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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 막간 - 메로메로 마고 (3)





너무 피곤했다.

우중충했던 날씨는 결국 오전부터 비를 떨어트렸고, 그에 맞춰 내 기분은 점점 다운그레이드 되어 갔다.

수업도 거의 듣는 둥 마는 둥,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아지랑이 나래로 돌아 왔을 때, 침대가 마치 수렁처럼 나를 빨아들였다.
마치 몸 전체가 녹아버릴 것 같은 감각 속에서, 그날 아침의 악몽이 또 나를 괴롭혔다.

마고씨의 체취가 아직까지 침대에 남아있는 듯 했다.

그 분홍빛 기억이 몸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난 기적적으로 침대에서 몸을 뜯어내듯 일으킨 후, 고개를 흔들어 뇌리에 각인된 마고씨의 부드러운 눈매를 머리에서 지우려고 애썼다.
가늘 가늘한 몸매에서 유혹적으로 묻어나오는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 머리 두개나 작은 여자아이의 몸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선명한 뇌쇄.

"아아악! 난 로리타가 아냐! 로리타가 아냐!"

스스로가 놀랄만큼 절규한다.

"놀랍도록 설득력 없군."

그러게, 라고 대답할 뻔 했다.
딱딱하게 굳어버려 잘 움직이지 않는 목을 끼기긱 소리 날 정도로 억지로 돌려 보니, 어느새 창문이 훌쩍 열려 있었다.
그리고 창문틀에 비에 흠뻑 젖은 채 걸터앉아 있는 것은, 내 오늘 하루를 지옥으로 보내버린 주범이었다.

"마... 마고씨?"

"마고로 충분해."

마고씨는 훌쩍 뛰어내려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몸을 타고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마고씨는 입을 삼각형 모양으로 만들고, 눈살을 찌푸렸다.

"닦을 거라도 줘 봐. 이런 때라도 암컷에게 점수 따 놓는게 수컷의 의무 아닌가?"

익숙한 독설, 내려다봐도 충분한 여자아이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 대상이 마고씨라면 난 할 말보다는 수건을 먼저 찾게 된다. 재빨리 서랍에서 빅 사이즈의 수건을 꺼내서 내밀자, 그녀는 마치 이불을 뒤집어쓰듯 머리를 닦았다. 

보통 머리나  맨살 정도라면 수건으로 닦는 걸로 충분하지만, 젖은 옷은 수건 정도로는 어림 없다.

같은 생각이었는지 마고씨는 교복 블라우스의 앞섶을 들어올려 빗물을 짜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그녀의 새하얀 복부와 조그맣게 파인 배꼽이 훌렁 드러났기 때문에,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빗물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은, 어떤 의미에서는 맨몸보다 위험하다.

시선을 둘 곳이 없다, 고개 돌린 것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창문을 닫는다.

"아우우, 왜 안 벗겨져!"

뒤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물에 젖은 무언가가 철벅거리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등을 타고 흐르는 한기가 느껴진다.
뭘까, 뒤에서 과연 무슨 가공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이봐, 너 남는 옷 없어?"

"나, 남는 옷...?"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마고씨가 불렀기 때문이다. 결코 내 본능과는 한치의 관련도 없다.
바닥에 널브러진 교복과 하얀색의 얇은 천조각,  그리고 수건으로 겨우 몸을 가린 조그마한 체구의 소녀.
솔직히 말해서, 에로틱하다는 느낌 보다는 이걸 봤다가는 죽는다는 생각이 앞섰다.

"우와아아아악?!"

그녀가 내 비명소리에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뭐야. 시끄럽잖아!"

"죄, 죄송해요. 전 무심코, 으아!"

마고씨에게 창피를 줬다, 눈으로 능욕했어, 혹시 눈을 뽑아내 버리면 용서해주지 않을까?
그녀는 내게 있어서,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존재다.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다. 이 사람을 건드리면 죽게 된다고, 그 순간 폭탄의 스위치가 들어가고, 세상은 멸망한다. 그런 엔딩이 펼쳐지게 된다.

"진정해 멍청아! 야! 정신차려!"

마고씨가 짜증난다는 듯 자신의 옷가지를 패닉에 휩싸인 내게 던졌다.
물을 잘 먹은 옷가지들은 내 얼굴에 철벅 하고 달라붙어 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이거, 왜 온기가 있는 걸까. 아하하. 마고씨 제 얼굴에 붙은 이거 묘하게 하얀색이네요.

그때, 바닥이 밀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세상이 빙글 돌았다.

내가 마고씨의 젖은 옷을 밟고 미끌어져서 넘어지고 있는 도중이라는 것을 납득한 것 까진 좋았지만, 날려가는 도중에 그런 납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고씨는 상황 파악이 덜 된듯 놀란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고씨, 피하지 않으면 부딪...

"하욱!"

다시 정신을 차릴 때 지 1~2초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넘어질 때 부딪힌 이곳 저곳이 아팠지만, 그 아픔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숨막히는 장면이 내 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마고씨는 아직까지 상황 파악을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덮쳐 누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임시로 의복의 역할을 해주던 수건은 완전히 개방되어, 마고씨의 실팍하게 솟아오른 가슴이 내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조그마한 첨단 부분은 깜찍한 분홍빛, 어느 새 마고씨의 가슴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 이제 죽는 거지?

공포도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포기한 체 결과를 기다리게 만든다.

"하아."

마고씨의 호흡이 불안정하다.
얼굴을 쳐다보니, 마고씨는 그 멍한 시선 그대로 내 눈을 쫓아왔다.
이게 나의 끝인가, 라는 느낌으로 조용히 눈을 감으려 했을 때, 마고씨의 조그마한 입술이 움직였다.

"... 너 때문에 태려한테 혼났어."

"네?"

도대체 무슨 말인가, 혼났다니? 마고씨가?

"태려 싫어... 정작 중요할 땐 내 편이 아냐. ...이제 태려 따위, 절대 보지 않을거야."

그녀의 얼굴은 열에 들떠 있었다.
흠칫해서 이마를 만져보자, 한겨울에 난로 위에있는 주전자를 만진 것 처럼 뜨거웠다.
아마 비를 맞고 그렇게 서 있어서 감기에 걸려버린 거겠지.

내가 허둥거리며 일어나려하자, 조그마한 손이 내 옷깃을 꾹 잡았다.

"... 흑."

마고씨는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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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코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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