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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차 밤 전투씬. 초벌용

kisone 2012.09.27 01:45 조회 수 : 9

로얄 코트 극장.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져서 런던 시민들의 고달픈 마음을 달래 온 유서 깊은 공간이다.

하지만 그런 것도 이제는 다 옛말. 백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런던 시 공무원들의 골치를 썩이는 고대 유물이 되어 버리려는 찰나. 어느 돈 많은 갑부가 호기롭게 로얄 코트 극장을 인수하게 된다. 그리고 주변 슬로언 광장(Sloane Square)의 모든 건물들까지 통 크게 모조리 매입, 건물들을 헐고 새로이 블록 하나를 차지하는 커다란 극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뉴 로얄 코트 극장 계획’. 몹시 유치한 프로젝트 명이였지만, 런던 시 젊은 공무원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건축허가서에 확인도장을 찍어주었다. 자질구레한 유지비로 세금이나 좀 먹는 골동품보다는 뛰어난 수익성으로 무장한 현대적인 극장이 런던 시 가계부에  좀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구닥다리 향수에 젖어서 혀를 차는 늙은 공무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ㅡ 젊은이들은 곧 퇴직연금을 받을 이들의 의견 따윈 점잖게 무시해버리고 초고속으로 일을 진행시켰다. 그쯤 되자 세금 좀도둑이라는 별명으로 유구한 세월을 버텨온 노인들 역시 쌓아온 연륜을 발휘하여 더 이상 뒤에서 투덜거리지 않게 되었다. 가계부에 빨간 줄만 그어져있으면 노인봉양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그들도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암묵적인 합의로 일이 추진된 것이 바로 일 년 전. 그리고 지금은 개장을 앞두고 극장 내부는 모두 비어있는 상태.

 

그런 빈 공간에 마샬은 숨어있었다.

 

온다.”

 

혼잣말을 내뱉은 마샬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어렸다.

주변에는 각종 컴퓨터들과 서버기계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마샬의 눈앞에 있는 거대한 스크린이 극장 구석구석을 실시간으로 비춰주고 있었다. 마샬은 품속에 안겨 잠들어 있는 헤일리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이 조금이나마 진정 되는 것 같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작전을 세워야 했다. 임시로 급하게 설치한 간이 마력탐지망에 감지된 인원은 두명. 아마도 그들 중 한 명은 서번트일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이야기만 하고 떠날 일은 없겠지. 그들과는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성배전쟁에서 맞닺뜨린 첫 번째 전투. 하지만 마샬은 승리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헤일리의 안위. 그러니까 일단 이곳에서 적의 침입로를 끝까지 확인 한 뒤, 미셸이 시간을 끄는 사이 도주로를 파악해서 빠져나간다면......

 

“!?”

 

순간 화면 한쪽에 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샬은 재빠르게 컴퓨터를 조작해서 해당 화면을 스크린 중앙에 띄웠다.

 

화면에 나온 건 꽤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커플이었다.

 

한 명은 정확한 성별은 알 수 없지만,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전신갑옷을 입은 인물. 보나마나 서번트 일 게 분명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녀였는데, CCTV를 눈치 챘는지 화면 너머에서 마샬을 바라보며 씨익 웃음을......

 


“........?”


 

마샬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화면에 비친 것은 그가 잘 알고 있던 여자였다

덜컥, 하고 가슴 어딘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빨라지는 심장 고동

마샬은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서 영상을 키우려 했지만ㅡ 여자를 비추고 있던 카메라는 이내 화면을 일그러트리더니 노이즈로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그 카메라를 시작으로 다른 화면들 역시 하나 둘씩 회색빛 노이즈로 채워져 나갔다.

 

마샬은 멍하니 노이즈로 지직거리는 스크린을 바라봤다.

 

아마도 저들이 카메라를 부수기 시작한 것이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녔다. 방금 화면에 비친 소녀. 그녀는 분명......

 

릴리.

 

 

 

열려있는 현관문

 

엉망이 된 집안

 

넘어진 의자

 

혼자서 앙앙거리며 울고 있는 헤일리

 

 

그리고,

구겨진 편짓장.

 

 

 

헤일리를 부탁해.’

 

 

마샬은 비틀거리다가 의자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끔찍했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되새김질을 시작했다. 간신히 잊고 지내던 악몽들이 삐걱거리며 어릴 적의 기억들 사이에서 새어나왔다. 마치 풀려버린 태엽과도 같이.

마샬은 그렇게 기어가 빠진 인형처럼 늘어졌다. 점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


 


, 하는 굉음과 함께 무대의 오른 쪽. 스탭들이 사용하는 뒷문이 열린다. 아니, 열린다던가 하는 고상한 표현은 부적합 할까, 글자 그대로 문을 차 날린침입자는, 그대로 위풍당당하게 극장 홀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충격에 대한 반작용 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부츠를 착용한 다리를 들어 올린 채 문을 차 날린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는 소녀를 향해, 그 뒤에 서 있던 갑옷을 입은 거한이 입을 열었다. 면갑에 의해 가려진 얼굴로 부터는 표정까지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목소리가 어쩐지 어이없어하고 있는 것만큼은 전해져오고 있었다.

 

……주인이여. 기세가 등등한 건 좋은 일이다만,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움직이는 버릇은 고치는 게 좋아.”

 

……우으으. 시끄러워. 이런 건 그냥 사소한 트러블이라고!”

 

기세 좋게 땅을 박차며 거한에게 반론하는 소녀였지만, 이내 어디에서인가 울려퍼진 소리를 듣고 그 표정을 바꾼다.

 

, , .

 

관객석의 맨 앞좌석.

마치 지금 막 무대 위에서 내려온 것만 같은 화려한 외형의 여성이, 좌석에 기대어 앉은 채 무언가 재미있는 것이라도 보았다는 듯이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아니, 아니. 이건 또 꽤나 참신한 등장법인 걸. 모처럼의 방문객이 유쾌한 이들인 것 같아서 다행이야.”

 

, 딱히 당신 좋으라고 한 것도 아니니까 같잖은 칭찬은 그만 두는 게 어때?”

 

매몰차게 대답하면 서도, 리제가 가진 마술사로서의 시선은 상대방의 모습을 빈틈없이 관찰하기를 잊지 않았다.

등 전체를 뒤덮을 정도의 선명한 붉은 장발과 암적색의 드레스. 신체와 의복을 장식하고 있는 몇 가지의 장신구들은 상인인 리제가 보기에도 고급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들이지만, 결코 경박하다는 이미지는 주지 않는다.

좌석 옆에 검은 우산 하나가 기대어져 있긴 하지만, 그 외에 무기로 사용할만한 물건은 전무.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언뜻봐서는 어딘가의 귀족가 여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외형이라 해도, 그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양과 압도적인 신비는 여성이 틀림없는 일곱 서번트의 일각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적 마스터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 어딘가에서 모습을 감추고 이쪽을 지켜보고 있거나, 서번트에게 전투를 맡긴 채 마스터 자신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겠지.

리제는 소지하고 있는 예장들의 목록과, 현 상황 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소지품 중에는 발동시 주변 공간을 통채로 격리시켜 압축, 소멸시키는 마탄 그라비티 홀 수 개와, 조합에 따라 각종 효과를 일으키는 약물들이 몇 가지. 그 외에도 갖가지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물품들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서번트를 상대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아마, 리제 자신이 이곳에서 전투를 돕는다 해도 큰 영향은 끼치지 못하겠지.

 

……버서커, 나는 숨어 있는 적 마스터를 찾아서 상대하겠어. 그 동안 당신은── 그러네, 10분 정도면 충분하지? 저 여자를 처리하도록 해.”

 

"주인이여, 아무래도 날 과소평가 하는 모양이군. 3분이면 충분하고도 남아.“

 

, 그렇게까지 자신만만하다면 실력으로 보여줘! 보기 흉한 모습을 보였다간 나중에 화낼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리제는 빗자루 위에 올라탄 뒤 허공으로 날아올라 2층 관객석 통로를 향해 모습을 감추었다.

그 모습 바라보고 있을 뿐, 딱히 아무런 제제도 하지 않는 여성, 미셸에게 의아함을 느꼈는지 거한의 남성, 버서커가 입을 연다.

 

꽤나 여유롭군. 제지하려고는 하지 않는 건가?”

 

아니, 굳이 따지자면 여유가 없어서 안절부절 못하는 중이지. 여하튼 나를 3분 만에 쓰러트리겠다고 장담하는 서번트의 앞이니까 말이야. 어설프게 다른 곳에 신경 쓰다가 빈틈을 보여서야 안 될 일 아니겠나.”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는 여성의 대답에, 버서커 역시 실소를 흘렸다.

옆에서 본다면 화기애애하게 조차 보일 모습이었지만, 만약 이 자리에 실제로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런 감상 같은 것은 조금도 품을 수 없었겠지.

여하튼 소녀가 사라진 직후부터, 버서커의 전신으로부터 새어나오는 살기는 점점 짙어져, 이제는 극장 홀 전체를 뒤덮을 정도였으니까.

민간인, 아니 어지간한 마술사조차도 들어서는 것만으로 졸도해버릴 공기 속, 이전과는 명확히 다른, 끓어오르 듯한 감정에 물든 탁한 목소리로 버서커가 입을 열었다.

 

, 렇군. 우선 작별 인사, 부터 해두지. 다음, 에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원념에 물든 마력과 살기, 버서커가 내뿜고 있던 두 가지에 더해, 또 한 가지의 요소가 극장 홀을 뒤덮는다.

 

[].

 

용솟음치는 듯한, 끓어오르는 듯한, 그에 닿는 모든 것들을 불태워 버릴 것만 같은, 홍련의 불꽃.

 

어느 새인가 타오르는 불꽃에 빈틈없이 뒤덮여, 이제는 갑옷의 윤곽만을 확인할 수 있는 버서커에게, 미셸 역시 입을 열어 답했다.

 

그렇군. 본디 인사란 원활한 인간관계를 끝맺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인 법이지. 하지만, 시작한지 1장만에 끝나버리는 서사시라는 것도 꽤나 시시한 것 아니겠나.

그리고 난 시시한 건 싫어한다네.”

 

벌써부터 작별인사를 할 생각 같은 것은 없다고, 어디까지나 여유를 잃지 않은 채 대답하는 미셸의 모습에, 버서커는 큰 소리로 웃었고. 이내 그것은── 이성을 잃은 짐승의 외침으로 변하였다.

 

, 크하하하핫! 하하, , 아아, 아아아── ■■■■■■■■──────!!!!!”

 

그럼 막을 올려보도록 할까. 관객이 없는 게 아쉽긴 하네만, 아무튼 뭐, 즐기는 데에는 부족하지 않겠지!”

 


 

//

 

 

 

마샬을 일깨운 건 세 살짜리 갓난아이였다.

 

“.....아빠?”

 

마샬은 반사적으로 왼손을 움직여 대형 스크린을 껐다. 회색빛 불빛이 사라지고, 방안이 고요함으로 가득 찼다. 마샬의 눈이 자신의 품속을 향해 움직였다. 헤일리를 안고 있는 손이 볼썽사납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손등 위에서 빛나는 토끼 얼굴 모양의 삼 획의 령주. 정신을 차려야 했다. 눈이 따가웠다. 마샬은 왼손으로 눈을 세게 비볐다.

 

아빠, 울어?”

 

헤일리의 말에 마샬은 흠칫 놀라며,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푸근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헤일리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우리 공주님, 잠에서 깨셨어요?”

 

마샬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헤일리를 두 팔로 안고 함께 빙글빙글 돌았다. 헤일리는 갑작스런 마샬의 행동에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즐거운지 꺄르륵 거리며 웃어댔다. 그러길 잠깐. 제풀에 지친 마샬은 의자에 쓰러졌고, 헤일리 역시 그런 마샬의 목을 껴안고 쓰러져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마샬은 헐떡이는 숨을 간신히 진정 시킨 뒤,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헤일리를 바라봤다.

 

헤일리, 우리 재밌는 거 볼까?”

 

“? 어떤 거 !?”

 

헤일리의 눈이 반짝였다. 마샬은 웃으면서 의자를 컴퓨터 앞으로 옮겼다. 그리고 간단한 인터넷 검색 후, 웹 스트리밍 서비스에 접속. 하나의 영상을 켰다. 그러자, 대형 스크린에 3d 애니메이션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 우와...”

 

순식간에 넋을 잃고 바라보는 헤일리. 스크린 위에는 한 펭귄이 고글을 쓰고 뒤뚱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서 따라 나오는 곰돌이, 악어, 여우 등등의 작은 동물들. 헤일리는 입을 살짝 벌리고 마치 뭐에 홀린 것처럼 영상에 집중했다. 마샬은 그런 헤일리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헤일리, 어때? 재밌어?”

 

헤일리는 시선을 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헤일리의 모습에 마샬은 가슴 한켠에서 먹먹한 느낌을 살짝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헤일리 이거 보고 있어. 아빠 잠깐 나가서 먹을 것 좀 사올테니까.”

 

그제야 헤일리는 고개를 돌려 마샬을 바라봤다.

 

헤일리도 같이 가?”

 

아니, 금방 갔다 올거니까 괜찮아. 아빠, 갔다 올 테니까 나중에 같이 먹으면서 보자.”

 

, 아빠 빨리 갔다 와! 차 조심 해!”

 

마샬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헤일리가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기길 기다렸다가, 천천히 등을 돌린 뒤, 문을 열고 조용히 방에서 빠져나왔다.

 

방을 나와서 조심스레 문을 닫은 마샬은 무너지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푸근한 미소는 어느새 사라지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 질 것 같았다. 헤일리 앞에서 잠깐 동안 참았기 때문일까? 억눌러졌던 감정들이 반작용으로 봇물같이 쏟아져 나왔다. 마샬은 울음을 참기위해 눈을 꾹 감았다.

 

 

마술사.

예장.

공방.

비행기.

아버지.

사고.

어머니.

헤일리.

 

그리고.... 릴리.

 

 

기억의 파편들이 떨어져 내린다.

 

시간이 없었다. 자신은 시계탑의 학생. 견습 마술사. 도망치는 게 옳은 선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인해야만 했다.

 

마샬은 눈을 떴다. 일어서서 잔뜩 충혈 된 눈동자로 정면을 주시했다.

그녀가 맞는지 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그리고 만약, 만약 그녀가 맞다면 물어봐야 한다. 도대체, 어째서 헤일리를......

 

 

 

사실, 확인하는데에는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

 

 

벌써 마샬의 눈앞에 와 있었으니까.

 

 

 

빗자루를 든 소녀가 반대편 복도 끝에서 마샬을 보며 웃고 있었다.

 

 


//

 

 


작열하는 불꽃이 감긴 권격이, 맹렬한 기세로 허공을 가른다.

직격은커녕 스치는 것만으로 치명상이 될 만한 일격을, 미셸은 손에든 우산을 사용해 막아내었다. , 하고 묵직하게 전해져 오는 충격.

버서커 클래스 특유의 압도적인 신체능력을 바탕으로 한 공격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위협이었지만, 문제는 그것 하나에 그치지 않았다.

지직, 하고 무언가 타오르는 냄새. 버서커의 일격을 막아낸 지점으로부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뿐만 아니라 버서커의 주먹으로부터 전해져온 불꽃이, 마치 의사를 가진 뱀과 같이 우산의 표면을 기어올라 미셸의 신체를 향해 쇄도한다.

불꽃의 뱀이 아가리를 들이밀기 직전, 미셸은 들고 있던 우산으로부터 손을 놓고, 그와 동시에 버서커의 가슴팍을 힘껏 걷어찼다. 두꺼운 통굽을 사용한 일격은 그만큼으로도 어지간한 인물이라면 졸도시킬 만할 위력을 품고 있었지만, 전신을 두터운 중갑으로 뒤덮은 버서커에게 있어서는 별다른 위해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버서커를 차 날린 반동을 이용해 몸을 뒤로 빼내는 데에 성공한 미셸은 무대 위에 올라 선 채, 관객석의 통로에서 다시금 붉은 안광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버서커의 모습을 보고 쓴 웃음을 지었다.

 

이것 참, 자신만만하게 호언장담할 만도하군.

이쪽의 공격은 별 효과도 없고, 방어는 한번이라도 실수 했다간 치명상. 본능에 맡긴 움직임은 단순하긴 하지만 기본 능력이 뛰어나니 무시하기도 어렵고 말이야.”

 

버서커의 신체를 감싸고 있는 화염은 버서커의 단지 공격력만을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변의 공기를 일그러트릴 정도의 고온의 열기는 직접 닿지 않은 상태에서 조차 다가간 자를 위협하고, 전신에 둘러진 불꽃은 버서커를 공격하는 무기를 끊임없이 손상시킨다.

물론, 지고의 환상이라고 칭해지는 서번트의 무장이 그리 쉽게 망가질 일은 없지만───

 

보구, 인가. 흐음, 역시 소도구 정도의 물건으로 진짜 신비를 따라잡기는 어렵다는 거겠지.”

 

이런, 이런. 하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미셸이 우산을 대신하여 구현 화시킨 것은 한 자루의 지팡이었다.

검은 색의 기묘한 광택을 내뿜는 몸체에 금색의 자수가 새겨진 그것은 상당한 견고함을 자랑하는 물건이었지만, 그것도 저 버서커가 가진 공방일체의 불꽃 앞에서 얼마나 버틸 지는 미지수.

 

어쩌면 좋을까, 하고 어쩐지 희극적인 동작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미셸의 빈틈 투성이의 모습을 보고도, 버서커는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다르다.

정확히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럼 나도, 숨겨둔 패 하나를 꺼내보도록 할까.”

 

■■■■■───!!!!!”

 

본능이 울린 경종에 따라, 배후로부터의 일격에 대처하기 위해 몸을 비트는 버서커. 하지만, 그보다도 불과 빠르게, 검은 금속제의 지팡이가 광전사의 뒷목 부분을 강하게 후려친다.

과연, 무방비상태에서 목을 가격당한 충격 까지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일까, 검은 갑주의 거체가 잠시 균형을 잃은 듯이 비틀거렸다. 빈틈을 드러낸 모습, 하지만 그것을 노린 습격자가 제 2의 공격을 날리기 이전, 버서커의 전신으로부터 일제히 불꽃이 방출되었다.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지 않은 불꽃의 위력 자체는 버서커의 공격에 실린 것 보다 약하지만,

그런데도 위협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깔끔하게 공격을 포기한 미셸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무대 위에서 버서커의 배후로 이동한 기이의 현상. 그것을 일으킨 장본인이기에야말로, 버서커가 기습을 알아채고 반응한 사실이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본래라면 머리를 날려버릴 생각이었네만, 그걸 알아차리고 반응한 건가…….”

 

자그마한 놀라움. 하지만 이내 그것은 기쁨으로 모습을 바꾼다.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즐거움을 알아챈 것 같이, 미셸은 웃었다.

보는 이를 매료시킬 것만 같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처절한 미소를.

 

하하! 그런가, 그렇군. 성배전쟁. 시공을 뛰어넘은 영웅들이 벌이는 싸움. 이렇게나 갖추어진 무대에, 이렇게나 고르고 고른 배우들이 펼치는 이야기다. 다소의 속임수 따위는 무대장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거였어.”

 

■■■■■....!!!”

 

충격에서 회복한 것일까, 몸 밖으로 내뿜던 불꽃을 멈추고, 다시 미셸에게로 달려들기 위해 자세를 낮추는 버서커의 모습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미셸은 입을 열었다.

 

아무쪼록 부디 전력을 다해주길 바라네. 그 편이 나로서도 즐거울 거 같으니까 말이야.”

 

 


//

 



20미터

 

 

제어실이라니. 너무 뻔한 곳에 숨어 있어서 놀랐어.”

 

좀 더 확실하게 봐야한다.

 

 

15미터

 

 

근데,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저기 일단 저 밑에서 날뛰고 있는 서번트의 마스터가 맞는 거지?”

 

지금까지로 보아서는...... 아니, 그래도 좀 더 확실하게 확인해야......

다가가는 마샬의 발걸음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10미터

 

 

, 그래. 령주. 당신도 손등에 있었네. , 뭐야! 토끼 얼굴!? 귀여워!”

 

다가가는 마샬의 발걸음이 멈췄다.

 

 

5미터

 

 

이 정도 거리에서 사람들 분별 못한다면 장님이나 다름없겠지.

그러한 확신 속에서 마샬은 눈앞의 소녀를 꼼꼼히 살폈다.

 

머리모양 - 다르다.

머리색 - 같다.

눈동자 색 - 같다.

눈 크기 - 다르다.

입모양 - 약간 작다.

목소리 톤 - 비슷하다.

 

결론 - 그녀가 아니다.

 

마샬의 마음속에서 큰 안도감과 약간의 아쉬움이 교차했다. 마샬은 왼손을 살짝 등 뒤로 옮겨서 뒷주머니에 있는 보석의 수를 확인했다. 달그락- 하고 잡히는 보석의 숫자는 네 개. 적은 수긴 하지만, A과 녀석들에게서 뺏은 거여서 그런지 그 하나하나가 꽤 큼직했다. 이 정도라면 결정타로는 부족할지 몰라도 시간을 끄는 용도로는 괜찮을 위력을 발휘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산을 마친 마샬이 상대방을 향해서 처음으로 말을 건넸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네 이름은?”

 

소녀는 자신만만하게 가슴팍을 치며 대답했다.

 

그런 것도 몰라? 잘 기억해둬. 내 이름은 리제 맥시아, 언젠가 세계를 매수할 여자야! ..., 당신과는 고작 해야 10분 정도의 만남이 되겠지만."

 

 

순간, 옛 추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반가워 릴리라고 해. 곧 네 ㅡㅡ . 근데 네 이름은 뭐니?

 

난 마샬. 그렇게 부르면 돼.”

 

 

 

난 마샬. 그렇게 부르면 돼.”

 

역시나. 다르다. 그녀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못 본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녀를 다른 사람과 착각 하다니.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과 자괴감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아났다.

 

마샬은 뒷주머니에서 보석을 꺼내 오른손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 그거, 꽤 굵은걸? 어디 상표지? 우리가게 쪽은 아닌 거 같고......”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슬금슬금 옆으로 움직이는 마샬. 소녀. 아니, 리제 역시 그런 마샬을 견제하면서 같은 방향으로 천천히 돌았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릴리가 아닌 것을 안 이상, 취해야 할 행동은 단 하나.

대신 상대가 절대로 눈치 채서는 안 된다. 마샬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며, 입을 열었다.

 

사실, 난 성배 따윈 필요 없어. 그래서 말인데...... 여기서 그냥 보내 주면 안 될까?”

 

글쎄. 그 토끼 손이라도 잘라낸다면 보내 줄게.”

 

 

다시 10미터

 

 

만능의 원망기 성배. 가지게 되면 원하는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하지. 사실 소원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어? 그리고 소원이 없다는 당신의 말 역시 믿을 수 없고 말이야.”

 

마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이야. 나에게 소원 따윈...”

 

 

15미터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이 밑에서 싸우는 서번트는 어찌 생각할까? 그녀도 소원이 없는 거야?”

 

그 말을 들은 마샬은 생각에 잠긴 듯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

 

저기, 있잖아? 충고 하나 해줄 게. 팀플레이에서 일방적인 행동은 좋지 않다고.”

 

마샬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끼릭- 하고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손에 든 보석에 천천히 마력이 불어 넣었다. 마샬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리제와 그녀의 등 너머로 보이는 제어실의 문. 어느새 두 사람의 위치는 서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마샬의 감각이 외쳤다. 지금이다ㅡ 라고.

그 외침에 순응한 마샬은 즉시 마력이 들어간 보석 하나를 던졌다.

보석은 담겨진 마력을 태우며 무서운 가속력으로 리제를 향해 돌진했다.

 

치사해! 말하는 도중에 기습!?”

 

하지만 리제도 대비가 되어있었는지 재빠르게 빗자루를 움켜쥐고 주문을 캐스팅,

 

강화 -

 

그리고 마력으로 강화된 빗자루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마치 유명한 4번타자와 같은 멋진 포즈로 날아오는 보석을

 

이 정도쯤이야ㅡ!”

 

쳐냈다.

 

 

 

....아니, 쳐내려고 했다.

 

 

파삭.

 

“......어라? 바스러졌어?”

 

빗자루에 닿은 보석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보석에 응축된 마력이 새하얀 빛으로 변해서 순식간에 리제를 덮쳤다.

 

!?”

 

깜짝 놀라서 두 팔로 얼굴을 가렸지만, 이미 늦은 상태. 리제는 이를 악물고 마샬의 추가 공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공격은 오지 않았다. 킁킁. 들이마시는 공기 사이에 습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상하게 온몸이 축축했다. 리제는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안개?”

 

눈앞에 깔린 거대한 수증기 연막. 어느새 마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저 어딘가로 급하게 뛰어가는 발걸음 소리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이었구나.”

 

리제는 빗자루를 눈앞에서 붕붕 돌렸다. 빗자루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실린 바람이 복도에 깔린 안개를 슬며시 밀어냈다. 안개가 어느 정도 걷히자, .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빗자루 끝이 바닥을 내려쳤다그리고 리제는 선언하듯이 외쳤다.

 

좋아, 각오해. , 화났어!! 언제까지 도망갈 수 있나 보자고!”

 

 

 

//




마샬은 불합리함을 느끼면서도 두 다리를 힘껏 놀려서 뛰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두 다리힘껏 이용해서 었다. 그렇다. 마샬은 네다리 동물처럼 기다시피 하면서 도망가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DNA에 잠재된 동물적인 본능이 일깨워져서가 아닌, 머리 높이로 날아오는 간드들을 피하려면극장 객석을 엄폐물 삼아서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합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오랜 도망과 부실한 체력이 금방 다리를 무뎌지게 했고, 이쯤 되니 질질 끌리는 다리보다는 아직 팔팔한 팔이 기어가는데 더 쓸모가 있다는 사실도 한몫 거들어 주고 있기는 했다.

 

“Run rabbit run rabbit Run! Run! Run!”

 

리제는 마샬의 머리위에서 천연덕스럽게 오래된 포크송을 부르고 있었다.

 

“Bang! Bang! Bang! Bang!”

 

. . . !

 

잠깐 머리를 드는 사이 날아오는 네 발의 간드. 퍽하는 소리와 함께 객석 끄트머리에 엄지 손가락만한 구멍이 뚫렸다. 화들짝 놀란 마샬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이건 퀴디치 경기가 아니라고!’

 

마샬의 입장에서는 너무 불리한 전투였다. 물론 시작은 좋았다. 제어실 앞에 있던 리제는 잔뜩 약이 오른 상태로 안개를 헤치며 복도를 뛰쳐나왔다. 만약 그녀가 등 뒤에 있던 제어실로 들어가서 헤일리를 만났다면 모든 상황이 엉클어졌겠지만, 다행히 리제는 눈앞에 있는 마샬을 쫓는데 집중했다. 그녀가 자신을 쫓는 것을 확인한 마샬은 곧바로 전날 혹시 이런 일이 생길까 미리 설치해둔 함정으로 뛰었고, 시간에 맞춰서 남아있던 보석들 중 하나를 소비해서 함정을 발동시키는데 성공했다. 보석이 아깝긴 했지만, 그녀를 덫에 빠트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속으로 내심 기뻐하며 리제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렸는데......

 

리제는 함정 위를 날아서 통과했다.

 

중세시대 마녀들처럼, 빗자루를 타고서.

 

마샬은 하필이면 마력감지 식이 아닌, 중력감지 식으로 함정을 만든 어제의 자신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를 감싸고 도망쳤다. 리제가 덫에 걸렸다면 제어실로 돌아가 헤일리와 함께 나올 생각이었지만...... 저 빗자루 덕분에 마샬의 계획은 엉망이 되었고, 이제 남은 최후의 수단은 단 하나. 자신이 이렇게 시간을 벌면서 버텨주는 사이. 미셸이 상대 서번트를 이겨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토끼야, 토끼야. 도망쳐. 덤불사이로 고개를 내밀면 사냥꾼에게 잡힌단다!”

 

마샬이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리제가 냉큼 빗자루를 몰고 쫓아와서 머리위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마샬의 주변으로 떨어지는 시약병들.

 

시약병?”

 


. . !


 

히익!”

 

갑작스런 폭발음 덕분에 마샬의 입에서 꼴사나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약병이 떨어진 여기저기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의 객석 의자들이 폭발에 휘말려서 마치 춤을 추듯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건물 소유주가 본다면 인상을 구길만한 재산피해가 곳곳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샬은 팔을 들어 파편이 얼굴에 닿는 것을 겨우 막아냈다. 그리고 엉금엉금 기어서 간신히 폭발의 중심지에서 빠져나왔다.

 

현재 있는 곳은 삼층 관람석.

의자 파편들 사이에 몸을 숨겨서 바라보니, 리제는 객석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저공비행하고 있었다.

 

폭발에 가려서 날 시야에서 놓쳤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마샬은 그 기회를 살려서 조용히 소리를 내지 않고 장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사층을 향해 걸어갔다.

 

좋아. 이제 사층 제어실로 가서, 헤일리를 데리고 나가기만 하면......’

 

그렇게 생각하며 관람석을 빠져나와 복도를 걷는 마샬에게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마샬은 의아해 하다가 이내 그 이질감의 원인을 찾아냈다. 복도 창 너머로 보이는 일층 무대의 서번트 전투 상황이 기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미셸은 마샬과는 다르게 상대에게 전혀 밀리지도 않고 능숙하게 잘 싸우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능숙하다라는 단어보다는 다른 묘사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모습은 마치 마샬이 보기에

 


 

//


 

 

리제는 어처구니 없어하는 목소리로 소리 쳤다.

 

버서커! 대체 뭐하는 거야!”

 

하지만 버서커는 대답하지 않고 괴성과 함께 미셸에게 달려들었다. 리제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버서커에게 답답했는지 발을 동동 굴리며 다시 소리 질렀다.

 

아냐, 거긴 빈 공간이야! 상대는 다른 곳에... 으휴! 지금 3분은커녕 10분이 훨씬 지났다고!”

 

버서커는 아까 전부터 적 서번트가 있는 곳이 아닌, 텅 빈 곳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사가 눈을 감고 적을 공격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초조한 나머지 리제는 자신의 머리끝을 잡고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감기 시작했다. 이런 식이라면, 머지않아 버서커는 적에게 약점을 노출하고 쓰러질게 분명했다. 하지만 버서커는 지금 자신의 조언이 들리지 않는 상태.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아깝지만, 어쩔 수 없나.”


리제는 휴, 하고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푹 숙인 뒤 웅얼거렸다.

 

하지만 말야. 그래도 명색이 맥시아 가 장녀의 서번트인데. 한번 정한 길을 벗어나게 할 수는 없지 않겠어? 상인도 한번 정한 상도는 절대, 절대. 벗어나지 않는 법이란 말야.”

 

그리고 고개를 번쩍 드는 리제.

 

그러니까!”

 

리제는 눈빛을 빛내며 손을 들었다.

형형한 붉은 빛으로 빛나는 삼 획의 각인. 신비로 짜여진 성배의 가호, 그 결정체. 마스터와 서번트를 이어주는 매개체. 그것들이 그녀의 손등 위에 있었다. 그리고ㅡ

 

 

네 방식을 지켜주겠어!  그러니까, 완전히 미쳐버려! 버서커!!!

 

 

붉게 타오르는 빛과 함께, 리제의 손등에 있던 령주 한 획이 사라졌다.

 

 

■■크하, ■■■■아아, 아아■■■■■── ■■■■■■■■──────!!!!!”

 


버서커는 더욱 맹렬한 기세로 업화와도 같은 불길을 뿜어내며 무대를 광기로 장식하기 시작했다

극이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

 



위험하다.’

 

마샬이 지켜보고 있던 창 너머의 풍경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미셸에게 유리했던 국면이 일순간에 적 서번트에게로 넘어갔다. 저런 광기어린 모습으로 보았을 때, 분명 저 서번트는 버서커임에 틀림없었다. 근데, 도대체 무엇이 저울의 추를 뒤엎은 것일까. 마샬은 급하게 창을 통해서 보이는 객석들 사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객석 사이에는 한 명의 관람객 - 리제 - 이 붉은 빛으로 빛나는 오른손을 들고 있고 있었다.

 

령주...! 그걸 사용했구나!”

 

마샬은 초조한 표정으로 미셸을 바라봤다. 광기어린 버서커의 공격과 그의 몸에서 맹렬하게 뿜어나오는 불꽃들이 미셸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옷자락과 무기들이 빠른 속도로 화염에 휩싸여 그을리고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진다.’

 

마샬은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 순간.

달그락 - 하는 소리와 함께 품속에 남은 보석 두 개가 마샬의 손끝에 닿았다.

짧은 망설임.

하지만 그 순간은 잠깐이였다. 마샬은 보석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난처한 표정을 짓고있는 미셸을 향해서 주문을 외웠다.

 


 

기동

 

마력의 시작은 자신의 마력회로로부터. 며칠 전 소환사건으로 엉망이 된 몸이 다시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흡입

 

몸속의 마력이 끓어오른다. 그리고 손끝의 보석과 공명을 시작. 마샬은 현을 조율하는 악기처럼 서서히 보석과 몸의 주파수를 맞춰나갔다.

 

압축

 

하모니를 이룬 마력을 몸속의 임계점까지 응축시킨다. 그리고 곧 있을 폭발을 대비한 정제작용을 시작. 또한 대상자를 검색. 목표는 창 너머, 무대 위의 미셸을 향해서.

 

폭발

  

이제 남은 것은 네 소절.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드는 생각은 두 가지.

본디 치유마술이란 연금술에 기원을 둔 것. 따라서 마력에 의해 연성한 세포조직을 이식하고 적용하는 것인데, 과연 인간의 신체구조를 바탕으로 한 마술이 서번트에게 통할까하는 생각이 첫째.

그리고 이 정도로 마력을 내뿜는 마술을 끝까지 영창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둘째.

 

그런 상념들이 끝남과 동시에, 마샬의 눈이 움직였다.

삼층 관람석에 서 있는 리제를 향해서.

 

그녀는 빗자루에서 내려앉은 채,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그 곳은......

 

 


//


 

 

대마술!?”

 

화들짝 놀란 리제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디선가 마력이 응집되고 있었다. 이정도 마술이면 어떠한 주문이든 자신들에게 이로울 게 없었다. 빨리 차단해야 했다. 하지만 의외로 시전자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삼층 복도! 거기에 숨어있었구나!”

 

리제는 빗자루에 올라타고 날아가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모여있는 마력의 량으로 보아서, 직접 날아가서 시전을 막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렇다면

 

뻔뻔하기도 하셔라! 이렇게 대놓고 대마술이라니!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각오하라고!”

 

리제는 정신을 집중한 뒤, 삼층 창 너머로 간드를 빠르게 세 발 쏘았다. 주변 사람들이 흔히 일컫는 일명 삼점 샷.

 

좋아, 이 정도면 캐스팅을 멈추겠지.’

 

대마술을 외우는 상대도 리제를 인식했는지 시선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날아오는 간드를 향해서도.

 

피해 보시지. 그 다음 건 더 큰 걸로 먹여줄테니까!’

 

리제는 주머니 속에서 카드를 꺼낸 뒤 만지작거렸다. 오늘 한 번도 쓰지 않은 회심의 역작. 마탄 그라비티 홀. 간드를 피한다면, 그 다음에 피한 위치에 맞춰서 때려박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

 


 

쨍그랑!

 


 

전개

 

비명과도 같은 소리와 함께 창문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나갔다. 그리고 마샬의 몸에 둔중하게 박혀오는 세 발의 간드. 그 여파로 마샬의 몸이 출렁거렸다.

 

 

변성 

 

울컥하고 몸속 깊은 곳에서만 돌아다니던 핏덩이가 한 움큼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뒤틀려서 비명을 지르는 마력회로들. 하지만 그럼에도 마샬의 영창은 끊어지지 않았다.

 

활성 

 

간드가 몸에 박히고, 후폭풍처럼 깨진 창의 유리조각들이 마샬의 몸을 덮쳤다. 마샬은 끔찍한 고통에 비틀거렸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눈동자의 혈관이 모조리 터져나가고, 입뿐만이 아니라 코에서도 핏줄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샬은 참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 술식 완료 

 

 

 

//

 



모든 것을 녹일 듯한 뜨거운 화염과는 다르게, 포근하면서도 따스한 기운이 미셸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건...?”

 

미셸은 눈을 들어서 마력의 흐름을 추적해 나갔다. 어렵지는 않았다. 그 흐름의 끝에 있는 것은 자신의 마력패스와 이어진 이였으니까.

 

마샬?”

 

다만 그렇게 부르는 게 맞는지 의문스러울 만큼 처참한 몰골이었지만

마샬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한 채, 피를 토해내면서 삼층 복도 창 너머에 서 있었다.

미셸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차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보 같은 녀석.

 

“......무리하는군.”

 

 


//

 


 

리제는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손에 쥐고 있던 카드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드는 줍지도 않은 채 중얼거렸다.

 

“......미쳤어. 그걸 피하지 않고 끝까지 시전 한 거야?”


 

 

//


 

 

마샬은 정신이 희미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바로 그것은

 

 


//


 

 

미셸은 마샬을 바라봤다. 마샬의 행동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보란 듯이 미셸을 향해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느릿느릿, 하지만 정확히 상대가 알 수 있도록. 그리고 마샬의 입술이 천천히 문장을 내뱉기 위해 움직였다. 비록 그것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중얼거림에 불과했지만그 효력은 대단했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미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잊지 않았다. 그대와의 약속은 꼭 지키지.”


자신의 역할을 완수한 마샬은 종잇장처럼 쓰러졌다.

그리고 마샬의 손등에 살고 있던 토끼는 귀를 하나 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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