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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많고 많은 교통편 중에서 지하철을 이용한다. 오늘같이 비 내리는 날에도 비를 맞지 않는 데다가...

... 아무 생각 없이 잘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가용-물론 부모님 것이긴 하지만 키를 맡겨두었으니 상관없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하철을 이용하는 이유이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주 잠을 잔다.

잠을 잔다는 것은 나에게 하나의 도피인 셈이었다.

보통은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고 하지만 나는 좀처럼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폐증상의 일종이라는 ‘무상증’이라는 희귀 정신질병이었다. 한때는 정신병원에서 통근치료까지 받아가면서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현재에는 나를 아는 사람들은 그것의 개선 여부에 대해서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어쨌든 나는 약간의 인파 속에서 포로수용소 같은 고철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비어있는 자리를 둘러봤다. 자리가 있으면 가서 앉고 없다면 선다. 과정은 다르지만 결과는 항상 하나이다. 조용히 아무 것도 없는 정적의 세상으로 나를 초대하는 것. 간단하게 말하자면 잠이라는 것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 어느새 내가 내려야 하는 역이 기계적인 어조의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오면서 나에게 안내해 준다.

조그마한 사람의 물줄기가 나와 함께 그 지하철 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무생각 없이 얼마 동안을 걷다보면 내가 다니는 학교가 나온다.

학교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보면 어느덧 입가에 확연히 드러나는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기계적으로 입 주변의 근육의 명령에 따라 무기력하게 움직이는 턱과 코 사이의 틈은 웃는 표정이 되었다.

기계적으로...

학교에서의 나의 생활은 그나마 인간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집에서와는 달리 사람들과 말을 하고 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가 편한 건 부인할 수 없었다. 조금 기계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해도 여태까지도 혼자서 잘 지내왔고, 앞으로도 잘 지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어!”

“...”


어느 순간에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녀석의 손이 나의 어깨에 닿았다. 비를 맞아서 그런지 나의 어깨가 차가움을 호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참고로 말하자면 이 녀석은 학교에서 몇 안 되는 친구중의 한 녀석으로 나에게 가장 말을 많이 거는 정우라고 한다. 중학교 때도 있었지만 그라는 존재와 내가 친구라는 끈으로 연결 될 수 있는 것은 고등학교를 들어와서이다. 그 전까지는 서로의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던 우리였으니까.

말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는 지라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정우 녀석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첫 친구를 만난 후에 학교 안으로 들어간 나는 평소와 같이 나의 교실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있을 곳... 내가 있을 곳이지만 그것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내가 있을 곳은 꿈속에 있는 나만의 공간뿐이다.

일찍 도착해서 그런지, 창밖에는 얇은 비가 창문을 가볍게 노크하고 있었다.

투두둑 투두둑

잠깐 비의 리듬에 맞춰 흥얼거려 보았지만 다만 흥얼거림으로 끝날 뿐 비오는 날의 설레임 따위는 없다. 회색 하늘과 짙은 먹구름의 세상이 세상에 초래되었다. 고등학교생활은 사실 꿈이 많은 나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현실문제와 각종 진로문제 그리고 아까 말한 그 꿈이라는 녀석이 비빔밥처럼 얽혀있는 나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성격상의 문제가 명백하다는 것은 여기서도 알 수 있었다. 환경 탓인지 유전자 탓인지, 내 존재 자체가 원래 이런지는 모르겠으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꿈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잊어버렸다고 보는 쪽이 옳을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분명 무언가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언제부턴가는 마치 처음부터 꿈이 없었던 것처럼 불투명하고 무얼 해야 할지 전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마냥 퍼질러 자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다크 템플러, 그것이 내 학교에서의 별명이었다. 짖굳은 몇 녀석들이 붙인 것이 시작이 되어서 시작된 이 이름은 한참 유행하며 지금도 대중적인 게임이 된 ‘스타크래프트’에서 나오는 유닛의 이름이다. 기척 없이 적진에 숨어들어 상대방을 공격하는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나와는 사뭇 다른, 나는 검을 잃어버린 다크템플러가 차라리 어울릴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척이 없는데다가 공격의욕까지 전혀 없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 하루는 7교시 내내 잠들어 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할 정도로 나는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좋아했다.

드디어 1교시 수업시간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마치 수면제처럼 나의 눈꺼풀을 무겁게 짓누른다. 이제 서서히 잠이 들고는 해가 질 무렵에서나 일어나겠지...

잠에서 깨어나면 언제나 허무하다. 현실이란 녀석도 아니나 다를까 도피자에게는 가혹한 벌을 내리는가 보다.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영 정신이 몽롱한 것이 꽤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모양인가 보다. 선생님들이 깨워야 정상이겠지만, 몇 달 째 지속된 나의 잠 풍경에 선생님들까지도 두 손 두발 다 든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앞자리에 있는 녀석에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 물었다. 아니, 정확히는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어이 이봐 거기 엎어져 있는 녀석! 종례시간 까지 잘 건가?”

...종례시간임이 분명했다.

“후우, 오늘은 7시간 동안이나 잠들어 버렸던 걸까?”

담임선생님의 뻔한 종례가 끝나고 아이들이 하나 둘 나가기 시작했다. 분주하고도 즐거워야 할 방과 후의 풍경. 하지만 학생들이라면 모두 즐거울 이 풍경마저도 나에게는 하나의 일상에 불구 했다.

왜인지 조차도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턴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하루일과가 되어버린 등교, 하교 그리고 집. 슬펐지만 무엇보다도 더욱 슬픈 것은 그런 슬픔을 느낄 겨를조차 없이 나른하다는 것이다. 언제나 항상 메마른 나른함은 단순한 일상보다 더욱 나를 슬프게 했다. 때로는 그런 나른함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게도 한다.

집에 올 때는 항상 나는 걷는 편이었다. 나른함을, 현실로의 도피를 걷기 위한 최후의 발악이었다. 계속해서 걷고 또 걸었다. 특유의 무상증 때문에 이 걷기는 상당한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이’ 반복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미친다는 것이 기정사실이었다.

그래서 몇 달 동안은 걷다가 최근에 그 최후의 발악마저도 점점 꺾여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거리의 풍경들은 계속해서 바뀌었지만 시선은 좀처럼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가지 않는다. 억지로 눈을 돌려놔도 곧 땅을 볼뿐이었다. 슬슬 이 노력도 지쳐가고 있었다.

집이 눈앞에 보였다. 꽤나 말끔하지만 불이 꺼져있는 집.
대문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벨을 눌렀다. 아무도 없는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누군가 나오기를 바라던 것일까? 아니,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미 집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일까 대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부모님께서 해외로 떠나신 뒤에는 늘 초인종을 눌렀다. 텅 빈 현관과 차가운 거실바닥이 나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그 짙은 어둠 속으로 나는 내 하루 외출일과를 끝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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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병: 생각을 할 수 없는 병. 자폐증의 일종이라고 하지만 그런 병은 없다. 다만 정신병일 뿐이다. 자기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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