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천하일색 천하일색/격돌의 장

느와르 2004.05.29 22:48 조회 수 : 420

  [두 자루가 모인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두 자루가 한 사람에게 모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천하일색/격돌의 장 - 검투사와 마검사




  장작을 줍기 귀찮아 통째로 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어버린 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불을
붙였다. 불을 붙일 때 조금 버벅대기는 했지만, 자연을 마구 훼손한 모닥불을 피워낸 참은
집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용살검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오른팔을 걷는다. 브
레스에 녹아버린 오른팔대신 솜씨 좋은 마법사에게 의뢰해 만든 의수가 아직 조금 익숙해지
지 않은 상태였다. 마법각인이 전체에 새겨진 은청빛의 의수. 용살검은 그의 몸이 용의 것
이 된 것을 알아낸 후로는 사용 당하는 것을 거부하며 날뛰었고, 결국 용살검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용의 것도, 인간의 것도 아닌 이 오른팔뿐이었다.

  “나를 미워해도 난 널 못 버린다구. 목숨을 구해준 파트너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용살검을 바라보던 참은 문득,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긴 흑발을 휘날리며 조용히 모닥불로 다가오는 아름다운 여인. 참은 거의 반사적으로 휘파
람을 불었고, 그녀는 참을 바라보며 물었다.

  “좀 쉬어가도 될까? 길을 잃어서.”

  “좋을 대로 해. 나도 똑같은걸 잃어버렸거든.”

  조금 고개를 숙여 보이며 참의 맞은편에 앉은 여인은 그리 장작을 몇 개 더 던져 넣는 참
에게 말했다.

  “나는 키리. 키리 가르테아. 당신은?”

  “참 시몬즈다. 그쪽은 마법산가?”

  키리의 허리에 찬 시약벨트에 눈길을 주며 묻는 참. 키리는 조금 고개를 저어보이고는 질
문을 돌려주었다.

  “당신은?”

  “보시다시피 칼잡이지.”

  내동댕이쳐둔 용살검을 턱짓으로 가르켜 보이며 오른팔의 소매를 내리는 참. 키리는 좀
지나치게 거대한 참의 용살검을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용살검 그로테스크 이빌? 저런 걸 잘도……아, 그래서 오른팔이 의수?”

  “아아, 저것 때문에 의수로 바꾼 건 아냐. 원래는 맨몸으로 휘둘렀거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참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키리는 곧 무언가에 생각
이 미친 듯, 참에게 물었다.

  “당신 혹시 1개월쯤 전에 포르켄 분화구의 흑룡을 물리친 남자?”

  “거의 운으로 이긴거니 그런 표현은 삼가줬으면 좋겠군.”

  멋쩍은 듯이 웃던 참은 키리가 천천히 일어나는 것을 보고 웃음을 그쳤다. 왼손의 소매를
걷어 붉은 문신을 드러낸 키리는 오른손을 허리로 가져갔다. 무방비한 자세로 앉은 채 그녀
를 바라보던 참은 정말 감탄했다는 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야, 마검사? 대단한데.”

  “검을 보고나서 놀라는 게 좋을걸. 드래곤 슬레이어.”

  조용히 발검 하는 키리. 모닥불 빛 너머로 그녀의 검을 지그시 바라보던 참은 거의 반사
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용살검을 집어 들었다. 눈앞의 미녀를 적이라고 인식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수초. 그녀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인식하는 것은 그 이하의 속도였다.

  “암검이군?”

  “수검이지?”

  “할건가?”

  “해야겠지?”

  서로 질문만 던진 채 이해하는 대화를 끝마친 둘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조금 거리를 벌
렸다. 용살검을 든 손을 등 뒤로 넘기고 왼손으로 허리에 찬 야명호인을 뽑은 참은, 모닥불
너머 고지식할 정도로 기본자세를 취하고 있는 키리를 보고 피식 웃으며 검을 까딱거렸다.

  “자, 아가씨. 아프게 안할 테니까 오라구.”

  “그쪽이야 말로 여성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실례라는 걸 모르는 거야?”

  소매를 걷어 올린 왼손에 화염의 구를 만들며 중얼거리는 키리. 참은 그거 미안하군, 하
고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모닥불을 가로질렀다. 발치에 차인 모닥불이 불티를 휘날리며 사방
으로 튕겨나간다. 거칠게 휘둘러지는 야명호인이 월하미인과 맞물리고, 키리는 그대로 참의
얼굴에 화염구를 집어던졌다. 이마로 그것을 받아내고 보답으로 용살검을 휘두르는 참. 키
리는 재빨리 옆으로 몸을 피했고, 굉음을 내며 휘둘러진 용살검은 그녀대신 그녀 뒤에 있던
나무를 쪼개버렸다. 용살검을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리고 야명호인을 들어 키리를 겨냥하는
참. 어느새 벨트에서 시약병을 뽑아서 손가락사이마다 끼운 키리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마법이 안 통하는거 보니 드래곤의 피를 뒤집어썼나 보네.”

  “조금은 마시기도 했지.”

  키리는 씨익 웃으며 자신에게 돌아서는 참을 주시한 채로, 시약병의 뚜껑을 입으로 따냈
다. 곧이어 행동. 내던지듯 참에게로 시약을 뿌리고 날카롭게 주문을 외운다.

  [7과 8의 사생수(私生數)! 뚫고, 파고들어, 파헤쳐라!]

  붉고 푸른 시약은 날카로운 침이 되어 참의 두 눈동자를 노렸다. 피한다면 자세가 흐트러
지기에 그냥 눈을 감아버리는 참. 둔탁한 느낌이 눈꺼풀에 맞아 튕겨나가고, 참은 그대로
용살검과 야명호인을 교차시켜 휘둘렀다. 땅이 패이고, 공기가 찢어지는 느낌은 있지만 그
외의 감각은 없다. 참은 뒤로 한 발짝을 내딛어 자세를 좌수중심(左手重心)으로 바꾸고, 야
명호인을 가슴께로 내밀었다. 채앵하고 검이 부딪치는 소리에 맞추어서 눈을 뜬다. 키리는
다시 서너 발자국을 뒤로 물러서서 질렸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채로 잘도…….”

  “감이 조금 좋거든.”

  용살검은 다시 등 뒤의 원래위치. 야명호인은 직선으로 뻗어 키리의 미간을 겨냥하고 있
었다. 이건 불공평해. 나는 저 두 검중 하나에 스치기만 해도 죽는데, 저쪽은 내공격의 반은
무시해 버릴 수 있으니. 키리는 입술을 깨문 채 천천히 월하미인을 늘어트렸다. 아까와는
다른 변칙적인 자세. 참은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곧 땅을 찼다. 자세를 낮
춘 채 무서운 속도로 질주한 참은 그대로 야명호인을 휘둘렀고, 키리는 반 박자 빠르게 공
중으로 뛰어올랐다. 문신을 새긴 왼손으로 월하미인을 옮겨 쥐고 짧은 주문을 말한다. 번득
이는 왼손의 문신. 키리는 중력과, 강화된 왼손의 악력을 사용해 있는 힘껏 참의 등을 내리
쳤다.
  용살검을 부딪칠 수는 없다. 월하미인을 사용한 저런 공격을 견뎌내다간 그대로 두 동강
이 날 테니까. 참은 억지로 몸을 회전시키며 야명호인을 들어올렸다. 허리가 불만을 토로하
고, 어깨가 무리라며 말린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묵살한 덕에 야명호인은 아슬아슬하게
월하미인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대로 땅에 쓰러지는 참. 그리고 그런 그의 가슴에 시약병을
집어던지는 키리. 그녀는 시약병을 집어던지는 자세 그대로 몸을 뒤로 던졌고, 바우웅, 하는
소리를 내며 용살검이 그녀의 가슴께를 스쳐지나갔다.

  [3과 5와 7의 반역수! 적대를 감지하여 중압하라!]

  주문. 그리고 다시 참격. 갑자기 전신을 찍어 누르는 무지막지한 힘에 참은 이를 악물며
야명호인을 내리치듯 집어던졌고, 난폭한 괘도를 그리며 내리쳐진 야명호인은 키리의 가슴
갑옷을 단박에 두 동강냈다. 참은 그대로 땅에 처박히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은 키리
의 다리사이에 야명호인이 박혀들었다.
  짧은 휴식. 키리는 천천히 손을 뻗어 야명호인에게로 가져갔고, 참은 주먹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잠시 호흡이 멎는다. 숨을 죽이고 상대의 호흡을 훔치는 검사간의
싸움. 터트리듯,
  호흡이 시작되면 그것이 신호
  가 떨어지자마자 손을 뻗어
  서 낚아채려는 검이 움찔거리며 뽑
  아낸 검을 팔로 당기며 몸을 일으키
  자마자 쏘아지는 마법을 몸으로 받아내
  고 뒤로 물러난다.
  다시 일어난 채 대치하는 키리와 참. 참은 야명호인의 자루에 묶어둔 실을 천천히 끌어당
겼다. 자국을 내며 끌려간 검이 다시 참의 손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키리는 못 쓰게 대버린 가슴갑옷을 벗으며 중얼거렸다.

  “생긴 건 안 그런데 꽤나 잔머리 쓰네. 당신.”

  “생긴 대로 미인계에는 약해서 말이지. 유비무환이라고 해두면 좋겠는데.”

  “아아, 그래…? [중압!]”

  다시 한 번 전신을 무서운 힘이 찍어 누른다. 속절없이 꺾이는 무릎. 그리고 돌격하는 키
리. 참은 이를 악문 채 오른팔을 쳐올렸다. 의수가 깎여나가며 월하미인의 괘도를 바꾼다.
다시 한 번 뒤로 물러나는 미리. 또다시 목표물을 놓친 야명호인은 공기를 한 움큼 끊어내
고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진저리를 치며 용살검을 내던진 키리는 허리에 차고 있던 다른 칼
을 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이제 익숙해졌어. 익숙해졌다고. 아가씨, 한 번 더 해 봐.”

  “얼마든지. [중압!]”

  외치며 달려든다.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몸의 압력에 입이 찢어져라 웃는 참. 그래, 젠장.
나는 이렇게 패널티가 있는 전투가 즐겁다고! 어깨의 근육을 있는 힘껏 튕겨 야명호인을 쏘
아내듯이 찌른다. 불꽃을 튀기며 맞부딪치는 월하미인. 키리는 중압에 걸린 상태에서도 엄
청난 힘을 발휘하는 참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고, 참은 키리를 튕겨내지도 못할 정도로 자신
을 억제시키는 중압의 힘에 휘파람을 불었다.
  전투는 그대로 재개. 키리가 던지는 마법은 참이 몸으로 받아내고, 참이 휘두르는 검은
키리가 피해낸다. 그 와중에서도 야명호인과 월하미인은 끊임없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겨낸
다. 무효화된 마법이 사방에 마나를 뿌려대고, 피해내는 검이 대기를 산산이 조각낸다. 때로
는 검에 베인 나무가 비명을 지르고. 때로는 마법을 빗맞은 대지가 기겁을 한다. 치밀할 정
도의 기본적인, 그래서 더욱 까다로운 키리의 찌르기. 중압에 걸리지 않았다면 방어 따위는
불가능할, 무지막지한 참의 휘두르기. 서로의 색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두 검사의 싸움은 달
이 천공의 정점에 오를 때쯤에야 겨우 멈추었다. 검을 늘어트린 채 얼굴이 닿을 정도의 거
리에서 동작을 멈춰버린 둘. 야명호인과 월하미인은 각각 키리와 참의 목을 겨냥한 채 움직
이기만 하면 일격필살이 될 터였다. 참은 긴장한 키리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
다.

  “아가씨. 소원이 뭐야?”

  키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참의 움직임에 신경을 쏟은 채 눈동자조차 깜빡이지 않는다. 참
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 소원은 이 세상에 나보다도 강한 놈들이 득시글거리는 거야. 용의 피 때문에 몸이 이
꼴이 되고 나니까 웬만해서는 상처를 입지도 않아서 말이지.”

  “당신, 대체 왜 그렇게 불리한 전투에 집착하는 거야?”

  경계심은 늦추지 않고 질문하는 키리. 참은 짧게 웃고는 키리의 목에서 검을 치웠다. 어
깨를 움찔하며 그대로 그의 목을 찔러버리려다가 멈추는 그녀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
라보며 참은 계속 말을 이었다.

  “과정이 힘들어야 결과가 값지거든.”

  키리는 복잡한 표정으로 참을 바라보다가 검을 거두었다. 팔을 늘어트린 둘의 거리는 여
전히 얼굴이 닿을 정도의 크기. 참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오는 향기가 상당히 낯익다고 느꼈
다. 달밤에 홀로 술을 비우던 그의 스승에게서도 풍기던 향기. 아아, 이건 “여자냄새” 로군.

  “보석의 마법사를 알고 있어?”

  “조금은.”

  “난 그 보석의 마법사가 되고 싶었어. 하지만 내 몸은 마법적인 결함이 있어서 불가능하
니까.”

  “그래서 이 녀석의 힘을 빌리려는 거군.”

  야명호인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리는 참. 고개를 끄덕이던 키리는 그제야 자신과 참의 거
리가 필요이상으로 가깝다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참의 얼굴. 조용한 호흡. 아까까지
흐르던 장난기가 사라진 눈동자. 참은 조용히 고개를 내려 그녀의 입술로 입술을 가져갔다.
이상하게도 거부할 수 없다. 에에? 이런 남자한테? 이, 이대로? 패닉에 빠진 채 별다른 대
처조차 하지 못하는 키리. 참은 그녀의 입술 바로 앞에서 동작을 멈추고는 입을 열었다.

  “그립군.”

  “……에?”

  참은 그녀의 향기와 함께 깊게 숨을 들이마쉬고는 몸을 떨어트렸다. 야명호인을 칼집에
되돌리고, 그것을 풀어낸 참은 이해를 못한 표정으로 서 있는 키리에게 그대로 검을 던졌
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든 키리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참은 용살검을 주워들
고 빙긋이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내 소원보다는 아가씨께 더 도움이 될 소원 같군.”

  “다, 당신! 지금 이걸 포기한다고 하는 거야?”

  그녀에게 야명호인을 건네고 자리를 떠나던 참은 그 소리에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내 이름은 참이다. 한번쯤은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장난스럽게 중얼거린 후에, 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속으로 사라져갔다. 태울 것을 잃
은 모닥불이 사그러지는 소리. 키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내려 야명호인을 바라보
았다.

  “……자기도 내 이름 부르지 않았으면서.”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