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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단편] 왜곡영웅담 - Red Or Green

2004.05.01 18:50

느와르 조회 수:579

키스까지의 거리가 늦어지는 듯 하여,
예전에 써두었던 단편을 손봐서 올립니다.
조금만 더 봐주세요^^;

음...리플 달기 운동을 하고 계시군요.
자도 본 글은 모두 달긴 합니다만.;;
모든 글을 보고 리플을 달아야 할텐데...;




[R.O.G]



그의 이름은 크림슨 레드. 붉은 용사라고 불리는 남자.
성검 붉은 노을에게 선택받아 절대적인 강함을 얻은 사람.
수백의 마수를 배고, 수천의 마(魔)를 부수는 천만파마의 검사.
그리고 나를 죽일 단 한명의 소년.

그녀의 이름은 에버그린. 녹음의 마왕이라고 불리는 여자.
마왕 블루스피어의 힘을 이어받아 최악의 마성을 얻은 사람.
수천의 마수를 부리고, 수만의 마(魔)를 거느린 절멸군세의 마녀.
그리고 내가 죽일 단 한명의 소녀.


  마룡의 날갯짓이 어두운 하늘을 가른다. 먹구름을 휘감고 벼락을 찢으며어둠을 머금은 능선을
따라 비행하는 검은 마룡. 불행과 공포를 모두 담은 검은 몸체는 능선의 최고봉에 있는 칠흑의 성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칠흑의 검은 안개가 마룡의 몸을 휘감고, 마룡의 모습을 장신의 미남자로 바꾸었다.
뇌우와 먹구름이 흉측스러운 배경을 만들어내는 성의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고 마룡이었던 남자는
성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공포의 반석위에 절망이 기둥을 세우고 죽음이 서까래를 달리며 멸망이 지붕을 덮은
마왕의 흉성(凶城). 남자는 그 어두운 향연의 장에서 너무나도 짙은 심녹색의 기운을 발견했다.
  기괴함과, 끔찍함만을 모안 만든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왕좌위에 몸을 구겨 넣듯이
하고 앉아있는 연녹색머리칼의 여인. 숨이 막힐 정도로 성안을 가득 매운 기운은 모두 그녀
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것일까. 여인은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은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누구…? 골드? 실버? 화이트?"

  "화이트입니다. 마왕님."

  여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이는 남자.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없는
초록색의 눈동자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허공만을 맴돈다. 그녀는 손을 움직여 고인 눈물을 짜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그래. 실버는 블루 다음으로 죽었었죠?"

  "예. 붉은 용사의 손에 죽었습니다."

  울분과 치욕을 억누르며 중얼거리는 화이트. 여인은 그런 화이트에게로 힘겹게 시야를 맞추었다.
하지만 그 눈은 그저 그에게로 향해있을 뿐. 마른 다리를 천천히 왕좌 아래로 내리고 녹색의 망토를
어깨 뒤로 넘기며 왕좌에서 일어난 여인은 무릎을 꿇은 그의 곁을 지나치며 중얼거렸다.

  "골드도……지금 그와 싸우고 있겠지요?"

  "예. 마왕님께 받은 영광된 이름을 걸고 마왕님의 길을 막는 저주받을 성검의 용사를 부수기 위해 갔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여인의 뒤를 따르는 화이트. 여인의 녹색망토가 바닥을 스칠 때마다 녹색의
기운이 스멀거리며 피어올랐고, 화이트의 다리가 땅을 딛을 때마다 철컥거리는 소리가 성을 맴돌았다.

  "몇이나 이끌고?"

  "삼천의 마군. 삼십의 마수를 이끌고 갔습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의 테라스에 다다라 걸음을 멈춘 그녀는. 꿈틀거리는 악의의 능선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리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라아아라아아아라
  라라라하아라아히
  라아아라히라히아
  
  아름다운 목소리. 그리고 단조로울 정도의 반복. 능선 위를 흐르는 여인의 노래는 점차 무거워지고,
급격해졌다. 쿵, 하고 울리며 물결치는 검은 물결. 그리고 능선이 포효했다.
마치 음식에 달라붙어있던 개미떼가 떨어져나가듯, 능선을 검게 물들이고 있던 수만의 마군이 녹색
평원으로 내려섰다. 차가운 갑옷 안에 저주받은 혼만을 담은 채, 자신들의 군주를 바라보는 수만 기의
사령기사들. 여인은 노래를 멈추고 화이트 쪽을 돌아보았다.

  "화이트, 이 아이들과 같이 골드에게로 가요. 그 정도로는 모자라."

  "예?"

  반문하는 화이트. 여인은 얼굴을 감싸 쥐고, 고통스러운 듯 외쳤다.

  "그 정도는 모자란다고! 붉은 용사를 없애기는 그 정도 수로는 모자라! 대체 왜 죽으러 간 거야, 골드는!"

  "마왕님?"

  "그렇게 부르지 마!"

  고개를 드는 여인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은 투명한 눈
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 하지만……마왕님은……."

  "알고 있어! 절멸군세의 최악마성! 녹음의 마왕 에버그린!"

  여인의 외침에 따라 미친 듯이 요동치는 성. 자신을 질식사 시켜버릴 것 같은 기세로 몰아치는
녹색의 기운을 힘겹게 버텨내며 화이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상의 악. 모든 인간의 적.
절멸군세의 마녀. 연녹색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오열하는 자신의 군주를.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의 장님 소녀일 뿐인 여인을.

  "내 이름은 에버그린이야……. 그 이상은 붙이고 싶지 않아…그 이상은 필요도 없어……."




  
  [하아아……커헉!]
  
  마왕군 제 2 군단장 골드는 피 섞인 가래와 함께 힘겹게 숨을 토해냈다. 가슴을 파고들었던 검이
공중에서 회전한다. 자신의 키만 한 거대한 검을 회전시킨 붉은 머리칼의 남자는 그대로 등 뒤에 서있던
마수를 베어버리며 검을 땅에 꽂았다.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와 소년의 몸을 물들이고, 대지를 적신다.
소년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다시 뒤로 돌아 골드를 바라보았다.  

  [역시 증오스러운 붉은 용사…혼자서 삼천의 마군을…모두…….]

  힘겹게 말을 이어나가는 골드. 피에 젖은 갈기와 사자의 얼굴이 힘들게 떨렸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선 붉은 용사는 슬픈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죄. 송. 합. 니. 다.

  […큭…사과 따위……받아줄 것 같은…가…….]

  비웃듯이 중얼거리는 골드. 자랑하던 황금의 팔도, 에버그린의 힘을 받은 무적의 철갑도,
눈앞의 소년에게는 갈대의 팔이요 누더기의 옷이었다. 골드는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오른팔로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했다. 위험하게 휘청거리는 그의 모습이 보기 안타까웠던 것일까.
붉은 용사는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웃기지도 않는 동정 따위는 집어치워!]

  가멸차게 외치며 몸을 트는 골드, 하지만 붉은 용사는 개의치 않고 그의 몸을 똑바로 앉혀준 후에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조롱하려는 것도 아니고, 동정하는 것도 아닌 순수한 선의로 이루어진 행동.
골드는 부드러운 용사의 얼굴에 욕지기를 내뱉었다.


  [젠장! 너 같은 바보 멍청이가! 뺨을 맞으면 반대쪽까지 들이대 줄 머저리가 어째서 우리의 적인가!
어째서 우리의 적인가! 대답해라, 붉은 용사 크림슨 레드!]

  아직 앳된 소년티가 남아있는 얼굴에 슬픔이 떠올랐다. 골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껏 자신의 명분
을 내세우며 자신들을 악으로 규명한 자들은 절대로 저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어째서 정작
적이 되는 것이 당연한 저 소년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인가. 소년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죄. 송. 합. 니. 다.

  […이제 됐다…용……아니. 소년이여. 끝내다오.]

  골드의 가라앉은 목소리. 붉은 머리칼의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땅에 박아두었던 거대한 검을
뽑아들었다. 최강의 성검, 붉은 노을의 어두운 광택이 골드의 얼굴에 비춘다. 그 저주스러운 검이
자신의 고통을 끝내주기를 기원하며 골드는 눈을 감았다. 그 조용한 모습에 소년은 공중에서 한차례 검을 회전시켜 휘둘렀다.


[마왕님! 지금 당신의 부족한 부하가 사죄합니다! 부디 이 어리석은 세계에 멸망을!]


포효처럼 터져 나오는 골드의 단말마. 그리고 잠시 움찔했을 뿐 괘도를 바꾸지 않은 용사
의 검에 골드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이름이 뭐예요?"

  소녀가 그렇게 물었을 때 그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선대의 마왕인 블루스피어의 죽음은 그들
에게서 모든 기억, 모든 추억, 모든 이름을 앗아갔다. 황금의 팔을 가진 사자는 멍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릴 뿐이었고, 은빛의 날개를 지닌 여인 또한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없습니다. 마왕님."

  푸른 검사는 소녀가 바란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송구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여인은 놀란 얼굴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그들의 가슴께를 더듬는다. 소녀는
녹색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조용히 다가오더니 푸른 검사에게 손을 뻗었다. 길고 매끄러운 그녀의
머리칼에 조심스럽게 손을 댄 소녀는 빙긋이 웃으며 푸른 검사에게 물었다.

  "머리칼은 무슨 색이에요?"

  "예? 파란색입니다만……."

  "그럼 당신은 블루."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한 소녀는 이번엔 황금의 팔을 가진 사자에게 팔을 뻗었다. 차갑고
단단한 황금의 팔을 쓰다듬던 소녀가 묻는다.

  "당신의 팔이 아니군요……."

  "예, 마왕님. 선대께서 황금으로 새로 만들어주신 팔입니다."

  "응…그럼 당신은 골드."

  "마, 마왕님. 전 은색의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날개를 만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은빛날개의 여인이 황급히 외쳤다. 소녀는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에 조용히 웃더니 그녀에게서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그럼 당신은 실버……. 마지막으로 나를 데리고 온 당신은?"

  검은 마룡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이마에 손
을 얹는 소녀에게 조용히 말했다.

  "저는 검습니다. 눈동자도, 머리칼도. 피부도. 아마도 마음까지."


  
  "골드……당한건가……."

  하늘로 치솟는 황금빛의 섬광. 수만의 마군을 이끌고 하늘을 날던 검은 마룡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충성을 다하지 못한 사자의 포효가 대지를 떠돌고, 화이트는 그것에 화답하여 절대적인 공포를 자아내는 마
룡의 포효를 대지에 토해냈다. 모든 것이 죽어버린 대지 위로 진군하던 인간의 군대가 패닉에
빠져 서로를 밀치며 도망치기 시작하고, 저주받은 마군들은 그들을 살육하기 시작했다.

  검은 마룡의 새까만 불길이 병사들을 불태우고, 검은 병사들이 새까만 검이 병사들을 베어버
린다. 마성에 휩싸인 검은 마수들은 발톱으로 병사들을 찢고 거대한 입으로 병사들을 먹어
치웠다. 소수의 용기 따위는 다수의 공포에 묻혀 빛을 발하지 못한다. 분노와 증오로 저주받은
마군들의 갑옷을 물들이며 도망칠 뿐인 병사들.
  그리고 붉은 색의 질주가 다가왔다.
병사들의 맞은편에서 질풍처럼 달려오는 붉은 머리칼의 소년. 붉은 사슬로 몸과 연결한 거대한
대검을 땅바닥에 질질 끌면서 병사들 사이를 역주하는 붉은 용사. 화이트는 눈을 가늘게 뜨
며 외쳤다.

  [전군! 목표는 붉은 용사!]

  몸을 회전시켜 사슬 끝의 대검을 휘두르는 붉은 용사. 전방의 마군을 모두 베어버린 그는 공중에 떠오른
검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머리를 노리는 검을 피해내고, 허리를 벤다. 가슴을 찌르는 검을 막고 자루로
투구를 부순다. 창날을 피해 옆으로 뛰며 마수의 다리를 달려 올라가 목을 일격에 베어버린다.
그대로 착지하면서 투구를 부수고 검을 내던져 두 명의 가슴을 꿰뚫는다. 손이 비어버린 용사를
노리고 내리치는 병장기들. 용사는 침착하게 사슬을 잡아당겼다. 무서운 속도로 다가온 검이
마군들의 다리를 자르고 용사의 손 안으로 들어왔다.
  수백의 병장기가 미친 듯이 주위에서 번뜩이고, 흉포한 마수들이 땅을 뒤집고 포효해도, 용사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베고, 침착한 얼굴로 피한다. 보통사람은 들기조차 버거운
검을 가볍게 들고 자유롭게 움직인다. 수만의 마군들 사이에 오직 적의만이 가득한 전장에서 용사는
조용히 가라앉은 얼굴로 주위의 마군들을 베고, 마수들을 없앨 뿐이었다. 행동에는 사심도 없고, 적의는
더더욱 없다. 그것이 호흡인 것처럼. 그것이 삶인 것처럼.

  "부, 붉은 용사가 왔다!"

  전세가 역전되었다. 도망치던 병사들은 단지 붉은 용사가 전장에 나타났단 것만으
로도 전의를 되찾았다. 도망만 치던 인간들의 물결이 다시 저주받은 마군에게로 쇄도한다, 그
들을 이끄는 것은 지휘관도, 공적을 세우고자하는 용기도 아니고, 단지 열일곱 살의 붉은
머리 소년의 모습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

  형세가 역전된 전장 위로 다시 한 번 마룡의 포효가 휩쓴다. 하지만 용기에 고무되고, 전의에 지배당한
병사들은 잠시 주춤할 뿐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전투는 호각. 아니, 압도적일 정도로 적들을 파괴하는
붉은 용사의 존재 때문에 인간들 쪽이 약간 우세했다. 열배이상 차이 나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를 갈던 화이트는 검은 물결을 가르고 찢어내는 붉은 섬광을 겨냥하여 일직선으로 급
강하했다. 하늘을 가릴 정도의 거대한 마룡이 중력에 가속도를 더해 부숴버릴 듯 한 기세로
덮쳐오는 상황에서 소년은 무심한 눈으로 검을 들어 올려 자루를 당길 뿐. 그 동작으로 거대한
성검 붉은 노을이 하나뿐인 눈을 뜨고 여덟 개의 입을 열었다.

  "뭐뭐냐냐. 용용사사놈놈아아. 저저걸걸 지지금금 나나보보고고 막막으으란란 거거냐냐??"

  하나뿐인 눈으로 마룡을 바라보며 울림이 심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붉은 노을. 소년은 곤란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다섯 번째 입으로 혀를 차더니 마룡을 노려보며 외쳤다.
  

"좋좋아아!! 너너!! 쓸쓸데데없없이이 크크기기만만한한 도도마마뱀뱀!!"

  눈 바로 아래의 입을 제외한 모든 입으로 숨을 들이마시는 붉은 노을. 마룡의 급강하가 귀를 찢을
듯 한 굉음을 내며 다가왔다. 촛불을 덮치는 회오리바람 같은 기세에 병사들은 숨을 삼켰고,
용사는 이를 악물었으며, 두 배로 부풀어 올랐던 성검은 용사에게로 쏘아져오는 검은 탄환에
게 기세 좋게 외쳤다.

  "멈! 춰! 라!"

  그리고 마치 사실화가의 역동적인 그림처럼 용사의 코앞에서 마룡이 멈추었다. 무릎을 꿇고, 방패를
떨어트리는 병사들. 용사는 안도의 한숨도 쉬지 않은 채 그대로 공중에 멈춘 마룡에게 검을 휘둘렀다.
찰나의 순간, 검은 안개로 몸을 휘감아 모습을 바꾸어버리는 마룡. 용사의 검은 화이트의 가슴을 아슬아
슬하게 스쳐지나갔고, 화이트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기세를 실어 용사를 자신의 장검으로 내려쳤다
. 요정의 가호를 받은 붉은 어깨갑옷으로 화이트의 검을 받아내는 용사. 휘청거리는 용사의
몸을 끝장내기 위해 화이트는 그대로 검을 되돌렸다. 하지만 용사는 기우뚱하는 몸의 반동을
그대로 사용해 붉은 노을을 휘둘렀다.
  마룡의 뿔로 만들어진 화이트의 장검과 요정의 강철로 만들어진 용사의 대검이 부딪친다. 불꽃이 튀고
검이 맞물리는 끔찍한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진다. 공격해 들어가면 반격해 들어오고. 내려치면 찌른다.
장검이 춤출 때마다 대지가 찢어지고, 대검이 포효할 때마다 대기가 울린다. 주위에 말려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찢겨져나간다. 인간이 다루기에는 불가능할 무기로 펼쳐지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공방.
  ……하지만 끝은 있었다.

  "큿!"

  격렬한 공방을 견디지 못하고, 깨어져 나가는 화이트의 검. 용사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화이트의 어깨를
내리쳤다. 오른팔을 잃은 화이트는 고통스럽게 포효하며 뒤로 물러섰고, 용사는 그대로 그의 나머지
팔도 베어버렸다. 두 팔을 잃은 채 그 자리에 쓰러지는 화이트. 용사는 그대로 그의 몸 위에 칼을 내리꽂았
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고통에 먹혀들어가, 화이트는 검은색의 피만을 토해냈다. 용사는 사람
의 몸에 검을 꽂은 다음에 으레 행하는 동작. 즉, 돌린다거나 뽑거나 따위를 하지 않은
채. 조용히 화이트를 바라보며 입을 움직였다.
  죄. 송. 합. 니. 다.

  "……아아…그대가 사과할 일은……아니지……."

  힘겹게 말을 있는 화이트. 마수는 이미 모두 죽었고, 남은 마군들도 병사들의 손에 스러져갔다.
골드가 끌고 간 병력의 열배를 끌고 왔건만 붉은 용사 하나조차 막지 못했다. 화이트는 알기 힘든
감각에 사로잡혀 쓴웃음을 지었다. 배를 파고든 이물질의 고통도 잘려나간 어깨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안타깝고 공허한 기분만이 지독할 정도로 그의 마음에 가득 차 있었다. 검은 눈물을
흘리며 화이트는 천천히 뇌까렸다.

  "용사여……. 그대의 운명은 너무나도 많은 축복으로 가득 차 있구나. 하지만 어째서 그대의 반대쪽 저울추는
그리도 가혹한가. 마왕님의 운명은 어째서 그리도 가혹한가……."

  저는 검습니다. 눈동자도, 머리칼도. 피부도. 아마도 마음까지.
  아니에요.
  예?
  당신의 마음은 검지 않아요. 화이트.

  "……마왕님. 감사합니다……."

  마지막의 마지막. 증오로 인해 만들어진 저주받은 생명을 위로해 준 그의 군주를
생각하며. 화이트는 눈을 감았다. 그의 몸에서 검을 뽑아낸 소년은 슬픈 얼굴로 뒤돌아섰다
. 어느새 다가온 병사들의 지휘관이 감격한 얼굴로 용사에게 외쳤다.

  “여, 역시 용사님! 그 악명 높은 검은 마룡까지도 물리치셨군요! 이것으로 모든 마군의 군단장이 전멸입니다!”

  용사는 슬픈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돌렸다. 공포도, 전의 상실도 모르는 마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전쟁은 단지 붉은 용사가 나타난 것만으로 역전되었다. 수천의 마군과 홀로 싸우면서도 상처하나
입지 않는 소년의 존재는 마군들에게 짓밟히던 사람들에게 희망이자 용기가 되어주었다.
  용사가 나타난 지 이제 석 달. 마군들을 지휘하던 네 명의 지휘관을 모두 쓰러트린 지금 남아있는 것은
암흑의 봉우리에 있는 녹음의 흉성뿐. 지휘관은 비장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제 긴 싸움을 끝낼 때가 됐습니다, 용사님. 저 흉성에 있는 증오스러운 녹음의 마왕을
물리치면……죽은 병사와 사람들의 희생이 보답 받을 수 있는 겁니다.”

  용사는 조용히 뒤를 돌아보았다. 격앙된 지휘관의 얼굴을 조용히 바
라보며 용사는 입을 움직였다.
  하. 지. 만. 돌. 아. 오. 지. 는. 못. 해. 요.
  슬픈 듯이 중얼거린 후 뒤로 돌아선 용사는 암흑의 봉우리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종지부를 찍는 일만 남아있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길러진 소년은 태어날 때부터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비관하지 않았고,
그것을 슬퍼하지 않았다. 언제나 부지런하고,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소년을 싫어하는 사람은
마을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물에 빠진 소녀를 구해주었다. 냇가의 붉은 지붕 집에서 홀아버
지와 살고 있는 앞을 볼 수 없는 소녀. 고마워하는 소녀에게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소년은 처음으로 자신이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슬펐다.
  하루의 일을 끝
내고 노을이 지는 언덕에 올라, 소년은 언제나 소녀를 바라보았다. 동물들을 좋아하고, 사람
들을 좋아하고, 가느다란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힘겹게 길을 걸어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그녀. 소년은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지팡이 대신이 되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녀의 눈이 되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열일곱 살이 되던 해. 소년은 자신의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소녀는 아버지를 잃었다.
마을의 사람들은 모두 소중한 사람을 잃고, 마을을 잃었다. 소년이 그 대신에 얻은 것은 하나의 눈과
여덟 개의 입을 가진 거대한 붉은 검. 소녀가 그 대신에 얻은 것은 천억의 마군과 백억의 마수,
그리고 마왕의 힘 이었다.
  맑은 물이 흐르던 냇가도 잃었다. 그늘이 시원하던 커다란 참나무도 잃었다. 노을이 아름답게 비치던
언덕도 잃었다. 사람들의 웃음도 잃었다. 소년과 소녀 모두 그런 것들을 잃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던 소녀를 죽여야만 한다는 운명을 알았을 때, 소년은 처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비관
했다.



  “화이트…….”

  가슴을 도려내는 듯 한 고통. 마왕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곁에 있어주던 검은 마룡의 죽음을 느끼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가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저주받은 생명이라고 인간들에게 매도당하던
자들은 모두 마왕의 친구요, 새로운 부모였다. 즐겁게 웃을 줄 알고, 슬프게 울 줄 알던 자들이었다.
단지 그 들과 다르다는 것만으로 인간에게 버림받았지만, 그 이유로 인간들을 미워하지는 않던 자들이었다.
  마왕은 그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날지도 못하는 날개를 싫어하면서도 남이 만지면 질색을 하던 실버도,
  평소에는 냉정해도 흥분하면 말을 더듬으며 얼굴을 붉히던 블루도,
  웃는 소리가 너무 커서 옆에 서있으면 늘 귀를 막아야 했던 골드도,
  마음은 검지 않다는 소리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던 화이트도.
  증오를 사기엔 너무나도 불쌍한 수억의 마군과 수천의 마수도.
  모두 마왕 때문에 죽었다.
  미왕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오열하기 시작했다.

  “아아…….이제 싫어…….더 이상은…….싫어…….”

  자신이 사랑하던 것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한다. 자신이 좋아하던 것들을 자신의 손으로 파괴해야만 한다.
그것을 받아들여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그것을 거부해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조용하고 따듯한 마을에서
살 때에는 그런 것을 바란 적도, 그런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마왕은 눈을 뜨기만 하면
운명을 저주하고 자신을 저주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같은 자신을 지탱해주던 네 명도 모두 이 세상에는 없다.
차라리, 차라리, 누군가 목숨을 끝내주기라도 한다면……운명을 없애주기라도 한다면.
  마왕은 천천히 일어났다. 눈은 볼 수 없지만 파괴당하는 마군들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었다.
붉은 용사가 자신에게로 오고 있다는 것을. 미왕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왕좌로 가서 앉았다.



  공격해오는 적들을 베며 능선을 달려 오르는 용사. 그가 지나온 길은 마군들의 파편과 마수들의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앞을 막는 것은 베고, 뒤를 잡는 것은 부수며 성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린다.
천만파마의 검사라는 이름처럼 질풍같이 적을 베며 돌진하는 곳은 녹음의 흉성. 녹음의 마왕이 있는
마군 최후의 보루. 용사는 그곳을 향해 달렸다.
  허리를 베고, 어깨를 베고, 다리를 베고, 목을 베고, 가슴을 베고,
  관절을 부수고, 무기를 부수고, 방패를 부수고, 갑옷을 부수고,
  양을 보살피던 손은 마수를 베는 손이 되었고, 밀을 추수하던 손은 마군을 부수는 손이 되었다.
몸에 묻은 검은 피의 냄새는 평생을 가도 지워지지 않는다. 아무리 저주받은 생명이라지만 죽어야만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녹음의 마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용사는 마지막으로
눈앞을 막아서는 마수를 베고 성문 앞에 섰다. 거대한 두 마리 뱀이 또아리를 튼 모습이 양각되어
있는 거대한 문을 밀고 들어선 용사는 거대한 왕좌에 고고한 자세로 앉아있는 마왕의 모습을 발견했다.
  수많은 감정이 용사의 가슴에서 고동쳤다. 그리움. 반가움. 그리고 늘 먼발치에서 보던 소녀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벅참. 용사는 조용히 한걸음을 내딛었고, 마왕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왔는가, 붉은 용사.”

  적의와 살의. 소년이 가지지 않았던 감정이 그 안에 있었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고,
방만한 자세로 왕좌에 앉아있던 마왕은 눈을 감은 채로 고혹적인 웃음을 띠우며 중얼거렸다.

  “그래. 나의 마군들을, 나의 마수들을, 나의 부하들을 죽였으니……이젠 내 차례겠지?”

  낮게 쿡쿡거리는 그 모습은 분명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웃음은 용사가 아는 웃음이 아니었다.
용사는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리는 마왕. 짙은 심녹색의 기운이 용사의
몸을 찍어 눌렀다. 나오지 않는 비명을 속으로 삼키는 용사의 복부를 강타하는 심녹색의 기운. 용사의
몸은 그대로 기둥에 부딪치며 바닥을 굴렀다. 역류한 피를 토하며 상반신을 일으키는 용사.
천천히 왕좌에서 일어난 마왕은 용사에게로 손을 내민 채 다가왔다. 짙은 심녹색의 기운이 용사의
몸을 부서트릴 듯 한 힘으로 옥죄어왔다.

  “하지만, 용사여. 성검 붉은 노을이 약속한 힘은 나의 수하들에게만 해당하는 것 일터, 나를 쓰러트리는 것은 무리다.”

  조용히 감고 있던 눈을 뜨는 마왕. 초록색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용사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마왕은 가느다란 손아귀에 조금 더 힘을 주었고, 용사의 오른쪽 팔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끔찍한 고통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용사. 문득 마왕의 손이 멈추었다.

  “어째서냐…….”

  조용한 목소리. 힘겹게 눈을 떠 마왕을 올려다본 용사는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발견했다.

  “왜 비명을 지르지 않나? 왜 나를 저주하지 않지? 왜 나를 쓰러트리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거냐?”

  마왕은 알 수 없었다. 용사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가 자신을 구해준 소년이라는 것을. 그가
설령 말을 할 수 있어도 그런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란 것을. 마왕은 초록색으로 물든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네가……. 나의 운명을 끝낼 수 없다면……. 나의 슬픔을 덜어줄 수 없다면…….”

  마왕은 다른 손을 들어올렸다. 손에 맴도는 녹색의 기운이 칼처럼 날카롭다.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날카롭게 외쳤다.

  “차라리! 나를 증오하며 죽어다오! 내 운명을 같이 나눠 가진 채 죽어!”

  기둥을 잘라버리는 녹색의 기운. 하지만 용사는 이미 자신을 옭아맨 기운을 뿌리치고 옆으로 피해있었다.
부러진 오른팔대신 왼팔로만 검을 쥔 용사는 마왕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만나면 성검의 입을
빌어서 하고 싶었던 수많은 얘기들. 자신이 했던 수많은 다짐들. 그 저주받은 운명에서 끊어주고
싶었다는 바램들. 용사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소녀도 소년과 마찬가지다. 짊어진 것을 남에게 넘길 수도 누군가와 나눌 수도 없다. 용사의 몸에
밴 피 냄새는 너무 짙고, 마왕이 받은 저주는 너무 많았다. 그렇다면……
  용사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고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내. 가. 끝. 내. 줄. 게. 에. 버. 그. 린.

  레드는 검을 옆으로 뿌리고 땅을 박찼다. 에버그린은 녹색의 기운을 온몸에 휘감고 그에게로 돌아섰다.
둘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공중에 아롱지고, 둘이 몸이 섬광처럼 스쳐 나갔다. 녹색의 기운이
레드의 갑옷과 얼굴을 찢고, 레드의 검은 그녀를 둘러싼 녹색의 기운들을 부숴나갔다. 흐르는 피가
눈물과 함께 볼을 적신다. 강요당한 악(惡)과 슬퍼하는 선(善)의 격돌. 초록색과 붉은색의 광휘가
서로의 몸을 휘감으며 치솟아 올랐다.
  흉성의 지붕을 부수는 두 줄기의 섬광. 구름을 흩트리고 대기를 꿰뚫는 그 섬광에 전장의 병사들도,
왕국의 사람들도, 저주받은 마군과, 흉측한 마수들까지 그것을 바라보았다. 용솟음치며 부딪치지만
결코 섞이지 않는 두 줄기의 섬광. 그리고 그 섬광은 천천히 사그라지자, 마군과 마수들의 몸도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마왕의 죽음.

  녹색의 기운이 걷혀가는 흉성. 레드는 부서져버린 성검과 함께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조용히 하나뿐인 눈을 뜨고 유일하게 남은 입을 움직여 중얼거리는 붉은 노을.

  “드디어……. 끝났구나. 용사 놈아……. 수고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레드를 보고 눈으로만 부드럽게 웃던 붉은 노을은 다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물밀듯한 슬픔이 소년의 가슴을 가득 메웠다. 상실감과 공허감, 석 달간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지탱해준
유일한 이해자의 죽음에 울음을 삼키던 레드는 고개를 들었다.
  피투성이 망토를 휘감은 채 자리에 쓰러지는 에버그린. 레드는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차갑게 식어가는
가녀린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들고, 호흡이 잦아드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붉은……용사……?”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힘겹게 중얼거리는 에버그린. 레드는 이를 악물며 그런 그녀의 몸을 힘차게
껴안았다.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에버그린의 이마에 아롱져 떨어졌다. 가느다란 손을 들어 소년의
뺨을 만지는 소녀.

  “나…를 위해…울어주는 거군요…나는 당신의…적…인데도……. 상냥한…사람…….”

  에버그린의 입가를 타고 흐르는 선혈. 그것은 용사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와 같은 붉은 색이었다.
고개를 흔들며 그녀가 듣지 못할 대답을 한다. 입을 움직인다.
  나. 는. 상. 냥. 하. 지. 않. 아. 에. 버. 그. 린.
  
  “아아…죽기 전에…만나고 싶은…사람이…한 명…더 있어…요. 예전에…아직…평범한 여자
아이였을 때…냇물에 빠진…나를 구해…준…남자 아이…따듯하고…부드러운 손을 가지고 있던
…그 아이…….”

  레드는 눈을 크게 떴다. 잠시 말을 쉬던 에버그린은 밝게 미소를 지으며 고갤 저었다.

  “용사님…처럼, 상냥한…아이였…어요. 그때는 미처…제대로 고맙다는…말조차 하지 못했는데…
하아…그리고…지금은 할 수도 없어요. 누가…죽였을까요? 언니 같던 블루…가? 아저씨 같던…
골드…가? 내 명을…위해서만 살아가던…마군이나, 슬프게 울던…마수들이? 하아…아냐. 내가…죽
인 거에요…모두, 죽은 사람들 모두…내가, 죽인거야…나를 원망하겠지요? 너를…냇가에서 구해주는 게…
아니었어…하고 원망하겠…지요?”

  내가 그 아이야, 에버그린. 나는 죽지 않았어.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아. 다시 그런 상황이 와도
너를 구할 거야. 레드는 정신없이 입을 뻐금거렸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더 이상 남아있는 시간도 없는데. 진심을 전할 수 없다.
  
  “안…녕……. 용사님……고마워요…정말로…고마…….”

  힘없이 떨어지는 에버그린의 손. 식어버린 몸. 멍하니 소녀의 몸을 흔들던 레드는 소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파묻었다. 주인의 죽음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흉성. 붕괴의 한가운데에서 사랑하던 소녀의
몸을 안은 채 앉아 있는 소년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째서 조금 더 빨리 다가가지 못한 걸까. 어째서 나만이 그녀에게 좋아한단 말을 할 수 없었을까.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어야만 한 걸까. 왜 그녀는 세상을 보지 못하고, 왜 나는 말을 하지 못한
걸까. 왜 그녀는 마왕이 되었고, 왜 나는 용사가 되어야만 한 걸까. 부서져가는 성에서 싸늘하게 식은
소녀의 시체를 안은 채 소년은 비탄과 저주에 찬 침묵을 내질렀다. 자신을 지탱한 무언가 에게. 이제껏
한 번도 저주해 본적 없던 무언가 에게.
  소년과 소녀의 거대한 무덤이 되어 줄 성안에서. 그는. 처음으로 운명을 저주했다.

  


옛날. 멀고 먼 옛날에.
세상을 어둠으로 뒤덮으려던 녹음의 마왕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돌로 만들고 지평선너머를 내다볼 수 있는 마녀.
그녀는 포악하고 흉측한 괴물과, 수많은 병사들로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습니다.
해가 떠도 깜깜한 밤이 이어지고, 달은 어두운 세상을 비추어주지 못했습니다.
물은 마르고, 땅은 갈라져 아무것도 꽃피우지 못하고 아무것도 열매 맺지 못했습니다.
새소리 대신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아이들의 웃음대신 저주받은 병사들의 갑옷소리뿐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두려움과 슬픔뿐,
희망은 없어져버린 무지개처럼 아련한 것이었을 때…….
노을을 등지고 붉은 용사님이 나타났습니다.
늠름한 붉은 머리칼과 부드러운 눈동자. 우렁찬 목소리를 지니신 용사님은,
요정에게 만들어진 성검 붉은 노을을 들고 어둠을 물리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번개처럼 마군들을 무찌르고, 폭풍처럼 괴물들을 없앴습니다.
세상에는 다시 빛이 돌아오고, 사람들의 마음에는 다시 용기와 희망이 돌아왔습니다.
마왕은 수많은 괴물들로 용사님을 막아섰지만, 용사님에게는 상처하나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마왕의 오른팔이었던 사악한 검은 마룡까지 물리친 용사님은,
마왕의 흉성에서 마왕과 싸우시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을 뚫을 듯 한 녹색과 적색의 빛기둥이 반나절동안 빛나고,
온몸에 상처를 입으시면 서도 용사님은 성검으로 마왕의 몸을 찔렀습니다.
단말마를 지르며 용사님을 저주하는 마왕.
그리고 용사님은 마왕이 다시 부활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마왕과 함께 무너지는 성안에 남았습니다.
희망과. 용기가 있는 세상을 다시는 어둠이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서요…….    

[구전설화 - 녹음의 마왕과 붉은 용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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