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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함께한 하루


  "미천한 광대의 이름은 아-라-모드. 부르시는 대로 이곳에 왔소이다."

  절반은 웃고, 절반은 우는 표정의 마스크를 쓴 채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서는, 과장된 동작으
로 고개를 숙이는 광대. 지저분한 뒷골목에서 내가 쏟아낸 토사물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그 광
경을 바라보고만 있자, 광대는 주머니에서 갖가지 색깔의 공을 꺼내 저글링을 하기 시작했다.

  "어, 내가, 당신을 불렀다고?"

  "그렇소이다. 영혼과 소원을 교환해주는 자. 이 광대는 악마라고 하는 존재요. 환락의 광
대라고 하는 이름이외다. 에누리도 없고, 이자도 없이, 영혼을 받고 소원은 무제한. 아아, 이
어찌 남는 장사라고 하겠소이까."

  과장된 동작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마스크가 들썩일 정도로 한숨을 내쉰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저글링하는 공은 다섯 개에서 열개, 스무 개로 늘고. 아예 아라모드의 손을
떠나 멋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그럼 당신이 악마라는 거야?"

  "오오, 이것 참. 이것 참. 보고도 믿으시지 못하시겠소? 대지를 갈라 망령을 부르고, 하늘
을 갈라 우박을 내리면 믿으시겠소이까? 저어기 쓰레기통에서 황금이 쏟아지고, 저어기 전
봇대를 꼬리 두개 달린 구렁이로 바꾸면 믿으시겠소이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저글링 공들이 희번덕거리며 눈을 떴다. 쓰레기통이 킬킬거리며 웃
고, 전봇대가 입을 열어 새빨간 혀를 날름거린다. 수십 개도 넘는 눈들에게 주시당하니 정
신이 나갈 지경, 이미 술기운은 토해낸 것들과 함께 날아가 버린 지 오래다. 나는 거의 본
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 믿을게. 당신은 악마가 맞아."

  "크아아앗! 그거야 당연한 말씀이 아니오!"

  일순 귀가 먹먹했다. 아라모드가 마스크를 벗고 포효한 순간 뭔가 무서운 걸 본 것 같기
도 하지만 잘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 이런 호칭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다시
마스크를 쓰고 손가락을 튕겨 공들을 펑퍼짐한 주머니 안으로 불러들였다. 마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오른 주먹을 동글게 말고 그 안을 들여다보며 뭔가를 찾는 시늉을 하던 아라모드는
잠시 후 그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새까만 깃털 펜과 양피지를 꺼내들었다.

  "자자. 익살은 이쯤, 즐거움은 나중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뭘 해도 서류가 뒷받침 되어 줘
야 하는 게 아니겠소? 여기에 서명해 주시오."

  뭔가를 순식간에 휘갈겨 쓰고는 쓰윽하고 양피지를 코앞으로 내민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
을 받아들자, 거기에는 스멀거리는 붉은 글씨로 그녀의 이름과 나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두 번은 말해주지 않을 테니 잘 들으시오. 거기에 서명하면 소원은 무한대, 대신 당신의
영혼은 세계수가 무너져 종말이 도래할 때까지 이 광대의 것이오. 싫다면 서명하지 않으면
되는 건 당연지사. 이 광대는 올 때처럼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 드리겠소."

  사뭇 위협적인 어조. 마스크의 눈구멍으로 주황색과 남색의 눈동자가 빛난다.
  
  “…….”
  
  영혼이라고, 그런 건 이제 별로 중요 하지 않다. 나는 지독히도 무능한 남자, 사랑하는 여
인의 목숨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내. 이 비루먹은 영혼이랑 바꾸어 무엇이라도 이룰 수 있다
면 무엇인들 하지 못할까. 나는 아라모드의 손에서 깃털 펜을 받아들어 떨리는 손으로 양피
지에 사인했다.  

  “비어 있는 숫자! 연회장을 떠도는 자의 이름으로 이 계약을 고하오! 세계수도 간섭할 수
없고, 파멸조차 끼어들 수 없소이다!”

  계약서를 빼앗듯이 낚아채고는 기세 좋게 외치는 아라모드. 순간이 눈앞이 무수한 백색광
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보게 된 건…….
  낄낄거리는사자자신을잡아먹는뱀언덕을오르는성자교만탐식음란태만분노질투탐욕이일곱개
의아치를이루고사그라지는뒤를따라해골이웃으며촛불을토해낸다산양의머리위에올라탄탕녀일
곱개의뒤집어진뿔을가진물개의마수.

  “계약 성립!”

  있는 힘껏 외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한 번의 박수 소리. 눈앞을 떠돌던 환상들이 자취
를 감추었다. 아라모드가 손에 들고 있던 계약서는 보라색의 불꽃에 휩싸여 재가 되어가고,
아라모드는 익살스러운 동작으로 손을 털어 불티를 튕겨내고는 내 쪽을 돌아보았다.

  “이걸로 됐소이다.”

  “이제, 소원을 말해도 되나?”

  “조건이 다섯 개 있소이다.”

  기세 좋게 말하며 쫘악 펴 내미는 손가락은 여섯 개다. 내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아라
모드는 고개를 갸우뚱 하고는 재빨리 손을 뻗어 손가락 하나를 없애 버렸다. 흠흠, 하고 헛
기침 하는 시늉을 하고는 천천히 말하는 아라모드.

  “하나, 소원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을 불가하오. 둘, 소원으로 세계를 위협하는 것을 불
가하오, 셋, 소원으로 악마가 되는 것을 불가하오. 넷, 소원으로 소원을 덮는 것을 불가하오.
다섯, 영혼을 되돌려 달라는 소원은 절! 대! 로! 불가하오!”

  마지막 조건은 거의 절규다. 혹시 저런 경우를 많이 당한 걸까. 내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마주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뼉을 짝짝 치며 내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트랄라. 소원을 말하시오! 미워하는 자를 개구리로, 사랑하는 자를 백학으로, 보기 싫은
자를 지렁이로 만들어드리리까?”
  
  손가락 마디에 방울을 끼우고 차라랑 소리를 내며 흔든다. 그림자가 너울대며 춤추고, 포
석이 들썩이며, 쓰레기들이 깔깔거리며 다리 사이를 달린다.

“트랄라. 소원을 말하시오! 깔려죽을 만큼 무거운 황금의 비, 배가 터질 만큼 계속되는 연
회, 복상사가 염려될 정도로 수많은 여자를 보내드리리까?”

  물구나무 선채로 공중에 멈춰서 발바닥을 탁탁 두드린다. 쓰레기통이 입을 열어 허밍하
고, 비상계단이 북을 두드린다.

  “트랄랄라! 소원! 소원! 소원을 말하시오! 근엄하게 명령하시오, 비굴하게 손을 비비시오,
뻐기면서 행동하고, 도둑처럼 걸으며, 하나! 둘! 셋! 말해주시오, 영혼을 넘긴 가련한 남자!
당신의 소원은 무엇이오?”

  무지개를 휘감고 눈앞에 내려앉으며 손을 내민다. 뒷골목에 비처럼 내리는 화려한 꽃잎
들. 그 가운데 선 악마를 향해 나는 내 소원을 말했다.

  “내 아내를 살리고 싶어.”

  모든 것이 잦아들었다. 뒷골목에 존재하는 것은 단지 쓰레기와 구역질나는 냄새뿐. 아라
모드는 나에게 손을 내민 자세로 한참을 굳어 있다가 조용히 되물었다.

  “부인 되시는 분이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시었소?”

  “아니. 하지만 자궁암 말기라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

  “이보시오, 이보시오. 이 광대 우스꽝스럽긴 해도 악마요. 마수황제처럼 무한의 황금향을
불러올 수는 없어도 평생 떵떵거릴 정도의 부는 줄 수 있고, 흑의사신처럼 갑주종까지 역병
에 걸리게 할 수는 없어도 인간 따위는 수수깡 비틀듯 죽여줄 수 있소이다.”

  “돈도 필요 없고, 죽일 사람도 없어. 난 내 아내의 목숨만 살리면 돼.”

  내 말에 아라모드는 조바심이 나는 듯 발을 굴렀다. 우스꽝스러운 모자 끝에 달린 커다란
금방울이 시끄럽게 딸랑거린다.

  “인생에 딱 한번이오! 내가 영혼을 받아 가면 다시는 오지 않는 기회를 고작 그런 일로
써버릴 속셈이시오!”

  “응.”

  “크아아아아아아!”

  우와, 또다. 마스크가 잠시 떨어질 정도로 엄청난 소리를 내지른 아라모드는 추락하는 마
스크를 공중에서 낚아채 위아래를 뒤집어쓰고는 주위를 마구 뛰어다니며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내를 살린다고! 영생도 줄 수 있는데 아내를 살린다고! 아내를 살린다고! 천하일색도
줄 수 있는데 아내를 살린다고! 아내를 살린다고! 미어터질 재물을 줄 수 있는데 아내를 살
린다고! 아내를 살린다고! 아내를 살린다고!”

  살린다고……살린다고…….
  메아리가 귀속에서 맴돈다. 아라모드는 동작을 멈추고, 뒤집힌 마스크를 다시 제자리로
돌리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정말로 땅이 꺼졌다.

  “정말 김빠지는 소원을 빌고 계시는군. 이 광대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오.”

  꺼져버린 땅위에 둥둥 뜬 채, 어깨를 으쓱한 아라모드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와 손가락을
튕겼다. 귀를 막고 있던 손가락을 빼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부딪칠 정도로 얼굴
을 들이밀고 으르릉거리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아시겠소? 재미가 없단 말이오! 이 광대의 이름은 환락이외다! 귀찮은 소원이나, 황당무
계한 소원보다는 재미없는 소원을 더 싫어한단 말씀이오!”

  “그래서, 안 들어 줄거……냐?”

  “안 들어줄 거냐고!”

  눈앞에 넘실대는 시뻘건 불길.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빼자 아라모드의 마스크 밑에서 흘
러나온 불길은 다시 스멀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꽈악 쥐었다 편 손가락 사이에 자그마
한 유리병을 쥔 아라모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조용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 몸은 광대이기 전에 악마요. 내기도 하지 않고, 소원도 들어주지 않은 채 영혼을 받
아가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소이다.”

  유리병 속에 고이기 시작하는 붉은 액체. 아라모드는 그걸 툭하고 나에게 튕겨주었다. 반
사적으로 그걸 받아들자, 뭔가 뜨거운, 그러면서도 질척거리는 묘한 느낌이 느껴졌다. 마치,
피 같은…….

  “이 광대의 피요. 이 광대에게는 창조의 권능은 없으니 댁의 아내를 살리려면 그 방법밖
에 없소이다. 쳇, 사람을 살리려는 거면 척안의 마법사나 침묵의 여법황을 부르는 편이 더
나을 텐데. 아니, 스물둘의 대악마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악마들 중에도 병을 치료하는 능
력을 갖고 있는 것들이 많은데 하필 나를 부르셨소.”

  “이, 이걸, 마시면 살 수 있는 거야?”

  “그렇소, 아니오.”

  이상한 대답을 한 아라모드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말꼬리를 늘여 말하기 시작했다.

  “살아나는 건 살아나오오오오. 하지만 악마의 피를 받아들여 살아난 자를 어디 인간이라
하겠소오오오오. 선택은 둘 중 하나아아아아. 마시지 않고 죽느냐아아아아. 마시고 죽은 채
로 사느냐아아아아.”

  “그럼 어느 쪽이던 죽는 다는 이야기 아냐?”

  “틀리오! 마시면 확실히 살아나긴 한단 말이외다!”

  제자리에 탁하고 멈추어 서서 등을 보인 그녀는 목만 빙글 돌려 이쪽을 바라본 채로,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외쳤다. 내가 그런 그녀를 떨떠름하게 바라보자, 아라모드는 목
은 놔두고 몸만 빙글 돌려 정상으로 되돌린 다음, 질렸다는 투로 말했다.

  “알겠소! 그렇다면 같이 가주겠소! 댁의 아내가 그걸 안 마신다면 내가 마시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해드리리다!”

  “어, 지금은 병원에 들어가지 못 할걸. 시간도 늦었고…….”

  “크아, 너무 자주 잊으시는 것 같은 데 이 광대는 악마요. 시간은 심심풀이요, 세월은 하
품일 뿐이외다!”

  비웃듯이 외치고는 손바닥을 짝짝 친다. 동시에 토사물과 술로 범벅이던 내 옷이 깨끗한
양복으로 바뀌는 것과 동시에 지저분한 뒷골목이 황량한 건물 옥상으로 바뀌었다. 아니, 내
가 옮겨진 거겠지. 아라모드는 옥상가장자리에 서서는 손을 이마에 대고 이리저리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나에게 물었다.

  “그래, 부인은 어디 계시오? 알려만 주시면 쌩하니 모셔다 드리리다.”

  “악마는……어지간한 건 다 아는 것 아니었어?”

  아라모드는 동작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더니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내쉰 한숨이 또
한숨을 쉬고, 그 한숨이 또 한숨을 쉬고, 그 한숨이 또…….

  “악마도 세계수의 그늘 아래 있소이다. 신이 아닌 바에야 어찌 모든 걸 알겠소이까? 이
광대, 길을 걷고 있는 자가 일주일 전에 뭐를 먹었는지도 알 수 있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자라면 뭘 하고 있는지는 알 재간이 없소.”

  혼자서 계속 한숨을 쉬고 있는 한숨을 꾸욱 눌러 구겨버리고는 구석으로 집어던진 아라모
드는 손을 귀에 대고 나에게 가져다댔다.

  “어, 그러니까. 시내에 있는 제일 큰 병원 있지? 바벨탑이라고 부르는 거.”

  “크……. 마천루의 주인께서 손대신 그 건물 말이로군, 확실히 그런 곳에 있으면 나을 병
도 안 나을 지경이겠소. 자, 가시오! 바람을 앞질러 다리 걸 정도로 빠르게! 깃털을 밟아 도
약할 정도로 가볍게!”

  따다다닥하고 순식간에 오른 손의 손가락을 모두 튕긴다. 뭔가가 등골을 잡아당긴다는 느
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거의 내동댕이쳐지듯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엉거주춤하게 일어나서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자, 아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의 정문이었다. 어떻게
한 건지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아라모드는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다리 다친 새나, 허리 굽은 고양이도 그렇게 볼썽사납지는 않겠소.”

  “해본 적이 없는 걸 어떡해. 게다가 다시하고 싶지도 않아.”

  “어련하시겠소. 이 광대도 볼품없이 떨어지는 공은 위로 던지지 않소이다. 어서 안내해
주시오. 댁의 아내를 후딱 살리고, 댁의 영혼은 냉큼 받아서, 번쩍 하고 사라져야겠소.”

  팡하고 손을 친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라모드는 마주 고개를 끄덕이고 병원 유리문
에 손을 댔다. 잠겨있어야 할 터인 문은 그녀가 손을 대자 손쉽게 열렸고, 그녀는 과장된
동작으로 허리를 숙여 들어가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밤의 병원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이곳은 분명 사람을 살리는 곳인데도 진절머리가 날 정
도로 죽음과 가까이 있다.

  “아내가 그리 되신 지는 얼마나 되셨소?”

  지독하게 조용한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아라모드가 말을 걸어왔다. 밝은 달빛에도
그녀에게는 그림자가 없고, 방울소리는 울려도 걷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결혼할 때부터 그랬으니까, 3년 쯤. 내가 결혼할 때 나랑 아내는 19살이었어.”

  “휘유, 대단하시군. 학창시절의 청춘에서 아름다운 결혼이오?”

  “그런 멋진 게 아니야.”

  그래, 멋진 게 아니지. 소꿉친구였던 아내는 중학교 때부터 짐승만도 못한 알콜 중독자
양부에게 강간당했다. 게다가 학교의 논다하는 양아치 놈들까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남자
들의 폭력과 강간에 시달리며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녀의 몸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엔
이미 여자로서의 기능조차 상실해버린 후였다.
  나는 지켜주지 못했다. 그녀가 당하는 일련의 폭력을 고등학교 때까지 알지 못했다. 알았
다면, 최소한 눈치라도 챌 수 있었다면.

  “나는 무능해. 그녀한테 해준 건 아무것도 없어. 좋은 연인이 아니었고, 좋은 남편이 되
주지도 못했어. 그러니까 최소한 그녀를 살게 해주고 싶어.”

  “굉장한 사랑이시군. 눈물이 날 지경이오.”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중얼거리며 아라모드는 정말 만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주먹만 한 눈
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궁금하긴 하다. 악마는 다 아라모드처럼 저런 짓을 할 수 있
는 건지, 아니면 그녀만이 광대라고 하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일까. 익살스러운 동작이
나 과장된 행동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인가.
  소리가 나지 않는 방울을 팔이 빠져라 흔들어대면서 앞이 막힌 나팔을 불려 애쓰는 아라
모드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아내의 병실 문을 열었다.

  “여보.”

  조용히 이름을 부른다. 내 부름에 달빛 드는 침대에 예쁘게 누워 있던 아내가 조용히 눈
을 떴다. 팔이고, 이마고, 그녀의 생명을 유지시켜준답시고 몸에다가 연결해 놓은 기계장치
의 전선들. 입에는 산소 호흡기인지 뭔지가 있어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눈을 깜빡이는 것  
뿐이다. 눈만으로 빙긋이 웃는 그녀의 모습에 왈칵 울음이 나왔다.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앙상한 손을 잡는다. 아주 차가운 손을 느끼며 힘겹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라모드. 이 사람 살려줘."

  등 뒤에 서 있을 아라모드를 향해 말한다.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알았는지 아내는 눈을
조금 뜨고, 이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라모드에게서 대답은 없다.

  “나한테는 이 사람이 내 목숨보다 중요해. 그러니 부탁해. 내 영혼을 줄게, 아라모드. 아
내를 살려줘."

  “이 광대, 발할라에서 쫓겨나 소원을 이루는 것을 업으로 삼은 존재. 숫자에 묶인 스물
둘의 하나이며, 4만의 악마와 함께하는 마계의 주민. 받은 소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뤄드
리오.”

  눈앞으로 나선 아라모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내에게 속삭였다.

  “아름다운 분이여. 눈을 감아요. 자장가는 없지만 엄마 품처럼, 벨벳은 없지만 침대 위처
럼. 눈을 감고 양과 노닐며 기분 좋게 잠들고 일어나면, 모든 악몽은 사라질 거예요.”

  목소리가 너무나도 감미로워, 나조차도 졸음이 올 지경이다. 놀란 표정으로 나와 아라모
드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의 눈꺼풀도 조금씩 떨리다가 끝내 조용히 닫혀버렸다. 새근새근
하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아내의 얼굴은 진정 천사다. 그리고 그런
천사를 살려내는 것은 마스크를 쓴 악마.
  아라모드는 조용히 아내의 산소 호흡기를 떼어내고, 나를 바라보았다.

  “먹이시오. 그러면 당신의 아내는 생명을 얻고 이 광대는 영혼을 얻을지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라모드가 준 유리병안의 내용물을 아내의 입에 흘려 넣었다. 가
느다란 목이 꿀꺽하고 악마의 피를 삼킨다. 아라모드는 그런 아내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다
시 산소 호흡기를 씌우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내한테 편지 좀 써도 될까?”

  “그러시오. 일출 때까지 기다려 드리리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아라모드는 아무 말 없이 아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스크 안에
감추어져 있을 그녀의 모습은 짐작할 수 없지만, 흐트러진 아내의 이불을 정돈해주는 그 모
습은 보기 좋았다. 역시 악마치고는 이상한 존재가 틀림없어. 아라모드는.
  
  사랑하는 여보에게, 로 시작해서. 몇 번이나 사랑한다는 말을 적은 지도 모를 편지를 끝
마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들고 아라모드를 돌아보았다. 창가에 앉은 채 떠오르기 시작하는
태양을 바라보는 아라모드. 나는 편지지를 잘 접어 아내의 베개 밑에 넣어두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 쓰셨소?”

  “응. 이제 미련은 없어. 마음대로 해.”

  나를 바라보는 아라모드의 눈동자는 처음과는 달리 녹색과 붉은 색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놀라움을 느끼지 못한다. 두 번째로 그녀의 마스크가 벗겨졌을 때. 내가
본 그녀의 얼굴에는 입도 코도 없이 눈만 7개였으니까.
  그녀는 악마다. 그 어떤 것도 아닌 인간의 영혼에 가장 높은 값을 매기는 존재.

  “그럼, 마지막 일출을 즐기시오.”

  조용히 창가를 비켜주는 아라모드에게 고개를 끄덕여보고 조용히 창가로 가서 섰다. 마지
막으로 깊게 잠든 아내를 바라보고, 고개를 돌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본다. 등 뒤에서 우
렁찬 아라모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약완료! 나의 이름은 제로! 근원에서 나오지 않은 무존재의 수! 지금 그 이름을 걸고
이 가련한 자의 영혼을 회수하오!”

  빛이 눈부시다. 소리가 귀에 울린다. 힘이 빠져나가는 감각. 그 감각이 옅어지는 느낌. 그
느낌이 아득해지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나의 죽음. 그것을 느끼는 순간 그야말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미 웃을 수 없는 몸은
  미소를
  지으
  며
  …………




  
“소원은 이루어졌소이다.”







0. The Fool : 환락의 광대. 무지개의 아라모드
기괴한 모양의 마스크를 쓴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여인으로, 일곱 개의 눈을 지니고 있다.
본인이 늘 말하는 것처럼 연회장을 떠도는 광대. 커다란 파티의 13번째 기둥에는 언제나
그녀가 익살을 피우고 있다. 가장 너그러우며, 가장 찾기 쉽지만, 가장 시끄러운 악마기도
하다. 재미없는 일이 아니라면 화를 내기도 한다고.
마스크를 벗으면 드러나는 무지개 색의 일곱 눈은 각각 인간에게 일곱 개의 감정을 불러일
으킬 수 있다. 진정 순수한 것을 밝혀내고, 극상의 쾌락을 맛 보여줄 수 있으며, 갖가지 요
술을 부려 환각을 보이고, 길 위를 걷는 모든 자의 신원을 알 수 있으며, 쉬지 않고 여행해도
지치지 않게 해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원하는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 쓰는 마스크는 언제나 다른 것으로, 본인도 가면
이나 악세사리를 모으는 것을 즐기고 있다.    
그녀를 멸망시킬 자는 따돌림 받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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