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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단편 습작 - 냉장고

2008.01.20 22:36

비렌 조회 수:197

냉장고




집에 돌아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런 대꾸도 없다. 아마 여전히 그곳에 틀어박혀 있겠지, 집에 돌아오면 으레 느끼곤 하는 불쾌한 갈증을 하소하고자 냉장고를 열었다.

"... 왔어?"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냉장실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작은 체구의 아가씨를 바라본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야?"

물병을 꺼내서 한모금 마실 때 까지 그녀는 '에, 그러니까. 음.' 하며 말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됐다, 됐어. 말을 말지."

물병을 제자리에 놓고 문을 닫는다.

그녀의 뭔가 복잡한 표정이 조금 걸리지만, 나는 개의치 않으려고 노력했다.

습관적으로 켠 TV에서 왜곡되고 미화 된 정보가 내 눈과 귀를 어지럽혔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쇼파에 기대어 나른하게 되어버린 기분을 만끽한다.

뭔가 기분좋게 늘어지려는 찰나.
끼익 하며 냉장고가 살짝 열리더니, 조막만한 얼굴이 나를 찾는다.

"오늘 눈 와?"

"... 일기 예보에서는 온댔어. 걱정마."

별로 안심 시킬 생각도 없었지만, 나는 습관대로 걱정하지 말라며 그녀를 거짓된 포장으로 위로한다. 도대체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 여자에게, 더 이상 신경 쓰는 건 사치다.

"다행이다. 그럼 나 1년 더 살 수 있는거네?"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왠지 나른해져서 더 이상 뭔가 대꾸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쇼파가 마치 내 온 힘을 빨아들이는 것 같아서, 그게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 만약... 더..."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저 녀석은.





그건 내가 인식 할 수 있는 나이로 처음이었다.

내가 무언가를 만들었다.
단순히 눈을 굴려서 어린애도 들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조그마한 눈사람을 만들었다. 그건 곧 내 자랑이 되었고, 겨울 내내 집 마당에 서서 나에게 자부심을 줬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같은 소리지만, 그 눈사람만 있으면 세상 모든 일이 가능 할 것 처럼 들떠 있었다.

그 눈사람은 지금...





눈이 번쩍 뜨였다.

이미 시간은 새벽으로 치닫고 있었고, 적막이 무겁게 좁은 아파트를 채우고 있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내가 일어나야 할 이유도 없었고, 내가 미칠듯이 불안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가슴이 너무 뛰어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를 불러 보았다.

불안감에 벌떡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을 때, 냉장고가 벌컥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주황의 빛이 쏟아지는 가장자리에,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녀가 보였다.

이미 녹아버렸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너무 적게 내려서, 일부러 모으지 않는 이상 눈은 바닥에 닫자마자 녹아서 없어져 버릴 정도로.

바닥이 물바다로 변해 있었지만, 난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 보일러를 켜 놨어."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른 했던 이유? 겨울인데도 눈사람인 그녀가 방에 나와있지 못했던 이유?

"나, 너에게는 소중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널 깨워서는 안되니까. 그래서 나..."

보일러에 의해 따듯할대로 따듯해진 방바닥은, 이미 그녀의 허벅지를 절반쯤 녹여버리고, 그래도 기어가려던 그녀의 손목마저 뭉텅 잘라먹었다.

여전히 횡설 수설, 대화를 잘하지 못해 생각나는데로 말하는 건 여전하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미안해. 멋대로 망가졌어. 나... 더 이상 네게 필요 없는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 용서해 줘. 응?"

무릎을 꿇고 무너져 버린다.

"바닥, 내가 닦을게... 미안해... 아... 나, 곧 죽는걸까? 그래도 괜찮아. 이제 나... 필요 없는 거지?"

그녀를 안아올린다.

물이 뚝뚝 떨어지지만 개의치 않는다. 눈에서 흐르는 뜨거운 것 마저 그녀의 살을 갉아먹는다. 그래서 울수도 없다. 허리 아래쪽이 부스스 거리며 곧 부서질 것 같지만, 어떻게든 받쳐들고 밖으로 달린다.

"... 응? 왜 그래? 우리 어디 가?"

"시끄러워!"

그녀가 깜짝 놀란다. 곧 우울한 목소리가 들린다.

"... 응, 미안해. 화내지마, 나 같은 것 때문에 화내지 마."

등에서 서늘하고 날카로운게 찔러대는 것 같다. 계단을 급히 뛰어내려가서, 차가운 바람이 부는 아파트 마당까지 나온다.

"... 차가운 곳, 차가운 곳!"

그녀가 멍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곧 완전히 바스라져버릴 것 처럼 불안한 그 눈에는 도대체 무슨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일까.

재빨리 달려서 한 동안 주차되어 싸늘하게 식어버린 차의 본넷위에 그녀를 눕힌다.

눈을 모을 방법이 없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건 떠오르지 않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생각해 내야 한다.

"... 음... 저기, 냉장고에 우유 떨어졌어."

"지금 이 상황에 무슨 소리야!"

"이 상황? 지금 상황이 어떤데...? 나, 바보라서... 좀 가르쳐 줘. 응? 미안해."

눈 앞에 불룩 하고, 일그러진다. 그녀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다.

아아, 눈물은 뜨겁기 때문에 안된다.
하지만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눈물을 멈추는 방법같은 건 왜 아무도 안 가르쳐 주는거야?

"... 나 버리러 나온 거 아냐? 빨리 들어가, 추워... 봐, 너 눈물도 나잖아."

난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하는 거지?

우라질, 도대체 눈이 왜 이렇게 찔끔 찔끔 내리는 거야, 좀 펑펑 내려 달라고! 평소에 방탕하게 살아온 인간에게는 결정적인 순간에 소원을 빌 빌어먹을 권리도 없는거냐?

긴장과 추위때문에 완전히 굳어버린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 죽지 마."

"으응? 나, 어차피... 생명이 아냐, 알잖아?"

"빌어먹을! 죽지 말라면 죽지 마!"

또 소리쳐 버린다.
하지만 그녀는 놀라지 않는다. 그저 손목만 남은 팔로 내 얼굴을 문지른다.

"울지마아..."

"만지지마! 녹아버려, 더 이상 녹아버리면..."

"난 괜찮아. 아프지도 않은 걸? 하지만 넌 아프잖아. 계속 울고 있어..."

눈물이 떨어져, 그녀의 신체에 푹푹 구멍을 뚫는다. 자신이 침식당하는 모습을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그녀는 말한다.

"... 혹시, 그럴리는 없겠지만... 아직 내가 필요해?"

그녀를 안는다.
눈물로 그녀의 어깨를 망가트리면서, 부서질지도 모르는 그 신체를 힘도 주지 못하고 끌어안는다.

그녀는 내 자부심이었다.

그녀가 처음 내게 말을 걸었을 때, 그리고 그 해의 눈으로 그녀를 한해 더 살 수 있게 한다는 걸 알았을 때, 그런 것 과는 상관 없이.

그녀는 어린 시절의 내 자부심으로 계속 내 냉장고 안에 살아 있었다.

"안돼, 없으면 안돼... 어른이 되어서 포기해야 하는 건 싫어... 계속 내 냉장고에 살아 있어 줘..."

"... 하지만, 나 오늘 눈을 덧붙이지 않으면..."

"눈이 있는 곳..."

갑자기 생각났다.

그거라면 그녀를 되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녀를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자동차 키가 부러져라 급히 자동차 문을 열고, 그녀를 조수석에 올려두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냉방을 최대한으로 튼다.

괜찮아, 괜찮아. 할 수 있어.

굳이 이곳의 눈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단지 오늘 내리는 눈을 맞아야 한다면, 눈이 많이 내리는 곳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추워서 자꾸 손이 곱아들어가지만, 한시도 멈출 수 없다.

재빨리 라디오를 틀어서 일기예보를 확인한다.

눈이 많이 오는 곳, 단지 그곳이면 된다.





집에 돌아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런 대꾸도 없다.

떨리는 손으로 냉장고를 열어 봤지만, 그곳에 그녀는 없었다.

"흐유..."

난 작게 한숨을 쉬고는, 택배랍시고 받아온 스티로폼 상자의 개봉을 뜯고 열어버린다.
그곳에는 눈이 아주 많이 오는 지역에 사는 친구 녀석이 보낸, 한 무더기의 눈뭉치가 있었다.

"짜식, 늦지 않게 줬군."

나중에 소주라도 한잔 사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안방의 문을 연다.
거기엔, 아이스크림 바를 입에 물고 있는 그녀가 있었다. 에어컨으로 방의 온도를 떨어트려서 이 방 자체를 냉장고로 만들어 놓은 건 도대체 누구의 생각이었는지...

"웅? 왔어?"

"보일러 켜 놓으랬잖아. 멍청아."

"에에, 깜빡했다! 용서해 줘."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다.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건지,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제스처를 취해 보이는 모습이 참 귀엽다.

"됐다, 아이스크림은 놔두고 이거."

"응? 눈이야?"

스티로폼 박스를 안아들더니, 작년에 그녀를 데리고 간 고개에서 눈을 맞을 때 처럼, 방긋 웃어 보인다.

"우리, 1년 더 함께 있을 수 있게 된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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