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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것도 모르고 생활을 계속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뉴욕에 초래할 이변을 알아차린 사람들도 있었다. 근원의 소용돌이에 닿을수 있거나, 필사적인 소원을 이룰 수 있거나, 그동안 갈고닦은 마술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기도 한.

 

  그들 중 한 마술사는 단순히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황금의 잔을 위한 쟁탈전에 직접 참가하기로 했다.

 

  그러나 영령을 부르는 영창이 반쯤 끝났을 무렵 마술사는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 위협이 있었는지, 그냥 단순한 변덕이었는지, 혹은 원하는 영령이 소환되지 않으리라는 예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약간이나마 의식이 진행되었음은 사실이고, 또한 그 부름이 영령의 좌의 끄트머리에나마 간신히 닿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무도 남지 않은 자리…… 소환진 위에 거무칙칙한 연기에 감싸인 무언가가 서서히 윤곽을 갖추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마술사는 기절할듯 놀랐을 것이다.

 

 

*

 

 

  7시가 되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겨울방학인데도 이렇게 평소처럼 눈이 뜨이는걸 보니까 습관이 무섭긴 한가 봐. 물론 내가 품행방정한 우수생이요, 바른 생활 청소년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좀 더 자고 싶다는 생각을 이불과 함께 뻥 차버리고 나는 침대 밖으로 뛰어내렸다. 자고로 아침은 밝게! 피곤이 날아갈 정도로 기운차게! 쭉쭉 기지개를 펴서 팔다리를 풀어주고(뚜둑 하는 소리가 났다. 이 나이에?!) 나는 아침 인사를 하기 위해 제시카의 침대 쪽으로 몸을 홱 돌렸-

  -다가 제시카가 아니라 제시카의 기절 베개, 일명 꿀잠베개와 마주쳤다. 아, 집에 갔었지.

 

  으으음. 방학이 시작된지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도 적응이 안된다. 3개월이 좀 넘도록 같은 방을 써서 그런걸까? 처음 만났을 때는 방 안에서 신발을 신을 수 있는지에 대해 심오한 토론을 나누느라 사이가 좀 안좋았었는데. 어느새 없으면 이렇게 허전한걸 보니까 역시 세상 일은 두고 봐야 한다. -어라, 잠깐만. 나 지금 뭔가 깨달음을 얻은거 같아!

 

  세상에. 이렇게 아침부터 성장하게 되다니, 오늘도 역시 나는 운이 좋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내 어른스러움에 대한 뿌듯함과 벅차오름을 느꼈다. 물론 나는 지금도 예의바르고 이지적이고 의젓한 청소년이지만 이렇게 한걸음 한걸음 걸어나가서 참된 어른이 되는 거겠지. 응응.

 

  좋아, 이 기세야!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얼굴을 씻기 위해 욕실로 달려갔다.

 

  이렇게 기숙사 안에만 있을수는 없었다. 여기는 뉴욕! 그리고 맨해튼! 패션, 예술, 금융의 첨단을 달리는 도시다. 그리고 나는 지금 겨울방학중이라 시간이 아주아주 많고. 그 말은 즉,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지성과 교양과 낭만과…… 아무튼 여러 귀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평소에 학교와 클럽과 자원봉사 등으로 미뤄뒀던 일도 모두! 얼른 나가지 않으면!

 

  온 몸을 뽀득뽀득 닦고, 양치도 하고, 신발과 코트도 제대로 입고 나서 나는 담당 선생님의 엄격한 체크아웃 절차를 문제 없이 통과하고 휴대전화-학교 밖에선 꼭 휴대해야 하고 전원을 끄면 안된단다-도 받았다. 그대로 기숙사 로비로 나가서 문을 열면, 와우, 아직 겨울이라 어둑어둑한데도 출근하는 사람들의 인파가! 역시 빨리 나오기를 잘했다. 뉴욕의 아침은 이렇게나 빠른걸!

 

  나는 잠깐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겨울의 아침 하늘은 아직 어두웠지만,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것이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화창한 하늘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최고야!

  눈 앞 거리의 직장인들-커피를 들고 바삐 걸음을 옮기는-에게 죄송스러움을 느끼며, 심호흡을 하고, 나는 밖으로 곧바로 달려나갔다.

 

  시간은 많고 가야할 장소는 많았다.

  오늘은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고 어떤 일을 해볼까나!

 

 

*

 

 

  도시에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그것'은 천천히 움직였다. 얼핏 보면 사람 같기는 하지만, 진짜 사람이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짙은 안개로 감싸여 있는듯, 혹은 안개 그 자체인듯-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하여 천천히 무너져가고 있었으니까.

 

  제대로 된 모습도, 이성도 갖추지 못한 채 그것은 오직 한가지의 일념만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

 

 

  기세 좋게 나온 건 좋았는데 얼마 안 가서 경찰 아저씨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아저씨 가라사대, '이렇게 이른 시간에 혼자서는 위험하단다! 부모님은 어디 가셨니?'라고. 나는 초등학생이 아닌데! 물론 내가 미국 사람들보다 어려 보인다는 건 알고 있다. 진짜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키도 아아아아아주 약간은 작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엿한 만 15세의 고등학생이고, 무엇보다 키는 더 자랄 예정이니까 전혀 문제가 되지 않, 않는다!

  그런데도 아저씨들은 내 말을 통 믿어주시지 않아서, 학생증과 필살기 전화 통화-담당 선생님!-를 동원해서야 나는 다시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너무해.

 

  "미안하구나, 괜한 오해를 해서……."

 

  하지만 연신 사과하시는 아저씨의 모습에 항의하려던 마음은 저절로 쑥 내려가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단순하기도 하지! 열심히 손사래치며 나는 말했다.

 

  "괜찮아요! 마음 쓰지 마세요!"

 

  비록 마음에 약간 기스가 나기는 했지만 내가 미국 사람들보다(ry)는 사실이니까! 내가 좀더 키가 크고 나이를 조금 먹으면 이런 일도 이제는 없어질 것이다. 오히려 뉴욕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계시다는 뜻이니까 좋아해야 할 일이지. 그렇고 말고.

  내가 이런 생각을 말씀드리자 아저씨는 겸연쩍은 듯 미소지으셨다.

 

 

  "고맙구나. 그래도 요즘은 좀 나아진 편이란다. 얼마전보다는 범죄율이 좀 줄어들었거든."

  "오? 정말요?"

  "뉴스에도 나오잖니? 범인들이 기절한채 경찰서 앞에서 발견되고는 한다고."

  "아아, 그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 기숙사 로비에 꽂힌 신문에서 봤다. 'XX 사건의 범인들, 경찰서 앞에서 발견되어……' '할렘의 총격전, 경찰이 출동했을 때에는 이미 모두 기절한 채 진압된 상태' 등등의 기사가 좌르륵 있었지. 흠, 어쩐지 데자뷰가 느껴지는데! 구체적으로는 빨갛고 파란 슈트를 입고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는……

 

 

  "하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어라, 나 혹시 사토라레였던 걸까? 세상에, 너무 무섭다. 오늘만 해도 옆을 스쳐지나간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데 지금까지 대체 몇명의 사람들이 내 생각을 읽었을…… 리가 없지!! 나도 모르게 소리내서 말했나 보다. 유치원생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뭔 망신이람! 경찰 아저씨의 웃음에 얼굴이 확확 뜨거워지는게 느껴져 양손으로 홱 얼굴을 가렸다.

  게다가 경찰 아저씨! 아직 저를 초등학생으로 대하고 계신거 같은데요!

 

  ……으으. 그렇지만 나도 안다. 경찰 아저씨는 내게 이미 사과하셨고, 나는 이미 사과를 받아들였으니 더 이상 그 문제로 왈가왈부할수는 없다는 거. 나는 지나간 일을 붙잡고 늘어지지 않는 어엿한 청소년이니까! 그렇지만 얼굴이 빨개진 것도 모자라서 입술이 자꾸 삐죽삐죽거리려는 바람에 나는 손바닥을 입에 대고 꾹 눌러야 했다.

 

  아, 그래도 만약, 만약 정말 진짜로 그런 히어로 같은 사람이 나타난 거라면, 좀 멋지기는 할 것 같다.

  아직 영화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기도 하겠지만, 멋지잖아. 남을 위해 솔선수범하는 정의의 영웅 같은 거.

  물론 어린애 같다는 생각인건 나도 알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 정도는 해볼 수 있는거 아니겠어. 흥흥.

 

 

*

 

 

  그러나 제대로 형체조차 갖추지 못한 몸으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특히나 지금은.

  한계를 모르고 솟아오른 돌과 쇠로 이루어진 숲 속에서, 그것은 결국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쓰러졌다.

  조금만 더 가면 됐는데,

  이제 곧 이었는데,

  이대로라면 정신도 육체도 산산히 부서져서-

 

 

*

 

 

  "우햐아아아……."

 

 

  잠시 벤치에 앉아서 종아리를 톡톡 두드렸다. 역시 재밌는 걸 할 때는 시간이 훌쩍훌쩍 간다고, 기숙사를 나왔던 건 아침이었는데 어느덧 거의 저녁 네시를 넘었다. 우와아.

  정말, 정말정말 많이 돌아다녔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도 보고, 센트럴 파크도 가고, 구겐하임 미술관도 가보고. 아무튼 평소에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일들을 잔뜩 했다. 그야말로 보람찬 하루!

  -였기는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또 수박 겉핥기 식이었던거 같기도 하고? 으으으음. 내 몸이 여섯개 쯤 되었으면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볼 수 있었을 텐데.

 

  아냐. 하지만 괜찮다. 아직 겨울방학은 아직 많이 남았고, 오늘 가봤다고 또 가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정 뭣하면 내일이라도 바로 갈 수 있다. 어쩌면 오늘 밤에도- 통금 시간 전에 다시 나가보면 가볼수는 있을 거 같은데 아침에 초등학생으로 오해받아서 붙잡혔던 걸 생각하면 제대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흑흑. 불합리해.

 

  아무튼 그런 의미로, 이제는 슬슬 돌아가야 될 시간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다리를 안마해주고(내일 근육통 생기는건 아니겠지?), 옆에 놓아두었던 모 슈퍼마켓의 봉투를 품에 안았다. 음…… 좀 많이 산거 같기는 하지만 오늘은 많이 돌아다녔으니까! 열심히 걸어다닌 나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자. 게다가 맛있으면 0칼로리랬어. 나는 힘차게 벤치에서 일어났다.

 

  걸어가며 힐끔 올려다본 하늘은 푸른 빛이 조금 바래고, 거기에 귤색이 더해져 점점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칙칙한 회색빛을 잠시 벗고 노을빛으로 물든 건물들, 길게 주우우욱 늘어진 그림자. 여기에 와서 노을을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혼자서 느긋하게 노을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왜, 있잖아. 아침에 일어나서 파란 하늘을 보았을 때라던가, 어느새 흐드러지게 피어난 벗꽃을 볼 때 마음이 찌르르해지는 그런 거. 일본어로도 영어로도 표현하기가 어려운 기분이지만, 아무튼, 뉴욕의 노을은 마음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는게 틀림없다.

 

  오, 잠깐만. 나 방금 뭔가 시적이었던거 같은데.

 

  아침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오늘은 왠지 여러모로 성장의 계기가 되는 날인거 같다! 나는 눈을 감고-걸으면서 눈 감으면 위험한 건 알지만 앞에 부딪칠 게 없다는 건 확인했다!-다시 한번 머리끝까지 차오른 뿌듯함을 느꼈다. 좋아, 좋아. 이 기세야! 이 기세로 겨울 방학을 넘어 2학기까지 단번에 돌파하는거야! 아니, 대학까지! 나는 속으로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힘차게 걸으려다…… 가, 잠깐 멈췄다. 지금 네 시를 넘었지. 관광객-언제나 많은-과 직장인 퇴근이 겹치는 시간!

!

  지금 지하철은 지옥이 되어 있을 확률이 10000%다. 택시는 어불성설(퇴근 시간에 맨해튼 도로 위를 달리겠다구????)이고.

  이제 정말로 다리가 아파오기는 하지만, 어차피 아픈 거 조금만 더 걷는게 좋을거 같다. 나는 지하철 역사로 향하던 루트를 기숙사 직통으로 바꿨다.

 

 

*

 

  형태도, 사고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건만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선명했다.

  만약 모래알 같은 이성이 사라진다면, 그 뒤에는 분명히 끝 모를 ……만이 있겠지.

  그 전에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그 때였다.

 

  -괜찮아요?!

 

   거의 비명 같이 외치며 달려온 누군가.

  그것은 한참을 들여다보아야 간신히 고개-얼굴-눈이라고 특정할 수 있을 부분을 들었다.

  긴 머리카락과 하얀 얼굴, 작은 체구의 소녀는-

 

 

*

 

 

  점점 전광판에는 불이 켜지기 시작하고, 거리는 쏟아져나온 직장인들과 관광객, 그리고 주민들로 북적였다. 키가 작, 아니, 클 예정이라는 건 이런 때에 좋다. 틈을 비집고 나가기가 좋거든! 물론 잘못하면 인파에 밀려나기도 딱 좋지만 그런건 타이밍을 잘 맞추면 어떻게든 된다. 지금까지 배운 기술(?)과 체구를 이용하여 나는 사람들 사이를 쏙쏙 빠져나왔다. 휴! 이래야 뉴욕이지!

 

  ……아, 그런데 딱 하나, 그동안의 뉴욕과는 조금 다른게 있다. 그동안이라고 하기에는 바로 며칠 전부터 이랬기는 한데.

  나는 잠깐 봉투를 안고 있던 왼손을 풀고 몇 번 허공을 쥐어보았다. 응, 역시 예전에 느낀 그대로다. 끈적끈적한, 눈에 보이지 않은 무언가가 공기에 가득찬 느낌. 꼭 안개가 꼈을 때나 비가 내리기 직전과 비슷한데 요즘 날씨는 너무나 맑고, 곧 비나 눈이 온다는 소식도 없고, 무엇보다 휴대폰으로 확인할 수 있는 습도수치부터가 평소와 똑같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고대하는 사람들도 많은 거 같고 나도 그 중에 한명이지만, 아무튼. 그러니까 습기는 아니라는 뜻인데.

  딱히 뉴스에서 이상 현상이 보도되는 것도 아니고, 검색해도 안 나오는걸 보면 내 기분 탓인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이 느낌은-몇 번 더 허공을 휘저어보았다-진짠데. 게다가 뭔가 익숙한거 같기도…… 하고……? 응. 익숙한게 맞다. 그런데 그 익숙하다는 것 자체만 생각이 나고 나머지는 전혀 모르겠다!

  

  으으으으음. 뭘까, 뭘까! 열심히 머릿속을 살펴보고 일단 기억나는 건 전부 끌어내서 먼지를 털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긴, 이렇게 길거리에서 내가 고민한다고 공기가 확 가벼워질거였다면 이미 진작에 그렇게 됐을거 같다. 칫.

  저번 시험에서의,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을 내가 알고 있는거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 그래서 더 화가 났던 때의 데자뷰를 느끼며 나는 걸음을 뗐다. 일단 기숙사에 들어가서 다시 생각해보자. 거기서 찬찬히 생각해보면 답이 떠오를지도 몰라. 응, 분명해!

 

  그렇게 힘차게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응?"

 

 

  주변이, 한순간에 뒤집혔다.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하늘과 땅이 거꾸로 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비유적으로,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

  나는 아까처럼 손을 들어서 허공을 쥐어보려다- 관뒀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거든. 바로 방금 전까지 내 고민의 원인이 되었던 '무언가'는 그래도 공기 속에 섞여든 습기와 비슷했는데, 지금의 이건 꼭 바닷물 속에 잠긴 것처럼 온몸을 손끝에서부터 꾹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눈앞에 초롱아귀나 실러캔스가 뿅 나타나서 헤엄쳐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다. 마리아나 해구에 잠기면 꼭 이렇지 않을까?

  게다가  더 이상한 건, 내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어떤 변화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관광객들은 여전히 신이 난채, 혹은 호기심을 가진 채 주변을 걷고 있고 직장인들은…… 으음. 압력에 몸이 쭈그러 든거 같기는 한데 원래 그랬으니까 별 차이를 모르겠다. 아무튼, 단 한 걸음 차이로 이렇게 선을 그어놓은 것마냥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걸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거 같았다.

 

  이쯤 되면 기분 탓으로 넘기는 게 더 이상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왜 나 말고는 이런걸 아무도 모르지?

  무슨 영화 속의 일도 아니고 하하하 아무리 내가 우등생이라지만 참 신기해라-

 

  -아니, 현실 도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자꾸만 현실을 벗어나려는 이성을 콱 잡아 끌어당겼다. 내가 생각해도 꼭 꿈 같지만, 다리는 여전히 아프고, 내가 오늘 뉴욕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뜻깊은 경험들을 한 것들은 사실이고, 오늘 아침에 기숙사를 나온 것도 몽땅 다 현실이다. 그래, 현실이라구!!! 무, 물론 원인이 뭔지 전혀 짐작조차 안되기는 하는데!

 

  으으, 조금 전까지 기분이 최고…… 였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 전체로 따져보면 정말 좋은 날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나는 슈퍼마켓 봉투를 좀 더 세게 안았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그냥 분위기가 이렇게 되어버린 것 뿐이야. 내 눈앞에 갑자기 살인마가 나타난 것도 아니고, 뒤에서 누군가가 내 등에 총구를 누르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이대로 신경쓰지 말고 기숙사까지 걸어가면 될 거야. 생각해보니 설마 여기 전체가, 어어, F워드나 What the hell이라는 말로 시작해야 할거 같은 일에 휘말렸는데 아무도 모르고 나만 그걸 직감했다는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났을리는 없을거라구!

  에잇, 정신 차리자! 이대로 여길 벗어나는거야! 뒤도 돌아보지 말고, 혹시 모르니까 왼쪽이나 오른쪽도 보지 말고-

 

  -라고 생각하자마자 왼쪽을 돌아본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치만 누구나 '이러쿵저러쿵 생각하지 말자'고 생각하면 그 '이러쿵저러쿵'을 생각하지 않아?! 게다가, 게다가- 어라?!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

 

  습기니 심해니 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대로에서는 좀 떨어진, 가느다란 노을빛이 간신히 비쳐드는 건물 사이에, 온통 시커먼 사람……? 이 미동도 하지 않고 쓰러진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앞을 무심하게 지나치는 모습에 더 크게 떴다. 아니, 이봐요들! 아무리 개인주의 사회라고 해도 그렇지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데 왜 아무도 신경을 안써요?! 아무리 총을 가지고 있을수도 있다지만!

 

 

  "괜찮아요?!"

 

 

  나는 열심히 인파 사이를 비집고-와중에 봉투를 놓칠 뻔했다!-나와서 그 사람에게로 달려갔다. 건물 사이라 그늘이 져서 그런지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미동조차 없는 것으로 보아 상태가 꽤 위급한 것 같았다. 어쩌지, 어쩌지! 근처에는 병원도 없는데. 내가 짊어져서 갈 수도 없고, 이렇게 쓰러진 사람을 함부로 들쳐맸다가는 오히려 상태를 더 악화시킬수도 있다고 하니까 함부로 만지면 큰일 난다!

  물론 학교에서 간단한 응급처치법도 배웠고 아직도 외우고 있지만, 거기엔 이렇게 몸에서 시커먼 안개가 풀풀 나올 정도로 다친 사람에 대한 방법은 없…… 다구……

 

 

  "……."

 

 

  하마터면 봉투를 떨어뜨릴 뻔했다. 정말엄청진짜 말도 안되는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너무 짙어서 연기처럼 보이는 안개가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니! 슈퍼 히어로 영화일까? 응, 그런거 같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영화관 스크린이 아니라는 것만 빼면!

  나는 혹시,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을 담아서 볼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 그러면 하나도 아프지 않……기는 커녕 무진장 아프다! 이 눈치 없는 볼! 꼭 지금이 현실이라고 알려줄 필요는 없잖아!

  며칠 전부터 느껴지는 공기 속 습기 비슷한 무언가에, 조금 전은 갑자기 심해 속으로 분위기가 굴러떨어지를 않나-가만, 그러고 보니까 지금 더 심해진거 같은데-이제는 몸에서 연기가 나는 사람까지! 이게 다 현실이라구?! 리얼리?!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서 머리가 아팠다. 이게 다 뭐람. 여기저기를 쏘다녔던게 벌써 옛날 일 같다. 단 몇분 차이로 사람을 둘러싼 상황이 이렇게 휙휙 바뀔수가 있구나. 응응. 이번에도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아까랑 다르게 별로 기쁘지는 않은데, 이 또한 깨달음이라는 거겠지, 응…….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현실 도피를 한 것 같은데 눈앞의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으윽.

 

  좋아. 그럼, 일단은…… 적어도,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일을 해봐야지. 몸에서 안개가 나오든 어쨌든, 눈앞의 사람이 의식 없이 쓰러져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요, 팩트요, 리얼이었다. 나는 봉투를 내려놓고 몸을 굽혔다. 문외한이 건드려서 문제가 커지는 건 보통 척추를 손상시켰을 때니까…… 팔을 건드리는 것 정도는 문제 없겠지? 으음. 안개가 그새 짙어져서 잘 안보인다. 나는 일단 안개를 흐뜨려놓기 위해 오른손을 뻗었-

 

 

  "아얏!"

 

 

  -다가 반사적으로 왼손으로 감쌌다. 당최 영문을 모를, 종이에 베였을 때처럼 쓰라린 아픔이 손등을 퍽 치고 지나가는 것을 분명히 느꼈기 때문에. 절대 환상통이 아니다, 이건.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한순간 핑 돌 정도였거든!

  그렇지 않아도 사건이 겹치고 겹쳐서 머리가 아픈데 이건 또 무슨 말도 안되는 처사일까나! 나는 문득 땅바닥에 털퍽 앉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게 앉아서 발로 땅을 두드리고 싶다는 충동도. 이제 유치원생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고집 피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라는 걸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래버렸을지도 모른다. 눈물이 핑 돈 건 어쩌면 아픔 때문이 아니라 내 처지에 슬퍼져서일지도 모르겠다…… .

 

  가슴 깊은 곳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한숨을 폭 내쉬고, 나는 다시금 그 사람을 부르기 위해 오른손을 들었다.

 

 

  "……."

 

 

  그리고 그대로 멈췄다. 이번에는 통증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내 성적과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하건데 나는 절대 타투는 커녕 헤나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오른손의 손등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문양이 붉은색으로 떠올라 있었다. 전체적인 모양은 복합하지만, 크게 3파트로 나눌 수 있을거 같은.

 

  어어, 나 이거 아는거 같다. 구체적으로는 배운거 같다. 지금보다 하아아아안참 어린 시절, 그냥 마술에 대한 지식만 간단하게 배우고 넘어갔을 그 때. 마지막에 승리한다면 어떠한 소원이라도 이룰수 있는 전쟁이 있다고. 거기에 참가하는 마술사는 각자 모양은 달라도 세 부분으로 나눌수 있는 문양이 몸 어딘가에 생긴다고-

 

  머리 어딘가에서 번개가 쳤다. 그래, 역시 기분탓이 아니었다. 이제는 다 알거 같다. 공기가 무거웠던 건 그 안에 마나가 가득 찼기 때문이고,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은 건 여기에 나 같은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마술적인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고. 사실이었잖아! F워드나 What the hell이라는 말로 시작해야 할거 같은 일에 휘말렸는데 아무도 모르고 나만 그걸 직감했다는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거! 아악! 그래도 우리 학교…… 뿐만이 아니라 학교들은 겨울방학 기간이니까 비교적 괜찮겠지만 회사원들은? 주민들은? 관광객들은?

 

  그리고, 휘말려버린 나는?

 

 

  "우와아, 지인짜 큰일인데 이거……."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정확히는 뒷목이 당긴다.

  지하철 타고 갈 걸. 아니, 그냥 집에 갈걸. 하지만 이미 돌아갈 기회는 맨해튼에 기적이 일어나서 도로사정이 획기적으로 좋아질 확률만큼이나 멀어졌겠지. 흑흑. 안녕, 나의 보람찬 겨울 방학. 안녕, 나의 '어른스러움 연습' 기간. 모두모두 쎄굿빠!

 

  속으로 눈물을 닦고, 나는 령주가 생긴 원인이 분명한- 조금 전 내가 다가가려던 사람을 보려고 했다. 그랬는데…… 무릎이 갑자기 푹 꺾였다. 어라?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했는데 도통 중심을 잡을 수 없어서 오히려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손끝에서 피가 싹 빠져나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 거 같다. 몸 속을 채우고 있던 무언가가 갑작스럽게 빨려나가는 감각이 정말로 이상했다. 정말로 남은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 때 누군가의 손이 내 몸을 잡았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며 깔린 그늘을 배경으로…… 검은…… 긴 그림자가 보였다.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데, 이제는 햇빛도 없고 어두워진 시야 때문에 눈이 마주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 이 사람 같은데. 좀 전에 쓰러져 있던…… 하지만 분명히 조금전까지는 반쯤 안개에 덮혀 있었는데 왜 갑자기…….

 

 

 "……마스터 님?"

 

 

  나직하면서 어딘가 나긋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저요? 하고 묻고 싶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물에 잠긴 것처럼 무거웠다. 날 살짝 흔드는 거 같은데, 조금 전에 내가 하려고 했던 걸 그대로…… 아니, 아니.

  나는 그냥 손을 뻗었을 뿐인데 왜 마스터로서 인정을 받게 된걸까. 어째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그렇게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모든 것이 멀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푹 꺼지듯 의식을 잃었다.

 

      

 

 

 

/////

 

 

중간에 나온 안개 비슷한 무언가~는 쉐도우 사바를 표현하려고 했던건데 사실 쉐도 사바가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를 잘 모르겠읍니다...... 영령검호에 나오기는 하는데 흑백인지라 흑흑

캐스터가 쉐도 사바로 있던 이유는 거창한건 없고 그냥 소환을 하다가 중간에 멈춰서 그렇습니다.

그러다 코노하를 만나서 계약이 맺어지고 마력을 쫙쫙 빨아가서 제대로 현계가 굳어진 느낌적인 느낌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됩니DA

 

tmi : 처음에 잠깐 나온 마술사가 왜 소환을 그만뒀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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