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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일색 천하일색/참의 장

느와르 2004.05.25 00:25 조회 수 : 578

  [두 자루가 모인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두 자루가 한 사람에게 모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천하일색/참의 장 - 용과 싸우는 사내


  무모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시끄러워, 이 자식아!"
  
  고막이 터질 것 같은 포효에 마주 악을 쓰며 검을 휘두른다. 공격을 위한 동작도, 방어를
위한 동작도 아니다. 이건 단지 "생존"을 위한 몸부림. 조금이라도 동작을 멈추면 거대한
발톱이 남김없이 몸을 파헤치고 찢어발겨, 주위에 굴러다니는 용암덩어리 속에 파묻어
버리겠지. 젠장, 금강석을 능가하는 강도에 공성추를 능가하는 크기. 투석기의 바위덩어리를
능가하는 파괴력을 지닌 "발"을 지닌 것과 싸우는 멍청이를 대체 뭐라고 말해야한단
말입니까. 사부님.

  [우둔한 인간이여! 고작해야 우리들 용족의 시독(屍毒)을 굳혀 만들었을 뿐인 그런
사검(邪劍)으로 이 몸의 숨통을 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인가!]

  “아아, 그래. 우둔한 인간. 고명하신 용족의 깜둥이께서는 고상한 어투만 쓰시는군. 우리
사부님 같았으면 골빈 머저리나, 병신같은 또라이 라고 했을 텐데. 근데, 그거 아냐,
깜둥아? 어차피 욕이란 건 지적수준이랑은 관계없어!"

  기합처럼 내지르며 발톱을 쳐낸다. 곧바로 오는 다른 발의 모습도 쳐냈다. 나야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고개가 아픈데다가 헛짓하면 뒈질 지경이니 잘은 모르지만 지금 저
깜둥이 드래곤의 모습은 개미를 밟아 죽이려 허우적대는 코끼리 같은 꼬락서니일거다. 내가
지금 그런 구경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게 유감이군.

  [건방진 소리를 하는 입이로군!]
  
  “브레스는 못 뿜어도 쓸 만하지!"
  
  손에 든 무기만이 지금 내가 믿을 수 있는 모든 것. 마흔 네 마리 드래곤의 시체를 썩힌
시독에 용의 뼈를 사백 마흔 네 번 담금질해 만든 龍 殺 劍(Dragon Slayer) 그로테스크
이빌. 인간이라면 그 검을 만지는 것만으로 몸이 썩어 들어가는 최악의 검은 그만큼
용에게도 효과적인 병기였다.
  
  [어째서 죽기 위한 싸움을 하느냐, 아둔한 자여!]

  “죽기 위한 싸움? 나한텐 살기 위한 싸움이야! 모르면 닥치고 뒈지라고!"

  멋도 모르고 이 검에 손을 댄 반작용(業報)로 내 몸은 이미 안쪽에서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다. 심장은 시꺼멓게 죽은피를 전신에 보내고, 폐는 호흡할 때마다 각혈을 일삼았다.
고통에 머리는 하얗게 세고 자고 일어날 때마다 몸이 늙어버려, 아직 열일곱인 몸뚱아리는
30살도 넘는 외견을 가지게 됐다. 사부님의 지옥 같은 수련이 없었다면 지금쯤 지옥을
헤매고 있었을 터, 나에게 남은 생존의 방식은 어떻게든 용을 죽여 그 피를 마시고, 그
피로 몸을 씻는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 만신창이인 몸을 굴려서 만신창이의 싸움을 한다.
  용살검은 용을 죽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병기. 그 병기는 가진 자의 운명을 용을 죽이는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정말 귀찮게 하는 인간이군!]

  몇 번을 발을 쳐냈을까, 엄지발톱이 부서져나간 검은 드래곤은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엄청난 풍압 때문에 몸이 용암호의 가장자리로 속절없이 미끄러져간다. 이를
악물고 두 번째의 검을 근처의 바위에 박아 넣었다. 용의 발톱을 단 한번 견딘 것만으로도
폐품이 되어버린 사부님의 검. 볼썽사나울 정도로 그 검에 매달린 채 풍압을 견디고 있는데
검은 드래곤은 목을 곧추세우고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BLESS[絶對破壞權能]

  “이런 빌어먹으으으으으을!"

  [크아아아아아아아아!]

  포효가 쏘아진 직후에는 거의 정신이 나갈 정도였다. 흑색룡(DRAGON Type=Black)의
브레스는 자신의 위에 축척된 순도 200%의 용해액을 역류시켜 쏘아내는 가히 구역질 같은
기술이다. 그것에 닿은 것은 그게 뭐든 간에 녹아버리며 그 기세라는 것은 가히 해일의
수준. 산? 구덩이가 되어 버린다. 바다? 사막이 되어 버린다. 숲? 악취만으로도 사람을 죽여
버리는 늪이 되어버리겠지. 간단히 말하면 저걸 뒤집어쓰고 살아날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다는 거다. 하지만 나는.

  “살아날 방법이 있으니까 용을 잡으러 온 거다아아!"

  어깨까지 녹아 사라져버린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용살검을 움켜쥐며 몸을 일으켰다.
용살검은 용의 모든 것을 죽인다. 그것은 브레스라도 마찬가지. 비록 검을 쥐고 있던
오른팔은 완전히 녹아떨어지고 갑옷도 군데군데 녹아 몸에 들러붙어 밀랍인형 같은
꼴이지만 기가 막히게도 아직은 살아있다. 다리가 비틀거리고 몸은 내가 뱉어낸 피 때문에
만신창이, 게다가 몸을 파고들어가 살과 섞여버린 금속의 갑옷은 움직일 때마다 몸을
도려내는 것 같다. 하지만 얻은 걸로 따지면 내가 이득이지. 아직 살아있고, 전장은 평지가
되어버린 데다가,
  놈은 브레스를 세 번 다 썼으니까.

  [마, 말도 안 돼!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빗나갔다고 해도, 어떻게 세 번째마저!]

  “니가 비웃은 이 웃기는 사검 덕분이다! 이제 좀 대가리가 차가워졌냐. 이 토악질 대장
도마뱀아!"

  빌어먹을, 왼손으로 감당하기에 이 젠장할 검은 너무 무겁고, 몸의 꼴은 정말 말이
아니다. 게다가 놀란 표정에서 분노한 표정으로 바뀌어 가는 집채만 한 용의 모습을
감당하고 있자니 정말 오줌을 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내 몸의 무방비함을
알았는지 부패의 침식은 이제 몸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썩어 들어간
왼손의 손가락이 툭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웃길 정도로 고통이 안 느껴졌다. 아마 저
녀석의 드래곤 피어(龍眼=視線重壓)에 중독이 되 버린 몸이 뇌와 신경의 연결을 얼려버린
탓이겠지.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곤란했다. 녀석의 몸에 칼을 박지 않으면
나는 이길 수 없으니까.

  [좋다. 인간! 네놈의 그 지독한 집념은 인정하지! 하지만 그래도 네놈이 지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 내 친히 네놈의 구역질나는 몸을 집어삼켜주마!]

  거대한 검은 재해가 공중으로 치솟아올라 선회한다. 거의 천공의 정점 까지 솟아오른 검은
몸은 곧바로 화살이 되어 내리꽂혔다. 압도적일 급강하. 산이 곤두박질치는듯한 숨 막히는
기분. 공포를 넘어선 경악이나 다름없는 광경이지만 조금 덜 떨어진 내 생존본능이란 놈은
이 상황의 해결책을 미친 듯이 떠올리기 시작했다.
  피한다. 불가능해. 죽는다.
  숨는다. 불가능해. 죽는다.
  도망친다. 불가능해. 죽는다.
  막는다. 불가능해. 죽는다.
  그렇다고 그냥 죽을 수는 없지.
  미친 듯이 퍼져나가는 용살검의 독. 허리띠를 풀어 순식간에 손을 용살검에 묶어버리고
진득거리는 대지에 발을 밀어 넣어 고정시켰다.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번득이는 비늘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공기를 끊는 매서운 소리가 폭음처럼 주위를 메운다. 입주위의 근육이
파르르 떨리며 뒤로 끌어당겨졌다.
  ……내 몸은 이런 미친 상황에서도 웃고 있는 건가. 역시 사부님이 기막혀 할만도 하군.
비틀거리는 몸으로 무릎을 꿇어 자세를 고정하며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이
빌어먹을 검 때문에 여기를 온 게 아니야. 나는 위험함을 바라고 있는 거다. 말도 안 되는
전투에서 목숨이 안남아날 짓을 하며 그것을 즐기고 있는 거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대책
없는 미친놈인 나는. 그 정도의 싸움을 해서라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껴보고 싶어 한
거다.

  “어디, 누가 죽나 해보자. 이 자식아아아아아아!"

  코앞까지 다가온 아가리에 외치는 목소리는 스스로가 듣기에도 즐겁다. 몸을 있는 힘껏
뒤로 젖혔다가 온몸을 앞으로 내쏘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걸로 이 미친 짓은 끝이…….




  “우아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눈을 뜨자 눈앞에 밤하늘이 있었다. 떨어져 내릴 것 같은 수많은 별들.
수없이 많이 본 것 같지만 낮선 광경이 눈앞에 있다. 그렇게 똑같아 보이는 게 수도 없이
번쩍이는데도. 밤하늘은 굉장히 아름답고, 터무니없이 평화로웠다. 사부님을 처음 만날
때에도 나는 이 꼴이었다. 수도 없는 늑대들과 싸워서 만신창이가 된 몸뚱아리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그때부터 이 기벽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내 역량으로는 감당이
불가능할 정도로 터무니없는 상대와 싸워서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그래, 승패따위 관계가
없었다. 나는 그냥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싸웠고, 살아남았다.
  그래, 나는 혼자서 목숨을 지키려고 늑대와 싸워 살아났을 그때에 중독되어 버린 것이다.
"생존이라는 것을 더욱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상황"에.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살아있지."

  몸을 일으켜 주위를 돌아본다. 거대한 유해의 언덕. 거대한 드래곤의 뼈가 마치 신전이나
무언가의 건축물 같은 모습을 하고 주위에 둘러쳐져 있었다. 내가 누워있는 곳은 그 신전의
지혜의 전당. 즉, 두개골의 안이었다. 마지막 순간, 필사의 각오로 내지른 용살검이 드래곤의
턱을 부수고 뇌까지 침투하여 그 치명적인 독을 전신으로 만개시켰겠지. 용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끔찍한 병기에 서린 지독한 독기는 순식간에 드래곤의 전신을 부패시켜버리고,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내 상처를 회복시켜 준 것일 터. 나는 손에 묶여있는 용살검을
옆으로 치우고 왼손을 들어올렸다. 떨어져 나갔을 새끼손가락도 제자리에 붙어있고, 놈의
아가리에 검을 처넣는 순간 부러졌을 어깨도 아무 무리 없이 움직였다.

  “오른손은……재생되지 못했나."

  오른쪽 어깨는 새로 돋아난 살 때문에 새하얄 뿐 팔은 없었다. 뭐, 당연한 결과겠지.
제생시킬 건덕지도 없이 완전히 녹아버렸으니까.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용의 피를
받아들인 것이 확실한지 몸은 더할 나위 없이 가볍고 힘이 넘치고 있었다.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 중에 녹아버리지 않은 놈을 꺼내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후우……."

  숨을 들이 마시고 들고 있던 녀석을 단박에 배에 찔러 넣었다. 쨍강하고 부러져나가는
단검. 음. 사부님이 보셨으면 당장 차력을 하라고 등을 떠밀었겠군. 쓴웃음을 지으며
용살검을 들어올렸다. 할 일을 모두 마친 이상 더 이상 볼일은 없다. 이젠 용보다도 더 강한
걸 찾아다녀야겠군. 자리를 뜨려는데 문득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지상으로부터 상당히 위
뻐끔히 뚫려있는 구멍에서 금빛 폭포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언가하고 자세히 보자 그것은
황금의 폭포였다. 금화. 금괴. 금으로 만든 장신구들 사이에 번쩍이는 보석과 찬란한
보구들이 섞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드래곤의 굴은 보물로 가득 차 있다던가……자기 브레스에 자기 굴을
박살내다니 생각보다 멍청한 놈 아냐?"

  뻥하고 놈의 이빨을 걷어차며 보물의 폭포로 다가갔다. 별로 이런 것에 욕심은 없지만,
팔을 재생시키는 데는 돈이 많이 든다. 마법사의 창고를 채워줄 정도의 금화는 챙겨가야겠지.
대충 끌고 갈 수 있을만한 적당한 상자를 찾고 있는데, 금화의 언덕에 거꾸로 박혀있는
칼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음?"

  주위에 굴러다니는 수많은 보검들에 비하면 수수한 자루였지만 왠지 모르게 사람을
잡아끄는 모습. 천천히 다가가 검을 집어 들었다. 칼집과 자루를 묶고 있는 금색 끈을
이빨로 끊어내고 검을 뽑아 그 칼날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완전히 그 검에 매료당했다.
  모양이 특이하다는 거나, 주조법이 기묘하다거나하는 종류가 아니었다. 모양을 따지자면
평범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그 것은 명검이었다. 이 검에 비하면 저기 굴러다니는
것들은 몽땅 과도나 다름없는 쓰레기들이지.

  “천하일색의 수검. 야명호인……."

  암검과 수검 두 자루가 한사람의 손 안에 모이면 단 하나의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돌격검
천하일색. 그것의 능력은 가히 절대적으로, 심지어는 소원이 세계의 섭리(二十七段運命木)에
반한다 하여도 이루어준다고 한다.

  “이런 걸 잘도 품고 있었군."

  이건 정말 예상외의 수입이다. 검사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당연히 자신의 목숨. 하지만
아주 예외로 자신의 목숨보다 귀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명검이다. 하다못해 하늘 아래 두
자루밖에 없는 최강의 검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큭. 크하하하.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미친 듯이 웃었다. 전투에서 이긴 것은 말할 수 없이 기쁘고, 이런 검을 얻은 것은 더욱더
기쁘다. 사부님은 내가 사는 방식은 자기가 가진 것을 내던지며 사는 삶이라고 했지만 그런
사고방식이기에 이런 것을 얻은 것이 아닌가.

  “하하하! 나는 살아있다! 나는 승리자다! 나는 이 검의 주인이다아!"

  검은 용의 묘지 위에 서서 평온한 밤하늘을 향해. 나는 그렇게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천하일색 수검 야명호인 소유자 - 참 시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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