일수도 있다.

은비는 고개를 몇 차례 흔들어 잡스러운 생각을 털어냈다. 온 몸에 힘이 없었다. 침대에서 나와 방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 자신이 깨어난 이유를 생각했다.

-찌링찌링

팔목에 매달린 구슬의 진동. 다시 한번 둔탁한 신경 너머로 전해지는 기묘한 감각.

“이건….”

거의 반나절 이상 잠들어 있어서 잔뜩 잠긴 목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보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은비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이 감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주 잠시 고민해 보았다.

익숙한데. 어디서 보았지? 어디서 겪었지? 이게 무얼 의미하는 거지?

해답은 금방 도출되었다.

늑대와 여우. 그것도 바로 어제. 보통은 상급 이상의 요괴끼리가 부딪히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여우는 사람으로 둔갑할 정도로 상급의 요괴. 늑대는 이천년을 살아온, 평범한 마법사가 어떻게 당해낼 도리가 없는 괴물. 따라서 이 둘이 부딪힌다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떠한 이해관계가 상충했다는 것.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대성이가 위험해!”

은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지만, 마력을 동원해 근육을 가속하려고 하는 동시에 찌릿, 하고 통증이 올라온다. 그 통증은 마력의 부족에서 오는 갈증과도 같은 것. 평범한 사람이 겪을 리도, 견딜 수 있을 리도 없는 휘몰아치는 마력의 소용돌이에 은비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으아아….”

은비는 흘러나오는 신음을 주워 삼키며, 이내 이를 악물었다. 천천히, 천천히.

마력 부족을 외치는 몸은 주변의 자잘한 마력들을 있는 대로 끌어 모아 흡수하려 하고 있었다.

마치,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모아 거대한 폭포수로 만들려는 것. 아무리 이질(異質)의 힘인 마력(魔力)이지만, 그 근본은 자연. 인식되지 못할 뿐이지, 이질과 동질은 종이 한 장 차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려는 행동을, 동질인 인간의 몸이 고통 없이 견뎌 내는 게 가능할리 없다.

은비는 다시 한번 거칠게 이를 갈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가까스로 흘러드는 마력을 조절한 은비는 비틀거리며 꿇어진 무릎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좀 전의 고통 속에 흘린 식은땀이, 어느새 옷을 흠뻑 적셔놓은 상태. 하지만 지금은 학교로 가야 할 때이다. 은비는 방구석,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들고 집 밖으로 나섰다. 차갑고 메마른 바람이 은비를 훑었다.

우중충한 하늘이, 은비의 마음을 더욱 시리게 비추었다.

 

 

 

 


점심시간을 앞둔 수업시간. 유린은 선생님이 칠판에 흰색 분필로 적어 내려가는 내용을 자신의 공책에 옮겨 적으면서도, 틈틈이 대성을 살펴보았다. 그의 주변에서 느껴지는 이질의 기운이 점점 더 강해지면서, 그 양이 위험 수위를 넘을 듯 말 듯 찰랑이는 게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이미 저 정도면, 대성은 령(靈)을 볼 수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용케도 저 상태로 버티는구나.

처음 그 안개 무리 같은 령을 보고 까무러쳤던 것을 기억해낸 유린은 쓰게 웃었다.

-출렁

그 짧은 웃음 사이에 대성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위험수위를 슬쩍 넘었다. 순간, 허공에 의미 없이 떠돌던 령의 잔재가 의지를 가지고 교실 한 가운데에서 모여 들었다. 유린의 목걸이가 찌릿, 하고 울렸다.

만약을 대비해 붉은 구슬을 손에 쥔 유린은 대성의 뒷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순간,

-찌링 찌링!

유린의 전신을 관통하는 요기의 흔적. 인간의 그릇과 그다지 어울리지 못하는 요기는 탐지해 내기도 힘들지만, 일단 탐지 가능할 정도 이상의 양이 느껴지면 그것은 마치 감전된 것과도 같은 기분이다. 유린의 시선이 창밖, 아파트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소까지 다다랐다.

“결계…?”

안과 밖을 차단하는 배타적 결계가 아닌, 결계 안에서 사용자가 원하는 효과를 끌어내는 결계. 그 내용은 동질과 이질의 분리. 요기의 주인은….

“여우요괴 인가.”

-딩동댕!

그 때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교실 한 가운데에서 위협적으로 몸집을 불리던 령은, 방금 전에 발동된 결계로 인해 동질에서 떨어져 나갔다. 마치 안개가 흩어지듯.

유린은 여우 요괴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이런 강력한 결계를… 그 조그만 여우가?”

-찌링 찌링!

다시 한번 붉은 구술이 짜릿한 경고음을 낸다. 유린의 시선이 다시 달려, 좀 전의 아파트 단지에 향했다. 거기에서, 그것에 대해 ‘아는’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금빛과 백색의 물결이 솟구쳤다. 하나는 여우요괴, 하나는 어제의 그 이천년 먹은 늑대.

“칫.”

유린은 학교에서 나와, 그 아파트 단지를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유린…? 어디가는거지?”

교실의 창문에서, 아직도 멍하니 시선을 밖으로 던지던 대성은 유린이 달려가는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유린이 향하는 곳에 평소의 ‘빛’의 종류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대성은 생각했다.

-벌컥!

“대성아, 같이 밥먹….”

“미안.”

대성은 교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는 복도를 달렸다.

 

 

 

 

 

 

체동??, 자외紫外

 

 

 

 


-우르르릉!

“치잇, 저 녀석들…! 격리결계(隔離結界)도 치지 않고 싸움박질 이라니!”

유린은 혀를 찼다. 이질은 동질이 존재하고자 할 때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것이거늘.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유린, 그녀조차도 마력을 짜내어 결계를 피워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금은, 단 한 톨이라도 마력을 아껴야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다, 지금부터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는 요괴는 단순한 삼류잡배 같은 요괴일 리가 없다. 이천년이라니, 그럼 서기가 시작될 때 이미 존재했다는 것과 같은 소리이다. 그런 요괴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 요괴들이 무엇 때문에 이 곳에 오게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 요괴가 이 장소에 머물 때 하필 만난 마법사가 자신이라는 것이 신경질 날 뿐.

 


마법사(魔法師)로서 이질(異質)과 동질(同質)의 사이(間)에 중도(中道)를 지키고자(護)하는 것.

단지 그것만을 향해 정진하는 것이 마법사로서의 숙명. 설사 목숨을 다하더라도.

그래. 목숨을 다하더라도. 유린은 문득 은비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털었다. 지금은 맞닥트린 일을 해결할 때다.

유린이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폭주할 듯이 치솟던 요기는 잠잠해져 있었다. 어떻게든 결판이 났다는 거겠지. 요기의 두 주인중 하나가 죽어 버렸다든지.

하지만, 결말은 어쩌면 뻔하다. 어쩌면 유린은 그 결말을 단순히 확인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것일 지도 몰랐다. 옥상을 향하는 문을 벌컥 열어 젖혔을 때, 유린은 솔직히 여기저기 파헤쳐져 폐허에 가깝게 변한 모습을 상상했다. 아니, 아파트가 무너지지 않은 게 더 다행일지도. 그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힘이 쏟아졌는데도, 이상하게도 옥상은 흠집도 없었다. 좁은 구역의 격리결계인가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밖으로 쏟아져 나온 요기의 양과 폭음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 깨끗한(실제로는 이끼 등으로 더러웠지만,) 옥상의 한 구석에는,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금색 여우와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 늑대만이 있었다.

유린은 여우를 향해 달려갔다. 처음 보았을 때 보다 서너 배는 더 커져 있는데다 꼬리도 아홉 개로 늘어나 있었지만, 금빛 화사한 털은 분명 초계, 그 여우요괴의 것임이 분명했다.

유린은 바닥에 떨어뜨려진 여우의 머리를 받쳐 들었다. 풍성하게 일어나 있던 금빛 털은 피에 반쯤 젖어 불쾌한 빛깔을 내고 있었고, 본래 포근해 보였던 꼬리들은 숫자가 아홉 개로 늘어나 있었을 뿐, 지금은 축 쳐져 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브러져 있을 따름이었다.

“여우? 내 말 들려? 정신 차릴 수 있겠어?”

유린은 피가 꿀럭꿀럭 새어나오는 몸의 상처에 손을 얹고 치료마법을 발동하며 여우를 불렀다. 그제야 여우는 간신히 눈을 떴다.

“인간…?”

“이 멍청한 여우야. 질 게 뻔한데 왜 덤빈 거야?"

초계는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에서 힘을 뺐다. 눈꺼풀에 힘을 주는 것조차도 힘겨운 모습이었다. 유린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려놓고, 여우의 몸 전체에 치료 마법을 덧씌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제야,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지던 늑대가 고개를 내렸다.

“마법사인가.”

유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붉은 구슬을 쥔 손에 힘을 더할 뿐이었다.

“너도 나를 막으려 들겠지, 인간 마법사.”

“당연한 소리를….”

작게 대답하며, 크게 숨을 들이쉰다. 숨쉬는 것과도 같이, 주변의 마력이 흐물흐물 모여들어 유린을 감싸 안았다.

“늑대, 너에게 댄다면 나 정도의 마법사야 발톱 끝에도 못 미치겠지만.”

유린의 시선이 힐끗, 뒤쪽에 있는 여우에게로 향했다.

“여기서 무너지게 될 것 또한 알겠지만…!”

마력이 소리 없이 조형(造形)되어간다.

“그것을 알면서도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자들이 짓밟히는걸, 지켜 볼 수만은 없어!”

-콰앙!

후끈하게 밀려오는 열기. 늑대는 가볍게 뒤로 뛰어 올랐다. 시동의 언어조차도 동반하지 못한 단순한 열기의 충격파지만, 그 허점을 찌르려고 하는 데야, 이만큼 좋을 것도 없다.

“그 무엇보다도,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까!”

드디어, 늑대가 외쳤다.

“그렇다면, 부딪혀 오라!”

다시 한번 열기가 휘몰아친다. 이번에는 늑대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그 열기의 충격파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그리고 이어지는 몇 번의 울림. 둥, 둥, 아파트의 꼭대기에서 벌어지는, 무결계 상태에서 폭출하는 이질의 힘은 아파트 전체를 미미하게 떨게 만들고 있었다.

-콰드득!

늑대의 이빨이 옥상의 콘크리트 난간을 한 움큼 베어 물었다.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콘크리트는 조각조각 흐트러져 바닥에 뒹굴었다. 유진은 그 모습을 약간 창백해진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공세와 수세의 전환은, 생각보다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본래 마력의 주조를 통해 마법을 발산(發散)하는 마법사들은 그 행위(行爲)가 몸에 크게 무리가 가지 않아 능력만 받쳐 준다면 장시간의 전투가 지속 가능하다. 하지만, 그 위력을 더하기 위해선 일정 시간 이상의, 마력에 대한 주조(鑄造)를 필요로 한다.

물론, 유린은 그 나이 또래의 인간 마법사 중에서는 최고로 뛰어난 마법사이며 눈을 한번 깜빡하는 정도의 시간만으로도 사람 한명은 우습게 꿰뚫을 위력의 마법을 쏟아낼 수 있지만, 그 기준은 ‘사람’이지, 안타깝게도 지금 이빨을 들이미는 늑대에 대한 기준은 아니었다.

완벽한 기회에 완벽한 노력을 기울여 쌓아내고, 그것으로 불러낸 번개조차 늑대를 잠시 물러서게 하는 정도에 그쳤었다. 하지만 지금은 좁은 아파트의 옥상. 저 늑대가, 그러한 시간을 다시 내어줄 이유가 없다.

생각이 길어져서일까. 유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다지 넓지 못한 옥상의 구석에 몰려 있었다. 늑대는 지척. 손에 쥔 구슬이 땀에 젖어 불안하게 미끈거렸다. 늑대는 자세를 낮추었다. 등의 흰 갈기가, 요란하게 치솟고 검은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이 희번뜩 빛났다.

유린은 이 대로 있는 다면, 그 다음이 자신의 마지막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진에게는 이 상황을 벗어날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처하자, 오히려 다급했던 마음이 차분해 지는 것은 어째서 일까. 그다지 많은 나이를 먹은 건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나이이지만 한평생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동안 지어왔던, 마법사라는 짐에서 잠시나마 일탈해 있는 것일까. 문득, 스쳐지나가는 기억의 편린 사이로 은비의 얼굴이 나타났다. 가족을 잃고 절규하던 모습, 그리고 그 이후 외로움에 떨며 지내던 가여운 모습이, 애정에 굶주려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그리고 은비의 뒷모습이.

뒷모습?

유린은 눈을 깜박였다. 땀에 젖은 눈썹이 귀찮게 들러붙었다. 하지만 트여진 시야 사이로, 언제나 외로움에 오들오들 떨던 작고 여렸던 어깨가 유린의 앞에, 또한 늑대의 앞에 나타났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은비야….”

 


은비는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하지만 온 몸의 말초 신경에서 전해오는, 회오리치는 마력의 짜릿함과, 그에 따르는 고통이 수백 수천 개의 바늘이 되어 뇌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찌릿찌릿.

고통은 뇌의 정신을 점점 침식시키고 있었다. 통증에 마비되어, 다른 사고는 정지 시킨 지 오래. 은비를 이끄는 의지는 단 하나.

“지켜야해….”

불타는 통나무집이 그려진다. 그 붉음과 화끈한 열기가, 바로 앞에서 느껴진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할, 요괴에게 살해당하는 부모의 모습이 가상의 망막위에 그려진다. 치솟는 붉은 핏줄기가 소름끼칠 정도로 사실적으로 보여 져서, 금방이라도 얼굴에 튈 것 같았다.

지켜야해.

그 강렬한 의지가, 적의에 담겨 둔해진 근육을 잡아당기고, 혼탁해져 흐려진 시야를 넓힌다. 겨우 일어설 수 있을 정도밖에 남지 않는 힘을 이끌어, 은비를 여기에 서게 했다.

하지만, 여기에 서 있을 뿐.

온전한 정신을 차리기엔 은비는 너무 지쳐 있었다.

자꾸 감기려는 시야 사이로, 달려드는 거대한 늑대의 회색 몸통이 흐릿하게 비쳤다.

검을 들어. 또 잃어버릴 셈이야?

하지만, 너무 힘들어.

일어서. 일어서.

일어서…!

그 때, 귓가에 익숙한, 하지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흐릿해지던 은비의 정신이 흰색으로 점멸하며 마치 전등처럼, 순식간에 밝아졌다. 익숙할 리 없는 남자의 목소리. 하지만, 머릿속에 언제나 맴돌아서 그 무엇보다도 익숙한 목소리.

“야이 늑대야!”

“안돼!”

다시 한번 들리는 그 목소리에, 은비는 비명처럼 외쳤다.

 


2%가 부족했다. 그래, 어떤 음료수 선전에서도 그랬듯이 2%. 대성은 자신의 인생에서, 자기에게 언제나 2%정도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지가 부족한건 아니었지만, 살아간다는 행위에 흥미는 없었다.

그것에는 공부 또한 포함되었고, 누구나 한번쯤 해보고 싶어 하는 연애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학교 공부는 소홀해지고, 친구를 사귀는 것 역시 뒷전.

취미역시 자주 바뀌었다. 다른 것에 도전해보고, 그쪽으로 몰입하다 싶으면 금세 흥미를 잃어버리고.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이미 그 취미에 대해 수준 이상으로 터득해 버리는 자신을 보고 천재인가 싶기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흥미였다.

흥미가 모자랐다. 이것도, 저것도 모자라서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고등학생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현실에 흥미를 잃었다. 그렇다고 염세적이다, 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단지 흥미가 없었으니. 환상이라는 것에 빠져들게 된 이유가 단지 그 뿐이었더라면, 이유가 설명이 될까.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다, 문득 단지 아는 사람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사람이 나타났다. 은비활, 초계. 자신을 지키려고 죽음을 각오하는 모습에, 문득 자신의 모자란 2%를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모자라는 게 그것이었을까.

기대를 품지 않았다면 거짓이었으리라.

“우리가 지키는 것은 ‘너’가 아니야.”

그 다음은 실망이라는 것이었다. 가슴을 채우는 것과는 반대로, 가슴 속을 깎아 내리는, 처음 겪는 생소한 경험. 무엇도 자신이 흥미를 잃기 전에 자기를 버린 것은 없었다. 그만큼 흥미가 유지되는 시간이 짧았다는 것이었겠지만, 아프게 후벼 파는 실망이라는 감정에 대성은 찌릿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낯선 감정. 낯선 경험.

흥미는 일지 않았다. 다만 뭔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만이 맴돌 뿐.

그게, 대성의 작은 변화였다.

대성은 유린이 올라갔을 옥상을 향하는 계단 중턱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쉬지 않고 달려온 턱에, 지친 폐가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얼마 앞에 옥상으로 향하는 문이 반쯤 열려 희미한 빛을 아파트 안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그 빛이 마치 구원으로 향하는 빛이라고, 대성은 생각했다.

-덜커덩!

반쯤 열린, 혹은 반쯤 닫힌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자 구름으로 그득한 가을 하늘 아래에 현실을 벗어난 장면이 그대로 대성의 눈동자 안으로 쏟아 들어왔다. 무채색을 배경으로 한 날카로운 검은 발톱. 그리고 그 앞의 두 소녀. 생각은 더 이상 길어지지 않았다. 대성은 힘겨운 숨을 한 번 더 가다듬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입을 크게 벌리고, 폐 가득히 들어찬 공기를 온 힘을 다해 토해낸다.

“야이 늑대야아!”

-움찔

막 뛰쳐나가던 늑대는 귀를 쫑긋하더니 대성 쪽을 돌아봤다. 들려진 입술 사이로 나타난 흰색 이빨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대성은 침을 꼴깍 삼켰다. 자신에게, 그 늑대를 이길 수 있는 무언가 방법이 있을 리도, 맞설 힘이 있을 리도 없었다. 자신은 총하나 쥐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니까. 하지만 대성은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마치 묘한 오기일까. 유린과 비활이 보라는 듯이 한걸음 앞으로 더 나서 가슴을 활짝 편다.

그것은 어머니에게 덤비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실망이라는 감정에 내민, 투정이라는 답일지도 모른다.

 


-화아악!

 


몸 전체를 덮는 인공적인 바람이 일었다. 늑대가 발톱이 세워진 큼직한 앞발을 들어올려 생긴 바람이었다. 대성은 자꾸 감기려는 눈에 힘을 주었다. 들려진 앞발이 내려쳐진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슬로우 모션 같았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점멸하듯 멀어지고, 머리가 흩날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 손톱에 의해 휘몰아치는데도 앞발은 한없이 느렸다. 저 뒤에서 달려오는 은비의 움직임도, 구석에 힘겹게 몸을 뉘인 여우의 경악에 치켜떠지는 눈동자도.

모두 한없이 느렸다. 하지만 확실히, 늑대의 발톱은 대성, 그 자신에게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푸욱!

 


그리고 관통. 몸 안에, 이질적인 것이 깊숙이 침투해 들어오는 느낌.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대성 자신의 시야를 붉게 가리는 뜨거운 것.

대성의 세상이 기울어졌다.

 


“뭐, 뭐 하는 거야….”

유린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대성이 뛰쳐나오고, 그를 발견한 늑대가 뛰쳐나가 발톱으로 몸을 꿰뚫는 일련의 행동이, 미처 그를 보호하기 위해 마법을 준비하기도 전에 끝나 버렸다. 유린은 무의식 적으로 늑대를 견제하며 남는 시간을 쥐어 짜 마력을 모으면서도, 이성은 몸에 구멍이 뚫린 채로 핏물을 왈칵왈칵 쏟고 있는 대성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무슨 짓을 한거지? 저 멍청이가…!

유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은비에게로 향했다.

 


은비는 대성의 몸이 꿰뚫린 그 순간부터, 세상이 마치 정지돼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더 이상 손끝이 저릿거리는 따가움도, 지칠 듯 비틀거리는 다리의 휘청 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피곤에 감겨지는 눈꺼풀은 있는 대로 치켜 올라가, 그 멈춰진 세상을 담아내는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대성이, 쓰러졌다. 은비는 비틀거려 서 있을 기력조차 없는 다리를 끌다시피 하여 대성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 가까이에 있던 늑대는, 당연스럽게도 대성의 핏물이 흥건히 묻어난 발톱을 들어 은비를 내리 치려 했다.

“정신 차려, 은비야!”

유린은 은비가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길 바라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거기에, 이번에는 늦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둔 마법의 탄알이 솟구쳐 늑대의 발톱을 튕겨 내었다. 다행히, 은비를 꿰뚫기 직전의 발톱은 은비를 스쳐 콘크리트 바닥에 깊은 상처를 내었다. 연달아, 유린의 마법이 늑대를 향해 가쁜 빛줄기를 토했다.

늑대는 일단 거추장스러운 유린을 떨쳐 내기로 작정했는지 그 거대하게 부풀은 몸을 돌려 유린에게 향했다.

 


늑대가 내리친 충격에 넘어져버린 은비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점점 좁아져가는 시야를 간신히 붙들고는 거의 기다시피 하여 대성에게 다가갔다. 대성의 주위에는 이미 왈칵왈칵 쏟아지는 핏물이 웅덩이를 이룰 정도로 흘러내려 있었다. 은비는 어쩔 줄 몰라 하다, 대성의 몸뚱이에서 아직도 핏물이 쏟아지고 있는 상처를 양손으로 꾹 눌렀다. 거의 소용없는 짓임은 분명했지만,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대성이 곧바로 죽어버릴 것 같아서, 불안에 정신이 사나워 졌다. 회복마법이라고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신이, 오로지 원수를 갑기 위해 내딛은 마도의 길이, 이번만큼 가슴 저리게 후회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찔하게 저려오는 가슴. 손을 발갛게 물들이는 따뜻한 피. 이미 대성의 안경은 깨어져 나가고, 처음 은비를 그렇게 가슴 두근거리게 한 상냥한 눈동자는 조금씩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맥박이, 호흡이 조금씩 옅어졌다.

“안돼….”

은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자신에게나 겨우 들릴 정도의 작은 속삭임. 하지만 그 연약한 속삭임에 대성이 반응했다.

“비활…?”

대성은 흐릿하게 풀린 눈동자를 굴려, 비활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곳을 응시했다. 불분명한 경계의 색들이 또렷치 못하게 번져 서로 뒤엉켜 있었다.

“대성아? 정신이 들어? 대성아?!”

반쯤 흐느끼는 목소리. 대성은 그 목소리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지금 자신이 지을 수 있으리라 판단되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었다.

“비활이구나….”

“그, 그래. 나야 나. 그러니까, 정신 차려…! 내가, 내가 꼭 구해 줄 테니까…!”

“응….”

은비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이슬이 대성의 얼굴을 점점이 적셨다. 얕은 흐느낌. 잠시의 가쁜 호흡 후, 대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비… 활아.”

“으, 응?”

대성은 잘 움직이지 않는 팔을 들어 자신의 몸 위를 덮고 있는 은비의 손에 얹었다. 조금씩 싸늘해지는 대성의 몸과 달리, 은비의 손은 따뜻했다.

“비활아.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마, 마지막 아니야!”

은비의 비명 같은 외침에 대성은 자꾸 쳐지는 입가에 잔뜩 힘을 줘 웃는 모양을 만들었다.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면서 외치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게 느껴졌다.

“…나를 써서 이겨줘.”

“뭐…?”

“내 영혼을… 써서… 이겨…줘….”

조금씩 흐려져 가는 대성의 목소리. 감겨가는 눈꺼풀. 대성도, 은비도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성은 힙겹게 입을 열어 계속 말했다.

“초계한테 들었어…. 늑대가 나를 노리는 이유도 모두 나 때문이라는 거…. 내… 영혼을 사용하면… 마력…이 더 강해진…다고….”

“아니야. 그럴 수 없어. 내가… 내가 내 손으로 그런 짓을 하라고…?”

계속되는 대성의 충격적인 말에 어느새 은비의 눈에서 흘러내리던 눈물도 멈춰 버렸다. 다만 대성의 상처에 얹힌 손에 힘이 들어갈 뿐이었다.

“내, 내가 죽더라도 대성이 넌 꼭 살아야해! 절대, 절대 그런 짓은 못해!”

대성은 자꾸 쳐지려던 입가를 다시 한번 힘겹게 끌어 당겼다. 이정도면 웃는 모습으로 보일까. 대성은 마지막, 온 힘을 다해 은비의 손 위에 얹혀있던 자신의 팔을 은비의 어깨 위로 둘렀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잡아당긴다. 기울어져 있던 은비의 몸은, 불안한 자세 그대로 대성에게로 무너져 내렸다.

-두근

맞닿는 심장박동. 인체의 유일하게 외부에 노출된 내부표피로 서로의 열기가 교환된다. 은비는 순식간에 어지러워지는 정신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다. 오로지 마법사로서의 본능이, 부족한 마력에 대한 갈증이 스스로의 일을 해나갈 뿐.

-두근 두근

생명력과 마력의 근원인 심장의 고동이 빨라진다. 더불어, 은비에게 맞닿아있는 작은 약동과 은은한 체온이 점점 느려지고 싸늘히 식어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순식간에 이어진 정신을 통해, 대성의 속삭이는 듯한 귓속말이 흘러 들어왔다.

[가져가. 내가,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니까.]

[가져가서, 꼭 살아가.]

안돼…!

[그리고 고마웠어. 이 꼭두각시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준 너에게.]

“그만해!”

-두근!

마지막의 커다란 고동. 드디어 두 온기가 하나로 합쳐졌다. 간신히 대성의 얼굴에서 스스로를 떼어낸 은비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악! 하악!”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어마어마한 마력.

“하아아아!”

그 어떤 인간의 것보다도 순수한 영혼을 기반으로 조율해나가는 폭포수 같은 마력.

“아아아아아!”

마력의 부족 때와는 전혀 의미가 다른 마력의 폭풍이, 울부짖는 은비의 오열과 함께 회오리쳤다.

“아아아아아아아!”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슬픔이 은비의 전신을 감싼다.

-쏴아아아아!

그 슬픔에 젖은 울음을 받아, 어둑했던 하늘에서 드디어 흐릿하고 차가운 가을비를 땅에 뿌렸다.

 

 

 

 

 

 

체동??, 무색無色

 

 

 

 


유린은 최대한 빨리 결정해야 했다. 옥상에서 벗어난다면 폭음과 진동뿐이 아니라, 외부에 직접적으로 노출된다. 마법사로서, 두 번째로 금기시해야하는 사항이지만, 그런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기엔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유린은 자신을 중심으로 몰려든 마력을 한 움큼 쥐어뜯어, 늑대를 향해 내팽개치며 외쳤다.

“Project Missile!”

-쾅!

붉게 일렁이는 마력이, 붉은 빛을 뿌리며 날아가 붉은 화광이 치솟는다. 그리고 피어오르는 연기를 해치고 큰 상처 없이 튀어나오는 거대한 늑대.

“칫!”

어느덧 그다지 길지 않는 옥상의 끝이 보였다. 그 너머로 옆 아파트의 옥상이 회색 구름을 배경으로 펼쳐져 보였다. 은비는 다시 한번 마력을 가공하며, 옥상의 난간 끝을 박찼다.

-후우웅!

아파트의 저 아래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차가운 바람이 유린의 온 몸을 구석구석 떠받쳤다. 거기에 섞인 마력에, 유린은 약속된 언을 읊는다.

“Soar!”

그 상승기류를 따라 하늘로 높이 치솟는 유린. 늑대는 아파트 난간에 잠시 멈춰 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크오오오!”

맹렬한 포효. 뒷다리를 잔뜩 움츠린 늑대는 마치 로켓처럼 하늘을 향해 발톱을 내밀며 치솟아 올랐다. 그 엄청난 속도에 기겁하며 유린은 비상(飛上)마법을 해제하고 몸을 둥글게 말면서 손바닥을 아래로 향했다.

“Enclose Barrier!"

순간 하늘로의 가속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유린의 주위로 옅은 붉은빛의 둥그런 막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위를 강타하는 늑대의 발톱.

-콰드득!

“이익!”

비록 유린은 방어마법에 그다지 조예가 깊지는 않았지만, 실전에서 유린의 목숨을 몇 번이나 지켜줬던 방어막이 단 한번의 충격으로 너덜너덜해진 모습을 보고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유린을 감싼, 늑대의 발톱에 한쪽이 뜯겨져나간 구체는 그대로 아래를 향해 곤두박질 쳤다.

“Levitation!"

옆 동 아파트의 옥상에 닿기 직전 방어막(防禦幕)을 해제하며 마법을 일으켜 안전하게 착지한 유린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상공을 바라보았다. 늑대는 얼마나 강력하게 점프를 했는지, 유린이 떨어져 내리고 자세를 가다듬을 때에야 상승을 멈춘 채로 유린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낙하.

그 잠시간의 시간을, 유린은 이 전투의 종지부를 찍을 때라고 직감했다. 가장 강력한 것으로, 자신의 모든 마력을 다하여…!

유린은 양 손을 좌우로 펼쳤다. 곧게 뻗은 손바닥이, 정확하게 양 옆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손바닥에 꾹 쥐고 있던 붉은 구슬이 살짝 떠올라 유린의 미간에 와 닿았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내리감은 유린의 몸 위로 희미한 빛줄기가 얽혔다.

하나, 둘, 셋.

빛줄기는 계속 그 수를 더해, 어느덧 유린이 서 있는 곳을 모두 감쌀 정도로 빼곡히 들어찼다.

빛줄기는 바로 구현 화된 마력. 더욱 농밀하고, 더욱 조형하기 간편한 마력의 잔재들.

굳게 닫혔던 유린의 입이 열리며, 주조를 위한 언어(Casting)를 흘려내기 시작했다.

“어둠. 그 안에 피어나는 화려한 폭죽(爆竹)이여. 그대는 나, 작열의 마법사의 상징이요.”

흘러가는 언어에 따라, 펼쳐진 유린의 손이 유연한 곡선을 따라 허공에 그림을 그려낸다.

“붉고 붉어서 선홍으로 빛나는, 뜨겁고 뜨거워서 돌조차 녹아내리는 화(火)와 염(炎)의 춤을 정유린의 이름으로”

그 무형의 그림을 따라 구현화 된 마력의 실들이 휘말려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마법의 언어들이 허공에 그려지고 이계를 현세에 구현코자 하는 진(陣)을 만들어내었다.

“그대들의 고향, 천겁(千劫)과 영세(永世)의 지옥(地獄)을 불러내고자 함이로다!”

흰색 빛이었을 마력의 잔재가 완벽하게 원을 그리는 순간, 흰 빛은 붉은 빛으로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달아올랐다, 라는 표현이 딱 맞아 떨어지도록, 그것은 마치 염화에 불타는 것처럼 맹렬한 붉은빛을 쏟아 내었다. 그리고 그 원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 사이로 이 세상을 비집듯이 새어나오는 같은 색의 불꽃들.

“Hellfire!"

-쿠화하하학!

드디어 시동어(始動語)가 터져 나왔다. 지옥을 닮아 그 무엇보다도 뜨거울, 붉은 빛으로 현현(顯現)한 지옥의 불꽃이 허공을 사르며 하늘로 치솟았다. 그 방향은 막 유린에게 닿으려는 늑대.

-털썩!

시전 자에게 조차 영향을 미치는 지옥업화(地獄業火)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유린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실, 유린 자신을 향한 열기 때문이라기보다 텅텅 비어버린 주변의 마력들과 과도한 마법행사에 의해 밀려드는 현기증에 다리힘이 풀려버린 것이겠지만 말이다. 유린은 아직도 짙은 붉은빛이 감도는 불꽃으로 허공을 불태우는, 자신이 불러낸 지옥업화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유린의 검은색 눈동자에 붉은 빛이 비쳐 일렁였다.

그리고

-화르륵!

불길이 걷히고, 그 폭염의 중심에서 뛰쳐나와 유린의 앞에 사뿐히 내려앉은 늑대.

유린의, 그때에 이르러서 머릿속에 남은 단어는 단 하나는 포기였다. 모든 것을 다 했고, 실패했다.

처음의 흰빛과 회색빛을 잃은, 하지만 여전히 검디검은 늑대의 발톱 앞에, 유린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투, 투두둑

-쏴아아아!

뜨겁게 달아오른 허공과 늑대의 몸, 그리고 온 힘을 다하고도 실패해버린 유린의 안타까움 위로, 가을의 차가운 빗방울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화악!

빗물을 맡기 시작한 늑대의 몸 위로 빗물이 증발한 수중기가 뭉게뭉게 일어나 시야를 가릴 정도로 가득히 피어났다. 좀 전의 지옥의 열기가 그 털 올기마다 남아 있는지 순식간에 흠뻑 젖어버린 유린과는 다르게 늑대는 아직 그 검댕을 씻어내지 못했다.

그 희뿌옇고 답답한 수증기 사이로 노란 무엇인가가 반짝였다고, 유린은 생각했다.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을 가르고 베어질리 없는 수증기조차도 갈라내고 나타난,

“은비…야?”

언제나 활기차고 밝게 되돌아오던 대답은 없었다. 지극한 침묵. 어느새 넓게 떨어진 옆 동 아파트를 건너와, 은비는 늑대의 등 뒤에서 차분히 검을 겨누었다. 평소의 은비와 전혀 다를 것 없는 태도. 조금 전의 오열이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침착하게 가라앉은 검은색 짙은 눈동자가, 유린은 섬뜩하게 느껴졌다.

마치 유린이 처음, 마음을 굳게 닫은 은비를 만났을 때의 그 모습.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검을 쥐고도 마음의 갑옷을 씌우지 않은 상태라는 것. 두 손에 꼭 쥐어진 칼과, 검게 빛나는 두 눈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은비는 다시 한번 몰려드는 수증기에 천천히 검을 가로 질렀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예리하게 뻗쳐 나오는 검기가 허공을 유려한 곡선으로 갈라내었다. 마력의 폭풍을 잠재우고, 넘쳐나는 마력을 갈무리한 은비의 검 끝에는, 가만히 서 있음에도 눈에 보일 정도로 유형화된 검기를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다.

늑대는 그런 은비의 모습에, 잔뜩 경계를 하면서 이제까지 몇 번 빼고는 딛지 않던 앞발을 땅에 내렸다. 그리고 잔뜩 움츠린다. 곧 있을 어마어마한 돌격을 예상하며, 은비는 곧게 앞으로 향한 검을 조금 뒤로 당겼다. 차분한 이성, 차분한 마력. 고요한 정신과, 흔들림 없는 검극.

자연스럽게 식(式)이 일고, 술(術)이 일어, 앞으로 천천히 내미는 검에 실렸다.

“중검(重劍)의 묘(妙), 붕(崩).

그 무엇보다 천천히 내밀어 지는 검을 따라, 폭풍 같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흩어져 내리는 빗방울조차 휩쓸려 검을 중심으로 천천히 퍼져 나갔다. 내밀어 지던 검이 다시 들리고, 그리고-

 


-쿠르르릉!

 


무너져 내린다. 얇디얇은 검 하나로 일으키는, 피할 수 없는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공격.

늑대는 무너지듯 쏟아져 내리는 검기를 향해, 검은 발톱과 흰 이빨을 맞부딪쳤다.

-쾅!

조금씩 고여 있던, 옥상의 물웅덩이가 일제히 솟구쳤다. 디디고 선 콘크리트의 대지를 통해 그 충격음이 울릴 정도로 강대한 맞부딪침에, 어째서인지 균열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다만, 그 위를 춤추듯 휘몰아치는,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그 상대가 무엇이든지 집어 삼킬 듯이 내리누르는 검기의 향연만이 존재 할 뿐.

-우드득

맞부딪친 늑대는 그 어마어마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어 버렸다. 마주친 발톱과 이빨의 요기가 검기와 갈려 듣기 싫은 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렸다.

-우드득! 우드득!

남은 한 무릎. 늑대의 양쪽 무릎을 모두 꿇려버린 은비는 검을 쥔 양손을 비틀어 그대로 검을 옆으로 내리 그었다.

-쿠르릉!

콘크리트 바닥을 비스듬히 내려치는 검압에 의해, 늑대 역시 반쯤 뒹굴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하지만 늑대는 개의치 않는 다는 듯이 금세 벌떡 일어나, 은비를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스쳐 지나가는 빗방울조차 베일 정도로 예리하게 다듬어진 요기는, 분명 눈에 보이는 발톱 너머의 영역을 침(侵)하고 있었다. 은비는 여유 있게 검을 들어 발톱을 막아 내었다. 전이라면 분명, 한번의 충격과 그 다음의 충격에 몸을 가누기 바빴을 테지만, 방대한 마력을 기초로 해 펼쳐진 중검(重劍)은, 그러한 압력마저 상쇄하고도 남았다.

-부우웅!

은비가 가볍게 휘두른 검을 무시하지 못하고, 늑대는 결국 세 발자국 뒤로 물러서 멈췄다. 잠시 소강. 은비는 그 다음을 마지막으로 하려는 듯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다음에 나올 자세는 뻔하지만, 그것은 분명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뜻.

늑대는 섣불리 달려들지 않고 가만히 서서, 자신의 요기 만큼이나 검고 깊은 은비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랬군.”

드디어, 늑대의 입이 열렸다. 처음과도 같은, 모든 것에 ‘뜻으로 통하는’ 언어.

“그 인간의 영혼을 먹어버린 거였군.”

-움찔.

조금 전까지 한 치의 미동도 없던 은비의 검극이 순간, 살짝 흔들렸다.

“인간을 해치지 않는 것이 인간 마법사의 계율이 아니었던가?”

비꼬는 것도, 비웃는 것도 아닌 그저 순수한 물음. 하지만 그 물음은 그 어떤 발톱보다 날카롭게, 은비의 가슴을 사정없이 할퀴고 있었다.

“아니면… 이제까지 수천 년간 반복해 왔듯이 그저 인간의 이기심인 것이냐.”

은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 이질에 가까운 인간이여. 내가 그들의 이기심을 간과한 것이 가장 큰 실수였도다.”

늑대마저 입을 다문다. 짙은 침묵. 그 끝에서, 조금이나마 흔들렸던 은비의 검은 더 없이 고요하게 직선을 그으며 하강했다. 그 끝없을 것 같은 침묵의 끝을, 은비는 나지막한 술식의 언(言)으로 고했다.

“진검(眞劍)."

늑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 끝을 알고 있음일까.

“참(斬).”

-츄아아아

은비의 검 끝과 늑대를 잊는 직선에 놓인 물웅덩이가, 일제히 하늘로 솟구치며 양 옆으로 갈라섰다. 그 직선상에 놓인 모든 공기가, 빗방울이, 그 위를 넘어 구름과 하늘조차도.

-첨벙!

반으로 쪼개진 늑대의 시체는 양 옆으로 천천히 쓰러져 고여 있는 물웅덩이에 처박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흑색 요기를 허공에 뿌리며, 천천히 사라졌다.

그 모습을 검을 내민 그 모습 그대로 지켜보고 있던 은비는 늑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입술을 움직였다.

“변명하지는 않겠어요. 늑대.”

그리고 마찬가지로, 짧은 가을비는 그 차가움을 걷어내고 흐릿하지만 말갛고 높은 가을 하늘을 들어냈다. 건조한 가을의 먼지마저도 쓸어간, 개운한 하늘이었다.

 


어느새 은비의 손에 들린 검은 사라졌고, 오로지 팔에 채인 팔찌 끝에 달린 노란 구슬만이 빛을 머금고 있었다. 멍하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은비에게, 유린은 천천히 다가가 그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돌아가자.”

“응….”

고개를 내릴 때 볼을 따라 흘러내린 눈물을 은비는 애써 감추었고 유린은 애써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 요괴는 그 어떤 때보다도 힘겹게 승리를 거두었다고 유린은 생각했다.

뒤돌아선 둘 뒤로 오로지 무지개만이 예쁜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밝은 금빛 머리카락. 영롱하게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의 소녀. 초계는 얼마 남지 않은 요기를 쥐어 짜, 애써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했다. 하지만 그 상처는 감출 수 없었는지 차려입은 옷 위로 번지는 붉은 빛과, 그 아래로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핏물은 고인 물을 붉게 물들였다.

이제 완벽히 숨을 멈춘 대성의 시신 앞에 다다른 초계는, 물이 고여 축축한 콘크리트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의 구멍 난 배 위로 양 손을 얹었다. 눈이 감기고, 양 손에서 흰 빛이 새어 나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의 몸은 깨끗하게 치료 되었다. 물론 상처를 치료했을 뿐인지라, 대성의 숨이 돌아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상급 요괴답게, 초계는 단번에 대성의 상태를 파악했다.

본래 영혼은 혼(魂)과 백(魄)으로 이루어져 있는 법. 생명을 유지하는 원천인 혼과, 몸을 유지하는 백이 조화를 이룰 때, 생물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대성은 생명을 이루는 근본인 혼이 빼앗긴 상태. 백만이 남은 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에 스러져 사라질 터였다. 그리고 그 백은 자연에 귀의하겠지.

나쁜 결말은 아니다. 필히, 몸이 아팠더라도 편안한 죽음이었으리라.

하지만….

혼을 잃어버려 백 안에 갇힌 영혼은 어찌할 것인가. 이젠 혼을 잃어 약동하지 않는 이 아름다운 영혼은. 분명 어렸을 때부터 가두어졌던 그 빛을 밖으로 새지 않았을 것이고, 늑대와 자신이 아니었다면 밖으로 들어날 일도, 이유도 없이 평범하게 살아갔을 것임을.

초계는 완전히 치유돼 흰 살을 들어낸 대성의 가슴 위에,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렸다. 물에 젖어 축축한 금빛 머릿결이 대성의 상반신 위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이게 옳은 일일까요. 당신의 영혼을 그 감옥 속에서 꺼내는 일이.”

무슨 뜻일까. 초계는 작은 중얼거림을 마치고,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했다. 비는 이미 그쳐, 파란 하늘을 들어냈지만 초계의 시선은 그것을 향하지 않았다.

눈은 감기고, 귀는 닫히고. 오감을 폐하고 오로지 초계, 자신의 내면에 깊숙이 감추어진 구미호(九尾狐)의 기운을 불렀다. 그리고 유일하게 밖과 소통하는 입을 통해 일족의 금기된- 구미호의 숨겨진 능력을 한껏 끌어 올렸다.

그것은 요기나 마력의 운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여우요괴의, 그것도 오로지 구미호들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술법.

“아아아아아….”

초계는 슬픔인지, 아니면 분노인지, 그도 아니면 고통의 외침인지 모를 가느다란 비명을 푸른 하늘을 향해 높게 뽑아 올렸다.

 

 

 

 


다음날 아침.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날씨는 한층 더 추워져 어느 새 겨울이 눈앞까지 다가왔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은비는 외투를 좀더 꼭 여미며, 등굣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타박타박

발걸음에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집 앞에서부터 같이 등교하고 있는 유린은, 그런 은비의 작은 어깨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즐거워 보였는데.

이젠 과실을 다 떨어뜨려 버린, 앙상한 밤나무의 가지가 쓸쓸하게 등굣길에 드리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 마음이 은비와도 같을까. 오늘따라, 등굣길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그때, 누군가 은비의 뒤로 다가와 등을 살짝 밀었다.

“아앗!”

멍하니 걸음을 걷던 은비는, 그 바람에 균형을 잃고 허둥댔고, 유린은 날카롭게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범인을 째릿, 쳐다보았다.

“무슨 짓이야…?”

·버럭 소리질러야할 유린의 말꼬리가 약간 이상하게 위로 꺾여 있었다. 은비는 약간 시간을 허비해서야, 중심을 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서 있었다.

“대성아?!”

반쯤 비명 섞인 외침이었다. 은비는 양 손을 모아 입을 가리고는, 글썽거리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대성을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말조차도 더듬는다. 은비의 옆에 서 있는 유린은, 자신이 유령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눈꺼풀 위를 세차게 비볐다. 하지만, 대성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든지, 유령 특유의 귀기가 느껴진다든지 하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인간.

어째서?

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으응. 초계 덕분이야. 나에게 생명을 나눠줬어.”

약간의 그리움이 섞인 말투. 그제야 은비와 유린은 초계를 떠올릴 수 있었다. 어떻게 라는 의문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지금의 이 상황에 만족하기로 한 것일까.

은비는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며, 한 걸음 앞의 대성을 꼭 끌어 앉았다.

“으, 으아앙! 사, 살아있었구나!”

“아, 어. 응. 어쩌다 보니. 아하하. 그렇게 부끄럽게 행동했는데, 결국 살아 버렸지 뭐야.”

“응? 부끄러운 거라니?”

되물은 사람은 오히려 유린이었다. 부끄러운 거? 유린이 언뜻 본 은비의 귀는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올라 있었다. 뭐지, 그게? 유린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모두들 살았고, 이렇게 다시 등굣길에서 만날 수 있으니까.

대성은 어색하게 웃으며, 아직도 품에 답싹 안겨있는 은비를 추슬러 학교로 향했다. 유린은 앞서 가는 대성의 모습이, 예전과는 달리 무엇인가가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뭐랄까. 조금 더 밝아졌다고 해야 하나?

비에 먼지가 씻겨 내려간 탓이려니- 하고, 유린은 은비와 대성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벚꽃의 꽃잎은 지지만, 그 자리에 푸르른 이파리와

다음의 벚꽃을 기약하는 약속을 남깁니다.

 


저는 그대의 가슴에 무엇보다도 아름다울

약동을 위해 저를 남기렵니다.

 


이제 저는 사라져 다시는 이 곳에서

그대의 약동을 지켜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저로 인해 그 약동이 내년을 기약할 수 있다면

저는 흔쾌히 저의 혼을 내놓을 것입니다.

 


그러니 영혼을 붙잡은 백이여. 저의 혼을 받아 주세요.

비록 인간이 아니지만, 그 영혼에 반한 이 가련한 요괴의

 


마지막 이 세상에서의 소원을 받아, 그대 백이여.

추하지만 마음만은 아름다울 제 혼을 받아 주세요.

 


그리하여 껍질마저 벗어 던질 고귀한 영혼의

반짝임을, 저로 인하게 하여 주세요.

 


그것이-

 


사라질 그대, 백을 붙잡고 대신 사라지려 하는,

멍청한 여우의 소원이랍니다.

 


이 탐스러운 아홉 꼬리를 하늘에 바쳐 비는,

아둔한 구미호의 소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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