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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일색 천하일색/재회의 장

느와르 2004.06.03 19:58 조회 수 : 474



  

  [두 자루가 모인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두 자루가 한 사람에게 모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천하일색/재회의 장 - 무식한 사내, 집요한 여인







  처음에는 과일 장수의 수레가 떨어트리고 간 하나의 복숭아뿐이었다. 워낙 광대한 황야의
중심에 떨어진 복숭아는 어떤 동물도, 어떤 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복숭아는 곧바로 찾아
온 차가운 겨울의 눈 속에 묻혀 계절을 보냈다.
  막대한 눈이 녹으며 생긴 상당한 양의 수분은 복숭아가 뿌리를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고,
복숭아는 그 척박한 토지에서 나무가 될 수 있었다.  
  황야에서 살아가는 것은 나무에게는 끔찍한 일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땅에서 병이 걸리
고, 갈증에 시달리고, 엄청난 외로움과 수많은 위험에 시달렸다. 그것은 나무를 단련시켰고,
나무를 끈질기게 바꾸었다. 거대수의 배변을 거름으로 삼고, 어쩌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마
시며 나무는 첫 과실을 맺을 때까지 버텼다.
  첫 과실은 초라하고, 양도 적었다. 그나마도 짐승들이 먹어치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
다. 나무는 슬퍼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고, 묵묵히 그들이 먹고 남긴 찌꺼기를  다시 자신의
양분으로 받아들였다.
  다섯 번째 과실을 뿌리고 수년이 지났을 때. 나무는 세 그루로 늘어있었다. 어머니가 된
나무는 기뻤지만 마냥 기뻐할 만 일도 아니었다. 이 척박한 땅은 세 그루 나무 모두의 생존
을 용인해줄 정도로 여유로운 곳이 아니었기에, 어머니 나무는 결국 자식들의 뿌리를 옭아
매고, 가지를 뻗어 자식들의 몸을 묶었다.
  십 수 년에 걸쳐 자식들과 한 몸이 된 어머니 나무는 황야자체의 구조를 바꾸어가기로 마
음먹었다. 주위서부터 조금씩 푸르게, 그늘이 닿는 곳부터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어머니나
무는 생존에 필요한 양분을 제외하고 다시 땅으로 돌려주었다.
  어머니나무의 수령이 백 살이 넘어갔을 때 쯤. 그녀의 뿌리가 닿는 곳은 모두 그녀의 자
식들이 자리 잡고, 황야의 중심에는 뚜렷할 정도의 숲이 만들어져 있었다. 어머니 나무는
스스로의 발아래를 계속 깎아내어 황야에 내리는 비를 가두었다. 바람에 실려 오거나, 혹은
새의 배변에 섞여나온 씨들은 그녀가 만든 비옥한 토지에 감사하며 그곳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쯤 그녀는 자신이 드라이어드(木精靈)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이 된 것을 알
아챘다.
  그녀의 끈질긴 노력과, 그것에 감동한 드라이어드들의 축복으로 그녀는 결국 방대한 숲의
어머니가 되었다. 장대한 가지는 숲의 어떤 동물도 쉬어갈수 있을 그늘을 만들고 뿌리 아래
로는 호수를 머금은 그녀의 주위에 그녀가 낳은 자식들과 다른 곳에서 흘러온 씨앗들이 만
든 수도 없이 뻗은 나무들의 군락. 그녀는 그것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만든 숲을 조금씩 망가트리기 시작했다. 황야에 자신을 버렸던 인간은
뻔뻔스럽게도 그녀가 만든 것들을 가로채려하고 있었다. 엘프들은 그녀의 품안에 멋대로 들
어와 살기 시작하고, 반신족들은 배려 따위는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숲을 짓밟으며 다녔다.
숲은 분노하지 않는다. 그들은 파괴에서 새로운 생성을 자아낸다는 괴로운 운명을 받아들이
는 현자들이기에. 그렇지만 아무것도 없던 붉은 땅에서 만들어낸 자신의 숲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나무로서는 가지기 힘들 정도의 소유욕. 결국 그녀는 자신의 숲에
살던 드라이어들을 호수로 꼬여 그들의 몸을 자신의 안에 강제로 가두어버렸다.
  정령의 힘을 가지게 된 그녀는 숲을 움직여 엘프들을 쫓아내고 지맥을 묶어 반신족을 거
부하고, 멋대로 들어오는 인간들을 헤매게 만들었다. 숲의 거부를 읽은 반신족과 엘프들은
더 이상 숲에 다가오지 않았지만, 인간들은 끈질기게 그녀의 숲을 범하려 들었다.
  인간이 밉다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증오스럽다는, 그 증오의 끝은 끝내 그녀에게 어느 한
가지의 결론을 만들어냈다.

  [인간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돼.]




  단점을 따지자면 수도 없이 열거할 수 있는 참이지만. 그중에 가장 큰 단점은 대책이 없
을 정도의 무모함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사람의 몸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참이 보여주는 무
모함이란 건 특히 자연재해의 수준으로, 통나무를 뽑아 벼랑에 다리를 급조하고 있는 행동
같은 것이 그러했다.

  “제에엔장, 다리도 없는 걸 보니. 확실히 길을 잘못 들었군.”

  아름드리나무를 벼랑너머로 넘어트리며 투덜거리는 참. 그가 지나온 길은 마치 용이 횡포
라도 부린 것 같은 엉망진창의 모습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다니지 않을 길을 만들면서까
지 다니니 당연히 길을 잃을 수밖에. 참은 도끼대신 사용한 용살검을 다시 어깨에 걸머지고
절벽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장점을 따지자면 꽤 자랑스러울 정도로 열거할 수 있는 키리지만, 그중에 가장 큰 장점은
역시 마법사 특유의 세심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참이 지나친 자취라는 것은 너무나도
거창한 터라 그녀 특유의 세심함을 발휘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수령이 30년은 넘었을 나무
들이 마구 부러져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키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삼림 훼손도 정도가 있지. 뭐 이런 남자가 다 있담.”

  숲을 직선으로 가로지르기로 작정한 건지 점점 더 깊은 곳으로만 들어가는 참의 자취를
따르던 키리는 이제 몇 개째인지도 모르는 마법의 각인을 나무에 새겼다. 이상할정도로 깊
은 숲은 깊어질수록 마나의 농도가 옅어지는 것이 다른 곳과는 확연히 달랐다. 아마 혼자라
면 절대로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겠지. 그녀는 허리에 찬 천하일색을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키리가 참을 따라잡은 것은 반나절정도가 지난 새벽녘이었다. 도저히 끝을 알아볼 수 없
을 정도로 솟아오른 아름드리 회색나무의 등걸에 빼꼼히 뚫린 구멍. 그리고 그 구멍입구에
쓰러져 있는 3미터짜리 너구리. 키리는 신음을 내뱉고는 한때 너구리굴이었던 곳을 차지했
을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참 시몬즈!”

  대답은 없다. 그녀는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불렀고, 역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구멍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았다. 낙엽이 깔린 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채 무방비한 자세로 자고 있는 참. 키리는 눈을 치켜뜨며 있는 힘껏 그의 옆구리를 걷어찼
다. 퍼억 하고 꽤 큰소리가 났지만 참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녀는 용의 피부가 감각까
지 둔해빠지게 하는 걸까하고 잠시 고민하다가 곧 그의 귀에 대고 있는 힘껏 외쳤다.

  “당-장-! 일어나아아아!”

  “우왓!”

  귀 옆에서 천둥이 쳤다. 내가 구름위에서 자고 있던가. 그런 것 치고는 좀 딱딱한데. 소스
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난 참은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흑발의 미녀를
발견했다.

  “사부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이없는 얼굴로 대꾸하는 키리. 고개를 몇 번 더 내저은 참은 눈앞의 여인이 누군지를
알아보고 다시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나한테 반한 키리 가르테아?”

  “……남의 이름 앞에 쓸데없는 것 덧붙이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기분 나쁜 듯이 쏘아붙이는 키리의 모습에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참은 그녀의 얼굴을 보
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너 왜 여기 있냐?”

  키리는 대답대신 허리에 차고 있던 야명호인을 풀어 참에게 던졌다. 거의 반사적으로 받
아든 그는 멀뚱히 야명호인을 바라보았고, 키리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기분 나빠서 소원 안 빌었어. 너 대체 뭐야? 설마 여자한테 지는 게 무서워서 도망이라
도 치는 거야?”

  화를 내는 키리와는 달리 참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야명호인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히죽거리며 그녀를 바라보던 참은 훗, 하고 짧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붉은
수염이 지저분하게 돋은 까칠한 턱을 문지르며 유들거리는 어투로 중얼거린다.

  “아가씨. 정말로 나한테 반하셨소?”

  키리의 손이 허리춤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녀의 행동을 예상할 수 있던 참은
그대로 손을 뻗어 월하미인의 자루를 내리눌렀다. 키리는 무서운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고,
참은 휘파람을 불며 사과했다.

  “휘유. 성격이 불같은 처자일세. 미안, 내가 잘못했어. 뒤에 하나만.”

  사과하는 태도로는 최악인 그의 말투에 이를 갈던 키리는 문득 그의 말에 이상한 점을 깨
닫고 자세를 바로 했다.

  “뒤에 하나만 이라니. 무슨 소리야?”

  월하미인의 자루에서 손을 떼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참은 그녀의 질문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농을 건건 미안하지만 도망친 건 안 미안해. 난 여자가 무섭거든.”

  “왜?”

  “너무 강해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키리의 얼굴에서 자꾸 낯익은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느낀 참은 일부러 난폭하게 야명호인을 내밀었다.

“자아, 하여튼 이건 다시 가져가! 난 줬던 거 다시 빼앗는 취미 없다구!”

“그러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는 납득 못해! 나는 당신이랑 싸워 이겨서 그걸 가져가
겠어!”

  야명호인을 건네는 손을 거칠게 쳐내는 키리. 참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부아가 치민다는
표정으로 마주 외쳤다.
  
  “바보냐, 너! 내가 졌다고 말하잖아!”

  “당신은 졌을지 몰라도 내가 안 이겼어! 여자한테 졌다고 말할 바에야 조금쯤은 근성이란
걸 발휘해 보지 그래!”

  “진 싸움에 무슨 근성이야! 언제나 근성 풀가동 같은 건 반신족한테 가서 찾아보라고!”

  “이……!”

  서로를 노려보는 남과 여. 먼저 눈을 돌린 것은 참이었다. 그는 쳇, 하고 혀를 차며 고개
를 떨구고는 손에든 야명호인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광택이 흐르는 검은 색의 검집에 새
겨진 보름달의 문장. 왠지 모르게 그리운 느낌이 찾아왔다.

  “……키리.”

  “친한 척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줘.”

  “그렇게 나랑 뭔가 승부하고 싶냐?”

  키리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대체 왜 이렇게
이 남자에게 집착하는 걸까. 그냥 소원을 빌어버렸어도 좋았을 것을. 으응. 아니야. 이렇게
제멋대로 하는 남자에게는 뭔가 제대로 맛을 보여줘야 하니까. 키리는 속으로 자신을 납득
시키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하고 싶어. 공평한 승부라면 뭘 해도 당신한테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잠자리에서도?”

  “그래, 잠자……에엣?”

  무심코 참의 말을 되뇌이던 그녀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참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쿡쿡거리던 참은 야명호인의 몸체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찍어 누르는 쪽과 찍히는 쪽 중 어느 쪽이 강할까?”

  “나, 남자란 것들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참을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키리. 참은 뻔뻔스러울 정도의 표
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털퍽 드러누웠다. 야명호인을 배위에 얹고 사지를 내팽개치듯 드러
누운 채 말하는 참.

  “아아. 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관둬. 하기 싫으면 관둬. 나도 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그냥 빨리 이거나 가지고 가라고.”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젓는다. 꽤 복잡한 분노에 휩싸여 이 건방진 남자의 목에 칼을 박
아버릴까 하는 맹렬한 충동을 느끼던 키리는 월하미인 풀어 참의 배 위에 집어던졌다.

  “좋아. 해!”

  “뭐?”

  “하자고 했어! 반드시 이겨줄테니까 해!”

  단호한 표정의 키리를 어이없이 바라보던 참은 아무래도 자신이 키리를 좀 만만하게 봤다
는 것을 깨달았다. 이, 아가씨. 생각한 것보다 더 성깔 있네.

  “어이. 방금 그건 농담이야.”

  “또 그렇게 도망치는군. 근성이 없는 건 그렇다 치고 남자로서도 부족한 거 아냐?”

  날카로운 미소를 지으며 참을 내려다보는 키리. 그는 독사에게 몰린 개구리 같은 심정으
로 고개를 젓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그래도 저런 소리까지 듣고 도망친다는 건 성질나
지.

  “그래. 붙어봅시다요. 누님.”


  
  예...!
  기대해주시지 않아도 다음화에 18금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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