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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일색 천하일색/회상의 장

느와르 2004.06.01 18:04 조회 수 : 402

  

  [두 자루가 모인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두 자루가 한 사람에게 모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천하일색/회상의 장 - 설산의 사부님, 공방의 스승님.



  사부님은 밤이 되면 늘 달을 벗 삼아 술을 마시곤 했다. 물이 흐르는 계곡이나 밝은 달빛
은 충분히 운치 있었지만, 사부님의 술 마시는 방법이라는 것은 뚜껑만 딴 술병을 통째로
들이키는 난폭한 것이었다. 폭음 아닌 폭음의 끝에서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늘 즐거운 듯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라는 것이 또 가관이라 제멋대로인 박자에 음식 이름, 술 이름만 끝
도 없이 되뇌는 게 끝. 듣고 있으면 비웃음도 안 나왔지만 그래도 난 사부님의 노래가 좋았
다. ……사부님의 목소리는 내가 아는 어떤 여자들보다 아름다웠으니까.

  “참. 칼잡이란 건 말이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피 냄새를 풍기기 마련이다.”

  바지춤을 걷어 올려 날씬한 다리를 계곡물에 담그고, 중얼거리는 사부님. 나는 별 대꾸
없이 옆에서 사부님이 비워버린 술병만 쌓아올렸다. 어차피 술을 마시면 저렇게 중얼거리거
나 노래를 부른다. 나야 그저 사부님의 목소리가 좋을 뿐이니 둘 중 뭐라도 좋지만.

  “칼이란 건 칼집에서 뽑히질 않아도 사람을 죽여. 잡은 사람의 손에까지 피 냄새를 옮겨
버리지. 칼은 그렇게 흉물스러운 물건이다. 그런 흉물을 매일 허리에 차고 다니니 칼잡이에
게서 어찌 사람냄새가 날까.”

  “사부님은 그걸 알면서도 왜 칼을 잡으셨슴까?”

  그렇게 되묻자 사부님은 피식 웃으며 마시던 술을 공중에 뿌렸다. 달빛에 물든 은빛 방울
이 계곡물에 뛰어들며 파문으로 사부님의 발을 간질인다.

  “이 멍청한 놈아. 칼을 잡아서 그걸 알게 된 거지. 그걸 알면 칼을 잡았겠냐.”

  사부님은 그대로 몸을 뒤로 눕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귀뚜라미 소리. 밤새들의 지저귐
에 장단을 맞춰 노래를 부른다.

  달이 밝아 짜지도 않은 실에 밤이 물들면,
  베 짜던 처녀의 손가락은 외로움이 묻는다.
  미리내를 저어가는 토끼에게도 계수나무가 있건만,
  처녀의 가슴 메울 낭군은 어디에 가 보이지 않을까.
  
  늘 부르던 술 취한 박자도 아니고, 엉망진창인 가사도 아니었다. 차가운 바위위에 몸을
펼친 사부님은 눈에 달빛을 가득 담고, 어울리지도 않는 애심가(愛心歌)를 정말 구슬픈 목
소리로 불렀다. 사부님은 폭음으로 깨끗이 잊어버린 그날의 그 노래는 열여섯 살의 나에게
는 사부님을 잊을 수 없게 한 수많은 일 들 중 하나였다.


  

  “키리니임! 저어 돌아왔습니다아아아아……!”

  2년전 이었을까. 나는 보석의 마법사가 될 수 없다는 걸 안 그날 밤. 스승님은 마시지도
못하는 술에 곤드레만드레가 되어서 공방으로 돌아왔다. 창문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내 이름
을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가자 스승님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스승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

  “아아, 정신 말입니까? 저, 마아아알짱합니다. 예. 취한 것 같이 보이는 건 그냥 그렇게
보이는 것뿐입니다아아아아.”

  상반신은 뒤로 하고 걸음은 앞으로 걸으면서 그런 소리를 해대는 스승님. 오다가 넘어지
기라도 했는지 안경알은 한쪽이 깨져있고, 로브는 온통 더러워진 채였다. 엉망진창으로 비
틀대는 스승님을 부축해 공장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만도 중노동. 대충 공장의 바닥에 눕
히고 부엌으로 들어가자 뒤에서는 돼지 멱을 따는 것 같은 스승님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삼에 제곱으은 구우! 구의 제곱은 파알십이이일! 파아알십일의 제에곱은 유욱천오백유우
우욱십……일!”

  대체 무슨 노래가 저래? 물 한잔을 따라 나올 때까지 조(兆) 단위를 훌쩍 넘겨버린 노랠
부르던 스승님은 내가 건네는 물을 단번에 들이마시고 얼굴을 찡그렸다. 냉수를 단번에 마
시니 그렇지.

  “우우우…….”

  “스승님. 괜찮으세요?”

  내 목소리에 멍하니 고개를 돌린 스승님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자는 걸까, 하고 생
각하는데 어깨가 떨리기 시작한다. 바닥에 떨어지는 눈물방울. 스승님은 바닥에 무릎을 꿇
은 채 울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키리님. 크윽. 정말 죄송합니다…….”

  “스승님?”

  “다 제 탓입니다. 제가 무능한 마법사인 탓입니다. 좀 더 우수한 분이 키리님의 스승이셨
다면. 그랬다면……크흑…으흐윽…….”

  대체 왜 우는 걸까. 늘 손해만 볼 정도로 사람이 좋고, 늘 남을 도우면서 보람을 느끼는
이 대책 없이 착한 남자가 왜 우는 걸까. 보석의 마법사가 될 수 없는 건 모두 내 몸의 문
제인데.
  다음날 숙취와 함께 깨어난 스승님이 자신이 술을 마셨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의 눈물은 내 가슴에 아프게 박혀들었다.


  

  사부님의 제자가 된지 벌써 5년이나 됐지만, 사부님이 시키는 수련은 늘 용서가 없다. 늘
자신의 검술은 남자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검술 수련 대신 시키는 훈련들 때문에,
나는 늘 호흡 곤란이 일어날 정도로 숲을 뛰어다니고, 손이 찢길 정도로 목검을 휘둘렀다.
게다가 오후가 되면 사부님은 겨우 숨을 돌린 나를 걸레가 될 때까지 목도로 두들겨 팼다.
훈련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양을 두 배로 늘리고, 맷집이 어느 정도 생겼다 싶으면 더 세
게 두들기는 끔찍스런 훈련.
  오전엔 말린 북어 꼴이고, 오후에 두드린 북어 꼴. 일주일에 하루 훈련을 쉴 때면 근육통
과 타박상 때문에 하루 종일 낑낑거리는 것이 일이었다.

  “하압!”

  “쿠헉!”

  방어를 위해 든 목도는 두자루 모두 부러져 나가고, 사부님의 목도는 어깨를 내리쳤다.
아픔에 비명도 못 지르고 바닥을 뒹구는데 사부님은 흙발로 나를 툭툭 차며 중얼거렸다.

  “엄살 피우지 말고 일어나, 약골제자. 빨리 안 일어나면 누나가 꼬추 따버린다.”

  ……이 남자에 굶주린 노처녀. 한창 사춘기인 제자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저 무지
막지한 힘에 맞았는데 뼈가 부러지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군. 비척대고 일어나서 자세를 잡
는데 손에 든 목도가 몽당 빗자루보다 짧다. 사부님은 혀를 차더니 검을 어깨에 걸머지고
턱짓으로 창고를 가르켜보였다.

  “빨리 가서 목도 가져와라. 게으름 부리면 따라가서 뒤통수를 때려준다.”

  “알겠슴다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한 십여 분 정도는 몸을 쉬어도 봐 주는 게 사부님이다. 그나저나
목도를 빠개버릴 정도의 힘을 견뎌 내다니 사부님 때문에 맷집은 엄청 컸군. 맨 처음에 맞
았을 때는 반나절이나 기절 했었는데.

  “목도가아…어디 있더라아……어라?”

지저분한 창고에서 목도를 찾는데, 문득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지저분한 천에 쌓인 커
다란 무언가. 호기심에 다가가 천을 풀어내자 천에 감겨있던 시커먼 것이 무거운 소리를 내
며 쓰러졌다.

  “뭐…야. 이건.”

  지독하게 생긴 검이었다. 어림잡아 5척은 될 것 같은 길고 넓은 검신의 옆면에는 시꺼멓
게 변색된 뼈와 이빨들이 기괴하게 뒤틀린 채 튀어나와 있었다. 다듬은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엉망진창의 삐뚤어진 검날. 때려 부수는 데에 써도 될 정도의 두터운 검폭. 그건 검
이라기보다는 난폭한 흉기였다. 그냥 보고만 있는 걸로도 기분이 나쁠 정도.

  “얌마! 참! 빨리 안 튀어나오냐!”

  “예에. 지금 나감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사부님의 목소리에 서둘러 대답하고 그 흉포한 병기를 제자리에 세워
놓기 위해 자루를 잡았다.
  순간, 팔을 타고 올라오는 끔찍한 감각. 기분 나쁨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한번 달리고
난 후에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다. 신경을 후비고, 혈관을 터트리고, 근육을 끊어내고, 살점
을 쑤시는 고통들이 하나로 합쳐진다. 놈이 뇌수를 부수려고 날뛸 때쯤이야 겨우 비명을 지
를 수 있었다.

  “아, 아아아아아아아악!”

  바닥이 덮친다. 아니, 바닥을 뒹군다. 좁아터진 하늘이 뒤집힌다. 천장 틈으로 보이는 손
톱만한 태양. 아프다. 아파. 정말 아프다구. 비명을 지르면 귀도 아프고, 입도 아프고, 바닥
을 뒹굴면서 닿는 부분은 모두 아파. 견디게 해줘. 아니. 견뎌야 되는 거야? 차라리 죽게 해
줘. 이렇게 죽을 만치 아픈 건 너무 끔찍해. 젠장, 누가 듣고 있다면 대답해봐! 진짜 더럽게
아프단 말야!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
  아프다구우!

  “참!”

  비명을 듣고 뛰어 들어온 스승님은 말도 안 되게 놀란 얼굴이었다. 우와, 우리 사부님. 저
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예쁘잖아. 젠장. 이런 헛소리라니 대가리가 완전히 미쳐 돌아가
버린 것…같은…기분이……든…….


  

  수도에 다녀온 후 스승님은 방에 틀어박혔다. 수도 없이 책을 보고, 마법을 시험하고, 시
약을 만들었다. 식사도 잘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 그 모습에 몇 번이나 방문을 두들겼
지만 스승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눈에 핏발이 선채 방에서 튀어나온 스승님은 부엌에서 요리를 하
고 있던 나에게 달려와 외쳤다.

  “키리님! 방법을 찾았습니다! 식을 완성했습니……우왓!”
  
  기쁨에 찬 얼굴로 달려 들어와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는 스승님. 놀라서 다가가자 스승님
은 코피를 흘리는 채로 졸도 하듯 잠들어 있었다. 하긴 일주일을 잠도 안자고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

  “죽이라도 준비해야 할까나.”

  그 후, 하루 종일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난 스승님은 내가 만든 죽을 20여 그릇도 넘게 비
우고는 자기가 만든 식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법적 신체 결함의 종류는 크게 두 종류. 마나을 받아들이는데 문제가 있는 경우와, 몸
안의 마력을 움직이는데 문제가 있는 경우로 나뉜다. 내 경우는 전자, 마력을 운용하는데
있어 큰 문제는 없지만, 마력과 마나의 직접적인 연결을 담당하는 부분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키리님은 시약, 혹은 문신이 없다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거지요.”

  “응, 알고 있어요. 그래서 단계마법이나 정령마법은 저한테 맞지 않지요. 27단 최후마법
같이 막대한 마나와 신체를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마법은 불가능한 거고요.”

  “예. 그런 마법적 부분이 완전히 타버렸다거나, 부서진 경우. 즉 원래 존재했다가 사라진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키리님처럼 처음부터 없는 경우에는 다른 부분을 확장시킴으로서
그 부분을 이어버리는 게 가능합니다.”

  어디서 꺼냈는지 한 아름의 종이뭉치를 꺼내든 스승님은 그중 두 장을 침대위에 늘어놓아
보였다. 다이아몬드의 마법사에 의한 정리. 그리고 라크하르트의 수식이 복잡하게 나열된
삼중식 마법 설계도. 스승님의 말한 대로의 방법이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 계산이었다.
  이것을 만드느라 스승님은 얼마나 고생하신 걸까……. 수염도 깎지 못한 지저분한 턱과
헝클어진 머리칼. 자신의 일도 아닌 것에 이렇게나 매달리다니.

  “고마워요. 스승님.”

  “예? 아, 아뇨. 키리님을 도울 수 있다면 제가 더 기쁩니다.”

  정말로 기쁜 듯이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 나는 그 얼굴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다시 고
개를 아래로 묻었다. 눈으로 계산식을 따라간다. 군데군데 묻어있는 붉은 자국은 혈흔일까.
문득 계산식의 맨 끝에 공란이 몇 개 있는 것을 깨달았다.

  “스승님. 촉매와 대체품 쪽이 왜 비어있는 건가요?”

  “예? 아, 그게……그 계산식대로라면 부분 확장에 대하여 성공확률이 가장 높은 방법은
현실적 신체 존재부분의 훼손입니다. 인체의 자가 수복능력에 강제로 마법적 각인을 새겨서
상처의 치료대신 마법적 부분의 확장을 꾀하는 거지만…….”

  “만신창이가 되어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예? 아, 뭐 그렇기도 합니다만……키리님은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스승님. ……그때에 알아냈다면, 이 자상한 남자가 상
처 입는 일은 없었을 것을.



  “가려는 거냐.”

  눈발이 거칠게 날리고 있었다. 늘 입던 흰색의 베옷만을 입은 채 그 설원의 한가운데 서
있는 사부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안쓰러워 보였다. 특히 하얗게 세어버린 백발이.

  “예. 더 이상 있는 다면. 사부님한테 폐를 끼치는 거겠지요.”

  “……이미 넘칠 만큼 끼치지 않았더냐.”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부님.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과 가느다란 몸이
눈발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며 걸어왔다.
  내가 용살검을 만지고 몸이 썩어 들어가게 된 그날부터 일주일간, 오장육부가 썩어 들어
가고 하루를 자고 일어나면 2년을 늙어버리는 내 몸을 지키기 위해 사부님은 필사적이었다.
온 산을 뒤져 약초를 마련해오고, 한시도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용의 신체조차
부패시키는 용살검의 고통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염치가 있으니, 그나마도 지금이나 떠납니다.”

  “그걸로 용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 하느냐.”

  수척한 손가락으로 내가 어깨에 멘 용살검을 가르켜 보이는 사부님. 나는 피식 웃으며 고
개를 끄덕였다.

  “불리한 싸움일수록 지독하게 살아남는 게 저 아닙니까.”

  “……죽는다, 네놈. 절대로 죽는다.”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사부님. 용의 살기가 무섭다고 하지만 저것 보다 무서울
까. 살아남기가 힘들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곳에서
계속 사부님의 수명까지 갉아 먹을 수는 없었다.
  머리칼은 하루 만에 백발이 되었다. 몸부림치는 내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사부님이 택한
것은 나를 안는 것이었다. 완전한 신선(神仙)은 아니라지만 사부님의 몸은 반선(半仙)의 몸.
나와 정을 통함으로서 사부님은 내 고통을 나누어 갔다. 끔찍한 일이었다. 나는 사부님의
몸에 취해 고통을 잊는다지만, 사부님은 내 고통을 남김없이 끌어 자신의 몸에 담는다. 아
름답던 금발은 일주일동안 완전히 세어버리고, 가뜩이나 가늘던 몸은 더욱더 가늘어졌다.
이건 안 된다. 이래선 사부님까지 위험하다.

  “하나를 위해 둘 모두가 죽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이 병신 같은 놈아! 나는……! 나는…….”

  차마 말을 잊지 못하시는 사부님. 나는 조용히 다가가 왼손으로만 사부님을 안았다. 사부
님의 키는 나와 같다. 사부님은 3년만 지나면 내가 더 커질 거라고 했지만, 용살검의 독 때
문에 사춘기를 손해 본 나로서는 그건 불가능해졌다. 나이는 열일곱. 몸은 서른하고도 하나.
그래도 좋은 점은 있군. 사부님과 뺨을 맞댈 수 있다는 게.

  “내가 가지 말아줘. 내 곁에 있어줘. 라고 말하면, 떠나지 않을 거니?”

  “사부님.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사부님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달이 뜨는 밤이면 사
부님의 노랫소리를 듣고, 볕이 밝은 날이면 사부님의 머리칼을 빗기면서.”

  내려서는 눈송이가 사부님과 나의 머리칼을 덮는다. 하지만 하얀색으로도 하얀색을 덧씌
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변하지 않아. 그렇지만 사부님의 머리칼은 내가 없다면 다시 예전의
빛을 찾을 수 있을 테지. 나는 조용히 사부님을 밀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사부님과 나는 노
처녀 스승과 약골 제자인 채로 헤어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럼. 사부님. 저 내려 가겠슴다.”

  “다시는 돌아올 생각 따위는 하지마라. 골이 빈 병신아.”

  허리에 찬 검을 풀어 내 가슴팍에 밀어붙인다. 늘 사부님이 지니고 다니던 긴 검. 내가
그것을 받아들자 사부님은 뒤로 돌아 걷기 시작했다.

  “꼴도 보기 싫은 놈! 가지고 꺼져라!”

  화난 듯한, 슬픈듯한 목소리가 눈발을 타고 나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오두막으로 사라져가는 사부님의 뒷모습. 나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절했다.

  “그간 가르쳐주신 은혜 태산과 같으며, 그간 베풀어주신 은혜 하해와도 같습니다. 불초제
자는 이제 사부님을 떠나오니 부디……부디…….”

  지난 5년간. 나는 저 등을 쫓았고, 누리지 못할 행복을 누렸다. 이제 그 모든 것은 끝이
다. 나는 사부님의 가르침을 어기러, 몸에 피 냄새가 베게하기 위해 산을 내려간다. 어린 제
자가 칼잡이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아무런 검술도 가르쳐주지 않은 사부님. 하지만
나는 그 등을 바라보며 사부님의 모든 것을 배웠고, 사부님을 바라보며 그 이상으로 살아가
간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를 배웠다.
  연인이 없던 나에게 사부님의 품은 따듯했고.
  누이가 없던 나에게 사부님의 목소리는 아름다웠고,
  어미가 없던 나에게 사부님의 웃음은 편안했다.
  얼굴 아래의 눈발이 녹아든다. 방울방울 흘리는 것은 눈물이 아니었다. 이것은 미련과 집
착.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

  “…헤, 헤헷……나한테 역시 이런 건 안 어울려. 그럼, 잘 먹고 잘 살으십쇼. 사부님.”

  자리에서 일어나 산 아래로 달린다. 혹시라도 들려올지 모르는 사부님의 목소리를 피하기
위해. 그리고 멈추어 되돌아 가버릴지도 모르는 나를 위해. 나는 눈발을 헤치며 미친 듯이
산을 달려 내려갔다.



  몇 권 안 되는 책과 공책들. 시약을 만드는데 필요한 도구들. 그리고 몇 벌의 옷과 여비
를 사차원 주머니에 차곡차곡 집어넣는다. 그보다 큰 짐을 챙기는 것은 오전 중에 끝냈다.
아직도 아랫배가 조금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 보다 이
런 별거 아닌 아픔으로 낑낑거리면 스승님을 볼 면목이 없다.

  “바보 같은 사람…….”

  나는 고개를 들어 열린 문틈 저편으로 보이는 스승님의 방을 바라보았다. 계산식에 문제
는 없었다. 비록 마법의 역량은 나보다 낮다고 하여도 꼼꼼하고 신중한 스승님의 마법은 단
하나의 오류도 없이 착착 준비되어갔다.
  마법의 구동범위는 상승마나의 회전식 전부. 안전장치는 모든 방향에서 2중으로 걸려있었
다. 마법진을 그린 것은 자신의 피와 스승님의 피. 그리고 유황과 광석과 36종의 시약. 도
안은 다이아몬드의 마법사의 것을 따라 2중 복합의 내부에 육망성과 일곱 표식. 시간은 정
오에 마나의 움직임은 역류로 흐를 때를 택했다. 사부님은 기동을 위해 진의 중앙에 서고,
나는 마법의 영향을 받기 위해 진의 첨단에 섰다.
  여타의 마법 기동방식과는 반대인 그 방식이 저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사부님의 계산을
믿기에 그냥 그대로 실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비어있던 촉매와 대체품의
자리. 그리고 반대로 역전된 마법의 위치. 마법이 기동되고 신체에 걸리는 마법 특유의 위
화감이 몰려오는 순간. 사부님의 몸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건 반대다. 기동의 순서가
제대로라면 내 몸 쪽이 저렇게 될 텐데? 그 순간 대체품과 촉매가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곳은 비워둔 게 아니었어. 애초부터 필요 없던 거지. 자신의 몸을 대체품으로 삼고, 자신
의 피를 촉매로 쓰면 되니까. 이건 애초부터 나에게 결여된 부분을 키우는 마법 같은 게 아
냐. 이건 이식이다. 스승님은 자신의 부분을 나에게 옮기려는 거야!

  “스승님!”

  “우, 움직이지 마십시오! 마법이 틀어집니다!”

  “무슨 짓이에요! 이런 짓을 했다간 스승님은 죽는다구요!”

  그 순간, 스승님은 눈동자는 웃고 있었다. 저 멍청이 같은 남자. 기뻐하고 있는 거야? 나
를 보석의 마법사로 만들 수 있으니까? 자신의 제자가 꿈을 접지 않아도 되니까?

  “이 바보 멍청이! 당장 그만둬요! 그건 짓 한다고 내가 기뻐할 것 같아요?”

  입으로만 외칠 뿐 섣불리 움직일 수 는 없다. 틀어진 마법이 역류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니까. 그런 와중에도 스승님의 몸은 점점 더 마법에 동조되어가기 시작했다. 주문을
외우기 바로 전 빙긋이 웃는 얼굴로 나에게 대답한다.

  “기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저는 무능한 스승입니다. 가르쳐드릴 것조차 없는 무
능한 스승. 그렇다면 하다못해 제자의 미래 정도는 이루어 주고 싶습니다!”

  정말로 기쁜 듯이, 후회 같은 것은 하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고, 스승님은 그대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특유의 노래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마법진 위를 떠돌며 문양과 표식들을
일깨우기 시작한다. 차가운 감각이 붉게 물들고, 뜨거운 감각이 푸르게 물들어 사라진 마법
회로를 찾으려 든다. 안 돼, 이게 찾아지면 그 다음은……!
  몸은 마법을 찾아. 주문은 스승님의 몸을 잠식한다. 이미 그 몸은 마법진의 부품. 나는 필
사적으로 외쳤다.

  “사람을 죽이고 이룬 미래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에요! 스승님은 나한테 굴레를 씌울
뿐이에요! 강박관념과 죄책감을! 평생 벗을 수 없는 피 냄새의 굴레를!”

  그것이 무아지경이던 스승님의 귀에 닿은 것일까. 계속 이어지던 스승님의 주문이 잠시
주춤했다. 그리고 나는 필사적으로 나를 옭아매는 안전장치의 있어서는 안 되는 균열을 파
고들어 그것을 부수었다. 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려는 스승님의 입술보다 빠르게 마법진
을 구르듯이 벗어났다. 칼로 후벼 파는 듯이 격통이 아랫배에 몰려온다.

  “아으윽!”

  “키, 키리니……커헉!”

  마치 꽃과 같았다. 짙은 냄새를 풍기며 개화하는 붉은 꽃. 뒤틀린 마법의 반작용을 뒤집
어 쓴 스승님은 전신에 절상을 입으며 마법진에서 튕겨나갔다.

  “스승님!”

  격통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다. 필사적으로 한 것은 손가락을 깨물어 나온 피를 사용해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는 것 뿐. 몸의 마력이 제멋대로 날뛰는 바람에 도저히 집중할 수는
없었지만, 필사적으로 그린 마법진을 향해 나는 늘 가지고 다니던 검은 갑옷조각을 집어던
졌다.

  [금주(禁呪)에 몸을 던진 맹약의 기사여! 마모되지 않을 영원의 기사도를 아직 가슴에 새
기고 있다면! 그림자를 걷고 모습을 드러내 나의 명을 들어라!]

  섬광과 솟아오르는 그림자. 늑대의 투구를 쓴 검은 기사가 나타나는 것을 보며 나는 의식
을 잃었고, 깨어나자 병원의 침대 위였다. 스승님은 전신절상으로 2주일간 입원. 나는 가벼
운 진통제만 먹고 병원을 나왔다.
  내가 제자로 있는 한, 스승님은 또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이겠지. 그렇다면 내가 떠나는 수
밖에. 이상할 만치 미련은 없었다. 배울 것을 다 배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더 이상 스승님을
괴롭게 하지 않아도 되어서 일까. 지난 5년간, 나를 받아들여준 낡은 공간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았다.

  “그 동안 고마웠어. 스승님께는 나대신 안부 전해줘……. 그럼 안녕.”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오자 검은 기사는 커다란 짐을 맨 채 방만한 자세로 서있었다.
늑대 모양의 투구의 눈구멍으로 빛나는 형형한 붉은 빛이 명백한 불만을 담고 있다.

  [군주 키리여. 나는 기사지 짐꾼이 아니네만.]

  “그럼 군주가 짐을 지란 말이야? 잔말말고 들어.”

  [흠, 부당한 명령이지만 감수하겠네.]

  건방진 소리를 하고는 앞서 걷기 시작하는 늑대의 기사.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뒷모
습을 바라보다가 뒤를 따랐다. 안녕,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낡은 공방. 안녕, 보
석의 마법사. 그리고 안녕. 좋아한다고 말해주지 못한 바보 같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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